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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기사입력 2014.05.31 08:53:45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섯 번째 이야기 주제는 5.16쿠데타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이야기 마당 1∼3] 한국전쟁
[이야기 마당 4∼8] 친일파
[이야기 마당 9∼15] 학살
[이야기 마당 16∼31] 해방·분단[4월혁명, 여섯 번째 마당] 국민 죽이고 '야당 탓' 대통령, 미국도 안 지켜줬다
[4월혁명, 일곱 번째 마당] '참변은 너희 탓' 떠넘긴 대통령, 결국 쫓겨났다
프레시안 : 1961년 5.16쿠데타 과정을 되짚어보면 여러모로 허술했다. 보안이 철저하지도 않았고, 쿠데타 당일 병력 동원도 매끄럽게 이뤄지지 않았다. 쿠데타군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한 나라를 손에 쥐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서중석 : 그전엔 안 그랬는데 요 근래 박정희 정권에 관해 강의할 때 빠지지 않고 얘기하는 게 있다. '박정희는 정말 대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운이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한다.
쿠데타에 성공할 때도 여러 가지가 겹치면서 정말 운이 좋았고, 경제 발전 문제만 해도 국내외 조건이 그야말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시기에 경제 발전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중화학 공업화를 할 때에도 선진국에서 (사양 산업이 된 일부) 중화학 공업을 넘겨주기 시작하는 시기와 맞물렸다. 또 차관을 많이 도입하고 중화학 공업에 과잉 중복 투자를 해 경제가 어려워진 1970년대 중후반에 중동 건설 경기가 갑자기 일어난 것도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에 대단히 유능했던 것처럼 평가하는 데는 1979년 10.26이 큰 기여를 했다', 일부에서 그런 주장도 한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프레시안 : 1970년대 말 차관 망국론이 나오고 재벌 위주 정책, 도농 간 그리고 지역 간 과도한 불균형 등의 문제가 겹치면서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빴다. 1980년대 중후반 3저 호황 때까지 이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3저 호황 덕에 경제 지표는 좋아졌지만 박정희 시대 체질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위기를 맞게 된 것과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건 10.26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책임에서 박 전 대통령이 마치 몇 발짝 떨어진 것처럼 돼버렸다는 말로 들린다.
서중석 : 그렇다. 박정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가를 자세히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짚을 게 있다. 박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 사거할 때까지 사실 박 대통령과 그 정권에 대해서는 신문에 그 당시 보도될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실, 진상, 진실을 탐구하고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연구도 거의 안 됐고 그런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도 전혀 안 갖춰져 있었다. 유신 시대가 단적으로 얘기해주는 것이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걸쳐 우리나라는 비화의 시대라고도 얘기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도 연구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비화에 의해 시작된 면이 다분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 무렵, 한 일간지가 관계자들 증언을 위주로 해서 5.16 군사 쿠데타가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대해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포 쪽에서 김윤근 준장(해병 제1여단장)이 거느린 해병대가 제일 먼저 노량진 쪽으로 들어오고 한강대교에서 방자명 중령이 끌고 온 헌병대와 대치하면서 총격이 일어나는 장면, 몇 차례에 걸쳐 그 장면까지 왔을 때 그 연재는 끝났다.
이걸 연재할 때 그 신문 가판은 폭발적으로 팔렸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가판 팔리는 게 신문사에 중요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보도의 중요한 임무를 신문이 다 맡아 했기 때문에 얼마만큼 빨리 보도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예컨대 석간만 하더라도 서너 번, 네댓 번씩 판을 바꿔서 새로운 뉴스를 계속 보도하고 그랬다. 그런 건 대개 가판으로 많이 팔렸다. 가판이 신문사 수익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5.16쿠데타 소식을 전할 때 그 신문 가판이 수만 부 더 나가는 등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팔린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요즘은 신문이 대형화됐지만 그때는 신문이 그렇게 많이 팔릴 때가 아니다. 그런데 쿠데타군이 한강 넘어 육군본부로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연재가 끝나버렸다. 그렇게 막 팔리니까 전두환 정권이 깜짝 놀라서 더 이상 못 나가게 막았다는 소문도 돌고 그랬다.
프레시안 : 1980년대는 현대사의 진실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참 많던 때였다.
서중석 : 1984년, 내가 <신동아>에 근무할 때였는데, 미국에 있던 장도영이 자신과 5.16쿠데타의 관계를 회고하는 내용이 <신동아>에 실렸다. 그때까지 장도영은 '5.16쿠데타 때 양다리 걸친 나쁜 놈'이라는 욕을 참 많이 먹고 있었는데 아마 그 해명을 처음으로, 박정희가 죽은 이후에 하려는 것 아니었나 싶다. 하여튼 장도영 회고담이 세 번에 걸쳐 연재됐다. 그런데 4만 부 나가던 <신동아>가 첫 번째 회고담이 실렸을 때 5만 부인가 나갔고 세 번째로 실렸을 때는 7만 부 내외가 나갔다.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4만 부에서 7만 부가 됐다는 건 당시 잡지 시장에서 대단한 일이다. (600호를 발행한 해인 2009년 <신동아>에 게재된 글에 따르면, <신동아> 부수는 1984년에 처음으로 10만 부를 넘어섰다. 그 후에도 현대사 관련 증언 등을 거듭 실으면서 부수는 급격히 늘었다. 1985년 20만 부와 30만 부를 돌파했고,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증언을 실은 1987년에는 40만 부를 넘어섰다. <편집자>)
그렇게 되니까 여기저기서 비화를 막 실으려 들고 <신동아>도 비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광주항쟁에 관한 기사를 그다음 해에 썼을 때는 초판 30만 부가 순식간에 나갔다. 30만 부가 팔릴 거라고 생각하고 초판을 찍은 <신동아>도 대단한데, 어쨌건 엄청난 일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사가 <동아일보> 신문으로 벌어들인 것하고 <신동아> 초판 30만 부가 벌어들인 돈이 별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서로 얘기하고 그랬다. 그 정도로 대단한 걸 해낸 것이었다. 물론 더 이상 찍지는 않았다. 서로 간에 뭔가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그러면서 우리나라가 비화 시대를 맞아서, 6월항쟁 이후엔 전두환 신군부 비화 같은 것이 또 팔리고 그러지 않나.
순식간에 나간 '광주항쟁' 30만 부…현대사의 진실에 목말랐던 사람들
프레시안 : 비화가 큰 관심을 끌었다는 건 그만큼 박정희 정권의 실상 중 제대로 알려진 게 별로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중석 : 많은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이나 했기 때문에 적어도 박정희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지가 않다. 우선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박정희는 국민에게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이었다. 그때 중학생이던 나도 삐라를 주워서 봤는데 삐라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이 시커멓게 보인 건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일반 국민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다. 언론계나 지식인층도 잘 몰랐다. 국회의원들도 '박정희가 누구야?' 하고 서로 얘기했다고 그런다. 쿠데타 후 국회는 곧 해산된다.
군인들 일부만 박정희를 알고 있었는데, 그 세계에서도 그렇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침울한 표정에 불만이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든가 '박정희는 좌익이었는데?' 하는 식의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그보다 더 극소수는 '그 사람, 쿠데타에 연관됐었다던데'라는 식으로 알고 있었다. 여기서 쿠데타 연관이란 5.16 이전의 것을 말하는 건데 극소수만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 정도였다.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이 군인으로서 매우 불운했다고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서중석 : 박정희 추종자들이 쓰는 글조차 박정희에 대해 '불운의 군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그런다. 그만큼 박정희는 군인 시절에 활동한 게 별로 없다. 쿠데타 전에 그렇게 눈에 띄는 활동을 한 게 없다. 군인들의 회고록을 보면 많은 군인이 6.25 때 전투 활약을 강조한다. 자신이 공을 많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박정희는 그런 것도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전쟁 기간 중 육영수와 로맨스라고 할까,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좀 있는 정도다. 1950년대 박정희 얘기에서도 이게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 일부에선 '박정희가 나이에 비해 진급이 늦었다'고 얘기한다. 좀 늦은 나이에 육사에 들어가서 그렇긴 한데, 육사 2기생만 갖고 얘기할 때는 꼭 진급이 늦은 것만은 아니었다. 박정희는 군의 실력자라고 볼 수 있던 백선엽, 장도영, 송요찬 같은 사람들이 많이 봐주고 그랬다. 그러니까 박정희를 그렇게 불운한 사람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물론 남로당 프락치 건 때문에 초기에 상당히 진급이 안 됐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후엔, 육사 2기로 따져서는 진급이 그렇게 늦은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는 할 수 있다.
프레시안 : 박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의 문제적 인물이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다.
서중석 : (박정희 정권 때) 나도 '박정희가 일본군관학교, 만주군관학교 나왔다', 이런 식의 얘기를 듣긴 했는데 어느 군관학교를 나왔는지 잘 알고 있진 않았다. 1990년대까지, 어쩌면 21세기에 와서도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만주군 장교다. 그만큼 박정희의 과거 이력이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사람 창씨개명이 지난 대선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하는데, 사실 나도 이 양반 창씨개명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를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 들어와서 처음으로 알았던 것 같다. 또 하나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인데, 이걸 알게 된 건 1980년대 중반쯤이다. 내 딴에는 현대사에 대해 뭐 좀 한다고 했는데도 박정희의 정확한 창씨개명 이름도 오랫동안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 박정희에 대해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2005년에 국가 기관으로 발족한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조차 박정희가 일제 때 어떤 행위를 했느냐, 이걸 궁금해 하는 상황이었다. 친일 행위자로 넣어야 하느냐 빼야 하느냐 하는 것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정희는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있던 사람 아닌가. 넣느냐 빼느냐가 아주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간에.
그래서 국내의 여러 곳에 박정희 관련 일제 때 군 경력 자료를 수집하러 사람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아마 그 자료가 그때 나왔더라면 친일 행위자로 넣어야 한다고 일부에서 강하게 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게 늦게 나오면서 박정희는 친일 행위자 명단에 올라가지 않았다.
프레시안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공개한 <만주신문> 자료를 말하는 건가.
서중석 : 그렇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고 있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나중에 알아낸 것이다. 일본어 신문이던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 자에 박정희가 혈서로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자료가 그때 나왔다.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끝날 때 이게 나와 버려서, <친일인명사전>에만 (박정희가 친일 행위자로) 수록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자료가 잘 안 나왔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에 응시했다가 나이 때문에 1차 탈락하지 않았나. 두 번째 응모한 게 이 <만주신문>에 난 것이다. 사진과 함께 났는데 '혈서 군관 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 조국을 위해 (…)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물론 여기서 조국이라는 건 '황국' 일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게 2000년대 마지막 시기에 와서야 나왔다. 그만큼 자료 같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 안 내놓는 경우가 있다. 백선엽 관련 자료도 최근에 와서야 <한겨레> 김효순 기자에 의해 중요한 몇 가지가 나오지 않았나. <간도특설대>라는 책에 그 내용이 나온다.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 박정희, 그의 삶은 비밀이었다
프레시안 : 이제 쿠데타의 전모를 하나하나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쿠데타 성공은 여러 조건이 그 주동자들에게 참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쿠데타 주동자들은 정말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제 어떤 식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가를 보자. 먼저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관련해 몇 가지 생각해볼 게 있다. 쿠데타 가능성이 있다는 제일 큰 이유는 한국군이 굉장히 비대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꼬맹이 때 '한국군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다'고 그랬다. 중국, 소련, 미국, 그다음에 프랑스하고 한국이 비슷하게 많다, 뭐 그러더라. 하여튼 많았다. 그러면 우리가 원래 군대가 많았느냐? 그렇지 않다.
모두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육군 숫자가 10만 명이 채 안 된다. 9만4974명으로 돼 있다. 그 숫자가 그해 연말까지 그렇게 늘어나지를 않는다. 1950년 12월에도 10만 명이다. 가장 중요한 전쟁은 이때 일어나는데, 왜 이렇게 한국군 숫자가 적고 미군이 훨씬 많은가. 한국군이 정식 군인으로서 투입되는 것에 대해 미군이 상당히 제한을 가한 것으로 돼 있다. 충분한 훈련, 무장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그렇게 조치한 것 같다.
프레시안 : 그 후 군대 규모가 급팽창한다.
서중석 : 군대 규모가 커진 건 1951년에 들어와서다. 지금의 휴전선 근처에 전선이 교착될 무렵 군대가 막 늘기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난 지 1주년이 됐을 때쯤인 1951년 6월 27만3266명으로 통계가 잡혀 있고 그로부터 1년 후인 1952년 6월에 37만6418명으로 돼 있다. 휴전협정을 맺는 1953년 7월에는 60만이 약간 안 되는 59만911명으로 잡혀 있다. 우리가 아는 60만 대군이라는 건 그 이후다. 1953년 12월에 61만2106명으로 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에겐 좀 고전적인 사고가 있었다. 군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대 규모를 늘리는 걸 미국에 계속 강하게 요구했다. 그 결과 나중엔 72만 명까지 늘어났다. 그런데 이 군대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미국 원조의 대부분으로 군대를 유지, 충당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국방비도 상당히 들어가는 것이었다. (1950년대 미국 잉여 농산물을 비롯한 원조 물자를 판매한 대금의 상당 부분은 군사비로 쓰였다. <편집자>) 할 수 없이 대통령 스스로 줄이는 데 동의해 이승만 정권 말기에 다시 60만 대군이 됐다.
박정희 정권 때 월남(베트남)에 파병하지 않나. 많을 때 한 5만 명까지 파병한다.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이 파병했다. 1960년대 중후반에 우리 군대가 65만이냐 60만이냐 할 때 월남에 있는 숫자까지 합하면 65만, 국내에 있는 숫자만 하면 60만이었다. 어쨌든 5.16쿠데타가 일어날 때 60만 대군이라고 불렀는데 굉장히 비대한 조직이었다.
프레시안 : 그런 군부가 딴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서중석 : 그렇다. 엄청난 '맨파워'를 가진 데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또 있었다. 군은 다른 어느 쪽보다도 엘리트 의식이 강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하니, 군에서 어지간한 장교는 전부 미국 가서 훈련을 받았다.
미국이 한국에 와서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제일 먼저 한 게 군사영어학교(1945.12∼1946.4)를 세운 것이었다. 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까지 최고급 장교를 다 차지하다시피 한다.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 장교도 미국이 다 새로 선발한다. 통신 부대, 공병 부대, 포병 부대 같은 것도 다 미국이 만들고, 그러면서 한국 장교들에게 특수 훈련 같은 것을 시킨다. 그러다가 1948년부터는 미국으로 보낸다. 1948년 8월에 군번이 굉장히 빠른 이형근, 이한림 등 6명을 미국 육군 보병학교로 보내는 것이 그 시작이다. 그다음엔 정일권, 강문봉 같은 사람을 보내는데 양쪽 다 계급이 높았다.
1951년부터는 위탁 교육을 대규모로 하게 된다. 1952년 594명, 1953년 829명이 위탁 교육을 받으러 간다. 이런 식으로 막 늘어난다. 한 자료를 보면 1950년에서 1957년 사이에 육군에서 4729명이 미국에서 위탁 교육 등을 받고, 해군이 920명, 공군이 1503명 교육받은 것으로 돼 있다. 특히 공군은 장교가 거의 다 받다시피 한 모양이다. 그래서 3군을 합해 7000여 명이라고 통계에 나와 있다. 또 다른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육군 장교가 1만여 명으로 나온다. 그 가운데 6700명이 1951년에서 1961년 사이에 갔고, 나머지는 그 이후에 간 것으로 돼 있다.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 김종필도 다 미국 가서 교육을 받았다.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노태우도 1959년 대위 때 미국 가서 교육을 받았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 중 도미 교육을 안 받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역사학자 서중석의 진단
▲ "박근혜는 유신의 허깨비가 결코 아니었다"
▲ "박정희 신드롬, 박근혜가 지울 수도 있다"
▲ "<조선> 말대로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빨갱이"
미국이 키운 장교들,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
프레시안 : 제3세계 국가의 군인을 자국에 데려가 훈련시킨 후 이들을 활용해 그 나라를 통제하는 건 미국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장교의 상당수가 미국에서 훈련을 받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서중석 : 당시 미국 유학이란 건 한국 사람들이 꿈꾸기 어려운 것이었다. 큰 부자, 특권층이 아니면 미국 유학을 못 갔다. 군인들이 이렇게 대거 갔다 왔다는 건 대단한 것이다. 관공리도 미국 연수를 시키긴 했지만 그 숫자는 얼마 안 된다. 그런데 군인은 몇 천 명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강한 엘리트 의식과 함께 정권을 넘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글을 쓸 때 인용하는 것이 유명한 콜론 보고서다.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요청으로 1959년 콜론 연구소에서 작성한 이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라는 제목 밑에 한국 관련 기사가 있는데, 이게 1960년 <사상계> 1월호에 실렸다.
프레시안 : 이 보고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서중석 : 콜론 보고서에는 아주 중요한 말이 하나 있다. "하층 경제 계급 출신의 유망한 청년 장교가 한국에서 다수 생겼고, 이들은 특권적 관리나 정치가에게 분노를 품게 된다. 이것이 폭발할 우려도 있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육사를 비롯한 장교 학교에 가는 사람들 중엔 하층, 그러니까 경제적으로 불우하고 어려운 이들이 참 많았다. 야망을 품은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다. 그러면서 특권층이라고 본다고 할까, 유복해서 일반 대학에 다니는 쪽에 대해 일종의 경쟁 의식, 비판 의식 같은 걸 갖고 그랬다.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현재 한국에 커다란 정치적 신망이나 조직력을 가진 군인은 없다." 1950년대에는 정권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이나 이기붕이 그건 잘 조정했다. 그런데 이 부분 끄트머리에 "만일 정당 정부가 완전히 실패하면 언젠가 한 번은 군사 지배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하다. 그러나 가까운 장래에 그것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돼 있다.
그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한 말이 들어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이 반공 국가로 존재하는 한 한국에 무슨 사태가 벌어지든 미국인은 무관심하다고 지금 믿고 있다."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을 더 강화하기만 해준다면 미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국인들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상계>는 아주 인기 있는 잡지였고 많이 읽혔다. 일부 군인들은 이 보고서를 읽고 흥분했다고 한다. 자기들이 잘 모르던 이야기를 해줬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한 번 해보자', 이런 생각을 갖게끔 했다고 회고록에 써놓은 것도 있더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마흔세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