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상견례 相見禮
사정 수련장은 분위기가 상당히 좋다.
소속 조직 내에서 별다른 공헌도 없이, 십 부장 什夫長 직책도 버거울 정도의 약관 弱冠의 연륜 年輪임에도 불구하고 무예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로 감히, 이백 부장의 직급을 받았으니 모두 의기양양 意氣揚揚하다.
수련장은 관리 병사에게 전담시키고 설걸우 천부장 막사 쪽으로 옮겼다.
3기생의 조교 담당을 위해서다.
갖가지 다양 多樣한 병장기를 다루는 조교 역할을 전담 專擔하였다.
그때 대릉하로 갔던 가마우지와 일황이 소기의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민들레는 열흘 날 만에 정인 情人이 돌아오자 기쁘기가 한량없다.
일황도 소릉하에서 구해온 초원에서는 보기 귀한, 비단 한 필을 말에 싣고 수련원 주변의 사귀고 있던 낭자의 게르를 찾아간다.
설걸우 천부장은 호위병들이 담당 임무를 수행하려 떠나기 전에 일정한 은냥 銀兩이 기재된 죽패 竹牌를 지급하였다.
직무수행에 대한 수당 手當이다.
그럼,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는 죽패에 기록된 은자 銀子를 지급한다.
호위병들은 그 은자로 그 지역의 특산품이나 자신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되돌아온다.
수련 생활을 마친 모두가 가마우지와 일황이 처음으로 수행한 호위 임무에 대하여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앞으로 자신들이 맡게 될 임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수행할 것인지에 대하여 서로가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이태 동안 사정 수련원에서 고생한 보람이 결실을 맺게 되자, 이제 여유가 생긴 우문 청아는 이중부와 함께 아버지를 뵈려갔다.
우문 무특 천부장은 딸을 반갑게 반긴다.
청아는 무남독녀다.
어릴 때부터 말괄량이 기질을 보이더니, 자라면서 무예에 관심을 보여, 부친을 졸라서 개인 사부까지 초빙하여 무술을 연마하였다.
덕분에 나름 힘깨나 쓴다는 장정 두, 세 명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무술 고수가 되었다.
하나뿐인 딸내미가 무술 실력이 대단한 것이 자랑스러우나, 우문 무특 천부장은 그 점이 오히려 은근한 걱정거리로 부상되고 있었다.
혼기 婚期가 찬 저 말괄량이를 데려갈 신랑감이 있을까? 그게 문제다.
청아의 무술 실력이 일반 장정들을 하찮게 여기는 실력인데, 그 자부심으로 인하여 보통 사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몇 달 전, 우문무특 천부장이 사위감으로 괜찮아 보이는 뛰어난 무예와 외모가 반듯한 청년 세 명을 초대하여 딸을 불렸으나, 청아는 청년들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콧방귀만 날릴 뿐이었다.
우문 천부장은 속이 타지만, 딸 바보다.
그렇게 아버지의 애를 태우던 외동딸, 청아가 남자를 데리고 나타난 것이다.
딸과 함께 온 사내를 보니 키가 크고 용모가 훤칠한 모습이 사윗감으로서는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수태차를 마시며 장래의 사위감과 이야기를 나눈다.
“성씨는?”
“이가 李家입니다”
“아, 거란족인가?”
“아, 아닙니다”
“그럼, 어느 부족 출신이지?”
“사로국 출신입니다”
“응, 사로국?”
“네”
갑자기 우문 무특의 눈빛이 심드렁하게 변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진다.
사윗감이 사로국 출신이란다.
말을 타고 일 주야를 쉬지 않고 달려 또, 배를 타고 보름을 가야 하는 머나먼 곳이 딸내미의 장래 시집이란다.
수레를 이용하여 정상적으로 이동하면 육상으로만 한 달 정도 걸릴 거리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보름 이상 만약, 일기가 불순하여 풍랑이 거세지면 한 달 이상이 걸릴지도 모를 위험한 항해를 감수해야 하는 그 멀고 먼 곳을...
그 먼 곳으로 시집을 가버리면 평생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이중부가 도둑놈으로 보인다.
눈에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하나뿐인 이쁜 딸이 저 시커먼 도둑놈 같은 녀석에게 시집 가버리면, 이 혼란스러운 난세에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반대하고자 하니, 딸의 고집불통 성격을 익히 아는 딸 바보 아버지로서는 고심이 깊어진다.
“그럼 결혼하면 사로국으로 곧 가야 하는가?”
“곧 바로는 아니지만, 기회가 되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흠...”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찾아가겠다는데 무슨 방법으로 제지할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을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리는 놈이 나쁜 사람이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해결책이 없다.
할 말이 없어진 우문무특의 표정이 더 무거워진다.
아버지의 심각한 표정을 읽은 청아가 부친의 팔에 자신의 팔을 뒤로 집어넣어 팔짱을 끼고 아양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버지, 지금 당장 가는 것도 아니고 또, 사로국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한 해에 한 번씩은 아버지랑 어머니 뵈러 올게요”
“야! 이 녀석아, 사로국이 옆 동네인 줄 알아 배편은 또 얼마나 위험한데”
흉노족은 깊은 물과 배는 아예 질색 窒塞이다.
평생 가까이하기 꺼리는 대상들이다.
그러자 상견례의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진다.
부녀지간에 서로가 자기주장만 내세우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서로 간에 마음속 큰 상처를 입게 될 처지다.
청아가 중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을 잃게 될 상황이고,
아버지가 딸을 포기하지 않으면 청아는 중부와 혼인하기 어렵다.
딸 바보 아버지, 우문 천부장도 지금까지는 딸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번 혼사 婚事 만은 반대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번 혼사가 성립되면 멀지 않아 귀한 딸을 더는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불을 보듯이 명약관화 明若觀火하다.
중부도 고향 사로국으로 가지 않으면 부모님을 뵐 수가 없다.
중부도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는 난관 難關에 봉착 逢着한 것이다.
답이 없다.
서로가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호감 好感을 갖고 있어도 이러한 묘한 갈등 葛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아니, 서로가 사랑하고 그 믿음을 오래 지속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가족애 家族愛. 그 따뜻한 마음으로 인하여 생기는 현상이 오히려 서로 간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 갈등
‘갈등(葛藤)’의 한자를 보면 ‘칡(葛)’과 ‘등나무(藤)’라는 뜻이다.
칡은 일반명사로 그냥 ‘칡’으로 통용되는데, 등은 반드시 ‘등나무’라고 표현한다.
겉보기에는 똑같다. 낙엽 진 겨울철에는 구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 같은 넝쿨 식물인데도 표현 방식이 다르다.
그것은 칡은 아무리 오래 묵은 굵은 줄기라도 부드럽고 인장력이 대단하다. 무척 질기다 또, 세로 방향으로 잘 갈라지는 것과 비교해 등나무는 젓가락 굵기가 넘어서면 딱딱하게 목질화 木質化 되어 잘 부러진다. 따라서 노끈이나 밧줄로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나무로 표현한다.
칡과 등나무 모두 대를 휘감고 올라가는 성질이 있는데 칡은 오른쪽, 등나무는 왼쪽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기 때문에 이 둘이 같이 엮이게 되면 서로 옥 죄듯이 얽히고설키게 된다.
한번 얽혀버리면 나중에는 풀 방법이 없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연리지 連理枝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를 인생사에 비유해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으니 참으로 의미심장 意味深長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가족간에 인과 관계의 묘한 갈등이 표면으로 돌출된 것이다.
결국, 이날의 상견례는 말 그대로 ‘상견례 相見禮’로 끝나 버렸다.
서로 간에 얼굴만 보여주고 확인만 하고 헤어진, 그런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런 결론이 없었다.
유야무야 有耶無耶다. 어느 누구도 자기 욕심만 강하게 주장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서로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고, 연인 사이인데 함부로 본인 욕심만 주장할 수는 없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오는 우문청아의 입이 당나귀 입처럼 튀어나온다.
“오라버니, 우리 여기 초원에서 양을 키우며 함께 살면 안 될까?”
중부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청아도 부모님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건 알아 그런데, 우리 부모님도 모두 사로국에 계셔, 나 역시 청아와 같은 입장이야.”
튀어나온 청아의 입이 이제 옆으로 ‘홱’하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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