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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묵상글 들 ( 성 마티아 사도 축일-뽑히든 뽑히지 않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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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1.05.14 05:37
성 마티아 사도 축일-뽑히든 뽑히지 않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강론을 오래 하다 보니 마티아 사도 축일 강론도 이제 새로운 강론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끙끙대고 있는데
문득 이런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티아는 뽑혔는데 둘 중 뽑히지 못한 요셉은 행복에서 미끄러진 존재인가?
마티아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고 요셉은 주님 사랑에서 제외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마티아가 뽑힌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제가 누누이 얘기하지만 이런 경우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믿음은
하느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똑같다는 것이고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티아를 더 사랑해서 뽑으시고
요셉은 덜 사랑해서 뽑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것이 그에게
영광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꼭 더 사랑받은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느님은 마리아나 마티아나 우리나 더 사랑해서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직무에 쓰시려고 뽑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 직분을 다하도록,
마티아는 주님의 사도직 직분을 다하도록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어떤 직분을 다하도록 뽑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직무에 뽑히는 것을 싫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단체장에 뽑히는 것을 싫어하지요.
돈과 시간만 뺏길 뿐 아니라 애는 애대로 쓰고
사람들로부터 욕만 먹는 것이 싫은 겁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람의 칭찬이나 인정이나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이 이런 직무와 책임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뽑히는 것의 의미 여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 여부가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직무에 뽑히는 것이 영광스러울 것이고,
사랑치 않으면 앞서 봤듯이 귀찮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의심치 않고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직무 수행자로 뽑혀도 좋고 안 뽑혀도 좋을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저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왜냐면 저는 제가 사제직에 뽑힌 것에 감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자랑처럼 하는 이유는 며칠 전 어떤 신자로부터
미사 드리는 것을 싫어하고 가톨릭 교리와도 충돌하는 사제,
그래서 사제생활 내내 신자들과 충돌하는 사제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제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미사 봉헌하는 것을 기뻐하고,
특히 코로나 상황 때문에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신자분들이 원할 때
하루에도 몇 번 기꺼이 미사를 드려드리는데 이것은 제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분명한 표시일 것입니다.
아무튼, 마티아 사도는 처음부터 사도로 뽑히지 않았지만
줄곧 주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보면 사도의 직무를 받지 않았을 때나
직무를 받았을 때나 주님을 떠나지 않고 기쁘게 직무를 수행한 우리의
본보기인데 이런 사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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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오늘은 사도 마티아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가리옷 유다의 빈자리를 마티아가 채우게 되는 선출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뽑으신 이를 받아들여 ‘사도단’이 채워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가 부활의 증인으로 직무를 맡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불렀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5-16)
예수님께서는 오늘, 인간을 당신의 친구로 만드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친구’란 ‘깊은 친교’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처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였듯이,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으로 맺는 친교입니다. 하느님과의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는 우리 사이의 깊은 친교를 이끕니다. 곧 우리를 서로 친구가 되게 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영으로 맺는 ‘깊은 친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친구로 삼은 이유를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곧 당신이 주신 ‘친구’라는 은총의 영으로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사랑’이라는 열매입니다. 곧 ‘사랑’은 친교의 영이 맺는 열매입니다(갈라 5,22-23,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
그렇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라는 열매만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1코린 13,8.13.).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신비롭게 당신과의 영원한 사랑 안에 우리를 가두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7)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친구라는 은총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요한 15,14)
이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이토록 더불어 살아야 하는 까닭도 서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은 경쟁자이이거나 적이거나 자신을 채우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헐뜯고 비난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어서라도 위해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한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봅니다. 그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주님!
저는 분명, 이미 사랑을 먹었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지만, 당신의 호의를 입었습니다.
먹고서도 먹은 줄을 모르는 무지를 깨우치소서.
더 이상은 그 사랑을 내팽개치거나 무시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삶이 온전히 당신의 사랑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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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 서로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제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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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 추종의 실천, 마티아 보선(補選)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2) 하신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서, 초대교회가 행한 첫 일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떨어져 나간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백스무 명 가량 되는 무리가 모였습니다. 이 무리는 우선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 가운데 열한 명과, 그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복음을 선포하면서 합류한
예순 명에다가, 이 일흔한 명이 또 두 번째로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면서 확보한
토박이 지지자들을 포함한 숫자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던
공생활 동안 줄곧 동행했던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뽑아서 유다의 자리를
채우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교회의 첫 행적을 통해서 세상을
복음화시키고 교회도 민주화하는 큰 원칙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는 제자 선발의 역사성을 계승하는 일은 그분이
예언자적 정통 노선을 걸으시고자 하셨고 이 노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왕정시대에 우상숭배에 물들어 훼손되기도 했으나,
본시 이스라엘 백성의 질서는 열두 지파의 연합체제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개인이
왕정에서 왕이 휘두르는 전제적 권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고, 오직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목자요 왕이셨습니다. 그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혈통이 좋아도,
그는 하느님을 믿는 백성의 일원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지도자는
이 열두 지파의 연합체제 안에서 지파별 대표자들이 하느님께서 부르셨다고
인정되었던 예언자들, 즉 모세, 여호수아 그밖의 여러 판관들과 사무엘 같은
지도자들만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유다가 스승을 배신하고 나간 그 자리를 채우고자 했던 것이었고, 또 그렇게 해서 채워진
열두 사도들이 순교하여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두 번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예언자적 정통 노선에 따른 연합체제의
공동합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뜻이 계승되어야 한다는
예수 추종의 의지가 중요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예언자적 정통 노선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를 당신 백성으로 이끌고자 원하셨고,
그 백성 안에서 당신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단계적인 절차에
따라서 먼저 당신의 뜻을 가시화시켜 구현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런데 왕정시대를 거치면서 이 뜻이 훼손되고 줄어들고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했기
때문에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고, 따라서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원상회복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이 열두 제자의 연합체제와 이들에 의해
계승되어야 할 성체성사, 그리고 이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할 하느님 백성, 즉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또 앞으로도 지켜져야 할 세상 복음화의 원칙입니다.
셋째, 초대교회는 최초에 부르심 받은 열두 제자와, 이들을 포함한 일흔두 제자에다가
토박이 지지자들까지 백스무 명 가량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추천을 받아 사도 보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추천의 조건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이를 보편화된 원칙으로 풀면 신앙이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신앙의 충실성 여부는 동료들의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바르사빠스 요셉과 마티아, 이 두 사람으로 후보를 압축한 다음,
기도하고 나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관련된 신앙인들의 추천 과정과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교회의 직무를 맡을 사람을 선발하는 절차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 절차가 교황 선출에만 적용되고 있습니다. 교황직무가 궐위되면,
즉 교황이 선종하거나 퇴위하면 80세 미만으로 선출권을 가진 추기경단이 소집되고,
이들 안에서 투표하여 2/3 이상의 득표를 할 때까지 무제한 계속합니다.
이 동안 외부와는 전면 차단되어 자물쇠로 채워진 방에서 감금된 채로
교황 선출 절차가 진행되기에 라틴어로 ‘감금된’이라는 뜻으로 ‘Conclave’라고 합니다.
황제의 간섭 등 외부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마련된 이 절차가 확정되는데 1천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넷째, 고대교회 때까지 모든 교회 직무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관련 신앙인들의
추천에 의해서 선발 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서품 공시 절차가
그 흔적입니다. 매우 형식적이 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신앙의 충실성을 보완하고
확인하는 절차로서 신학 과정을 밟게 한 후 일정 수준 이상을 취득하게 하고 반드시
공동 생활을 통해 성품과 신앙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임명 절차가 따릅니다.
이렇게 서품된 사제들 중에서 주교직을 맡을 후보자를 교황이 상시로 확보했다가
궐위되면 그 후보자들 중에서 임명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제 선발에 대한
신앙 공동체의 추천권도 살아나고, 교구와 본당의 책임을 맡는 직무도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그리고 교황 선출 절차를 참고하여 성서적이고 민주적으로 추천되고
선발될 날이 올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는 상호 섬김의 공동합의 전통을
활성화시켜야 하는 전통은 그 다음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왕정으로 축소, 왜곡, 훼손되었던 역사적 교훈을
기억하여 예수님께서 복원하신 예언자적 정통 노선의 바탕 위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고, 이것이 사회 복음화와 교회 민주화의
대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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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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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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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한때 일만 시간의 법칙이 사람들 사이에 퍼졌던 적이 있습니다. 1993년 미국 심리학자 앤더슨 에릭슨이 주장한 이론으로 무슨 일에서든지 일만 시간을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람들의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일곱 시간 공부한 사람보다 한두 시간 공부한 사람이 더 높은 점수를 얻고,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아주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앤더슨 에릭슨은 자신의 이론을 수정했습니다. 시간보다 발전에 신경 써야 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무조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나아질까?’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시간이라는 숫자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과 질’을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꾸준히 기도와 묵상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만 시간이 지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하느님과 같아져서 자기 자신도 전능한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단순히 습관적으로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이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과 질’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며,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런 사랑을 보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종종 방송에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쓸데없는 행동을 하고 있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제보다 더 나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랑의 길을 가는 것뿐, 다른 정답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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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복한 순간을 소중히 간직하라. 노후에 훌륭한 대비책이 된다(크리스토퍼 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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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얻는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갑자기 정전으로 불이 꺼진 것입니다. 지하에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력 회사에서는 언제 복구될지 모른다는 말만 할 뿐이었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물건을 훔쳐 가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바로 그때, 슈퍼마켓 직원이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전으로 불편하게 해 죄송합니다. 전기가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바구니 안에 담은 물건은 그냥 집으로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그 값은 여러분이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해 주세요.”
아무도 물건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물건값을 자선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슈퍼마켓은 큰 손해를 보았을까요?
그날 나간 상품 금액은 4,000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이 해프닝이 언론에 알려졌고, 일주일간 언론에 노출된 회사의 긍정적인 이미지로 얻은 광고 효과는 자그마치 40만 달러였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손해일까요? 이득일까요? 나눌수록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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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1)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제자가 된 일은
예수님께서 주신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그 은총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은총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은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그런데 자기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생각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를, 또 여러 주님들 가운데 한 분을
자기 권한으로 자기가 골라서 선택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참 종교는 하나뿐이며 참 주님은 한 분뿐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면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주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준으로 하면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주님을 고르고 선택할 권한이 없습니다.)
또 그 생각은 “내가 선택한 것이니 버리는 것도 내가 한다.”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틀린 생각’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주님을 버릴 권한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셨다는 말은,
어떤 사람은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부르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집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지만,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처음부터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되어버립니다.
부르심을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주시는데도 받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사람을 처음부터 따로 정하셨다면,
그것은 구원할 사람과 구원하지 않을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이고,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만일에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되고,
멸망이 예정되어 있다면 신앙생활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신앙인이 되었더라도 이 응답은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2)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임무 수행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게 됩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하고,
전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 자신들을 구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도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구원’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한 생활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신앙생활의 일부입니다.
그냥 일부가 아니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언제나’ 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열매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고, ‘영원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명령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즉 우리가 얻는 구원과
생명의 영원함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이 말씀을, 앞의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요한복음 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말씀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1) 우리가 가장 먼저 원해야 할 것과 청해야 할 것은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은 바로 그것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이유도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이유도 없습니다.)
7절의 “무엇이든지” 라는 말은, “아무거나” 라는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은 구원과 생명,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들,
즉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들, 인내심, 의지력, 용기 등입니다.
(2) 아버지께 청하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예수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뜻도 우리의 구원입니다.)
7절의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라는 말씀을 풀어서 표현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기도하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는 언제나 들어 주십니다(요한 11,42).
(3)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라는 약속이고,
7절의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약속을 반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전체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말씀만 따로 떼어서 “누구든지 믿음을 갖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얻을 수 있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하고,
그 뜻을 충실하게 ‘삶으로’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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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넷플렉스에서 ‘시지프스’라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예전에 ‘터미네이터’라는 영화처럼 미래에서 사람이 현재로 온다는 설정입니다. 터미네이터와 같이 시지프스에서도 미래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현재보다 궁핍합니다. 자연은 파괴되었고, 문명도 파괴되었으며, 먹을 것도 없는 미래입니다. 그런 미래에서 성공확률이 5%도 안 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현재로 사람들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미래의 삶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 중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에 와서 풍족하게 사는 것입니다. 미래에서 온 사람은 정보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주식, 복권은 미리 결과를 알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난의 현장도 미리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현재를 통해서 미래의 고통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원인을 없애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현재에서의 풍요와 안락함은 가치가 없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만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드라마에서 몇 가지 질문이 나옵니다. ‘어디에서 왔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 왔습니까?’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어디에서라는 말은 공간의 문제입니다. 언제라는 말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왔든지. 언제 왔든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하나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무엇하러 왔습니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잘 모릅니다.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잘 모릅니다. 아직 가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부활로 꽃이 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박도식 신부님께서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라는 제목으로 교리서를 출판하였습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현대인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신앙인들에게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유다’의 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자고 제의를 했습니다. 사도들은 기도를 하였고, 마티아가 유다의 자리를 대신 할 사도로 선출되었습니다. 마티아 사도는 교회 공동체에서 하느님을 위한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시는 일이 있다면 마티아 사도처럼 우리들도 충실하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받아 들여야 하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권고나 부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겸손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았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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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공부工夫, 평생 학인學人 - “서로 사랑하여라” -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선사膳賜된 날입니다.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사랑을 공부하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날마다 사랑 공부인 강론을 준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랑의 학인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공부하라 사랑의 학교,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입니다.
“교회는 아름답다. 신랑이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다. 신랑의 사랑은 교회를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다.”
교황님께서 책 서문에 쓴 내용중 일부입니다. 교회 대신 우리 하나하나를 넣어 ‘우리는 아름답다. 신랑이신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이다. 신랑의 사랑은 우리를 풍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한다’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이요 날마다 주님 사랑으로 풍요롭고 아름답고 행복해지는 우리들입니다.
며칠전 말없이 피정하던 수녀님이 피정 끝나고 떠난다 하며 강복을 받으러 집무실을 찾았을 때, ‘아, 사람 하나하나가 신비이구나! 사랑의 신비!’ 순간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이에 대한 응답은 진심으로 환대와 포옹, 경외와 겸손, 경청과 응시, 침묵과 개방, 존경과 사랑, 판단 보류와 배움임을 마음 깊이 확인했습니다. 어제는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난 하루였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짧은 잠언같은 깨달음의 글입니다.
-“주방장님, 감사합니다. 잘 먹고 잘 시작합니다. 오늘도 축복 많이 받으세요.”
“비워지니 채워지는구나. 비움이 채움이네. 은총의 선물이다.”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겸손의 역설, 초월의 원리, 충만한 삶, 행복한 삶”
“덜 먹고 덜 쓰는,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쓰레기를 덜 내는, 무공해의 작은 삶, 잘 사는 삶”-
네 짧은 잠언성 시같은 글, 모두 사랑에서 일치합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꽃처럼 사랑하며 꽃다운 사랑의 삶을 살라고 곳곳에서 끊임없이 피고 지는 무수하고 다양한 꽃들입니다. 얼마전 깔아 놓은 야자매트 좁은 틈바구니에서 올라오는 푸르른 생명의 싹, 사랑의 싹이 감동이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그대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주고 받은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파스카의 삶, 파스카의 신비! 선물입니다. 행복하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신비! 놀랍습니다.”-
-“파스카의 신비! 축복 선물 받으시고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어머나 신부님! 생명력이 대단합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니 생각이 어지러운데 파란 생명력처럼 저도 힘을 얻습니다. 건강하세요.”-
하루하루 사랑하라고 주어진 날들입니다. 오늘은 마티아 사도 순교 축일입니다. 빨간 제의와 영대가 순교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사랑의 순교를 통해 영원히 사랑의 주님과 하나되어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랑의 사도, 사랑의 순교자 마티아 사도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마티아가 사도로 뽑히는 과정을 보면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확인합니다.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랑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네 단락의 말씀이 사랑의 본질을 환히, 분명히 밝혀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 공부이자 사랑 숙제입니다.
1.“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2.“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를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
4.“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순수한 사랑, 무사한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존중과 연민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당신의 친구로 뽑아 주신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주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주님이자 친구인 예수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집니다.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정주할 때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와 겸손의 성심聖心에 샘솟는 순수와 열정의 삶입니다.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어디나 서로 사랑하면 바로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머물게 됩니다. 새삼 사랑의 주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쉼터, 샘터, 배움터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학교에서 사랑의 학인學人되어 꽃같은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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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인간의 노력이 드러납니다.
"그 자리에는 백스무 명가량 되는 무리가 모여 있었다."(사도 1,15)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마티아 사도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 뽑힌 열세 번째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을 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를 채웠지요.
사도들은 자기들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믿기에 그 수를 채우고자 합니다. 당시 모인 사람들에 대해 성경 저자가 "백이십 명"가량이라고 구체적 수를 기술한 이유는, 완전한 수인 '열둘'을 '열 차례' 되풀이 더한 수로써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완전체에 가까웠음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던 시대에, 스스로의 죄악으로 소멸 위기에 처했던 벤냐민 지파를 되살리기 위해 열한 지파가 모여 고민하고 결정했던 자구책이 떠오릅니다.(판관 21장 참조) 현대를 사는 우리의 눈에 이해나 용납이 불가한 방식이기는 하나, 그만큼 열두 지파의 존속과 유지가 중요했음을 보여 주지요.
"우리와 함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2)
하지만 지금 사도들은 그 목적뿐만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도 주님의 선하신 뜻을 추구하고 있기에 구약 판관시대의 사건과 명백히 결을 달리합니다. 무엇보다 "부활의 증인"을 간청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들이 열둘을 채우려는 의지는 단지 숫자를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의미를 넘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의 선포 사명을 더욱 충만히 수행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아울러 실제 예수님의 시대를 살지도 않았고 열둘에 끼지도 못한 우리에게도 열세 번째 자리가 열려 있다는 영적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하지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사도 1,24)
사도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이 추가적 선출에서도 주님께서 친히 주도권을 행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사람의 손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내어 맡기는 겁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이 말씀이야말로 주님 곁에 머무르는 특권의 원리입니다. 주님의 선택! 교회 안에 여러 신분과 제도 안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힘을 자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모든 부르심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생성되고 움직이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죄인이기까지 한 우리 역시 그렇게 불리워 감히 주님의 곁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적인 모자람을 오히려 부활의 증인이 될 자질과 가능성으로 보아주신 주님 덕분에 가능한 기적이었지요.
사랑하는 벗님! 부활의 증인으로 새롭게 부르심 받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어느 자리건 거기에 우리까지 있어야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좀 더 근접해 나간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부르심의 길을 걸어 갑시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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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뽑힌 우리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비뽑기로 뽑혔습니다. 열두 사도와 마티아 사도는 '기도로 뽑힌 사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6,12-13)
"그러고(기도하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1,26)
이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그들을 뽑아 세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열세 번째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뽑힌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한 나를 뽑아 세우셨습니다.
사제로, 수도자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나를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사목위원으로, 전례봉사자로 뽑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봉사직의 부름을 받을 때, "아니요!"나 "나는 못합니다!"라고 응답하면 안 되고, "네,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마리아의 순종'에서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순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마태10,20),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갈라2,20), '하느님의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그분의 영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부르심에,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응답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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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행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성공한 자녀로 키우고 싶은가?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성 마티아는 가리옷 유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사도입니다.
성 마티아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사도의 자리를 교회가 스스로 다시 채울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교회의 권위가 곧 그리스도의 권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도인 것입니다.
또한, 성 마티아 사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특권을 잃게 된다는 것도 보여줍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도의 위치에 있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그리스도를 배신하며 사도의 권위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자리에 있든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자리가 요구하는 소명을 채워야 합니다.
끔찍한 일이겠지만, 만약 영화 ‘에일리언’에서처럼, 태중에 있는 아기가 부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하게 된다면 부모는 그 아기를 더는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자녀로서의 해야 할 일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해 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부모도 자녀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가 당신의 ‘계명’(뜻)을 지키기만 한다면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기 때문에 당신께 청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녀의 행복은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것에 있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만 하면 부모는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가 사랑만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머물기 때문에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느낀 것처럼 그런 천상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아버지로서 우리의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JTBC 뉴스에 보니 이번 어린이날 어떤 아이가 1억 원이 넘는 작품 위에서 놀다가 작품을 훼손한 일이 있었습니다.
전시물은 한국화의 거장인 박대성 화백의 작품이었습니다.
‘김생 임서’라고 하는데, 김생의 글씨를 따라 쓴 작품입니다.
늦게야 도착한 아버지는 아이가 노는 것을 보고는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어줍니다.
박대성 화백이 어린이는 다 그런 것이라며 이해했기에 망정이지 아버지는 큰돈을 물을 뻔하였습니다.
부모는 왜 아이를 말리지 못했을까요?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그렇게 계속 잘못 나가면 결국 아이는 자신을 그렇게 키운 부모를 원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게 만들기 위해 부모는 아이에게 벌을 줄 수도 있습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 없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존중의 법을 어긴다면 부모도 자녀의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슬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의 부모인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시고 싶으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한다면 모든 청을 들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일을 하나도 이룰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기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기쁨-평화’로 나가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 기쁨도 평화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자산어보’(2021)는 천주교 박해로 흑산도로 유배 온 ‘정약전’과 청년 어부 ‘창대’의 갈등과 우정이 그려집니다.
정약전은 바다 생물에 관한 책을 써서 세상에 유익한 일을 하려 하고 창대는 글을 배워 세상에서 출세하려 합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란 책을 내고 세상을 하직합니다.
12년간의 노력으로 탄생한 자산어보는 세계 최초로 수산 동식물을 나름의 기준으로 분류한 책이고 많은 이들에게 도움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대는 과거에 급제하여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신물이 나는 세상을 등지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정약전이 마티아 사도로 비유된다면 세상 출세를 쫓으려 했던 창대는 유다의 모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기쁜 삶일까요? 이웃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으로 사는 삶일까요, 아니면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삶일까요?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는 세상에 어떠한 이익을 줄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하고 독사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이익을 챙길 것인지만을 생각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소와 같은 인물이 마티아였다면 반대로 뱀과 같은 인물은 가리옷 유다였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창조되었기에 사랑으로 살아야 사랑받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말하자면, 사실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성공합니다.
일본 최고 부자인 손정희 회장이 첫 딸을 낳았을 때 길어야 1년밖에 못 산다는 병을 앓게 됩니다.
그런데 그 첫 딸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첫 딸의 미소를 보고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먼 나라의 아이에게서도 자기 딸 아이의 미소가 떠오르게 하고 싶다면 생각을 합니다.
사랑이 생긴 것입니다. 그랬더니 병이 나았고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국 최고 부자였던 록펠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만 알 때는 병을 얻어 1년밖에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한 여자아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고 그 아이의 감사 편지를 받고는 삶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자선재단도 만들고 나누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게 됩니다.
병도 나았고 장수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책에 보면 성공하려면 자신의 이익이 아닌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새로운 좋은 발명품이나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 생각만 하게 된다면 하느님은 실수를 통해서라도 그 바람을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기쁘게 됩니다.
우리는 자녀를 젖소가 되게 키울 것입니까, 아니면 뱀이 되게 키울 것입니까?
자녀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런데 결국 행복한 사람이 성공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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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의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오는 인간적이고 세상적 기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진정으로 참 기쁨을 느꼈던가 돌아봅니다.
즐기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에 몰입할 때의 기쁨도 컸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성취한 것에 대한 기쁨도 컸습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점이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데서 오는 기쁨, 좀 더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기쁨, 손톱만한 봉사지만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 사목적 헌신과 그 결과에 따른 보람에서 오는 기쁨...
결국 참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기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 영혼과 정신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쁨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란 표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그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기쁨 충만한 우리의 삶이랍니다.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들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
(솔로몬의 찬미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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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성 마티아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제1독서 (사도1,15-17.20-26)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 (21~26)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승천으로 마감된다.
가리웃 사람 유다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사도의 후보로 오른 자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승천하실 때까지 제자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 천거된 요셉과 마티아의 이름이 복음서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놀랍다.
이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역사적 사실을 마치 일지를 적는 것과 같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자신의 공동체에 꼭 필요한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요셉이나 마티아는 그 동안에는 특별하게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의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두가지 조건을 이야기 한다. 두 가지 조건은 바로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함께 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21~22).
바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 역사상 단 일회적 사건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가리옷 사람 유다를 대신할 사도에 선출되기 위한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기존 사도들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사람을 사도로 선출하기 위하여 최대한 기존 사도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자를 사도로 뽑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열 두 사도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 이라기보다는 충분조건으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오로는 두 번째 조건 밖에 충족시키기 못했음에도(1코린15,8)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다(에페1,1).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예수님께서 기적이나 치유를 포함한 여러가지 활동을 행하신 목적은 사람들을 고치고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함께 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보고 배우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통해 제자들을 직접 현장 학습시키신 것이다. 본절은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 사람들끼리 일상생활을 함께 한다는 의미의 히브리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신명28,6; 1사무29,6).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을 아는 정도가 아니고, 그분과 함께 동고동락하여 그분과 인격적 고통을 나누었던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알고 있다거나 교회에 오랫동안 출석했다던가 아니면 교회안에 어떤 직책이나 감투를 쓰고 있다고 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과 개인적 묵상(기도)을 통해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서는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일은 더 더욱 불가능하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가리웃 사람 유다를 대신하여 새롭게 사도의 일원이 된 사람의 사명이 명시되고 있다. 즉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인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난과 부활과 승천에 관한 신실한 선포자가 된다는 의미가 있다.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바르사빠스'를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Bar)와 '안식일'이라는 뜻의 '사빠스'(Sabbath)의 합성어로 보면, 이것은 '안식일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가 태어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인 '요셉'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유스투스'는 '의로운 자'란 뜻을 지닌 라틴식 이름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필요에 따라 히브리식 이름에 그리스식이나 라틴식 이름을 더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마티아'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니세포루스에 의하면,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선교 활동을 했으며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에우세비우스에 의하면, 마티아나 요셉은 모두 루카 복음 10장 1절에 나오는 70인의 예수님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새로운 사도를 뽑기 위해서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행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기도하였다'로 번역된 '프로슉사메노이'(prosuksamenoi)동사의 주어가 3인칭 복수란 사실은 그들이 이 한가지 문제를 놓고 한 마음으로 합심하여 기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도를 충원하는 제비뽑기에 있어 단순히 사람의 뜻을 배제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쉬 키리에 카르디오그노스타 판톤; sy kyrie, kardiognosta panton) 직역하면 '당신은, 주여, 모든 이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십니다'이다.
여기서 2인칭 단수 대명사 '쉬'(sy)와 호격 '퀴리에'(kyrie; 주여), 그리고 '마음을 아시는'에 해당하는 남성 단수 호격 '카르디오그노스타'(kardiognosta)는 모두 하느님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중복적 호칭을 사용한 사실을 통하여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는 일에 있어서 마르코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하느님의 뜻을 물었는지 알 수 있다.
한편, 본문은 하느님께서 요셉과 마티아의 마음속을 아시므로, 두 사람 중에 어떤 이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의 사도로 더 적합한 사람인가를 아신다는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서 시편 139장 13,14절에 나오는 대로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가 어떤 자인 줄을 아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주님께서 뽑으신'에 해당하는 '엑셀렉소'(ekselekso)의 원형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12제자들을 택하신 경우를 묘사한 2절의 '그의 택하신'에 해당하는 '엑셀레사토' (ekseleksato)의 원형과 동일한 '에클레고마이'(eklegomai)이다.
이 단어의 변형들이 사용된 용례를 보면, 마르코 복음13장 20절에서는 세말에 구원받을 '택하신' 백성에 대해, 루카복음 6장 13절에서는 산에서 열 두 제자를 택하셨을 때에, 루카복음 9장 35절에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간택을 받은'자인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되었다.
즉 '에클레고마이'는 구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단어이다.
제자들은 자신들과 함께 일할 사도가 될 사람을 뽑으면서도 자신들의 판단에 의지하기보다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존하였음이 이 단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리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사도행전 저자는 죄를 짓고 죽음을 택한 유다의 운명(제 갈 '곳')과 이제 그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도로 선출된 자의 '직무'를 동일한 단어인 '톤 토폰'(ton topon)을 사용해 공간적 이미지화하여 표현함으로써 비교의 효과를 높였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 '직무'라는 단어 대신에 '자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한편 후일에는 봉사와 사도의 직무 중에 봉사의 직무는 새로 만들어진 부제들에게 위임되었다(사도6,3.4). 그래서 '사도'로 번역된 '아포스톨로스'(apostolos)가 사도직을, '직무'로 번역된 '디아코니아스'(diakonias)라는 용어 자체가 부제직을 가리키게 되었다.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예수님을 은 삽심에 팔아넘기고 자살했던 유다의 최후에 대한 본문의 묘사는 매우 문학적이다.
'제 갈 곳'은 유다의 최후의 운명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다음과 같은 대상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지옥이다. 둘째, 그가 죽은 장소이다. 셋째, 그가 예수를 버리고 배반한 행위 자체이다.
위의 견해들이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첫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왜냐하면 위의 세 가지 중에 어떤 경우를 택한다고 할지라도, 사탄의 사주를 받아 (요한13,27~30) 예수님을 판 자의 최종 도착지는 지옥일 것이기 때문이다.
'제비를 뽑게 하니'
(에도칸 클레루스 아우토이스; edokan klerus autois; they gave forth their lots; they cast lots) 제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하였다. 제비뽑기는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구약시대부터 내려온 방법이다(레위16,7~10; 1사무10,20).
23절을 보면, 당시 모인 120명의 사람이 요셉과 마티아를 추천했지만, 이렇게 추천하는 일은 그들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21절과 22절의 조건에 부합된 사람을 고르는 객관적인 작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천한 두 사람을 두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에 제비뽑기를 통해 마티아를 사도로 뽑았으므로, 이일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행해진 것이다.
성자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 분을 증거하는 일을 할 사람을 성자 하느님께서 친히 뽑으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한 '뽑다'로 번역된 '에도칸'(edokan)의 원래 의미는 '주었다'(gave)이고, 좀더 문맥에 맞게 번역하자면 '던졌다'(drew)이다.
'그들에게'라는 뜻의 '아우토이스'는 번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런 의미들을 살려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들에게 제비를 던졌다'이다.
본문의 의미가 120명 가량되는 무리가 두 사람을 위하여 제비를 던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두 사람이 스스로 제비를 던지게 하였다는 의미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제비뽑기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표식을 그릇에 집어넣고 세게 흔들어서 튀어나온 것에 적힌 이름을 가진 사람을 선출하는 것이다. 제비뽑기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무조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교회가 천거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비를 뽑아 어떤 사람이 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는 제비뽑기가 행해지지 않았고, 또한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도 이 방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이런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신약시대의 제비뽑기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 사이의 공백기에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임시적으로 사용된 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의 제비뽑기의 방법을 오늘날의 모든 의사 결정에 항상 사용하여야 하는 절대적 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마티아 사도 축일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 하느님처럼,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주신 사랑입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그 뜻을 거스르는 가지들을 들어 올리시고, 가지치기를 하셨듯이 그 같은 사건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머물지 못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면서 떨어져 나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의 사랑이신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물러라’ 하십니다.
그 가지치기가 하느님 사랑의 손길이기 때문입니다.
(히브12,5-6. 10)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10 육신의 아버지들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잠깐 훈육하였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 하느님은 예수님을 구원의 나무로 사랑하셨고, 예수님은 당신의 가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는 것- 사랑 안에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인 구원의 일에 동참 시키는 그 사랑입니다.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 계명은 주시는 분의 뜻이, 마음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말씀과 동일하게 하셨습니다.(5월11일 묵상)
그 계명과 말씀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사랑의 끈임을 깨닫고‘옳습니다’하며 믿음으로 갖는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그 사랑을 주는 것-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한14,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믿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랑, 우리는 못하는데~ 그러면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나요?
그런데~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말씀)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 그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로마5,6-8)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죄인인 나를 사랑으로 친구로 삼아 주셨습니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 친구를 위해 죽는 그 사랑의 계명을 예수님께서 지키시어 그 계명의 열매를 주시기 위해 뽑으셨습니다.
언제나 남아있을 계명 지킴의 영원한 구원의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계명을 지키신 분,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인들이 하늘의 용서, 평화, 생명을 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친구를 위해 죽는 그 이타의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우리에게 그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이타의 사랑을 하라고~ 우리가 서로 하늘나라 완성에 동참하는 그 사랑 안에 머물라고~ 앞7절에서 시작된 결론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아멘,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 (요한15,9-17)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0~11)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성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모델로 내세워 성자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 주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성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모델로 내세워 당신의 계명을 지켜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도록 촉구하고 있다.
즉 요한복음 15장 10절에서도 앞서 9절에 있는 '~처럼'으로 번역되는 접속사 '카토스'(kathos)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계명 준수를 제자들의 계명 준수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생략해도 내용 전달에 지장이 없는 인칭 대명사 '내가'에 해당하는 '에고'(ego)를 사용하여 당신이 제자들의 삶의 모델이 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0절 후반절(새 성경; 원문은 전반절)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내 계명을 지키면'으로 나오듯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서 '지키면'에 해당하는 '데레세테'(teresete; obey)의 원형 '테레오' (tereo)는 '준행하다', '유의하다'는 뜻을 전달한다. 이 단어가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샤마르'(shamar)의 역어로 나오는데, 주요한 뜻은 하느님의 명령이나 지혜의 명령들(1사무15,11; 잠언3,1) 에 대한 종교적인 준행을 말한다.
신약에서도 '테레오'(tereo)가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지키는 것(1테살5,23; 1티모5,22), 율법(야고2,10), 규정(마르7,9) 등을 가감없이 따르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였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5장 10절은 모든 계명들을 시대와 상황의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서는 안되고, 손상됨 없이 철저히 지켜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1절은 예수님께서 앞의 요한복음 15장 1~10절의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한 교훈을 주신 목적이 제자들 안에 당신의 신적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스도와 일치한 자들의 삶 가운데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기쁨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기쁨의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웃음을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대이며, 우울하고 침울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람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데, 그중의 하나가 언제나 기뻐하는 것이다(1테살5,16). 사도 바오로는 옥중에서도 찬미가를 불렀고(사도16,25),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도록 성도들에게 권했다(필리4,4).
기쁨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 곧 예수님과 일치한 사람들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열매들 중의 하나이다(갈라5,22).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참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지름길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이 충만한 상태의 삶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이기에, 예수님꼐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요한14,27)처럼, 이 기쁨도 예수님의 것, 즉 천상에 속한 것이며, 사람이나 세상의 어떤 것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특별한 선물이기에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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