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라면 예전의 내 책갈피 속에도 한 두 권 묻혀 있는 시집이였지만, 누가 오천원을 벌려고 이런 성가신 거래를 할까, 문학이 죽어가는 요즘엔 라면 냄비 받침대로 시집만한 것이 없다더니, 라면 받침대로선 좀 비싼 가격이지만 길상사를 짓기 .위해 터를 매입 했다는 1000억대의 재산가, 그 사람의 욕망 한 웅큼 보다 못하다고 평한 백석의 시집이니 만큼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거래 장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벼룩 시장에서 1달러에 고호 그림을 사게 된 사람처럼 횡재하는 기분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롱패딩 코트를 뒤집어 쓴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에게 오천원을 건내고 돌아서서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몰고 왔다.
먼저 읽은이의 마음이 오래 머물다 간 흔적들이 있었다 나는 남이 읽던 책을 좋아한다. 형광펜이나 볼펜으로 어떤 구절에 그어 놓은 밑줄, 읽다가 잠이 쏟아졌거나 다른 볼 일이 생겨서 살짝 접어 놓은 책장 모서리, 운이 좋으면 눈물 방울이 떨어졌는지 페이지 한 쪽이 울퉁불퉁 해져 있는 자국도 있고, 어떤 구절에 자신의 목소리를 삽입한 낙서들을 보면 먼 외국 여행지의 까페나 레스토랑 벽에서 한글로 씌여진 낙서를 보는 것처럼 묘한 떨림 같은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내가 오천원을 주고 산 백석 시집은 막 태어난 아기처럼 너무도 깨끗해서 나에게 외로운 여행지가 될 것 같았다. 우리 도시에 부자들만 몰려 산다는 동네의 가장 좋은 곳, 가장 부자들만 산다는 아파트 후문에서 만난 5000원의 그녀가 어떻게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 가도록 태어났다 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참 이상한 일은 오래 전에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않음을 부러워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안에 거할만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높고라는 단어가 초가집처럼 쉽게 무너지는 마음들을 감쪽같이 펼쳐서 일으키고 세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까닭인지 살아 온 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높고라는 단어가 점점 부실해져 가고 나는 이 세상에서 그냥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해져만 가는 것 같다. 자정이 지난 것일까?
지난 봄까지만 해도 동네 마트에서 얻어 온 갈치 상자에 아크릴 믈감을 색칠해서 만들었던 나의 화단은 얼마나 많은 꽃들을 피우며 나의 아침과 늦은 밤을 위로 했던가?
그런데 호박과 쥐새끼로 변한 신데렐라의 황금마차처럼 나의 서툰 솜씨로 만든 정원이 이제는 쪽팔리기만 하다. 몇 해 전 식당 사장이 된 친구는 웬만한 아파트 값과 맞먹는 차를 타고 다닌다. 아직도 버스를 타고 다니거나 뚜벅이거나, 저전거를 타고 다니는 나는 가끔 그놈의 차에 실려서 집으로 가면 이 세계의 단단한 밀도와 재질을 그제서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놈은 나를 태워주고 마사지 샾으로 간다고 했다. 나는 7000원이 아까워 한 달에 두어번 가는 목욕을 그놈은 날마다 안마를 받으러 간다. 특히 무뚝뚝하고 단물이 다 빠져서 벽에 붙여놓은 껌처럼 서로간에 점성을 잃어버린 나의 시간에 대해 짜증을 치밀게 하는 것은 최근 그놈에게 생긴 13살 연하의 키가 큰 여자의 거의 충성에 가까운 헌신적인 사랑이다.
그녀는 마치 모래시계의 이정재처럼 24시간 그놈 곁을 맴돈다. 손님이 미어터지고 이 상 저 상 차리고 치우고 닦느라 정신이 없는데, 그 젊은 여자는 의자에 앉아 있는 그놈에게 무릎을 꿇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난리다.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생선 뼈를 발라서 밥 위에 얹어주고, 어깨를 주무르고, 하는데 무슨 까닭인지 나는 눈꼴이 시럽기만 하다. 그런 놈의 불타는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그녀가 성화에 나오는 성자들처럼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온 세상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그녀는 그렇게 숭배 받는 것이 일상인 여왕 같고, 나는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거나 밥을 차려주고 허드랫일을 하는 하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서로 많이 사랑하는 것도 다른 많이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처럼 과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목욕이나 마사지는 커녕, 피곤해서 세수도 안하고 잠들기 일쑤인 나는, 날마다 폭삭 폭삭 늙어가는 것 같아 싸구려 마스크 팩이라도 붙여보자 하고는 이십분만 붙이라는 주의 사항을 무시하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려서, 나중에 보면 마스크 팩은 라이스 페이퍼처럼 얼굴에 말라붙어 있다.
요즘의 가난은 꼭 필요한만큼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가지지 못하는 상황을 말하는것 같다. 그리고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가난한 것이 아니라 기꺼이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부자들보다 존경을 받고 고귀하게 여겨졌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거나, 기꺼이 가난하거나 가난은 똑 같이 경멸과 외면의 대상인 것 같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세끼 밥 잘 먹고, 잠 잘곳 있고, 좋아라 하는 막걸라도 언제든지 마실 수 있는 돈은 있고 입을 옷 있고, 따지고보면 별로 쓸데없는 것들을 더 많이 가진 것이 부유함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내가 아는 고향 선배는 오직 밥 한 그릇에 우주 삼라만상을 설파하고는 했다 오 !! 놀라워라 밥 한 그릇을 위한 기나긴 여정의 발자취란 어떤 것이냐? 밥 한 그릇이 아니라 쌀 한 톨 마다에 우주가 ,담겼다는 생각은 얼마나 위대한 것이냐 그리하여 눈물같은 밥 한 그릇 먹을 때마다 시 한 줄 떠오른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선배는 목숨과 밥 한 그릇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인생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백석과 나타샤는 끼니때마다 밥 한 그릇 먹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함께 가는 당나귀는 하루종일 되새김질로 배고픈 위장을 달래줘야 했다 가난한 백석과 나타샤에게 당나귀라는 동물은 최고의 동반자가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 저런 불편들이 더 편한 여건에 비하면 많긴 했지만 불편이 불행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소유 같은 거창한 생각 같은 걸 하지도 않았다. 내게 인연이 되는 만큼 가질 수 있음 가지고, 가질 수 없음 못가지는 거지 굳이 이름 붙여 작정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쌍둥이 조카를 데리고 동네 뒷산을 산책한 적이 있었는데 예닐곱살 먹은 아이들이 풀섶에 버려져 있던 훌라호프 하나를 주워서 서로 가지겠다고 싸우는 것이였다.
그래서 먼저 보았다는 언니와 먼저 주웠다는 동생을 가위바위보를 시켜서 결국 동생이 가지게 되었는데 처음엔 언니야가 한참을 투덜거리며 부러운 눈으로 훌라후프를 바라보더니, 얼마 안가 누구도 훌라후프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게 되니까, 동생이 은근히 짐이 되는지, "언니! 이제 언니 해!" 하는 것이였다. 그랬더니 이제 훌라후프 자체를 잊어버린 언니가 "싫어, 니꺼쟎아"" 하는 것이였다. 아무도 부러워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우리를 많이 가난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날마다 날마다 밥 한 그릇 살 한 톨을 먹을때마다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가?? "나 밥먹는거 귀찮으니까 내 밥도 니가 먹어" 이렇게; 말하는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은 천국인가 지옥인가.
다시 1000억대 길상사 터 보다 낫다는 나타샤와 당나귀를 가슴에 새겨 본다. 나타샤와 당나귀는 타임머신을 타고 나에게 온 유일한 메티포였음을...........!!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세대지만, 나는 다시 민족중흥 보다는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난 것으로 내 삶을 믿기로 한다.
마치 수작업으로 깍아만든 나무 시계나 나무 만년필처럼 말이다. 한 끌 한 끌 때로는 불편이라 느껴지는 정성을 들여서 참하고 수수하게 원래 그렇기 위해 만든 물건처럼 내 삶을 규정하기로 한다.
버스와 뚜벅이와 자전거로 충분하고, 얼굴은 여름에는 땡감이지만 가을에는 홍시가 되는 것처럼 세월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 족하고, 목욕은 너무 자주하면 수질만 오염 시킬 뿐이고,
수년 째 떼지 않은 가스 보일러 대신 나는 겨울이면 양초 13개를 켠다. 양초의 불꽃은 흐르는 공기가 마치 음악인양 펄럭펄럭 소리를 내며 춤을 추고 양초 위에 얹어 놓은 아주 작은 양은 주전자에서는 쉭쉭 폭폭 물끓는 소리가 넘치고, 옆에서는 늘어져 잠든 고양이가 갸르릉갸르릉 증기 기관차 소리를 낸다
나는 겨울마다 우풍이 심해서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이 냉장고에서 갓 꺼낸 마스크 팩을 붙인것처럼 찹찹해지는 집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이 엷은 온기의 화음을 참 좋아한다. 우리가 추억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곰곰히 뜯어보면, 대부분 포장이 잘 되어진 매끄럽고 편했던 기억이 아니라, 아궁이의 꺼져가는 불씨 속에서 꺼낸 군고구마의 뜨거움과 입가에 묻은 재와 긴긴 겨울 해질 무렵 집집마다 끓이던 된장찌개 냄새 같은 넘치는 풍족의 장면들이 아니라 바닥이 거의 드러나는 부족의 장면들이 많다.
이불과 전기장판을 떨치고 일어나 성에낀 창가에 서서 손가락으로 다시 쓴다.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이라고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의 글에서 눈물처럼 땀처럼 흘러내리는 수증기 방울들 사이로 바라보는 겨울 풍경이 피골이 상접한 붓다의 고난상처럼 거룩해 보일때가 있다.
그런 날에는........... 그런 날에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양, 나는 手淫을 하고 잠든다 그리고 세상에 퍼지는 수 많은 나의 자화상 들이여 !! |
첫댓글 글쎄다.
삶은 제 삶을 사는 게 가장 중요하고
시도 또한 제 삶을 보여주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겠지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