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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8)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 구조와 구성원
제대 꾸며진 협방에 주문모 신부 모시고 여성 20여 명 상주
- 18세기 서울의 모습을 그린 ‘도성대지도’. 종로구 안국동 인근 충훈부 후동에 강완숙의 집이 있었다. 현재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인근, 인사동 입구에 있었다. 오른쪽의 숲은 창덕궁과 비원이다. 좌측 상단에 정광수의 집이 있던 벽동이 보인다.
스무 명이 넘는 상주 인원
강완숙(골룸바)은 1799년 남대문 밖 창동에서 도심 속 대사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 새집을 지으려다 법적인 분쟁이 발생해, 1800년 3월에 충훈부 후동(관훈동)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은 명실공히 조선 천주교회의 최전선이었다. 집행부의 중요한 의사 결정뿐 아니라 첨례와 교리 교육도 이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당시 강완숙의 충훈부 후동 집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고, 어떤 인원들이 상주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겠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주문모 신부가 강완숙의 집에 머물게 된 경위를 이렇게 썼다.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로 입교한 사람이 자못 많았는데, 대개 나라의 법이 역적이 아닐 경우, 사족의 부녀에게는 형벌이 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금지하는 명령을 염려하지 않았고, 신부 또한 이를 빌어 교회를 널리 선양할 바탕으로 삼으려 하여, 대우함이 특별히 두터웠으므로 교인 중의 큰 세력이 모두 여교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소문 또한 널리 퍼졌다.” 여성이 조선 천주교회에서 실제 주축이 된 배경을 설명한 내용이다. 끝에 말한 소문은 남녀 간에 구분 없이 문란하다는 구설이 있었다는 뜻이다.
먼저 강완숙 집의 상주 인원을 알아보자. 적어도 이 집에 상주하던 인원은 최소 20명 이상이었고, 대부분 여자였다. 우선 여러 사람의 공초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강완숙의 직계 친속이 8명이다. 시어머니 유 아녜스와 강완숙 본인, 아들 홍필주와 딸 홍순희, 홍필주의 처와 처형 및 조카딸 등이 그들이다.
여기에 더해 주문모 신부와 윤점혜(아가타), 김달님, 김순이와 여종 소명, 정임, 복임, 동의 어미, 고공(雇工) 김흥년과 최춘봉과 그의 어미 등 최소 11명이 더 이 집에 살고 있었다. 이 19명 외에도 매번 첨례일이 가까워오면 3, 4일 전부터 객방에 기본적으로 대여섯 명 이상이 머물렀다. 동의 어미나 여종인 소명과 복임 등은 심부름과 빨래 등 허드렛일을 맡았고, 윤례(允禮) 어미는 정임과 함께 신부의 식사를 책임졌다. 외부로 나가는 편지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경기 감영 앞에 살던 윤례 어미는 날마다 출근했다. 이밖에 평상시에도 교리 교육이 활발히 이뤄졌기에 상주 인원은 기본적으로 늘 25명이 넘었다.
안채의 구조와 역할 분담
많은 인원이 함께 생활하려면 우선 이들이 숙식을 해결할 공간이 필요했다. 방은 몇 개이고, 공간은 어떻게 분할되어 있었을까? 「사학징의」 속 여러 관련자의 공초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대충 어렴풋하게나마 집의 구조가 파악된다.
동정녀 김달님[金月任]의 진술은 이렇다. “이른바 신부는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노소(老少)가 그를 고향의 친족이라면서 비밀로 상청(上廳)의 가운데 방에다 숨겨두었고, 그 방에 출입하는 자는 강완숙 모녀와 다슬아입니다. 강완숙은 종종 혼자 그 방에 들어갔는데, 매번 그 방에 들어갈 때는 문득 안에서 닫아걸어 제가 들어가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제가 혹 창틈으로 엿보기라도 하면, 강완숙의 어미가 대경실색하여 한사코 막아 금하였습니다.”
상청은 윗채이니, 우선 이 집이 윗채와 아래채로 분리된 것을 알겠다. 주문모 신부의 거처는 윗채 즉 안채의 안방 옆에 따로 들인 월방(越房) 즉 건넌방이라고 부르는 협방(挾房)에 있었다. 협방은 안방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밀실이었다. 그 옹색하게 좁은 협방이 주문모 신부의 비밀 거처였다. 주문모 신부의 방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강완숙과 그녀의 딸 홍순희, 그리고 김순이뿐이었다.
비녀 복점의 다음 공초도 이같은 내용을 뒷받침해준다. “그 집의 모든 일은 홍문갑의 어미가 맡아 하므로 왕래하는 여러 사람이 모두 아랫방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항상 노주인이 지키는 안방에 있었기에, 비록 한 집 가운데 있었지만 건넌방의 일을 실로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요컨대 웃방에는 시어머니 유 아녜스가 있었고, 그 아랫방에 강완숙이 지냈다. 주문모 신부가 거처하던 협방은 강완숙의 아랫방에 딸린 협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문모 신부의 방은 유 아녜스의 웃방과 강완숙의 아랫방 사이에 끼어 있었다. 집 뒤편으로 난 별도의 출입문이 있었을 것이다.
1801년 3월 15일의 의금부 공초에서 주문모 신부는 “제가 그 집에 계속 머문 것은 또한 장소가 없어서 그 집 건넌방에 몸을 깃들여 묵었을 뿐입니다. 그 아들이 함께 잤습니다. 그 시어머니는 웃방에서 홍문갑의 어미와 함께 있었으니, 서로 지냄에 절대로 남녀가 구별하지 않는 처신은 없었습니다”라고 약간 다르게 진술하였다. 안채의 윗방 즉 안방에 강완숙이 시어머니 유 아녜스를 모시고 지냈고, 아들 홍필주가 신부와 함께 곁방에서 잤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주문모 신부는 이런 진술도 남겼다. “대개 조선 집의 제도는 천하의 여러 나라와 비교해 다릅니다. 비록 4, 5칸의 초가집도 내외 구분이 반드시 몹시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도망해 달아난 사람이 만약 사랑방에서 지낸다면 며칠이 못 가서 바로 붙잡히게 됩니다. 저는 제 몸을 온전하게 보전하려 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매번 남의 집 중문 안쪽의 건넌방에서 지냈습니다. 그 집에 혹 남자가 있거나, 혹 남자가 없더라도 또한 한집에 사는 다른 사람이 있는지라, 저는 이곳을 여관방과 같이 보면서 경문을 외우거나 묵묵히 기도하며 방문을 닫고서 가만히 수행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삿되고 더럽다는 두 글자를 가지고 더한단 말입니까?”
한편 안채에서 생활하던 다른 식솔에 대한 진술 역시 비녀 복점의 공초에 보인다. “홍문갑의 집에 늘상 왕래한 여자는 냉정동 남판서 댁 여종 구월(九月)의 여식 복임(卜任)과 아기씨 방에서 지내는 달님[月任], 아랫방에서 지내는 이름을 모르는 아기씨, 늘상 노말루(老抹樓) 아래 조카딸로 불리는 여자 등입니다”라고 했다. 복임은 성이 박씨였고 세례명은 투다(投多: 테오도라)였다. 동정녀 김달님은 강완숙의 딸 홍순희와 한방에서 지냈고, 아랫방 아기씨는 동정녀 윤점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렇게 보면 안채에는 유 아녜스의 웃방과 강완숙의 안방, 그리고 그 사이 주문모 신부가 숨어지내던 협방, 이와 별도로 홍순희와 김달님이 거처하는 방과 윤점혜의 아랫방, 다시 홍필주의 처나 처형 및 질녀가 거처하는 방까지 포함해 안채에는 최소 여섯 개의 방이 있었던 셈이다.
아래채 사람들
손님이 머무는 객방과 여종과 하인들이 머무는 공간은 아래채에 별도로 있었다. 여종은 소명과 정임, 복임이 있었고, 여기에 동의 어미와 윤례 어미 같은 여자들이 주로 음식 수발을 담당했다. 이밖에 집안의 허드렛일과 바깥 심부름을 맡았던 김흥년이 있었다. 소명은 원래 한신애의 여종이었는데, 18세 때 강완숙의 집으로 보내졌다. 이후 24세 때까지 7년간 이 집에서 강완숙을 모시며 교회의 비밀스러운 심부름을 도맡았다. 여종 정임은 강완숙의 집에 온 지 3년 째였고, 윤례 어미와 함께 신부의 식사 준비를 담당했다. 규모가 있다 보니, 남자의 일손도 필요했다. 「사학징의」 속 김한봉의 공초를 보면, 자신의 이종사촌 최춘봉이 어머니와 함께 이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밖에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교회의 일과 교리 공부를 함께하던 그룹들이 있었다. 비녀 복점의 공초를 보자. “냉정동 남생원(南生員) 댁 안 양반과 수구문 안 조예산 집 안 양반이 찾아오면, 혹 보름이나 수십일 동안 계속 머물렀습니다. 여염집 여인으로는 어디 사는지도 이름도 모르는 4, 5명이 왕래하며 경문을 외우면서 날마다 함께 모였습니다. 자세히 물어보면 첨례 기일 3, 4일 전에 와서 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복혜 간지대와 김연이 율리아나, 비녀 윤복점 레지나 등 사학매파 3인방을 비롯하여 문영인과 강경복, 서경의 같은 궁녀나 나인들도 출입이 잦았다. 그 밖의 출입 인원 또한 대부분 여성이었다. 남성들은 각 거점별로 신부를 모셔갈 때나, 신부의 재가가 필요한 긴급한 현안이 있을 때만 강완숙의 집을 찾았다.
홍어린아기연이는 강완숙의 바로 뒷집에 살았고, 그 집에는 우물이 두 개나 있었다. 1800년 겨울 강완숙의 집에 화재가 났을 때, 그의 아들인 좌포청 포교 강득녕이 불을 꺼준 일도 있었다. 뒷문을 만들어 수시로 왕래했고, 폐궁 나인 강경복의 어미가 그녀의 집 곁채에 세들어 산 인연으로 서학을 전파하기도 했다. 왕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았으므로 강완숙 집의 여종들은 집에서 나오는 빨래나 허드렛일을 들고 홍어린아기연이의 집으로 건너가서 해결했던 듯하다.
강완숙의 집에서는 강습과 첨례가 수시로 열렸다. 첨례는 강완숙의 안방에서 신부의 거처인 곁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고 진행되었다. 유덕이는 공초에서 그 광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교종(敎宗)이라 일컫는 사람이 협실에 앉아있고, 그 집 모녀와 집안에 있는 여자아이와 과부, 침교(沈橋) 조예산(趙禮山: 조시종)의 처 한신애, 동네 이름을 알지 못하는 홍주부(洪主簿)의 처 등 여러 사람이 좌우로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은 뒤에 강완숙이 강론하는 책을 가지고 이를 외웁니다.”
첨례 때는 주문모 신부의 거처인 협실이 개방되었다. 신부가 협실 중앙에 앉고, 여성 신자들이 안방의 좌우에 열을 지어 무릎을 꿇고 앉으면, 강완숙이 책을 외워 강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조혜의의 공초에는 신부 뒤편에 십자가와 함께 족자가 걸렸는데, 예수가 잔혹한 형벌을 받는 형상을 그려 놓았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절을 올리고, 엎드려 입으로 사서를 외운다고 썼다. 이로 보아 신부의 거처에는 소박한 형태로나마 제대가 꾸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옆에서 홍필주가 복사를 섰다. 손님인 주문모 신부를 제외하면 20명이 넘는 집안에 남자라고는 홍필주와 최춘봉 정도뿐인 여성의 집이었다.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은 언제나 강완숙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89) 거룩한 해에 오는 1000척의 배
「정감록」 예언과 ‘대박청래’ 접속, 천주의 세상을 꿈꾸다
- 서울대 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 「정감록」의 첫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다
1787년 4월 13일, 정약용이 아버지 정재원을 모시고 고향 초천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지금 팔당대교 인근의 물가 마을 당정촌(唐汀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팔당협을 오를 참이었다. 갑작스레 흉흉한 와언(訛言)이 돌아 마을이 온통 난리였다. 시는 「파당행(巴塘行)」이다. 전쟁이 났다는 소문에 아전이 들이닥쳐 군대를 점고했고, 흉흉해진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피난 길에 올라 우왕좌왕하는 정황을 잘 보여준다. 시 중에 “군대 왔다 말하지만 군대는 뵈지 않고, 바람맞은 나비 모양 정처 없이 가는구나”란 구절에 유독 눈길이 간다.
실제 「정조실록」 1787년 4월 19일 기사에는 기호 지방에 갑자기 오랑캐의 기병이 쳐들어왔다거나 해적(海賊)이 가까운 곳에 정박하였다는 헛소문이 퍼져, 마을이 텅 비는 일이 잇달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소문은 4월 14일, 수원과 평택의 경계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온양, 아산, 천안, 직산까지 퍼져 나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오래전부터 떠돌던 비기의 예언이 곧 실현되리라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이때 당정촌뿐 아니라 인근 여러 고을에서 군대 소집령이 발동되었고, 백성들이 놀라 짐을 싸서 산속으로 달아나는 바람에 민심이 크게 술렁거렸다. 있지도 않은 오랑캐 기병과 오지도 않은 바다 건너 해적의 풍문이 순식간에 경기도와 충청도 일원을 뒤흔든 태풍의 눈이 되었던 것이다.4월 25일 사직 강유(姜游)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서로 선동하기를 좋아합니다. 비록 이번 일만 해도 하루 만에 남양, 수원, 금천, 과천, 인천, 부평에서 온통 소동이 일어나, 신주를 땅에 묻고 닭과 개를 잡아 남부여대(男負女戴)한 백성이 산야를 온통 덮어, 경계를 넘어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도(道)를 지나 깊은 골짝으로 향해, 바닷가 여러 고을이 거의 사람이 없이 텅 비었습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 하나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치안이 순식간에 마비되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 달 뒤인 1787년 6월 14일에 유언비어의 진원지로 지목된 제천의 김동익(金東翼) 등이 역모로 복주되면서 이 소동은 겨우 가라앉았다.
당시 여러 차례 일어난 이런 종류의 소동에는 어김없이 「정감록」이 등장했다. 이때는 해도(海島)에서 정희량(鄭希亮)의 손자 정함(鄭)을 받드는 무리가 장차 6월 11일에 거사를 일으키고, 팔도에서 일시에 호응할 것이라는 유언비어였다. 그 섬은 일본과 동래 사이에 있는 무석국(無石國)이고, 섬을 다스리는 세 사람 중 하나는 이인좌의 아들이라고도 했다.
그들이 청의(靑衣)를 입었고, 머리에는 모두 관(冠)을 썼다는 풍문에다, 일이 일어나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으며 궁궁(弓弓)이 이롭다”는 영조 조 이래 유언비어 세력들이 늘 입에 올리던 수상한 말이 사람들 사이에 다시 떠돌았다. 5년 전인 1782년에 발생한 충청도 진천의 문인방(文仁邦) 역모 사건, 1785년 하동의 문양해(文洋海) 역모 사건 때의 상황과도 판박이였다. 뻔한 레퍼토리임에도 늘 뻔하지 않은 소동이 일어나곤 했다.
쌓인 시체 산과 같고, 흐르는 피가 시내를 이루리
1800년 10월 11일, 이우집이 전주 유관검의 집에 들러 하루를 묵었다. 밤중에 누워있던 유관검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 거룩한 해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1천 척의 배가 정박한다는 예언을 들어 보았는가?” “처음 듣는 소리요.” “예수님이 경신년에 태어나셨고, 올해가 마침 경신년이니 거룩한 해란 말일세. 주문모 신부의 말을 들어보니, 큰 배가 서양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5년이 걸린다고 하더군. 우리가 황심을 통해 큰 배를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 딱 5년 전이었네. 큰 배가 이때 도착한다면 밤중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1천 척의 배가 정박한다는 비기의 예언이 딱 맞아 떨어지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유관검은 뜬금없이 5년 전 1796년에 북경 주교에게 대박청래(大舶請來)의 탄원을 보냈던 기억을 소환했다. 유관검이 다시 말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큰 배를 순순히 받지 않을 경우, 일장판결(一場判決)을 낸 뒤에 서교가 크게 행해질 것이네.” 위태로운 말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고 있었다. 곧 엄청난 숫자의 서양 배가 한강 어귀로 몰려든다. 그때가 되면 조선은 속절없이 서학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감당할 수 없는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떠돌던 참기(讖記), 즉 예언서에 나오는 말이다. 수십 년 전부터 떠돌던 그 예언이 이제 곧 우리 눈앞에서 실현될 터이니 너는 천주를 열심히 믿어야 한다. 유관검은 이우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유관검의 이 얘기는 실제로 영조 때부터 떠돌던 「정감록」의 갈래인 「감결(鑑訣)」 가운데 나오는 예언 중 한 대목이었다. “원숭이 해의 봄 3월과 거룩한 해의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중에 1천 척의 배가 정박할 것이다. 안성(安城)과 죽산(竹山)의 사이에는 쌓인 시체가 산과 같겠고, 여주(驪州)와 광주(廣州)의 어름에는 사람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리라. 수주(隋州: 수원)와 당성(唐城: 남양) 사이에는 흐르는 피가 시내를 이룰 것이다. 한강 남쪽으로 1백 리에는 개와 닭 울음소리가 없고, 사람 그림자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말세의 참혹한 광경에 대한 묘사다. 앞서 1787년 4월 정약용이 목격했던 경기 충청 일원에서 벌어진 소동이 모두 이 비기의 소문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소동이 일어난 지역까지 일치한다. 「정감록」의 한 갈래인 「서산대사비결」에도 “거룩한 해를 만나면, 1천 척의 배가 갑자기 인천과 부평의 넓은 들에 정박할 것이다”라고 한 내용이 있다. 이 글은 45년 전인 1755년 2월 나주 괘서 사건 때 처음 나왔다. 원숭이 해를 운운한 것은 1728년(丙申年) 3월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가리킨 것이다. 실제로 이때 안성과 죽산 사이에서 이인좌의 반란군이 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유관검이 위 대목을 콕 집어 인용한 것은 1800년이 예수가 태어난 해인 경신년이어서 비기에서 말한 원숭이 해와 거룩한 해가 일치하는 때였기 때문이다. 이미 3월과 8월이 한참 지난 10월이었음에도 유관검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1천 척의 배는 왜 하필 인천과 부평 사이로 모여들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유관검은 어째서 「정감록」이 서학의 공인을 예언한 것으로 받아들였던가? 우리는 이 같은 연쇄적 질문에 휩싸인다.
「정감록」 신앙, 천주교와 접속하다
성세는 원래 예수가 탄생한 경신년(庚申年)이 아니라 ‘강성지세(降聖之歲)’ 즉 성인이신 공자가 탄생한 해란 뜻으로 썼던 표현이다. 그런데 1800년이 마침 경신년으로 예수가 태어난 간지가 돌아온지라, 거룩한 해라고 보았다. 유관검은 「감결」 속의 신년(申年)과 성세가 바로 1800년을 가리킨다고 믿었던 셈이다. 새 세상이 곧 열린다. 서학은 무력에 의해서라도 공인될 것이다. 우리는 깨어 그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 없이, 흔들리지 말고 가자.
「감결」 속 1천 척 배의 정체는 자신들이 그토록 갈망해온 서양 대포와 각종 문물과 보화를 가득 실은 대박(大舶)일 것이었다. 몇만 리를 건너온 1천 척의 서양배는 서양국의 국왕이 조선 교우에게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주기 위해 보낸 것으로, 5년이나 걸리는 항로를 지나 조선에 곧 당도할 것이었다. 이런 터무니 없는 상상을 유관검은 어떻게 확신했을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에 조선 정부는 왜 그토록 긴장했을까? 1728년 이후 조선을 뒤흔든 「정감록」 신앙은 이렇게 해서 천주교와 접속되었다.
대박청래의 생각은 1795년 주문모와 조선 신자들이 북경에 보낸 청원서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두 해 뒤 현계흠이 1797년 동래 앞바다에 표착한 영국 배에 직접 올라가 본 뒤 소문을 내자 대박의 꿈은 이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틀림없이 온다. 오기만 하면 한꺼번에 바뀐다. 이 믿음이 해도(海島)의 진인(眞人)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험한 세상을 끝장내고 새 세상을 연다는 조선의 오랜 예언과 결합되면서 흉흉한 소문이 되었다. 조선 정부는 유독 「정감록」의 풍문이 만들어내는 민심의 동요에 민감했다. 이는 이듬해인 1801년 황사영의 「백서」에서 다시 소환되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안겨준 트라우마가 컸다.
「정감록」의 예언과 비결들은 계속해서 왕조의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1782년, 1785년, 1787년에도 계속해서 「정감록」의 비기에 바탕을 둔 역모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그때마다 민심은 크게 출렁였다. 세 해 전인 1797년에는 강이천과 김건순이 작당해 해도에서 군대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로 정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여기에는 주문모 신부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정감록」의 흉흉한 괴담이 서학과 만나 증폭될 경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될 터였다. 조정으로서는 그 후폭풍을 감당하기가 두려웠다.
다블뤼 주교가 1850년 9월에 프랑스에 있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도 “사람들 얘기로는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책 속에 오래된 예언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즉 서양의 종교가 이 왕국에 들어와 널리 퍼질 것을 예고했다는 거예요”라고 한 내용이 나온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이 같은 믿음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대박청래의 날을 고대하며 살았다. 경신년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1천 척의 배가 몰려들어 조선 정부를 겁박하면, 일장 판결이 나서 그것으로 조선은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세상은 머잖아 천주의 세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서학범(西學汎)」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교육의 혁신이 오고, 온갖 불의와 부패가 가라앉아 천주의 가르침이 세상 가득 펼쳐질 것이었다.
그 믿음 하나면 못할 일이 없었다. 그는 이따금 서울로 올라가서 신부를 만났다. 확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배는 오지 않았다. 올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를 만났다. 신념이 무너지고, 신부가 죽고, 교회가 박살 났다. 이들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이들에게 씌워진 죄명은 대역부도였다. 능지처참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90) 폐궁의 여인들
신앙에 목말랐던 폐궁의 여인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 받아
- 사학징의 중 이조이의 공초기록 부분.
고인 물속에 전해진 복음
신유박해 순교자 중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 이인(李, 1754~1801)의 처 송 마리아(1753~1801)와 며느리 신 마리아(1769~1801)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이었던 이인은 강화로 귀양 가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고, 신 마리아의 남편이었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담(李湛, 1769~1786)은 홍국영의 모의에 연루되어 1786년 11월에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국왕의 친동생으로 산다는 것은 차라리 잔혹한 형벌에 가까웠다. 국왕 정조는 하나 남은 동생의 목숨을 지켜주려 안간힘을 썼지만 주변에서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은언군이 죽어야만 끝날 일이었다. 은언군의 서울 집 양제궁(良宮)은 송현(松峴) 인근 전동(洞)에 있었다. 지금의 조계사 뒤편 종로구 수송동 일대다. 양제궁은 1786년 은언군의 강화 유배 이후 폐궁(廢宮)으로 불렸다.
폐궁에는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그녀의 며느리이자 죽은 상계군의 부인인 신씨가 살았다. 폐궁은 늘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다. 바깥출입 없이, 나인 몇이 수발을 들었다. 고인 물로 썩어가던 시간이 여러 해 지났을 때, 그녀들의 불행한 처지를 동정한 한 여교우가 찾아와 복음의 희한한 소식을 전했다.
폐궁을 찾아와 전교한 여교우에 대해서는 주문모 신부가 진술한 내용이 따로 있다. “폐궁의 집안사람이 천주교를 받든 것은 제가 조선에 들어오기 여러 해 전입니다. 들으니 그때 조씨(趙氏) 성의 한 노파가 궁에 들어가 이를 권하였다고 합니다. 이 노파는 바로 서씨 나인의 외조모라더군요.” 「추안급국안」에 나온다.
이때가 1792년 즈음이었다. 당시 그녀들은 바싹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주문모 신부의 입국 소식을 알게 된 그녀들의 적극적인 요청으로 1799년 즈음에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던 듯하다.
하지만 이들의 입교는 자칫 전체 교회에 큰 재앙을 불러올 단초가 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도 이들과 접촉하려 들지 않았다. 강완숙만 용감하게 폐궁으로 직접 찾아가서 그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가 하면, 신부를 직접 모시고 가서 성사를 받게 하기도 했다. 신앙에 목말랐던 그녀들은 밤중에 주문모 신부가 머물고 있던 근처 충훈부 후동 강완숙의 집으로 여러 번 직접 찾아가서 교리 교육을 받았고, 이후 성사를 받고 세례명을 얻었다. 두 사람에게 똑같이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지어준 것은 신부의 뜻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교회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달레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신부를 궁에 모셔 들이는 것이 기뻤다. 신부가 거기 있을 때에는, 홍익만 안토니오의 집과 붙어 있어서 벽에 비밀리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그 집과 왕래할 수 있는 따로 떨어진 방에 숨어 있었다.” 강완숙은 그녀들을 특별히 관리하기 위해 아들 홍필주의 장인인 홍익만 안토니오를 그 옆집에 이사시켜, 비밀 통로를 통해 신부가 그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녀들의 인도로 폐궁의 나인 강경복과 서경의가 입교했고, 나중에 이들은 함께 명도회의 지부를 구성해서 회원으로 활동했다.
조씨 노파와 사학교주 이조이
폐궁의 두 여인에게 처음 서학을 전한 조씨 노파는 누구였을까? 주문모 신부는 그녀가 뒤에 폐궁 나인으로 들어간 서경의의 외조모라고 했다. 앞서 사학매파 3인방을 얘기하면서 김연이가 폐궁 전담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과 밀접하게 접촉했던 사람 중에 홍정호(洪正浩) 또는 홍시호(洪時浩)로 불린 이의 어머니로 초기 교회 조직에 깊숙이 참여했던 이조이(李召史)가 더 있다. 이조이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당시 역모 세력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역적으로 사형당한 여선군(驪善君) 이학(李)의 서녀(庶女)였다. 이학은 인조(仁祖)의 아들인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의 3세손으로 영조와 항렬이 같았다. 말하자면 그녀는 왕가 혈통의 서녀였다. 「추안급국안」에 홍시호의 어미가 동대문 밖에서 격쟁하여 그 선인의 원통함을 밝히려 했다는 얘기가 실린 것을 보면, 그녀가 부친 이학의 죽음을 억울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조이는 풍산 홍씨 집안의 서족인 홍탁보와 결혼하여 홍정호를 낳았다.
그녀는 「사학징의」에 실린 1801년 11월 23일 한성부의 이문(移文)에서 ‘사학교주(邪學敎主)’, 또는 ‘사설정범(邪說正犯)’, ‘추류본색(醜類本色)’으로 지목되었다. 아들 홍정호가 어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1801년 5월 22일에 사형을 당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녀는 끌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눈을 꽉 감고 매질을 참으면서 끝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학징의」에는 이조이의 아들 홍정호가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와는 가까운 인척 간이라고 소개했다. 홍필주의 증조부 홍석보(洪錫輔)와 홍정호의 부친 홍탁보(洪鐸輔)가 항렬이 같아, 직계일 경우 촌수로 따져 6촌간이 된다. 두 집안 모두 서족이긴 해도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와 가까운 일가였다. 강완숙은 혜경궁의 7촌 서질부(庶姪婦)였다. 이조이는 후에 홍탁보와 이혼하고 조봉상(趙鳳祥)과 재혼하였다. 여기에는 무언가 우리가 모르는 곡절이 있는 듯 한데, 남은 기록이 더 없어서 살필 수가 없다.
이조이가 재혼한 남편 조봉상은 1801년 3월 3일에 포도청으로 끌려왔다. 그는 1791년 8월에 이윤하의 전도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이윤하는 이경언 바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부친이다. 조봉상은 포도청의 공초에서 자신의 아내 이조이가 여러 해 전부터 사학을 하느라 전동 폐궁을 자주 드나들었고, 사위의 전실(前室) 딸인 서경의(徐景儀)가 과부로 지내다가 5년 전 폐궁의 나인으로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여기서 다시 폐궁 나인 서경의가 호명된다. 서경의는 조봉상의 사위 서종주(徐宗柱)가 전실에게서 얻은 딸로, 조봉상의 의붓 외손녀다. 그러니 이조이가 바로 그녀의 외조모가 되는 셈이다. 주문모 신부가 이조이를 조씨 노파라고 한 것은 남편 쪽의 성씨로 불러서 생긴 착오로 보인다.
조봉상은 의붓 외손녀 서경의가 폐궁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이조이가 그 집을 들락거리게 되었다고 했다. 사실은 이조이가 서경의를 폐궁 나인으로 추천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왕실의 자손으로 억울하게 역모에 연루되어 아버지 이학을 잃은 이조이와, 남편이 임금의 친동생임에도 강화로 귀양 가 목숨이 위태롭고, 아들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송씨의 처지는 확실히 동병상련의 지점이 있었다.
이조이는 1801년 검거 당시 나이가 70세를 넘겼고 중풍으로 거동마저 불편한 상태였다. 아들이 이미 사형을 당한 상황이었고, 막상 고령인 자신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1801년 12월 20일에 진주로 유배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사학징의」의 여러 기록을 통해 볼 때 당시 교계에서의 위상은 홍정호 모자와 홍필주 모자가 대등했다. 당시 교회 내에서 이들의 역할과 비중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홍정호는 당시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4, 5차례나 모셔올 만한 위치였다.
폐궁의 나인들
폐궁에는 부리는 나인이 여럿 있었다. 강완숙 홍정호와 한날 서소문 밖에서 사약을 받아 죽은 강경복 수산나와, 죽음을 면하고 웅천(熊川)으로 귀양 간 서경의, 그리고 늙은 나인 이덕빈(李德彬)의 이름이 확인된다. 이 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나인 몇이 더 있었다.
「사학징의」 속 용호영 노파 김연이(金連伊) 율리아나의 공초 속에 강화도 죄인 집 나인 방으로 수놓은 베개를 찾으러 간 이야기가 나온다. 나인들이 용돈 마련을 위해 베갯모에 수를 놓았고, 이를 핑계로 천주교 신자들이 그 집을 들락거린 정황이 짐작된다.
신유박해 당시 주문모 신부는 다급한 상황에서 나인 서경의의 안내를 받아 폐궁에 숨어들었다. 3월 12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하고 나서 나인 서경의의 발고(發告)로 이 일이 알려지자 송씨와 신씨는 1801년 3월 17일에 즉각 사약을 받았다. 처음 사약이 내렸을 때 그녀들은 사약 마시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천주교 교리에서 그것이 자살죄에 해당해 십계명을 어기게 되므로 죽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들은 강제로 사약을 먹고 죽임을 당했다. 그녀들의 죽음 장면은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이루어져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인 강경복도 서소문 밖 작은 집으로 끌려가 따로 사약을 받았다. 왕가와 관련된 사안이라 다른 죄수들과 격리한 것이다.
강화도에 유폐되어 있던 은언군 이인도, 그녀들이 주문모 신부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 역모와 관련되어 있고, 이인 또한 이 음모의 주동자라 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6월 30일에 사약을 받고 48세의 나이로 배소에서 죽었다. 평생 그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정조가 급서한 지 1년 만에 대왕대비 정순왕후에 의해 집행된 일이었다.
그녀들의 천주교 관련 사건 기록들은 은언군의 손자로 훗날 보위에 오른 강화 도령 철종이 즉위한 뒤, 왕계의 불미스런 기록을 삭제하라는 순원왕후의 명에 따라 국가 기록에서 대부분 말소되었다. 「사학징의」에 폐궁의 나인이었던 강경복과 서경의의 공초만 남았고, 두 왕가 여인의 공초 기록이 빠지고 없는 이유다. 그밖에 「사학징의」 속 홍정호와 이조이 등 폐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공초 내용에 자주 얼버무리거나 뭉뚱그려 쓴 기술이 많이 보이는 것도 국가의 검열이 작동한 결과로 보인다.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씨 및 며느리 신씨는 천주교 신봉과 주문모 신부를 숨겼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다. 이인도 역모의 배후로 역시 사약을 받았다. 서학은 외래의 종교였고, 파급력이 대단했으므로, 종종 집권 세력에 의해 역모 또는 반역의 굴레가 씌워졌다. 그녀들은 진심을 다해 신앙을 지켰고, 신분을 잊고 교회 활동에 힘을 쏟았다. 왕가 차원의 기록 말살로 오늘날 그녀들의 신심마저 잊힌 것은 조금 슬픈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