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으로 덮인 나무
출 25: 10-14
< 서 론 >
오늘이 5월 2일, 이제 6월, 7월.... 12월, 앞으로 7개월만 있으면 대망의 2천년대를 맞습니다. 과연 2천년대의 한국사회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지금처럼 계속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2천년대의 땅에 들어가서 유럽교회처럼 몰락해 버리고 말것인가? 시대를 따라 흥하는 게 있고 망하는 게 있습니다. 종이와 볼펜이 문화를 주도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가 나오면서 종이와 볼펜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하철이 나오면서 버스가 점점 줄어듭니다. 저는 컴퓨터 486으로 설교를 작성합니다만 이제 486은 고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2천년대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한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껍데기만 덩그라니 남아있는 쇠락한 종교집단으로 남을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쥐고 있습니다.
왜냐? 다음 세대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의 교회는 우리가 주역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의 주인은 바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고 청소년들입니다. 그들을 바로 키우면 다음 세대는 흥하는 것이고 그들을 키우는 일에 등한시한다면 다음 세대는 망하고 말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은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1. 왜 40년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 이후 광야에서 40여년을 방황했습니다. 그 거리는 한달이면 넉넉히 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40여년을 헤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40년 걸릴 거리를 40일 만에 간다는 것도 기적이지만 40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걸렸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엉금엉금 기었다 해도 40년씩이나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 이 불가사의 때문에 고심했습니다.
왜 40여년인가? 40년을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비밀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며 찾는 자에게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0년의 비밀을 간절히 찾는 저에게 40년의 섭리를 알려주셨습니다. 40년의 비밀!
사람들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서 찾았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광야에서 뺑뺑 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틀린게 아닙니다. 옳아요. 그러나 그 해석이 모두 옳은게 아닙니다. 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게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죄의 역사요 부도덕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근성을 다 아시면서 출애굽시키셨습니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그들의 죄에 진노하셔서 40년을 뺑뺑 돌렸다는 것은 옳은 해석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은 세대교체를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을 헤매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두가지입니다.
심판과 교육입니다.
누구에게 심판하셨을까요?
기성세대, 즉 불신의 애굽세대를 향해서 심판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진노하시고 멸절시키는 일들을 계속하셨습니다. 애굽세대는 겉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라 했지만 사실 400여년 이상을 애굽에서 살다보니 모두 애굽사람들이 되어버렸어요. 출애굽 이후 그들이 보여준 모습들을 살펴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다른 게 없습니다. 원망, 불신, 거역, 믿음의 후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갈때는 이런 질병이 없었습니다. 요셉처럼 모든 것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여호와 중심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 들어가서 병에 걸려버렸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수백만명의 대부족으로 번성했지만 믿음의 부흥은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게 애굽 400여년 동안 선지자도 랍비도 예언자들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숫자적으로만 부흥한 것입니다. 4백년 동안 내려오면서 애굽화된 기성세대들, 그들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왜냐? 가나안땅에는 일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온 열명의 정탐들은 그들 종족을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 대장부라고 했습니다. 네피림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로서 짐승에 가까운 종족들입니다.
그들은 부도덕했고 반종교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성(罪性)이 강했습니다. 죄성은 인간이 쉽게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성을 쉽게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더군다나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땅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땀흘리고 노력하고 점령하고 수고하여 젖과 꿀이 흐르도록 만들어 내야할 땅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해야 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고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사는 동안 그들의 야성(野性)은 약해졌습니다.
그들의 시조(始組)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개척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해 온 불타는 개척의 정신을 가진 선각자 아닙니까? 그들의 조상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은 하나님과 겨룬 사람입니다. 그만큼 삶에 치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애굽에 사는 동안 개척자의 정신, 치열한 삶의 정신이 무디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투정이나 하고 새로운 세계로 날아가는 것을 두려워 하는 새장 속의 길들여진 새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서는 가나안에 들어가봐야 네피림의 밥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네피림의 밥으로 만들려고 가나안으로 끌고 가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 옛날 백제의 계백장군이 황산벌에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맞아 전쟁터로 나가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 싸움이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장수는 항복하거나 물러날 수가 없습니다. 전투에서 패배하면 장군의 아내와 자식들이 수모당하고 겁탈당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직접 그들을 베어 장사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하나님은 애굽에서 길들여진 사람들, 도무지 훈련과 교육을 통하여 거듭날 수 없는 기성세대, 그들을 광야에서 제 손으로 죽이리라 결심하셨습니다. 홍해 앞에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도무지 가나안에서 함께 할 수 없는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고집과 아집은 어떠한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죽어야만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기성세대를 멸절시키신 것은 그릇된 영향력을 차단시키려는 것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애굽에 과히 물들지 않은 세대들입니다.
그러나 불신의 기성세대와 함께 있으면 물이 듭니다. 좋은 것은 전염이 늦게되지만 안 좋은 것은 쉽게 전염이 됩니다. 우리 속에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른이 되고 지도자로 남아있는 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여인들과 애굽의 남성들과 지내본 사람들이기에 쉽게 가나안 족속들과 혼합됩니다. 가나안의 세속문화에 쉽게 빨려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을 제외한 모든 성인들을 멸망시키심으로 기성세대의 그릇된 영향력, 불신앙의 전염성을 뿌리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느라 40여년이 걸린 것입니다.
광야 40여년은 단순히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의 세월만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만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의 속마음을 너무도 몰라주는 것입니다. 광야 40여년은 새로운 세대를 키워내는 생산의 세월이었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훈련과 교육의 기간입니다.
그들은 나어린 세대로서 애굽의 영향권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러가지 이적과 양식의 공급으로 직접 자신을 계시하시며 교육시켰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現存)과 인도를, 메추라기와 만나를 통해 하나님의 공급을, 반석에서의 물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교사가 되어셨고 선지자가 되셨고 랍비가 되셔서 보여주는 교육을 통해 광야의 세대를 키워나갔습니다. 애굽세대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기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 확실했습니다. 하나님의 교육 기간이 끝나고 요단강에서 졸업시험을 치루었는 데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그들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40년 전 그들 조상들이 홍해 앞에서 보여준 불신앙에 비해 엄청난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등생이 된 것입니다. 바로 우등생을 만들기 위해 40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기다림과 손수 다듬으심을 통해 새로운 세대교체를 이루어 어 내셨던 것입니다.
3. 세대교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정치 일각에서 `젊은피 수혈론'이라는 게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대교체입니다. 젊은피를 수혈한다니까 늙은피들이 긴장했어요.
"우리를 정치권에서 퇴출시키겠다는거냐?"
그러자 금방 해석이 달라졌어요.
"젊은피는 연령이 아니라 사고의 젊은이 피다!"
한국 정치가들 말 바꾸는 데 뭔가 있어요.
그래요! 세대교체는 단순히 연령으로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과 사고가 새로워야 합니다. 새로운 사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사고(新思考)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나라를 이끌어야 합니다. 젊은이라고 신사고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요즈음 고모씨라는 정치지망생 보세요. 장인이 박태준씨이면 그 밑에 들어가던지 경쟁 편에 서서는 안되는 것 안됩니까?
본인이 정치소신이 있어 입당했다면 끝까지 소신을 지키던지, 공천서는 국민회의에 접수시키고 공천은 한나라당에서 받고 사퇴는 자민련에서 하고...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어요.
젊은 세대라고 모두 오염되지 않고 건강한 것은 아닙니다. 기성세대 뺨칠만큼 속물되어 버린 사람이 많아요.
젊은 세대들이 경망스러워요.
젊은 세대들의 처신교육에 문제가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적인 젊은 세대는 연령과 사고를 합친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애굽세대이면서도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신사고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신 사고는 하나님 중심의 사고입니다.
하나님 중심은 긍정적인 사고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보는 사고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지닌 사람들만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늘빛교회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신 세대를 키워내는 학교가 되어야합니다.
< 결 론 >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2천년대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는 우리의 세대가 아닙니다.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가나안이 해당되지 않았듯이 우리는 이미 20세기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녀가 다음세대의 주역들입니다. 21세기의 한국교회를 위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녀가 하나님 중심의 사고로 살 수 있도록 모두들 가정에서 교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21세기의 한국교회는 계속 부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