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기도
“기도를 하려고 두 손을 모우는 것은 이 세상의 혼란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행동의 시작이다.
철저한 기도란 뿌리와 심장과 중심에까지 내려가는 기도이다. ‘철저한’이란 말은 라틴어의 ‘라딕스’에서 온 말로 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철저한 기도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들의 가장자리에 맴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히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목표는 사람과 제도와 사회의 완전한 변화이다. 알고 보면 , 철저한 기도는 예언자적인 기도이다.
영적 저항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입장을 하늘 보좌에 탄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요구해야 하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장해야 한다. 월터 윙크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인 기도는 뻔뻔스럽고, 굽힐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정중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바자회에서 끈질기게 값을 깎는 흥정과 더 흡사하다.
우리의 영적 저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일치한다고 믿어 질 때,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 도날드 블로쉬는 “때때로 믿음의 기도에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또 마틴 루터는 “기도의 힘은 너무나 커서 하늘과 땅을 모두 이겼다.”고 했다.
우리의 저항의 무기를 보면, 우리가 권력과 효율과 통제에 기초한 세상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며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불의와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놀라운 것은, 이무기들은 사탄의 요새를 무너트리며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사회적 성격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로써, 사람들을 우리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금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복받는 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그만큼 거짓된 믿음이다.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러므로 우리는 개개인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열방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 이 온 땅 위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힘써 일해야 한다. 그 다음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상의 죄악들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국이 어떤 나라든지 간에 우리나라의 죄악부터 회개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나라가 없으므로 우리는 조국의 대표자가 되어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기도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도는 종종 개인적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결코 예배하고 기도하는 친교의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기도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세심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자칫 기도는 무익한 것이라고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찰력 있는 생활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금방 체면치레와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
최고의 법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만이 하나님꼐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소위 본 회퍼가 ‘꿈속의 소원’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 관계 위에 부과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만다. 인간 스스로의 사랑은 그 자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아가페는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고, 보답을 요구하며 시행된다.
반면에 아가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본 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사랑이 순수한 영적 사랑을 만나게 되면 개인적인 증오로 변하고 만다. 그것은 진정한 영적 사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만다.
우리는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며,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망각하는 것은 하나님도 곧 망각하는 서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그렇지 않게 보이려고 애쓴다 해도 우리의 섬김은 언제나 일부러 공손함 체하는 교만함으로 물들고 만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사랑이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준다. 기도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우릴 이웃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끊임없는 그 사랑의 교재 속에 들어가게 된다.
참되고 온전한 기도는 ‘사랑’ 그것뿐
나는 성 어거스틴의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내면으로 향하게 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모습으로 빚으며 이루어 가는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보았고, 그 다음 우리는 위로 초대를 받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께 귀 기울이는 친밀함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밖으로 부름을 받아 병자를 치유하며, 상처받은 자와 고통을 나누고, 세상을 위해 중보 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