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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2-27
저주받은 성 구원받은 사람들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승리를 선포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함이라 은, 금과 동, 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첫 번째 명령은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으로 그 성과 성에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불살라 죽이고, 금, 은, 동, 철기구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성 소리와 함께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 함께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성에서 심판을 당하는 사람들 틈에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주받은 성에서 구원받은 사람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여리고 성
17절 상 반절에 보면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 '바친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케렘인데, 일단 케렘이 선포되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완전히 멸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광물질(금, 은, 동, 철 등)은 여호와의 창고에 들여져야 했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유(男女老幼)와 우양(牛羊)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4절도 읽겠습니다.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럽고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성전(聖戰, holy war)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주민 전체를 철저하게 멸절(滅絶)시킬 수 있는가?" 또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우리로서는 아주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연관지어서 깊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매우 발전된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언어가 존재했으며, 뛰어난 건축술과 함께, 음악, 그림, 그리고 화려한 종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문화적으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현란한 문화 생활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이방종교문화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나안 사람들이 지켜 온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종교의식은 그 사회를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문란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철저하게 영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요구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나안의 문화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과 영적인 가치관을 얼마나 바르게 지키고 사는 것인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다 멸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윤리적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능력 있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아가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요구가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만큼 찬란하고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우리들의 거룩성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온전히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에는 손해가 너무 클 것 같아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갈등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쾌락을 찾고 유흥을 즐기려 합니다. 어제 신문에는 60대 노인이 원조교제라는 것을 한 혐의로 실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들이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위장한 채 우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 취함과 방탕함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뇌물에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란의 문화에 노출되어 가정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있습니다. 마약과 약물에 정신과 육신이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세상문화의 덫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외로 여기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후5:8)"라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진멸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이 파괴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오늘날도 한결같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세상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영적 가치관을 확고히 다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는 영적 가치관을 온전히 세울 때, 우리는 타락한 세상 문화에 의해서 넘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바벨론의 문화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신앙을 지킨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우상의 제물과 술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않겠다고 "뜻을 정하고" 그들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금 신상을 세워놓고 절하라는 왕의 명령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라고 하나님 중심의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던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의 문화에 무릎 꿇지 않도록 도우셨고, 그 신앙과 삶이 빛나게 하셨습니다. (위폐 선별교육 - 진폐만 보여준다)
다음은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는 타락한 문화를 없애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그의 성격이나 삶의 가치관이 정해집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문화가 편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 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그 외의 것에서 기쁨이나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든 타락은 아주 작게 그리고 표시 나지 않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비근한 예가 마약입니다. 처음에는 돈도 받지 않고 공짜로 가져다주면서 유혹합니다. 그러다가 한번 두번, 빠져들면서 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 담배, 그 외에 음란 등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100% 그렇게 시작되어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주변에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차단하고 없애야 합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차단하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귀를 막고 살수 없고, 눈을 감고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방 신의 문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문화를 하나님의 문화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앙으로 복음으로 이 세상에 거룩한 문화를 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 자녀들이 마음놓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찬송이 들려지고, 세상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영적인 공간이 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 부모 세대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의 문화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산다"라고 하는 선언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 즉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가치관이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표준이었고, 진정한 믿음의 실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변하고 지역이 변했습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이 우상숭배가 떠나갔습니다.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으로 타락한 세상 문화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타락한 문화가 다시는 재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히브리말로 '여리고'라는 말의 의미는 향기의 도시 혹은 종려나무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는 타락한 바알의 문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을 무너뜨린 다음에 다시는 이 성을 재건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저주는 이것입니다.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라"
실제로 열왕기상 16:34 아합 왕 시대에 '벧엘'의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요새화 시키려고 건축할 때에 그 성의 기초를 놓으면서 장자인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달면서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신 이유는 무너진 성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확신을 주변의 이방 국가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성이 다시 요새화 되어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를 보면서 죄의 습성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서 영원히 물리쳐야 할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주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바꾸려다가 비참하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신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회개하고 다시는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죄악이 우리에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다짐하고 경성하는 계기를 삼아 날마다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사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저주받은 성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음으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러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저주받은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케렘이 선포된 여리고 성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완전히 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녀였습니다. 몸을 팔아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여리고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숨겨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을 정복할 때에,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해 줄 것을 약속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비록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창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를 구
원하셨습니다. 한 도시, 한 나라 백성 모두가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신실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도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홀로 고독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홀로 이러한 짐을 맡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아합 왕에게 아부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왜 자신만이 이 고독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명을 남겨두었다"(롬11:3-4)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남은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타락하고 세상의 모든 문화가 더렵혀졌다고, 또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가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바르게 서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바르게 일어서 있으면, 절대로 희망은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타락한 여리고 성에서 홀로 믿음 지키고 살았던 라합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당당히 기록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악한 사탄의 영이 세상의 문화를 지배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타락한 세상문화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문화를 세우게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앙 인격과 온전한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세상 구석구석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능력 있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