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간산의 남행이었다.
지리산-마니산-가리산을 다녀와, 하루를 쉬고 다시 출발.
이번엔 아내와 함께였다. 대안학교를 다니며 아내와 저녁을 먹은 적이 참으로 드물었다. 더구나 잦은 여행으로 미안한 마음은 더했다. 한편 귀농하고 싶은 마음에 연고가 있는 전라도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남쪽! 그리고 귀농한 선배와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된 한 가족을 만나보고 싶었다. 7학년 이동학교 장소문제를 섭외할 일도 있었다. 이런저런 목적이 여행에 부가되면서 나는 일찌감치 벅찬 느낌을 받았다. 마을에서 빌린 두레자동차도 금요일 오후엔 다른 이가 예약을 해 금요일 정오까지 돌아와야 한다. 다시 기간이 줄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5박 6일. 결국 시간에 쫓기는 도시인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여행은 행려인가? 행려라는 말은 여행의 빈곤한 심상을 슬쩍 노출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행려가 아니었다. 이미 유숙한 곳을 연락해두었으니, 빈곤한 금전사정을 최대한 만회할 수도 있었다.
남쪽! 내게 남쪽은 아직 미래를 담고 있다. 북쪽이 고대와 선사와 종교로 향한 치열한 정신의 공간이라면, 남쪽은 낭만과 이상을 담은 현실의 공간이다. 과연 남쪽은 봄의 뿔이 조금 일찍 드러나고 있었다.
출발 아침 일요일 새벽 열차, 우리 칸엔 취객이 들어와 누웠다. 험악해 보이는 노인의 눈은 광기로 번득였고, 사람들의 재보로 정차역 마다 단속원들이 탔지만 결국 노인을 당해내지 못했고 열차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교도소에서 30년을 보냈다며 사람들을 위협하는 노인의 말은 욕에서 시작해 시비로 끝났다. 나는 절망했다. 노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노인에 대해 무력한 나 자신에 대해. 불편했던 속이 결국 학교에 도착해 설사를 하고야 진정되었다. 우리는 기적을 원하지만 대부분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관건이 되곤 한다.
첫날은 전주! 한선생님댁이다. 부부가 남매 같이 닮은 점잖은 가족이다. 아이들도 꼭 부모같이 착하고 예의바르다. 오후에 목암선생을 뵐 약속을 했지만 목암님이 인천에서 늦게 오셔서 다음날로 일정을 미뤘다. 저녁엔 옛 시꿈사 사람들과 막걸리집에서 만났다. 조각을 하는 소선생, 센터장을 하는 수현, 그리고 한선생님 먼저 막걸리를 마시다 가족와 정읍의 이선생이 합류하며 자리를 옮겼다.
신시가에 자리잡은 한선생님의 찻집 공사는 내장을 막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아직은 썰렁한 주변지구도 내년이면 바뀐다니 우려 다음 안심이 된다. 아무튼 이제 교사를 그만두로 보이찻집을 시작하시는 사모님이나 한선생님 큰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그게 마흔이다. 마흔은 스물에 어렴풋 품던 꿈이 서른의 사회경험 속에서 참고 견디가 제 길을 갈 기회가 되기도 한다.
한말 면암 최익현은 선비노릇하기 힘듦을 고백하고 절명시를 남겼지만, 남 가르치기의 어려움 또한 그렇다. 남을 가르치기 전에 우선 내가 부족하고, 사회가 어둡다. 제정신이 아닌 세상에서 제정신을 가르치자니 시장의 광인이 되는 기분이다. 온통 횡설수설이고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아니 벌거벗은 임금님의 시민들처럼 한국의 위대한 국민들도 모두 안다. 알지만 현실과 대세에 복종하며 침묵할 뿐이다.
강덕이와 수빈이에게서 엄마 아빠시간을 많이 빼앗았다.
하루를 자고는 목암선생댁을 방문했다. 솥뚜껑 같은 손을 오랜만에 잡아봤다. 신념을 향해 살아가는 이의 전형이었다. 차를 마시며 100학교 이야기, 밝은 마을, 농촌 살이 등의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즐거웠지만, 자신이 환히 보이는 것 같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목암선생은 아내에게 닭이 막 낳은 알을 주었다.
백운도서관에서 나는 행복한 미래를 보았다. 시골마을에 자리잡은 도서관에서 동네 아이들 몇이 만화를 보고 있었다. 책의 양이 아직은 좀 아쉬운 형편이지만, 빔 프로젝터도 보였다. 2층엔 편집실도 있었다. 도서관이 있고, 거기 맑은 사람들이 모이면 꿈도 자라고 문화도 만들어질 것이다. 문화가 있다면 사람은 삶을 삶으로 느끼며 살 수 있다. 문화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젊은 세대와 어린이들이 없는 농촌에서 현재와 미래의 문화를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이 모이면서 삶과 문화가 하나로 영켜 가야 한다. 그것만이 미래를 내다볼 창이 된다. 하지만 시골 마을 도서관도 사람이 없으면 역시 빛좋은 개살구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엉터리 행정과 눈 먼 돈 나눠먹기는 여전히 많이 확인된다. 부자는 많은 시대이지만 정승은 없다. 하지만 백운은 꿈을 꾸게 한다. 하얀 뭉게구름같다.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까?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며 살까?
귀신에 쫓겨 달아다니던 내 어린 시절의 꿈처럼, 사람들은 어떤 귀신에 쫓겨 달아다니며 살까?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귀신이란,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의 총체다. 다락이 무섭고, 지하실이 무섭고, 변소가 무섭고, 혼자 있는 방이 무서웠다. 어쩌면 그것은 나 이전부터 나를 품어주었던 엄마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귀신이란 나라는 에고를 강하게 단련하려고 보낸 신의 사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귀신은 나를 구속하는 미망의 총체와 다름 아니다. 귀신 없는 세상이란 헛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랑과 명철의 시대일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미망의 중음천을 헤매고 있다.
떠나는 길에 각종 선물과 간식, 그리고 여비까지 주시는 배려에 부끄런 빚을 더욱 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국도보다 못한 88고속을 타고 경상도로 갔다. 쉼없이 나타나는 화물차들이 역시 전라도와 다른 세계다. 더구나 뼈 깊은 혈통과 족벌의 옷자락을 스치는 기분이었다. 약간 답답하고 혐오스런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곳곳 처처에 건재한 제각과 무덤들을 보며, 후손들에게 짐과 재앙을 드릴 잔재이지만, 아직 너무도 견고하게 전통으로 둔갑한 혈통주의다. 인도어의 카스트제도와 전혀 다름이 없다. 돈과 가문이라는 이 두 가지 다소 편견 있는 이미지는 도로를 달리며 그리고, 예천에 귀농하신 소나무님 부부를 보며 더욱 짙어졌다. 사실 돈(현재)과 가문(과거)의 결탁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산천에 들어찬 별장을 보면 더욱 절망스럽다. 교양과 실력은 그 안에 자연스럽게 길러질 것이다. 하지만 전라도 트라우마에 기댄 이런 심정의 호소는 오히려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나는 견고해진 돈과 가문의 카르텔에 대한 혐오와 불안을 동시에 느낀다.
경주에 처음 와본 아내를 위해 첨성대와 왕릉군, 계림을 산책하고, 해질녘에야 들풀님댁에 도착했다. 오름이와 호정이는 생각보다 더 컸다. 역시 상상을 하며 글을 읽을 때와 차이가 있다. 누구나 오독을 피할 수 없다는 듯. 하지만 둘의 명랑함은 누구든 쉽게 동화시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차려준 밥상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아내와 난 호의호식을 했다. 자상하며 원칙과 뚝심 있는 바우님과 진정을 아끼는 들풀님의 환대로 밤늦도록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누적된 피로와 음식, 거기에 맛있다고 차를 마지며 너무 많이 먹은 야콘이 반응을 해 밤에 몇 차례 설사를 했다. 다음날도 설사로 진이 빠지면서, 매서운 바람 속에 불국사와 석굴암을 방문했다. 바람을 쐬고 싶어하는 호정이가 같이 했지만, 정말 매찬 바람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아내는 과자를 먹고 싶어하는 호정이의 마음이 체질과 관계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그런 것들을 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들풀님댁은 올해 안동으로 이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너무 경황이 없을 것 같아, 이동학교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들풀님이 물어주셔서 손쉽게 얘기가 되었다. 다행이 둘째날 새벽에 속이 진정되면서 예천길에 자신이 생겼다.
들풀님 가족은 모두가 좋은 가르침이 되었고, 무엇보다 화목했다. 나는 이 가족의 선의와 낙관에 경의를 보낸다. 거기 지내는 닭과 염소, 그리고 두 마리 개도 다정해보였다.
집을 나올 때는 들기름이며 참기름, 배추, 매실효소 등을 바리바리 싸주셨다.
예천은 국도로 갔다. 가는 길에 용담정을 들렀다. 나는 최근 검곡과 용담정 두 곳의 지리적 위치가 석기인들의 성인지 장소인 라스코나 알타미라 같은 깊은 동굴을 겹쳐 생각했다. 일종의 거듭남을 체험하기 위한 지리적 장치로서, 사회로부터 단절하고 자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존재를 체험하고 거듭나는 것이다. 사찰도 마찬가지 구조로 되어 있다.
문중 제각을 관리하며 거기 딸린 집에 귀농해 살고 계시는 시냇물과 소나무님 부부는 산촌유학을 하고 있다. 벌써 4,5년 하시면서 이젠 노하우도 붙어 자신감과 확신이 녹녹치 않게 보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떠나야한다는 말을 듣고 쌀쌀한 저녁에 금당수 마을 산책을 했다. 시골 살이에서 터득하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지 못해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았다. 예천의 용암마을은 의외로 컸다. 조선시대 십승지 중 하나였다고 한다. 가지고 간 보이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아내는 모처럼 편안 자리를 만났다는 듯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얘기를 나누다 천렵과 닭 잡는 얘기를 했다. 닭을 잡으려다 쉽게 죽지 않아 결국 죽은 닭을 묻어주고 다시는 닭을 잡지 않겠되었다는 얘기였다. 들으며 나는 얼마나 석기문명과 청동기 이후 나타난 종교의 도축의례를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산골깊이 자리 잡은 축사와 고기문화를 생각했다. 도축의례는 분명 구석기 사냥시대부터 전해내려오던 의례였을 것이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포식자가 피식자에게 느끼는 도덕적 채무를 덜고 평형과 조화감을 지속하기 위해 일종의 영가천도 같은 의식으로 배풀었을 것이다. 그게 토템이고, 유대교, 이슬람교, 티벳불교에도 유지되는 전통이다. 우리 전통에도 고사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먹을 것이라면 내가 죽이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육식을 가급적 줄이고, 먹어도 식사기도에서 죽음을 생각하고 천도와 감사의 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례를 통해 피식자와 포식자 사이의 맺힘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눈에 자연은 맹수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준 것 같다. 적대관계가 아니라 감사와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고 지속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도 선해지고 투명해질 것이다.
거기서도 농사지은 유기농 현미와 흑미를 싸주셨다.
어디든 지방 인심에 자식이 된 기분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도서관 컴퓨터가 다시 말썽이다. 내일은 다시 학교에 가서 컴퓨터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야 겠다.
기록을 미룬다면 아름다운 사람과 추억이 사라질 것 같아 거칠게 남긴다.
첫댓글 호정이는 선유님이 남편은 멩이님이 무지하게 좋다고 해요^^*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몸의 고단함도 내색없이 잘 참으며 그렇게 밝고 귀여울 수 있는 호정이가 참 기특했습니다. 바우님의 균형잡힌 '똥이들'에 대한 사랑에도 감탄었구요. 넘 의젓한 큰똥이와 소녀같으신 들풀님 (졸음신 강림하신 것이 아쉽기만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호정이의 맘은 제가 얍삽하게 과자로 잡은 듯 합니다.^^
참기름 들기름 매실 배추.. 힘들게 농사지으셔서 바리바리 싸주신, 귀한 것들 감사히 모시겠습니다. 들풀님이 바쁘셔서 참 힘드셨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달부터는 봄과 함께 많은 것들이 달라지겠지요. 가화만사성이라는 오랜 말이 실감으로 느껴집니다. 내내 건강하소서!
'우리집에 와주셔셔 고맙습니다.'로 시작하는 강덕,수빈이네의 편지글!
있는 듯 없는 듯 살피시어 부족함이 없이 지냈던 시간뒤로 길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맘 써 주심에 들풀님네 가는내내 감동으로 잔잔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