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된소리의 표기에 오해 및 왜곡이 존재한다
국어의 왜곡과 혼란
우리말 된소리의 표기에 오해 및 왜곡이 존재한다.
'까'라는 표기를 보고 지금의 우리는 '가'의 된소리로 인식하고 또 그렇게 읽지만, 훈민정음의 창제자인 세종대왕께서는 '까'를 된소리가 아니라 탁성으로 규정하고 또 그렇게 읽으셨다.
다시 말해 가의 된소리는 까가 아니라 ㅺ을 쓴 'ㅺㅏ'라야 맞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ㅺ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음운학적인 면에서 ㄱ의 된소리 표기는 ㅺ으로 해야 맞으며 ㄲ은 틀린 것이다.
그렇다면 ㄱ의 된소리 표기를 위해 왜 세종께서는 굳이 불편해 보이는 ㅺ을 쓰셨을까? 그리고 왜 우리의 선조들은 20세기 초반까지 근 5백년동안 ㅺ 식의 표기를 고수했을까?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과거에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 그리고 그 이전의 조상들이 행했던 간단한 언어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위의 말을 뒷글자 '가'에 주목하면서 소리내어 읽어보자. '내' 뒤의 '가'가 된소리로 읽히는가? 아니면 평이한 '가'로 읽히는가? 물론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이 때의 가는 硬音[경음; 된소리]이 아닌 평음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냇'으로 바뀐 다음 말을 읽어보자.
냇가
천천히 두세 번 반복하여 읽어보자. 이 때의(냇 뒤에 있는) 가는 평음으로 읽히는가? 아니면 경음으로 읽히는가? 신기하게도 이 때의 가는 내가의 경우와는 달리 분명 된소리로 발음된다.
그렇다면 내가나 냇가나 다 똑같은 가인데 왜 냇 뒤의 가만 유독 된소리로 발음되는 것일까? 세종께서는 당연히 이러한 음운현상에 주목했을 것이다. 뒷글자 가를 된소리로 발음되게 하는 주범은 바로 앞글자의 종성 ㅅ으로, ㅅ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가의 된소리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ㅅ은 된소리를 만든다해서 '된시옷'으로도 불리운다.
물론 ㅅ 만이 된소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ㅂ이 그것으로 다음 예에서와 같이 ㅂ(일명 '된비읍') 뒤의 가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가는 발음 면에서 차이가 난다.
내가ㅇㅇㅇㅇㅇ냇가 냅가
이러한 음운현상에 주목한 우리의 선조들은 ㄱ의 된소리를 표기함에 있어 된시옷 및 된비읍 등을 이용한 ㅺ 또는 ㅲ 등을 고수하였는데, 그렇다면 세종대왕 당시의『동국정운』등에 보이는 ㄲ·ㅃ 등의 표시는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는『동국정운』서문 중의 다음 문구에 보인다.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 豈音此理
아국어음 기청탁지변 여중국무이 이어자음독무탁성 기음차리
此淸濁之變也 語音則四聲甚明 字音則上去無別... 此四聲之變也"
차청탁지변야 어음즉사성심명 자음즉상거무별 차사성지변야
"우리나라의 어음[말소리]은 그 청음·탁음의 구별이 중국과 별 다를 바 없이 가능한데, 유독 그 자음[글소리]에 있어서만은 탁성 구별을 할 수 없으니, 어찌 음이 이럴 수[모순]가 있단 말인가? 이는 청탁이 변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어음은 사성이 심히 분명하나 자음은 상성과 거성의 구별이 안되고 있으니... 이는 사성이 변한 것이다."
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ㅇ- 필자 주 -
신숙주가 쓴 위 문구 중에 나오는 字音자음이란 말은 동방문자의 음을 말하며, 淸音청음·濁音탁음은 동방문자의 청탁음을 말한다. 신숙주는 당시 자음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점들은 세종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을 써서 해결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위 문구 중 탁음·탁성이란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음은 말 그대로 '맑고 깨끗한 소리', 즉 무성음을 의미하며, 탁음은 감기 걸렸을 때 나는 콧소리(鼻音비음; 코맹맹이 소리)와 같은 '흐리고 답답한 소리', 즉 유성음을 의미한다.
이 청음·탁음에 대해서는 일본어를 배운 사람들은 그 개념을 확실히 알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본어에서는 탁음을 구별할 때, 청음의 か카행, さ사행, た타행, は하행의 오른쪽 위에 일명 니고리(")라 불리우는 탁음부호를 붙인다.
청음예: か·き·く, さ·し·す
탁음예: が·ぎ·ぐ, ざ·じ·ず
※위 자음을 못읽는 분은 일본어를 아는 분에게 그 음가를 확인하기 바람.
조사해보면 濁音탁음[콧소리]과 硬音경음[된소리]은 전혀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께서는 예로부터 본래 구별이 뚜렷했던 청음과 탁음이 선비들의 反切반절에 대한 이해부족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동방문자의 음에 있어서만은 결국 탁성 구별을 할 수 없게 된 점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수집된 우리의 어음 자료와 명나라의『홍무정운』등 각종 자료를 참고하여, 탁음을 본래대로 재구하였다.
그리고 그 탁음에 대해서는 ㄱ의 경우 ㄱ을 두 번 중첩시킨 ㄲ의 형태로, ㄷ의 경우는 ㄸ의 형태로 규정하여 탁음인 동방문자를 표기하였으니, '茶'를 따로, '投'를 뚜로 표기한 것이 그 예이다.
그런데 '한자는 오로지 중국글자'라는 잘못된 관념에 빠져있는 일부 학자들은,『동국정운』에 표기된 탁성표시 각자병서 ㄲ·ㄸ 등에 대해 어처구니없게도 다음과 같은 식으로 학생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우리나라 한자음에 탁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탁음자를 표시하기 위해 각자병서(ㄲ, ㅃ, ㄸ)로 표기, 실재 한자음의 된소리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중국 운서에 의거한 고음의 전탁을 재구하여 표기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위와 다르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동국정운 서문을 오해·왜곡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한자음에는 분명히 청탁의 구별이 있었다. 단지 말소리로는 구별이 가능한데 한자[문자]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여 안타깝게 여기고 세종께서 전문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으로 그것을 구별하게 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동국정운에 나타나는 수많은 '탁음'들을 중국음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음이 아니라면 세종의 저서는『중국정운』이지,『東國正韻동국정운』이 아닐 것이다. 동국정운이란 명칭에는 세종의 자존심과 자신감이 내포되어 있다. 이는 마치 허준이 자신의 저서를, 잡다한 중국의서들을 능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감 있게『東醫寶鑑동의보감』이라고 지은 것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만약 세계 문화의 종주국인 우리 東國동국의 자존심을 짓밟고 세종대왕의 업적을 폄하하는 언사를 서슴치 않는 국어학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신의 국가와 직업을 부정하는 행위일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ㄱ·ㄷ·ㅂ의 된소리가 서양 제어에서 gg·dd·bb와 같은 황당무계식이 아니라 '된s'를 쓴 sk·st·sp로 나타나듯이, 그것들은 본래 탁성 표시인 ㄲ·ㄸ·ㅃ이 아니라 '된시옷'을 쓴 ㅺ·ㅼ·ㅽ으로 복원되어야 마땅하다. 세종대왕의 과학적 성운 이론을 바로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음운왜곡, 그리고 그에 뒤이어 왜곡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등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당시, 위 탁성[흐린소리: 일본어에서 니고리표시된 음]을 표기할 때, 동일자음을 겹쳐쓰기로 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후속권]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