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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그가 살아나셨다 말씀/ 마가복음 16:1-20 요절/ 마가복음 16:6 | 2024. 3. 31 | |
부활절특강 |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부활절만이 아니라 52주 매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사건이요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고 오늘날 교회도 그 기반이 무너지고 맙니다. 부활이 없는 인생은 죽음 앞에 멸망하고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부활이 있는 인생은 어떤 시련도 이기고 어떤 어두움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또한 부활신앙을 가진 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예수님은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바로 그 날 돌아가셨습니다. 그 역사적 현장에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믿음의 여인들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숨어버렸지만 여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는 급하게 치루어졌기 때문에 여인들은 예수님께 향품도 발라드리지 못하고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은 원수들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 안식일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여인들은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생각났고 ‘누가 그 큰 돌을 굴려줄 수 있을까?’ 하며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뜨거운 마음을 큰 돌이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하여 눈을 들어본즉 벌써 그 큰 돌이 굴러져 있었습니다. 굴러진 큰 돌은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는 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부활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섬기고자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은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습니다. 천사의 등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인이었습니다. 그 천사는 슬픔과 비통함에 빠져 있는 여인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상상하기도 힘든 사건을 목격하고 정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놀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나님의 말씀 다시 말해 예수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릴 수 있습니다. 정신이 흐려진 사람에게는 어떤 기쁜 소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신 차리고 집중해서 부활의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 “He has risen!” 천사는 예수 부활 소식을 전하고 바로 빈 무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은 얼마나 기쁘고 좋은 소식입니까? 세상에 이것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에 삼킨 바 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갇히실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의 주, 생명의 주가 되셨습니다. 불의가 예수님을 패배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죄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이요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교회와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며,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으로 인도해 줍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부활의 주, 살아계신 주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도, 어떤 영웅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죽음은 어떤 세력보다 강합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옯겨지게 됩니다. 연약함과 한계를 이기고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을 이기고 운명주의와 패배감을 이기고 능력 있는 삶, 생명력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의 장인이 돌아가신지 벌써 12일이 되었습니다. 저는 장인 김대경 성도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고 시신도 만져보았고 장례도 치루었습니다. 과거 저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싫어하던 자였습니다. 죽음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늘 가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 가까운 친척들의 죽음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녀를 잃어버리고 이태원 참사 사건으로 자녀를 잃어버린 부모들은 지금도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일 전에 한 목자님으로부터 비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통역 일을 하던 진바울이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는 얼마나 원통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를 아끼고 아들 같이 여겼기에 그의 죽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그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두움도 슬픔도 절망도 두려움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시련도 이길 수 있고 어떤 사단의 고소와 정죄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찬 삶, 도전하고 개척하고 정복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언제 우리 곁을 떠나게 될지 우리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사고로 생을 마갈할지 병으로 죽게 될지 암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죽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철학으로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어주신 메시아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성경대로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게 하시고 성경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고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썩은 몸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고 완전한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는 신자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생명과 빛과 영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이 땅에 두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순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망권세를 이길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 산 소망을 불들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천사는 여인들에게 부활 증인의 사명을 주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 그들에게 주님의 양들을 맡기고자 하십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먼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의 마음이 가장 힘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는 자기야말로 예수님을 배반한 배신자라며 자책과 정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부활의 주님은 베드로가 여인들의 증거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상처가 속히 회복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들은 무덤을 나와 도망하였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너무 놀라운 것들을 보았고 놀라운 말씀을 들었기에 두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증언의 사명을 받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여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나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울면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 다시 말해 주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그녀는 과거 일곱 귀신에 들려 일상적인 삶을 살 수 없었던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를 만나주셨고 그녀를 사로잡고 있었던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심으로 그녀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고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섬기고자 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주셨고 그녀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과의 만남은 그녀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기쁨과 희망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어요! 내가 예수님을 보았어요.” 하지만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다면 자기들을 만나셔야지 왜 그 여인을 만나셨을까 하며 자존심이 상해 여인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또한 너무 슬픔에 빠진 나머지 여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사망권세에 꽉 잡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시골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열두 제자 그룹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칠십인 제자 그룹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에게 실망하여 고향으로 가서 농사나 짓고자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대화하시고 식사도 하시고 성경말씀 특히 이사야와 시편에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영적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회복되어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남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고 두 남자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증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갖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보다 더 강한 세력은 없습니다. 산소호흡기로 호흡하고 있을 때는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치료를 합니다. 하지만 호흡이 끊어져버리면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죽음의 세력에 잡히게 되면 절망하게 되고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사망권세 아래 있는 인생들은 패배적이고 어두운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산 자의 삶,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활신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부활신앙은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들을 때 생겨납니다. 부활신앙은 문제를 바라보고 연약한 자신을 바라보던 데서 부활의 주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에 깊이 빠져 있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열한 제자가 식사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셨습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씀과 일자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밥 먹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을 때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또한 마음이 완악할 때 믿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흥왕히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합심동역의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배우고자 할 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캠퍼스 개척과 열두 제자양성을 힘 있게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활신앙을 심으신 후에 세계선교 명령을 주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세상만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간절한 소원입니다. 제자들은 언어도 부족하고 능력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주역들로 세우셨습니다. 세계선교는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춘천 캠퍼스 영혼들을 맡은 우리에게 세계선교는 춘천 캠퍼스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전파를 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전임사역자뿐만 아니라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입니다. 신앙연륜이 많은 신자들보다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자들이 마음이 더 뜨겁고 불신자 친구들도 많기 때문에 더욱 왕성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반드시 전파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기 위해서는 복음을 들어야 하고, 복음을 듣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 다시 말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세례는 신앙공동체에 들어오는 의식입니다. 믿음이 없이 세례만 받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위와 나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놀라운 표적이 따릅니다. 그 표적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뱀과 독으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신유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믿고 병든 내 자신을 위해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 치료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봄학기에 30명의 양들을 얻고자 캠퍼스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않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한 사람을 얻는 것이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어주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봄수양회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말씀을 들음으로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큰 군대로 세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가 실제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과 사망권세를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날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믿고 생명력과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인생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