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저수지 위에 돌멩이 하나가 얼음 속을 파고들고 있다 뜨거운 입술로 혓바닥으로 벌거벗은 돌멩이 온몸으로 너에게 푹 빠져 촉촉이 젖은 돌멩이 조금 드러난 등짝으로 지는 저녁 햇빛도 받아 돌멩이, 숨도 안 쉬고 그 두꺼운 동토의 처녀막을 맹렬히 뚫고 있다
—시집『밥그릇 경전』
.................................................. 차가운 돌멩이가 더 차가운 얼음을 껴안고 겨우내 붙어 있다. 불같은 연애는 자주 보았지만 저렇게 뼈가 시린 연애는 낯설다. 미끄럼 타던 아이들 발끝으로 차도 요지부동이다. 사실 저 두텁고 완강한 물의 껍질은 지난여름 연잎을 만나고 오는 바람에도 명주처럼 찰랑거리지 않았던가? 누가 물의 마음을 잠갔는가? 물고기는 뛰어오를 하늘이 없고, 물오리는 헤엄칠 물이 없다. 모두가 단념했을 때 차가운 돌멩이가 더 차가운 얼음을 껴안고 있다. 결국 물은 가슴을 열고, 돌멩이는 물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봄이 오는 이치는 저렇다. 사람의 일도 그러하리라. 반칠환 (시인)
이슬의 탄생 ㅡ 이덕규
주로 식물에 기생한다 입이 없고 항문이 없고 내장이 없고 생식이 없어 먹이사슬의 가장 끝자리에 있으나 이제는 거의 포식자가 없어 간신히 동물이다 태어나 일생 온몸으로 한곳을 응시하거나 누군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한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진다 짧은 수명에 육체를 다 소진하고 가서 흔적이 없고 남긴 말도 없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일설에, 허공을 떠도는 맹수 중에 가장 추하고 험악한 짐승이 일 년 중 마음이 맑아지는 절기의 한 날을 가려 낳는다고 한다 사선을 넘나드는 난산의 깊은 산통 끝에 온통 캄캄해진 몸으로 그 투명하게 반짝이는 백치의 눈망울을 낳는다고 한다
—시집 『놈이었습니다』(2015)
끙게질 ㅡ 이덕규
큰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를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게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엔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설설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근만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넣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고개를 들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에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시집 『놈이었습니다』(2015)
설파(說破)하는 뱀 ㅡ 이덕규
아무리 더러운 곳을 통과해도 먼지 한 톨 묻지 않는 그는 죽기 전에 절대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는 법이 없다지
추운 산 어두운 굴속에 들어가 잠을 잘 때에도 몸을 둥글게 말아 똬리 튼 중앙에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장좌불와, 면벽좌선한다지
머릿속에 고인 오직 맑은 한 방울의 치명적인 깨달음만이 한겨울 유일한 식량이라지
저것 봐, 동안거 끝내고 탁발 나온 어느 야윈 선승이 들길 한가운데 가부좌 틀고 앉아 일갈(一喝)하는 저 날카로운 설파(說破)!
—마침내 말로서 바위를 꾸짖어 산산조각 내겠다는 것이지
—시집 『놈이었습니다』(2015) -------------- 이덕규 / 1961년 경기 화성 출생. 1998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밥그릇 경전』『놈이었습니다』. 어처구니 ㅡ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문학동네.2003
청정해역 ㅡ이덕규
여자하고 남자하고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다네 하루 종일 아무 짓도 안 하고 물미역 같은 서로의 마음 안쪽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다네 너무 맑아서 바닷속 깊이를 모르는 이곳 연인들은 저렇게 가까이 있는 손을 잡는 데만 평생이 걸린다네 아니네, 함께 앉아 저렇게 수평선만 바라보아도 그 먼 바다에서는 멸치떼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 떼지어 떼지어 몰려다닌다네
초기의 정신병원들은 모두 바닷가에 있었다고 한다. 상처받은 정신을 바다가 치유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실제로 효과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이 사납게 일렁일 때 바닷가에 한나절쯤만 동그마니 앉아 있어 보라. 들고 나는 파도의 리듬을 따라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호흡을 타고 공명하면서, 어느 한 순간 들끓던 소음들은 모두 사라지고 내면 가득 거대한 정적이 자리잡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거대한 정적이 바로 너무 깊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리들의 청정해역이다. 이 청정해역은 무엇인가 쓸모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찾아온다. 같이 간 이와 함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어떤 유용한 말을 나누거나 기념이 될 만한 사진을 찍으며 수선을 떠는 행위를 내던지고, 그저 하염없이 수평선 너머를 바라볼 수 있을 때 마음 안쪽을 쓰다듬는 물결이 밀려오게 된다. 바라만 보아도 ‘멸치떼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 떼지어 떼지어 몰려다’니는 그 먼 바다가 두고 온 내 사랑이다. ‘아아’ 그 바다 앞에선 하릴없는 감탄사만 터져나온다. 원시음에 가까운 모음. ‘바다’는 자음을 떼어버린 뒤의 나머지 모음과 같다.― 손택수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마침표를 뽑다 ㅡ이덕규
살아 있는 문장 끝에 박힌 마침표처럼 흔들거리는 개말뚝을 다시 고쳐 박자고 무심코 쑥 뽑았는데, 아뿔싸 잡을 새도 없이 어떤 넘치는 힘이 무거운 쇠사슬을 끌며 멀리 동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다
일생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단문 끝에 말뚝처럼 박힌 뒷산 무덤가 비석들 모조리 뽑아주면 죽음 너머 밝은 귀 서넛쯤 하던 일 멈추고 솔깃하겠다
저 소리, 돌아오지 않는 단순한 문장의 길고 먼 여운
--------------------------------------- 말뚝에 매인 개를 본다. 유선과 무선의 차이일 뿐, 당신도 집이라는 말뚝에 묶여있다고 개가 나를 측은하게 바라다본다. 전파의 말뚝, 돈의 말뚝, 관계의 말뚝……. 현실을 직시해보니 말뚝들로 연결된 쇠사슬에 내가 묶여있다. 아니, 말뚝에 더 견고하게 매이려고 발버둥치고 있고 혹시라도 말뚝에서 풀려나면 어쩌나 안달까지 하고 있는 형국이다. 태양과 공기와 물의 말뚝을 벗은 자도 비문의 말뚝에 매여 있다니, 살아 있는 자로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무도 해보지만, 이 봄 쇠사슬이 너무 버겁다. 나무처럼 말뚝이 되어 말뚝에서 해방될 수 없다면, 잠시만이라도 구름과 새소리와 물빛과 아지랑이로 말뚝을 지우며, 쇠사슬 쩔렁거리며 동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ㅡ함민복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논두렁 ㅡ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 출전 :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 모내기는 모를 논에 꽂는 일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사람과 생명과 자연이 함께 참여하는 풍요로운 축제인 줄은 몰랐네요. 모내기는 "굽은 등짝"과 "허옇게 부르튼 맨발"과 "갈퀴손가락들"이 하는 힘든 노동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즐거움이 넘치는 놀이인 줄은 몰랐네요. 벼는 심어놓기만 하면 물과 흙의 양분을 먹으며 저 혼자 자라는 줄만 알았지 이렇게 많은 이웃들이 함께 하면서 도와주고 튼튼하게 길러주는 줄은 몰랐네요. 우리가 매일 먹는 쌀에 이렇게 다양한 자연과 흥겨운 노래와 드넓은 세계가 들어 있는 줄도 몰랐네요. 쓸모없는 것들, 소외된 것들, 아무 힘도 없는 것들이 모여서 장엄한 아름다움과 살가운 온기를 만들어내는 백석의 시 「모닥불」의 모내기 버전을 보는 듯합니다. 김기택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식물도감을 던지다 ㅡ이덕규
해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들판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비틀어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맨발에 짓이겨져도 그것들은 늘 거기에 피었다가 지고 말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맛 달고 향기로운 꽃 찾아 따 먹으며 나 여기까지 흘러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간 사람들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울음 저토록 많은 씨알 속에서 터져 오르는데
저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그렁그렁한 눈빛들 맞추고 바라보면 아-하, 늦저녁 들판에서 돌아오는 지친 암소 발굽에 쓰러지면서도 이른 저녁 별들에게 기꺼이 손 흔들어주던 낯익은 얼굴들, 통성명도 없이…… ,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시집『밥그릇 경전』 ---------------------- 바람결에 겨울의 기미가 들었다. 꽃들이 한해살이를 마무리하고 겨울잠에 들 시간이다. 기다리는 사람 없어도 봄이면 피고, 겨울바람 불어오면 시들어 떨어지는 게 꽃의 운명이다. 시골 아낙의 부르튼 맨발에 짓이겨지는 남루도, 들일 마치고 돌아오는 암소의 발굽에 뭉개지는 치욕도 온전히 들꽃의 운명이다. 그의 이름 부르기 위해 식물도감 뒤적일 필요는 없다. 노랑 꽃 분홍 꽃 빨강 꽃이어도 괜찮다.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없어도, 꽃 없는 봄 들녘, 낙엽 없는 가을 산길이 견딜 수 없이 적막하다는 것은 분명히 안다. 그러면 됐다. 밖에 바람이 분다. 식물도감 덮어 놓고 꽃처럼 내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겠다.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 ㅡ이덕규 (1961~ )
논을 간다, 논을 간다는 것은 단단하게 뭉쳐 있던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 치밀했던 조직망을 잘게 부수고 부수어 다시 작은 소립자 하나하나의 위치를 새롭게 개편하는 것이다 이제 그 느슨해진 조직 사이사이로 신품종 이념들이 뿌리를 내리고 재편성된 조직은 그 뿌리를 통해 또다시 일 년 동안 결연한 의지를 키우며 지상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묵은 땅은 갈아엎기 힘들다 쟁깃날이 튄다 부러져나간다 참신한 생각의 날이 파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콘크리트 밭에 사람들 우거지듯 늘 점령군 같은 잡초만이 빼곡히 자랄 뿐이다 그건 우리를 비웃는 땅의 조용한 테러이다 그대로 방치해두면 장기집권체제의 황량한 황무지로 남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흙이, 사람의 조직을 와해시킬 것이다
-------------------------------------- 논에 쟁기질을 해 줘야 하듯이, 정치와 정당도 생각과 시도 자주 갈아엎어 주지 않으면 굳는다. 어떤 체제에서도 늘 신품종 이념, 새로운 생각과 체계가 필요하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말만 바꾼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도, 생각도, 하물며 시까지도 저 바닥부터 갈아엎어야 새로워지는 것이다. 최정례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끙개질
이덕규
황소가 한겨울 먹고 놀면 사람이 생쥐만하게 보인다는데요 무엇이든 그냥 닥치는 대로 꾹, 밟고 싶어진다는데요 아—흐, 몸이 근지러워 말뚝에 치대고 들이받고 비비는 놈을 바로 논밭으로 밀어 넣으면 씨근덕 불끈덕 삐뚤빼뚤 갈지자로 갈아대기 일쑤인데요 이른 봄 아버지는 통나무 썰매 위에 일 마력짜리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턱 올리고 먼지 뽀얗게 날리며 들판 몇 바퀴 뺑뺑이 돌리는데요 이른바 끙개질이라고 하는데요 맷돌 같은 어금니를 뿌드득 뿌득 갈아대며 메기수염 같은 끈끈한 침을 흘리며 등짝엔 시루떡을 쪄 얹은 듯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데요 반나절쯤 돌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어라, 발굽 아래 기던 사람들이 저보다 더 크게 보여서 눈망울이 화등잔만해진다는데요 거짓말처럼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 하는데요 쟁기질 써레질로 몸이 천 근 만 근이 되어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이면 또 캄캄해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데요 서리태 듬뿍 섞은 여물 한 구유 정신없이 먹고 나면 그 크다란 눈동자 속엔 모종하고 비 맞은 수숫대처럼 웃자란 어린 주인이 우뚝 서 있었는데요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 이마에도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이었는데요
—《현대시학》2009년 7월호
--------------------- 맺고 푸는 힘의 조율 눈앞의 현실은 날것의 재료다. 비린내도 나고 쓴맛도 나고 때로는 떪은 맛도 난다. 시인은 그 날것의 재료를 그대로 시로 옮기지 않는다. 거르고 묵히고 삭혀서 충분히 발효되었을 때 시의 그릇에 담는다. 한 편의 좋은 시는 잘 익은 술이다. 「끙개질」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이덕규 시인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하듯 삶의 현장에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일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생경하고 덜 익은 현실적 발언들을 잘 다스려서 한 편의 시로 빚어낸다. 완급과 강약의 조절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그의 시는 목에 핏대 세우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여타의 설익은 시들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시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끙개질」에는 황소와 아버지가 등장한다. 겨울 한철 놀고 먹은 황소의 제멋대로의 힘을 다스리기 위해 아버지는 ‘발동기만한 돌멩이’를 통나무 썰매에 올려놓고 들판을 뺑뺑 돌게 한다. 차고 넘치는 폭력적 힘의 고삐를 잡아 틀어쥐는 행위이며 야성의 힘을 조절하는 제의이다. 반나절의 의식을 통해 소는 생쥐만하게 보던 사람을 저보다 더 큰 사물로 보고 유순해져서 “휘어진 논은 휘어지게 곧은 논은 곧게 다그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가고 서고”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또 힘든 노역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끌고 돌아오는 날”에는 아예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서리태 듬뿍 섞은 여물 한 구유” 먹고 나면 어린 주인이 수숫대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세상 갈지자로 마구 갈아엎고 다닐 그 껑충한 황송아지”는 곧 “어린 주인”에 다름 아닌 것.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은 신성한 제의의 시간이다. 화자가 마지막에 슬며시 “어린 주인”을 등장시킨 것은 다분히 전략적이다. 이 시가 단순히 황소 길들이기 차원의 내용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행사되는 ‘힘’의 의미에 대한 화두를 툭 던져놓고 돌아서는 것이다. 황소의 몸에서 흘러 넘친 힘은 새로운 생명의 에너지로 전환되어 논과 밭을 푸르게 물들일 것이고, 적당히 힘을 뺀 황소는 대지를 갈아엎고 신생의 터전을 일구어 나갈 동력이 된다. 결국 이 시는 그릇된 힘의 과잉이 대상을 파괴하고 현실을 왜곡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부드럽고 유연한 힘은 신생의 에너지로 작용하지만 경직되고 폭력적인 힘은 현실을 억압하고 구속한다. 노자 할배가『도덕경』에서 그토록 강조한, 강한 것은 죽음으로 가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으로 간다는 사실을 이 시는 진솔하고 담박한 서정으로 잘 형상화하였다. 또한 “-데요”를 반복하여 화자는 시종 관찰자의 위치를 견지하면서 최대한 시적 상황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가 시의 완성도와 공감의 감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데요”의 반복을 통한 운율적 효과와 부드러운 정서의 호흡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 시에 탄력성을 부여하고 설득력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다. “검지만한 뿔이 돋느라고 개굴개굴 되게 가려운 저녁”도 빼어난 감각적 수사로 눈길을 끈다. “개굴개굴”이라는 시어를 이처럼 절묘하게 사용한 시를 본 적이 없을 만큼 인상적이다. 건강한 서정의 근육이 만져지는 시가 이덕규의 시다. 그의 작품은 정련된 사유와 야생의 정서가 잘 버무려져 탄생한다. 대부분 대지에 굳게 발을 딛고 서서 땅의 기운을 전신으로 호흡하며 강약과 완급의 조절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언어의 조율사가 바로 이덕규 시인이다. 홍일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꽃 ㅡ이덕규 (1961~ )
한 해 동안 캄캄한 흙 속을 뒤져 찾아낸 걸 한순간 허공에 날려버렸다
해마다 똑같은 패를 쥐고 나와 일 년치 노역을 아낌없이 걸고 던지는 화투(花鬪), 향기로운 꽃놀이 끝에
집에 가는 차비나 해라 국밥이나 먹어라 개평을 뚝 떼어주는 이 아름다운 도박판의 결정(結晶)
까맣게 굳어버린 갸륵한 농부님네 마음을 다시 흙 속에 묻는다
---------------------------------------------- 시골 뜰에는 나리꽃이 한창이다. 이제 막 패기 시작하는 벼이삭들 또한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 논둑 곁을 달리는 시골 버스에서 듣는 소리다. "저 나리꽃이 피면 아이들이 방학을 한 거지? 맞지?" "에누리 없지" 그 노인들의 말과 말 사이에 한여름의 더위가 향기롭다. 몇 월 며칠에 방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리꽃이 피면 하는 방학! 아무튼 요즘 아이들은 방학은 하지만 나리꽃이 필 때 방학이 온다는, 시적인 시간의 단위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뿐인가. 아이들은 나리꽃을 모른다. 그것을 자세히 보았다간 학급 순위에서 처진다. 나리꽃은 여름 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 있다. 하여 이 여름 숲에, 뜰에 나팔소리처럼 떠 있는 그 꽃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것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없다. 나는 가끔 우리나라 법관들이 이 여름 한창인 나리꽃을 알까? 그 섭리를 생각해 보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모든 꽃들이 흙 속 암흑 살림의 근면하고 긴장된 화투(花鬪)놀이라는 통찰이 없다면 우리들의 삶은 과연 이승의 제대로 된 꽃들일까? ㅡ 장석남 (시인, 한양여대 교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머나먼 돌멩이 ㅡ 이덕규
흘러가는 뭉게구름이라도 한번 베어보겠다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서 수수억 년 벼르고 벼르던 예각의 날 선 돌멩이 하나가 한순간, 새카만 계곡 아래 흐르는 물속으로 투신하는 걸 보았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에서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다소곳이 떠받들고 앉아 있는 닳고 닳은 몽돌까지
----------------------- 〈머나먼 돌멩이〉는 ‘돌멩이’의 신산한 삶을 빼고 더하고 없이 보여준다. “절벽 꼭대기”에서 “읍내 개울 옆 순댓국밥집 마당”의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떠받드는 “몽돌”이 되기까지의 신산스런 내역이 주르륵 펼쳐진다. 그 내역을 사설로 풀면 책 한 권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터다. 그렇게 길게 풀자면 그 안에는 기어코 신세 한탄과 자기 연민이 끼어들기 마련이지만, 시는 흐벅진 군살을 허락하지 않는다. 압축과 은유라는 뼈만 남기는 게 시다. 〈머나먼 돌멩이〉는 경성(硬性)의 존재인 돌이 오랜 디아스포라의 체험 끝에 몽돌로 안착하기까지의 떠돎의 이력이자 시련의 시간을 수행의 시간으로 전환해서 담담한 해탈에 이른 수행기다. 누구나 삶에는 곡절이 있는 법이다. 순댓국밥집 마당의 다리 부러진 평상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저 몽돌의 닳고 닳음에도 사연이 있다. 시인은 그 사연을 들려준다. 하나의 돌은 “거센 물살에 떠밀려 치고받히며 만신창이로 구르고 구르다가” 여기까지 흘러온다. 변전과 유동은 어쩌면 삶의 본질이다. 우리는 흘러온 삶들이다. 당신이 지금-여기 서 있는 자리를 삶의 최저라고 할 수 있는 바닥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돌이다. 돌은 온몸으로 절벽 꼭대기의 정상에서 바닥까지 굴러오며 떠밀리고 치고 받히며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채 떠밀려온 삶을 증언한다. 이 돌에 늘 “적자뿐인 손익계산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를 쓰는 시인의 이력을 겹쳐보면, 이 시가 저와 같은 삶의 비루함을 깔고 앉아 있는 장삼이사들의 새로울 것도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간발의 차이〉는 〈머나먼 돌멩이〉의 다른 버전이다. 한쪽 다리를 잃고 “정상에서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의 곡절을 풀어놓은 〈간발의 차이〉는 〈머나먼 돌멩이〉와 다르면서도 같은 시다. 절벽 꼭대기에 있던 “날 선 돌멩이”가 까마득한 허공 아래로 떨어진다. 그 순간부터 돌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로 밀려나간다. “여기서부터 다시 멀고 험하다네”라는 시구는 그 투쟁의 험난함에 대해 말한다. 〈간발의 차이〉에서 이 돌은 공사장을 떠도는 일용 노동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밤낮으로 전국 공사장을 떠돌던 그가 피곤한 발목 하나를 터널 굴착 현장에 빠뜨려 잃어버렸다./사는 게 무슨 쇼트트랙 경기라고, 쓰러질 듯/쓰러질 듯 아슬하게 원심력을 견디며 뺑뺑이 돌다가 작두날 같은 생의 결승선에/그렇게 다급하게 한 발을 쓰윽 밀어 넣었나”는 핏빛 어두운 그 추락의 체험을 증언한다. 이런 투신/추락들은 밖에서 볼 때 대개는 개별자의 부주의라는 형식을 갖지만, 그 실상은 윤리와 정의를 결락한 사회의 공모에 의해 일어난 ‘이지메’ 현상의 결과다. 여기서 ‘이지메’는 가난한 자를 더 지독한 가난에 가두는 사회적 폭력을 말한다. “잘린 신경 끝에 욱신거리는 미열의 불을 켜고 보면/곳곳이 수렁이고 함정이었던 바로 사십 센티 아래가 이제 가닿을 수 없는 미지의 땅인데/남은 한 발로 그 미지의 땅을 딛고서면 더 이상 내디딜 발이 없는 여기가 극지이다/그러니까 여기는 외발로만 설 수 있는 칼날 정상이다”라는 구절은 ‘이지메’를 당한 자가 내려선 마지막 자리는 삶의 “극지”이자 “칼날 정상”임을 말한다. 돌은 경성의 존재이자 동시에 타자성의 심연을 감춘 존재다. “하찮은 돌에도 다 혼령이 있”(〈우리집 식구 중에는 귀신이 더 많다〉)는 법이다. 그러니 돌을 우리 주변에 흔한 일용 노동자이거나 떠돌이, 즉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재론적 기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재산이 계속 불어나는 사람과 아무리 일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 후자에 속한 사람은 삶의 극지이자 칼날 정상에 버티고 서기 위해 마모되어간다. 청년들을 비정규직으로 내몰고, 88만원 세대를 양산해내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나쁜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는 끊임없이 깨지고 부서진다. 나는 “사람이 그 격을 갖출 때에는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배제된다면 가장 나쁜 동물로 떨어지고 만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떠올린다. 법과 정의가 없는 “나쁜 동물”들에 둘러싸인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가! 《밥그릇 경전》에 국한하자면, 이덕규의 시들은 극한의 처지로 내몰린 사회적 약자의 절규를 시적 전언으로 담지만, 그 약자들이 부도덕하고 참혹한 “나쁜 동물”들의 폭력에 맞서 싸우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