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앞 안내판 교체 공사가 시작되었다. 기간은 3일이고 예상 금액은 오백만 원 정도였다. 기초 공사를 다시 하고 새것을 세우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현장에 온 인부는 검붉고 야윈 얼굴에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의아했지만, 지켜볼수록 노련하고 꼼꼼한 일솜씨에 믿음이 갔다. 점심시간에 잠시 들러 음료수를 건네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자신은 1인 기업의 인부 겸 사장이라면서 멋쩍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얘기할 때마다 상대의 눈을 쳐다보고 엷은 미소를 짓는 인자한 표정 때문에 가족 이야기는 물론 출신학교까지 밝히게 되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소설 이야기로 대화가 오갔다. 자신도 젊었을 때는 소설깨나 읽었다면서 내가 알고 있는 어느 소설가에 대해서도 자세한 설명까지 덧붙이며 맞장구를 쳤다. 행색은 초라했지만 볼수록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정산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며칠 후 소포 하나가 배달되었다. 장편 소설 한 권인데 책장 사이에 흰 봉투가 끼워져 있고 한문으로 ‘촌지(寸志)’라 쓰여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체에서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속에는 현금 십만 원이 들었다. 볼 때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즐겁게 일하던 까무잡잡한 그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낮은 톤으로 조용하게 말하는 투나 시간대별로 쉬는 시간을 정해 계획성 있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부당한 돈을 보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공직사회에서 숱하게 말하던 김영란법이 떠올랐다. 어떡할까 고민하다 다음 날 무작정 그 업체를 찾아갔다. 동료 직원에게 주소를 물어 수소문한 끝에 방문한 그곳은 변두리의 낡고 허름한 작은 사무실이었다. 사장 부인인 듯한 백발의 아주머니께 급히 돈 봉투를 건넸다. 갑자기 봉투를 받은 그 분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뭐냐고 되물으며 따라오는 눈길조차 피했다. 뛸 듯이 사무실을 돌아 나오니 밀린 숙제를 다 한 것처럼 개운하고 홀가분했다. 부모님을 뵈러 갈 때처럼 음료수를 사 간 일은 참 잘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소포가 왔다. 내용물은 책과 함께 편지가 추가되었고 돈이 이십만 원짜리 상품권으로 바뀐 것이 저번과 달랐다. 책은 일전에 보낸 작가의 또 다른 신작 소설집이었다. 편지에는 거절하지 말고 꼭 받아달라, 김영란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다시 돌려보내면 인연 끝내자는 섭섭함으로 알겠다, 공사 동안 인간적인 배려와 따뜻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손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편지글에서도 삶에 대한 노련미가 넘쳤다. 마치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협박이 담겨 있었다.
참 난감한 상황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두 권의 소설책은 받을 수 있었으나 상품권은 부담이 컸다. 그냥 모르는 체하고 써 버릴까. 아니면 사랑의 시민운동본부나 장애인보호센터와 같은 자선단체에 기부해 버릴까. 상품권 처리를 놓고 이런저런 생각이 겹칠 때 갑자기 고교 시절 배웠던 함무라비 법전이 떠 올랐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만인대 만인 법칙’에서 무릎을 쳤다. 급히 서점에 가서 소설책 하나를 골랐다. 촌지를 준 사장님과 침 튀기면서 얘기했던 그 작가의 작품이다. 공사판 인부의 삶을 사실적으로 옮긴 줄거리와 토속어, 은어 등이 마음에 들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다. 이쁜 포장지를 구해 정성껏 쌌다. 편지에는 ‘문학 동지를 만나서 반가웠다. 사장님 사업이 번창하기를 기대한다. 상품권은 도저히 받을 수 없어 다시 돌려보내니 이해해 달라. 그리고 마침 내가 명절 때 쓰다남은 상품권도 함께 보내니 사장님의 뜻에 따라 좋은 곳에 쓰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장님의 미소 짓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발걸음도 마음도 점점 가벼워졌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된 모교에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내 신분을 확인하더니 교장 선생님이 한번 뵙자고 전한다. 뜬금없는 전화에 당황스러웠지만 엉겹 결에 학교에 방문할 날짜와 시간을 얘기했다. 모교는 늘 마음의 고향 같다. 고교 시절 뛰어놀던 학교 주변 동네를 느긋하게 한 바퀴 돌았다. 자취방이 있던 단층집은 빌라로 변해 있었고 담쟁이넝쿨 가득했던 학교 담벼락은 조경석으로 이쁘게 꾸며져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선생님들이 일제히 눈을 피한다. 학교에 뭔가를 따지러 간 것도 아닌데 야박하다는 느낌이다. 교무실 풍경이 사도(使徒)의 집합체가 아니라 마치 일반 직장 같아 안타까웠다. 터벅터벅 교감 선생님 자리로 갔다. 전화를 받고 왔다고 얘기하자 교장실로 안내한다.
교장 선생님은 예상보다 젊었고 친절했다. 그는 자리에 앉기를 권한 후 낡은 졸업 앨범 한 권을 가져와 펼치더니 손가락으로 한 졸업생을 가르쳤다. 대뜸 이분을 아시냐고 묻는다. 거기에는 어디에서 본 듯한 앳된 학생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분이었다. 교장 선생님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얘기했고 기부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내 이름으로 결식 학생을 돕는 데 쓰라며 거금 오십만 원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굵은 서체의 아라비아 숫자로 금액이 표시된 폼보드판을 가져와 사진을 찍자고 한다. 겉모습만 보이려는 그의 행동이 거북했지만, 학교 운영에 필요하다는 말에 카메라 앞에 섰다.
며칠 후 집으로 배달되어 온 총동문회 회보에는 교장 선생님과 함께 찍은 내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고 동그란 박스 안에는 촌지로 인연을 맺은 그 선배 사장님의 얼굴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 설명 기사에는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을 자세히 소개했다. 동문 선후배의 배려하는 미담 사례라며.
첫댓글 참으로 묘한 인연!
아름다운 인연!
선후배의 미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