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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에 담긴 신비한 계획
히브리서 4:12~16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지난주일 예배에서 <안식이 중요한 이유>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안식의 핵심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하나님과 함께 누림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쉬신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과의 친밀한 교제에 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안식이란 누림과 교제 그리고 이를 통한 하나님의 영원한 기쁨인 행복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식이란 ‘recreation’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이란 ‘피로를 풀고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하여 함께 모여 놀거나 운동 따위를 즐기는 일’을 뜻합니다만 이것이 안식이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재창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의 또 하나의 단어는 ‘rest’가 있습니다. 이것은 ‘쉬다’라는 뜻이지만, 이것을 안식으로 연결하면 ‘pause’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기계를 동작할 때 stop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지를 말한다면 ‘pause’는 잠시 정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안식에 대한 recreation과 rest라는 단어를 연관하여 살펴본다면 안식은 그 자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기도에서 비밀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셨던 분이십니다. 그 영화를 지금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에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뤄보건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만물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사람에게 주시며 깊은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흙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아니라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는 원대한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계획입니까? 이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하는 과정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그 마음에 악한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나타난 안식은 사람의 욕심으로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므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여자는 남자를 의지하여 살지 않으면 안 되고 해산의 고통을 가져야 했으며, 남자는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을 일구어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해야 하였습니다.
오늘을 사는 이 세대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안식이 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안식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 하더라도 전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 예를 보여주었던 인물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는 모든 권세와 영광 그리고 부와 지혜를 누렸던 솔로몬의 고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 2:11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후’라는 것은 전 2:1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 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그는 만족함을 얻기 위해 그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였고, 세상의 모든 부유함을 끌어들였습니다. 게다가 눈이 보기에 좋은 정원을 꾸미고 귀를 즐겁게 하는 노래와 춤으로 기쁨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 모든 노력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그에게 남은 것은 텅 빈 공허뿐이었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진정한 행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안식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에서 ‘주인’이란 ‘퀴리오스,κύριος’라고 하였습니다. 큐리오스란 막강한 힘을 지닌 지배력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안식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이 안식을 허물거나 침범할 수 있는 존재는 온 우주 만물 가운데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참된 안식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더욱 강조하면서 구체적인 적용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전진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깨진 이유는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이라고 하였습니다. 선과 악의 구별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이 ‘선’, ‘토브’입니다. 하나님이 악한 것이라고 여기는 ‘라’라는 히브리어의 ‘나쁜,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를 무너트리고 내가 선과 악을 구분 지어 내가 옳게 여기는 것이 선이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 악이라고 여기는 것이 교만이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는 것과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판단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각과 나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예리하게 나의 마음을 꿰뚷어 지난날에는 죄라고 여기지 않고 무심히 지내던 것이 죄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식당에 갔다가 이쑤시개다 대나무로 되어있고 낱개로 포장된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습니다. 그러다 QT를 하면서 골 3: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란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탐하다’는 영어로 ‘cove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커 보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훈련병 시절에 한창 식욕이 왕성할 때였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양이 차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옆에 있는 친구의 식판에 밥이 커 보였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번 바꿔 먹자고 바꿔 보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여전히 친구의 밥이 커 보이더란 말입니다. 이처럼 탐심은 현재의 내 것을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욕심입니다. 이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말씀을 거울삼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이기에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적용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는 이유는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겪지 않기 위함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누구도 예외 없이 죽습니다. 그런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말씀에서는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사는 동안의 모든 것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드러나는 날이 바로 심판대입니다. 여기서 어느 사람도 자신을 변명할 수 없습니다. 불꽃같이 우리의 모든 것을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우리의 악함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악하고 불의하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무리 옳게 여기고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행한 것이라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평생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노라고 큰소리치고 살았던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재판장 되어 죄라고 판정하시고 불의라고 말씀하시면 영원한 저주의 구렁텅이인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신에 머물러 있을 때 부지런히 하나님의 살았고 활력있는 말씀에 비춰 자신을 점검하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가 불화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제도를 통해서 사람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제사장을 세우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제사를 지내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고 화목 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제사 제도를 세우시고 제사장과 대제사장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즉 큰 대제사장의 모형이요 예표입니다. 단 한 번의 제사를 지냄으로 영원히 죄를 대속하는 일을 하시는 큰 대제사장이 오심을 예고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큰 대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과 더불어 또다시 제사를 지내거나 제물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완전한 큰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은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동정하지’라는 헬라어 원어는 ‘쉼파데오, συμπαθέω’인데 ‘동정하다’의 의미도 있지만 ‘동일한 감정을 느끼다’, ‘공감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를 이해해주고 아픔을 다독여 줄 때 신뢰할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 치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친구는 의사가 되기 위하여 학교에서 실습시간에 생니를 뽑기도 하고 마취 주사를 맞기도 하며 이를 갈아내는 것도 경험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환자가 처해 있는 아픔을 공감하여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사가 따끔합니다. 그리고 입안이 얼얼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풀리니 안심하세요”그러면서 치료를 하는 의사를 우리는 신뢰하고 그에게 자신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처지와 형편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내게 오셔서 내게 처해 있는 환경을 이해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 기도할 때 성령이 함께하시며 내 마음을 받으시고 위로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인정하고 누려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신랑 되시고 나는 그의 신부가 되어 사랑으로 하나 될 때 부끄러움이 사라집니다. 창 2:25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랑의 깊은 교제를 나누는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한 전진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성도를 구원하는 것은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으로 자칫 우리의 육체를 소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은 구원하시면 새로운 혼의 기능이 생겨나고 육체는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어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육신을 있을 때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예배와 봉사 그리고 전도의 일에 힘쓸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역에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을 해야 합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에 직면한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서신입니다. 그들에게 핍박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키도록 권면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서신입니다. 특히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변증하면서 성도들이 인내로써 믿음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함께 '20세기 영어권 최고의 설교자'로 자주 꼽히는 영국의 존 스토트 (John Stott)는 망원경이 장착된 카메라를 들고 강변에 나가 새를 관찰하고 촬영하는 취미를 가졌습니다. 그는 새를 통해 얻어지는 교훈을 모아 <새, 우리들의 선생님, Birds our teachers>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여기서 새를 두 종류로 나누어 언급하였는데, 자력 비행의 새와 공기 힘을 이용해서 나는 타력 비행의 새입니다. 자기 힘으로 나는 자력 비행의 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참새, 까치, 박새 같은 새들입니다. 이런 종류의 새는 멀리 날지 못하고 높이 날지도 못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참새는 이 나무 저 나물로 잠깐 옮겨 다닐 뿐 멀리 날지 못하고, 높이 날지도 못하고, 오래 날지도 못합니다.
반면에 공기 힘을 이용해 타력으로 나는 새는 우리들의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하늘의 제왕 독수리,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 같은 새들인데 참새나 까치처럼 피곤한 날갯짓을 하지 않습니다. 날개를 펴고 바람을 타면서 대륙을 횡단합니다.
존 스토트는 새들만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과 은혜로 사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막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와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셔서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이 세대에 필요한 은혜는 성령을 통하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중에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세상이 거칠고 악한 이 세대에서 주님의 돌보심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런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에게 펼쳐질 말할 수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과 왕 노릇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우리가 모두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