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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선 지연작전(풍기-안동 전투)
제 4 절 풍기 - 안동 전투
1. 전투 개요
풍기-안동 전투는 국군 제8사단이 중앙선 축선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 제8.12사단과 7월 14일부터 7월 31일 가지 풍기-영주-안동 일대에서 벌인 방어전투다.
제8사단은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한 이후 풍기분지에 살상지대를 계획하여 14일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12사단을 무력화 시켰다. 이로인해 북한군 제12사단은 상당 기간 부대정비를 실시하지 않으면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어 강릉에서 증편된 제8사단을 문경-예천방향으로 투입해 제12사단을 증원하게 하여 국군 제8사단을 협공하게 된다.
이에 맞선 국군 제8사단은 영주-풍기 일대에서 상대적으로 열세한 전력에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하다 에천 방향으로 우회하는 북한군의 협공을 받게 되자 24일 옹천-안동 지구로 철수한다.
국군 제8사단은 24일 내성천 방어선을 형성하여 3일간 대치하며 28일 내성천 방어선이 돌파되자 옹천-안동으로 철수하며 지연전을 수행한다.
한편 이 무렵 중부전선을 담당했던 국군 제1군단이 7월 25일 안동으로 이동하고 이에 앞서 21일에 수도사단이 보은에서 안동으로 이동하였다. 이 후에 28일 문경 유구에서 철수한 제1연대를 풍산에 배치하였다가 31일 안동읍 뒷산에 재배치하여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게 한다.
'50.8. 1일 새벽에 안동을 철수하게 되는데 건너기도 전에 안동교가 폭파되어 장교 21명,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는 대 참사가 벌어지는데 바로 제2의 한강교 폭파사건이다.
2. 전투경과
가. 풍기-영주전투
(1) V자형 진지 편성
7월 12일 죽령선에서 물러난 제8사단(이성가 대령)은 풍기를 중심으로 제10연대(고근홍 중령)를 5번도로 좌측 장군봉-426고지선에, 제21연대(김용배 중령)는 도로 우측 258고지-277고지-299고지에 배치하여 V자 형국을 만들어 진지를 구축하고 좌측방 지역에는 청풍지역에서 철수하면서 위치를 모르던 제21연대 제7중대가 9중대와 예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제7중대장으로 하여금 경찰 병력을 포함해 500여 명으로 구성된 예천혼성대대를 노상동 부근에 배치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12사단은 충주방면으로 공격하던 제31연대가 13일에 복귀함으로써 완전편성을 갖추고 단양전투의 손실 병력을 보충하고 7월 14일 차량으로 죽령을 넘기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전날밤에 제8사단의 차량을 이용한 역후퇴전술에 속아(차를 라이트를 켜서 내려가고 올라 올때는 크고 올라와 철수한 것으로 위장) 별 대책없이 v홈 안으로 들어왔다가 2회에 걸쳐 살상지대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북한군은 14일 첫 번째 공격에 실패하자, 15일 02시경 트럭 34대에 1,000여 명을 태운 채 국군 제8사단 진지를 돌파하려 했지만 또 실패하게 된다. 북한군은 두 차례의 공격이 실패하자, 측방기동으로 전술을 바꾸게 된다.
15일 이후 이틀간 조용했던 전장은 18일 02:00를 기해 전 정면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제10-제2대대가 배치된 장군봉(733)을 점령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역습을 감행하여 재탈환하였다. 사단은 각 부대장에게 좌우 측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사단 공병대를 주축으로 예비대를 편성하는 한편, 봉화 일대의 경계임무를 수행중인 제25연대 제1대대의 제2중대(중대장 채명신 대위)를 차출하여 영주에 집결 대기시켰다.
한편 국군 제8사단은 순흥방면으로 침입한 북한군이 동원리로 우회하자 사단 공병대를 268-동촌리로 진출시켜 제21연대를 지원하게 한다. 이 무렵 육군은 신편한 105밀리 제50포병대대의 1개 중대(M-2 6문)를 배속시켰다.
(2) 장군봉-426-258-377고지선 전투
북한군이 풍기분지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15일 이후 이틀간 소강상태로 유지된다. 그 동안 북한군 제12사단은 후속 부대인 제32연대를 풍기로 진출시켜 공격부대를 증강하였다.
7월 18일 02시를 기해 북한군 제12사단은 전 정면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한다. 이 공격으로 제21연대에서는 제1대대가 대대장의 잘못된 지휘조치로 인해 258고지에서 철수하면서 377고지의 제2대대마저 연쇄적으로 철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제8-21-1대대장 윤태현 소령은 진내전을 치르는 와중에 북한군 소수병력이 대대관측소에 접근하자 조급하게 철수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사단의 중앙이 돌파되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사단은 즉시 대대장을 해임하고 연대연락장교 조규영 소령을 후임대대장으로 임명한다.
풍기 전투 상황도('50.7.14-22)
299
창락동 3/21 동원리
북12사 277 2/21
풍기 공병대대
258 1/21
장군봉 426 망전산 3/10 축차진
2/10 1/10
971 상줄동
3/10
용암산 영주 국8사
2/10 1/10
시루봉(493) 2/10
한편 5번도로 좌측의 장군봉-426-생현동 선을 확보하고 있던 제10연대도 7월 18일 02시에 북한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다.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되면서 북한군의 규모가 중가되고, 혼전 속에서 사상자가 계속 늘어나게 되자 사단장은 18일 09:30붕ㄷ까지 용암산-망진산 선으로 철수시킨다. 제10연대장은 철수를 완료하자 적이 재편성을 완료하기 전에 장군봉-426고지 섡을 역습하기로 결심하고 15:30분부터 제18포병대대와 제50포병 제1중대의 공격준비사격을 시작으로 제3대대가 천부산을 점령하고 계속 공격하였지만 적이 지리적 잇점을 살려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서 결국 19시에 제3대대의 철수를 명하여 제3대대는 용산동으로 물러난다.
(3) 용암산-망전산-250-268고지선 전투
국군 제8사가 용암산 망전산-250-268고지선에서 새 방어진지를 편성한 다음날 19일 새벽, 북 제12사가 재8사단 전 방어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망전산에 배치된 제10-3대대가 02시 20분경부터 무너지면서 제1,3대대는 축차진지(256)로 철수하고, 용암산의 제2대대도 시루봉으로 철수한다.
한편 동측방의 제21연대는 250-신촌-268-동촌동선에서 정비를 하고, 01시부터 북한군의 공격을 진전에서 격퇴하였지만 결국 동이 틀 무렵 북한군의 집중공격으로 신촌 일대의 제2대대가 오계동 서쪽 구릉지대로 철수하면서 전장의 주도권은 북 제12사단에 넘어가 258고지와 망전산을 확보한 북한군 제12사단이 공세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은 수세일변도의 방어만으로는 난국을 탁개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기습공격으로 적의 예봉을 무력화하려 한다. 따라서 제21연대는 258고지 방햐으로, 제10연대는 971-장군봉 방향으로 19일 오후 16시 30분을 기해 역습을 감행했다.
제10-2대대가 용암산-천부산-971고지에 진출했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971고지에서 멈추게 되었다. 반면에 제21연대는 3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하였으나 북한군의 화망을 뚫지 못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원지지로 복귀하였다.
(4) 영주 외곾 방어선의 형성
7월 19일 16시 30분부터의 기습공격이 실패하면서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현 방어선을 유지하면서 전투력을 증강하여 북한군을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19일 21시부로 전투편서을 조성하고 20일 미명을 기해 공격할 준비를 한다.
이에 따라 제2사단 소속의 제16연대가 제8사단에 배속되고, 개전초기 일본으로 철수한 캐슬러 소령을 비롯한 미군사고문관들이 사단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적이 먼저 여명을 이용해 공격을 개시하여 전 전선이 적에게 유린되는 상황에서, 일부 제21-3대대 철수 병력이 영주로 진입하는 적의 주공을 기습하여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일 06시경 야포와 박격포, 직사포 등을 동원한 적의 공격에 일시적인 매복 기습공격이나 참모전의 승리는 있었으나 중과부족으로 결국 영주는 피탈당하게 된다.
(5) 영주 외곾 방어선 붕괴와 영주 피탈
7월 22일 전날 밤부터 내리는 비가 호우로 변하면서, 북한군 제12사단은 이런 날씨륽 이용해 주공부대를 5번도로에 투입해 공격을 재개하였다. 비로 인해 시야를 분간 못하는 상태에서 영주 서북방 276고지가 적에게 피탈되며 위기에 처하자 제8-21연대장은 22일 17시 50분에 사단공병대대(-)와 제25-1대대(-)를 투입하여 역습을 감행하여 19시 20분 경에 탈환하였다.
7월 22일 02시경 북한군 전차가 망전산 부근으로 남하 중이라는 제10-3대대 수색대의 보고에 제8사단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23시경 SU-76 자주포 4문을 앞세우고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 결국 영주 전방의 제21연대와 제10연대는 영주로 철수하게 됨으로써 사단장은 차기 방어지역인 옹천으로 철수를 결심하게 된다.
한편 육군본부는 7월 23일 10시경, 소속 불명의 북한군이 예천 방향에서 영주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을 항공관측으로 확인 결과, 7월 19일 풍기에서 예천으로 진출했던 북 제12-31연대병력으로 사단 주력을 지원하기 위해 안동방향으로 전환된 부대였다. 육본은 국군 제8사단의 퇴로가 차단되는 사태를 대비하여 예천에 배치된 수도사단 제18연대로 하여금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토록 하고 제8사단을 옹천으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나. 안동 부근 전투
(1) 국군 제8사단의 부대정비와 내성천 방어선 형성
내성천 전투('50.7.24~26)
영주 적 12사
3/10
1/10 1/18
2/10 포곡 적동리 신천리 21연 (예)
화기리 275
서천 1/16
적 12-31연 2/16
갈동
금광리
3/16
내성천 강동리 18포병대대
1/10
3/10
석탑동
2/10 국8사
7월 24일 금광리로 철수한 제8사단은 내성천 연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날 사단은 새로 배속된 제16연대를 방어지역 중앙에 배치한다. 제16연대는 7월 21일 제2사단에서 제8사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의성-안동을 거쳐 24일 옹천에 도착하며 약 1340명 수준으로 그 중 1,000명이 의성에서 모집된 신병이었다. 이에 따라 제8사단은 창설이후 처음으로 3개 연대가 된다.
재편성을 완료한 사단은 3개 연대를 석탑동-364-간의 20km에 달하는 내성천 연변에 배치하고 영주-옹천-안동 축선 방어에 중점을 두고 방어하게 된다. 사단 전술 지휘소는 옹천초등학교에 위치하였고, 좌로부터 제10연-제16연-제21연대 순으로 편성하고 포병은 예고개에 포진하였다.
이 무렵 육본은 전선조정 계획으로 제8사단이 7월 25일부로 제2군단에서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으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국군 제8사단은 장병들의 피로가 쌓여 사기가 다소 저하된 상태였다. 하지만 북한군 제12사단이 영주 점령 후에 여세를 몰아 계속 추격하지 않아 옹천일대는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제8사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진지를 보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제10연 제1대대는 금광리 북쪽의 334고지에 북한군 관측소가 설치된 것을 발견하고 26일 15시에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그 때 나타난 SU-76자주포 3대와 45밀리 대전차포의 집중 포격으로 공격을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약 30분 후에 연대장으로부터 공격제대가 산개한 선상에 백색 대공포판을 깔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실행하자 유엔 전폭기와 B-26폭격기 편대가 작전지역에 나타나 영주지역을 폭격하였다. 대대는 결국 27일 새벽에 334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한편 예천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수도사단 제18연대(연대장 임충식 중령)는 예천 북쪽 용산동-생천동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대치 중에 있었다. 그러나 단대호 미상의 적 1개 연대 규모가 예천-안동 중간지점에서 풍산으로 이동하여 있어 국군 제1군단을 긴장시켰다. 안동 사수가 어렵게 되는 상황이다.
이에 국군 제1군단은 제6사단에 배속되어 영강전투에 투입된 수도사 예하 제1연대를 배속해제시켜 28일 제1연대를 풍산으로 이동 조치한다.
(2) 내성천 방어선의 붕괴와 안동 외곾 방어선 형성
안동 전투('50.7.28~31)
연곡동 319
공병대대 제21연(-)
천등산 제16연
384 제10연
232 오산동
200 21연 16연
10연
적 1개연대(단대호 미상) 21연
253
상리동 1연 1-3대대 1-1대대 1-2대대
안동 국1군단, 제수도사, 제8사
안동교
제8-10연
무릉동
제21연 제8-16연
수도사-1연
북한군 제12사단은 국8-10-1대대가 334고지를 점령하자 사단 중앙지역에 맹렬한 포격을가하며 일부 병력이 내성천 건너편 제방까지 진출하여 국군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봉화-옹천 도로 주변에 전개한 1개 연대 병력이 은밀하게 국8-21연대의 방어 정면으로 침투하였다.
하지만 제21연대는 전혀 북한군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다가 7월 28일 04시 30분경 방어진지 동쪽으로 우회한 북한군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지휘체제가 와해되어 남쪽으로 철수, 봉수산에서 제2/3대대가병력을 수습하여 북한군을 저지했으나 제1대대는 대대장의 판단 착오로 11km 남쪽의 예안까지 후퇴하여 큰 혼선을 가져왔다. 이에 연대는 대대장 임익순 소령을 직위해제하고 부대대장 허순오 대위를 대대장 대리로 임명하였다.
중앙의 제16연대는 우측방 제21연대의 철수에 뒤이어 이방향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대혼란이 야기된다. 신병들이 대부분인 제16연대는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무작정 남쪽으로 철수하여 연대장 김동수 중령은 영지산에서 병력 수습에 실패하고 결국 제10연대의 엄호하에 397고지에서 철수병력을 수습하여 11시경에 이 고지를 제21연대에 인계히고 옹천에서 재편성에 착수한다.
7월 28일 12시경 제8사단장은 제21연대가 397-봉수산- 선에서 적을 저지하자, 이곳에 방어진지를 편성하려 했다. 그러나 뒤이어 적이 예천-풍산 부근으로 진출, 좌측방에서 제8사단을 위협하고 예안 복쪽에 단대호 미상의 북한군 연대규모가 나타나자 천등산-204-연곡-오로봉-233고지를 잇는선에서 새 방어선을 설정하고 28일 밤에 좌로부터 제10연, 제21연, 제16연대 수느로 3개 연대를 배치하였다.
한편 28일 오후에 풍산으로 진출한 수도사단 제1연대는 상리천 서쪽 연변의 267. 228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여 예천-안동 도로 주변에 출몰하는 북한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29일 03시에 제8사단이 새 방어선을 형성하자 1개 대대를 천등산 서쪽에 있는 조운산에 배치하여 내성천-397괴에서 철수하는 제8사단을 엄호 하였다.
7월 29일 북한군 제12사단이 금광리-조제리 일대에서 내성천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이미 국군 제8사단이 약 8km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여 큰 전투는 없었다.
다음날 , 30일 04시에 북한군은 국군 제8사단 전면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전방 제10연대는 적의 공격에 대응하여 격퇴하였으나 중앙의 제21연대가 제16연대의 방어진지 붕괴로 축차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국군 제8사단은 우전방의 제16연대가 지리산-240고지로 철수하자 방어선의 균형을 유지하려 제21연대와 제10연대도 남하시켜 안동 방어를 위한 마지막 방어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3) 안동 외곾 방어선의 붕괴
7월 31일 06시경 T-34전차 4대를 앞세운 증강된 1개 연대 규모의 북한군이 중앙일선인 제21연대 정면으로 공격을 개시 히였다.
제21-1대대는 적 전차의 위력에 놀라 187고지 일대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자, 연대장이 제2대대를 투입해 제1대대와 더불어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적이 증강되면서 포위될 우려에 직면하자 제21연대장은 사단의 명에 따라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렇게 되자 187-오산동 일대를 점령한 북한군의 일부 병력이 전차의 지원하애 좌인접 제10연대를 , 이와 별도로 1개 연대 규모가 우인접의 제16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긴급 요청으로 출격한 유엔공군의 F-80 전초기 2대가 북한군 T-34 전차와 노출된 병력을 폭격하게 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제21연대장 김용배 중령은 제2.3대대로 역습을 감행하여 오산동 고지를 점령하여 187-오산동 선에 진지를 편성했다.
이 당시에 제1군단장 김홍일 소장은 예천에 주둔 중인 제18연대를 차출하여 안동 동측방 방어에 전용하고자 군단 직할 수색대를 예천 방향으로 투입해 제18연대의 철수를 엄호토록 하고, 안동방어를 위해 풍산부근에 배치된 수도사단 제1연대를 안동 외곾으로 전환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육군은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 제1군단과 제2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에천을 제2군단 작전지역에 포함시켰다. 이에 다라 31일 09시부로 명령이 발효되어 제18연대는 제2군단에 배속전환되어 이날 저녁 함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예천은 북한군 제8사단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어 안동에 대한 북한군의 압력은 한층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군단은 낙동강-반변천 연안으로 철수시기가 임박해졌다는 판단하에 수도사단 제1연대를 안동읍 뒷산으로 배치하여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토록 하여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풍산의 제1연대를 안동 북쪽 2km 지점의 석수암-253고지선에 전개시켰다.
(4) 안동 철수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9일 반격준비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될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에 설정한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명령을 하달 하였다. 이에 따라 육군은 7월 31일 국군 제1.2군단에 철수명령을 내려 19시경 연락기편으로 제1군단 사령부에 전달된다. 이에 제1군단은 운산에서 단촌(의성북쪽 8km)으로 이동한 상황에서 철수상황에 임박하여 작전회의를 개최하여 철수작전에 매우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구나 이 작전회의에서 철수시기와 우선 순위로 부대간 이견이 대립하여 타결점을 찾지 못하다,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군단장의 명령으로 제8사단이 수도사단의 엄호하에 8월 1일 02시에 먼저 철수하여 04시까지 완료토록 한다.
그러나 너무 늦게 8월 1일 02~3시경에 사단 전술지휘소에 도착한 관계로, 제8사단은 06시까지 안동 인도교를 통과하도록 철수 완료시간을 연장하였다.
이 때문에 제8사단 예하 부대들은 04시 이후에야 대치중인 북한군과 접촉을 끊고 철수를 개시하게 되며 그나마 전초진지나 측방경계진지에 추진된 병력에게는 철수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했다.
(가) 국군 제8사단의 철수
이에 따라 04시 50분 무렵부터 제10연대 제1대대가 보리고개 진지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여 06시 40분경 안동 인도교 통과를 완료하게 된다
뒤이어 제21연대가 적과 접족을 유자한 가운데 05시경 철수를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제3대대 제10중대는 구두로 전달된 철수명령이 잘못 전달 된 것으로 판단하고 계속하여 북한군과 교전을 하게 된다. 나중에 자신이 잘못 판단한 것을 깨달은 중대장(중위 황기상)은 권총으로 자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제21연대가 진지선을 이탈하여 제3대대(-)가 선두로 안동시내에 돌입할 당시는 이미 적이 시내에 들어와 이곳 저곳에 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3대대 일부 병력은 인도교 돌파를 강행했으나 제2대대는 강안에 도착전에 인도교가 폭파됨으로써 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안동교와 안동철교 폭파는 군단이 안동에서 철수한 후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다. 제1군단은 군단 공병단에 폭파준비를 명령하였다. 이에 공병단은 한강교 폭파를 담당했던 폭파반이 7월 30일에 이미 폭약장치 작업을 끝내고 폭파작업을 제8사단 공병대대에 인계한 상태였다.
교량폭파는 8월 1일 06시 경에 폭파하기로 결정하고, 철수부대와 협조를 위해 군단 참모장 최덕신 대령을ㄹ 현장에 급파하여 직접 지휘케 한다.
제8사단의 선발연대인 제10연대와 뒤를 이어 후속한 제21연대의 일부 병력이 통과할 무렵 북한군이 낙동강변 구릉지대를 점령하여 기관총 사격으로 안동철교 교량을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곧 안동교마저 피탈될 위기 였다.
이에 최덕신 대령이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과 숙의하여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하고, 폭파반이 남쪽 해안의 정자에서 8월 1일 07시 30분분에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따라서 당시에 도하직전 또는 교량에 올라서 있던 병력은 우왕좌왕 하면서 무거운 장비는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강폭 400M에 유속이 빠르고 수심이 2m가 넘는 관계로 익사자가 속출하고 적의 조준사격에 희생되어 제21-1대대 2.3중대의 경우 약 50%의 병력 손실이 발생한다.
뒤이어 제21-2대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 병력이 혼재되어 마치 해수욕장 인파를 방불케하는 모습속에 강습도하를 해야만 했다.
한편 우전방 제16연대는 06시 경에야 겨우 연대전술지휘소에 도착한 사단 연락장교 박승진 소위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 대부분이 신병으로 채워진 연대는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패배의식에 사로집힌 일부 병력은 북으로 북상하여 퇴로를 찾는 등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하 병력이 겨우 250명 미만이었다. 철수과정에 제16연대는1,100명 중, 전사 137명, 부상 120명, 실종 594명 등 총 851명의 병력손실이 발생했다.
(나) 국군 수도사단의 철수
수도사단은 8월 1일 02시경 철수명령 하달한 후, 사단전술지휘소를 일단 의성으로 이동시켰다. 이 당시에 제1연대가 석수암-성관현 선에서 제8사단의 철수를 엄호하게 되어 있었다.
제1연대는 제8-10.21연대의 뒤를 이어 철수를 개시하여(성관현의 제3대대는 통신두절) 북한군의 출물이 없는 안동 서쪽 합천다리를 거쳐 옥동 아래골로 진출하여 안심마을에 일단 집결하였다.
제1-3대대는 해가 뜰 무렵에도 제8-16연대가 철수하지 않음으로 초초하게 기다리던 중 수 미상의 북한군으로 부터 측방공격을 받고 분산철수하여 안동교 부근에서 합류, 제21-2대대와 함께 강을 건넜으며 이날 22시 경에 연대와 합류된다.
이처럼 예하 연대들의 철수 상황이 지연되면서 제18연대는 8월 2일 01시경에 의성에 도착하게 되어 8월 1일 아침에 책임지역인 반변천 연변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지시된 제1군단의 작전명령을 이행할 수 없었다.
3. 전투 결과
국군 제8사단은 풍기-영주전투에서 상대적으로 열세한 전투력을 지휘관의 적절한 지형 이용과 임기응변의 용병, 그리고 장병들의 투지와 용기로 12일 동안이나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므로서 북한군 제2군단과 전선사령부의 작전전반에 큰 혼선을 빚게 하였다.
그러나 제8사단의 안동 철수작전은 철수시간과 낙동강 도하대책을 등한시 하여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고, 낙동강-반변천 방어선 형성과 그 이후의 군단 작전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초래한다.
제8사단은 안동 철수 후에 운산리에 사단지휘소를 개설하고 구미동-상아동 간 20km 정면을 방어하게 된다. 8월 4일에 사단장이 군단 참모방 최덕신 대령이 새로 부임하였다.
한편 예천을 탈취하고 풍산에 이른 북한군 제8사단 제83연대는 낙동강을 도하하여 인금동을 공격한으로써 8월 2일부터 좌일선인 국군 제8-21연대와 접촉하기 시작한다.
안동을 탈취한 북한군 제12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안동사단의 칭호를 받고, 전열을 정비하여 8월 4일 01시에 낙동강을 도하하여 우인접인 수도사단 정면을 공격하면서 낙동강 전선의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에 이른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풍기-영주 지역
(1)"소백산 핏물을 먹고 살았어요."
풍기에는 희방사라는 고찰이 있다. 이곳에 나를 알고 있는 스님이 있다하여 찾았다. 소백산 정상에서 국망봉에 이르는 구간은 나무 한그루없이 억새풀같은 초목만 무성하였다. 이곳에서 전투는 제1연화봉일대 무선 중계소 지역이 전쟁터였다는 것은 단양지구 전투에서 알아보았다.
다시 비로봉으로 와서 비로사방향으로 내려서 비로사에 갔다. 이곳으로 차량이 오게 되어있다. 삼기리의 금계천이 많은 제보자들, 특히 피난민들의 이야기에서 군인들이 많이 죽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군장을 어깨에 메고 총을 잡고 죽어갔다는 것인데 대부분 부상자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제보를 한 할머니는 서울에서 온집안이 피난을 나서 문경을 거쳐 단양으로 여기서 소백산을 넘었는데 바로 지금의 금계천 상류로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몇살때 피난이였습니까?"
"내가 9살에 밑에 동생이 남동생 1명, 여자동생 1명이 더 있는데 여자동생은 피난 길에 죽었어요."
"그럼 민간인은 없이 군인만 죽어있었습니까?"
"어린 나이에 꼭 군인인지 민간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머니 이야기가 군인이라 이야기했어요. 내려오는데 폭탄이 떨어지고 비행기도 나타나 총을 쏘아 많은 사람이 다치기도 했어요."
"그런데 핏물은 어떻게 먹게 되었어요?"
"내려오다 밤이 되어 산속에서 잠을 잤는데 계곡 옆에서 잤어요. 여름이라 너무 더워 밤에 물을 먹고 싶어 흐르는 물을 먹었는데 아침에 보니 색깔이 좀 이상해서 어머니가 살펴보니 바로 위에 군인이 죽어서 개울에 엎어져 있었어요."
"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갔다 살아왔어요."
할머니는 억세게 기가 쎈분이였다. 어린 나이에 무섭지도 않고 당당하게 따라다녔단다. 그런데 이 소백산맥을 넘으면서 피난민들이 한지역에 몰려서 있는데 북한군이 들어와 웬만한 남자는 다 붙들어 갔다. 조국해방을 위해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며 곧 돌아온다고 떠들어댔다.
아버지는 북한군이 주는 베낭을 메고 산을 출발해 한밤중에 떠나가고 엄마와 자식들은 울수도 없었다. 비는 억세게 내리고 엄마와 아버지는 뭐라고 수신호를 주고 받고 하였다. 결국 이 비로 인해 막내가 감기가 왔는데 어디서 약도 구할 수 없고 결국 죽어갔다.
풍기에는 어머니 외가가 살고 있어 산속에서 얼마동안 머물다 찾아갔다. 이때는 북한군이 판을 치고 다녔다. 매일 이상한 여자가 돌아다니며 호구조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지 말라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당당하게 나와서 돌아다니며 이집저집을 넘겨보았다. 사람이 안보였다. 아버지는 떠난지 얼마되었는데 돌아오지않아 엄마에게 물어보니 곧 온다고 했다. 얼마가 지나 국군이 올라오고 할머니는 다른 피난민들이 다 돌아가는데 아버지를 기다리며 머물러 있는데 아버지가 나타났다. 낙동강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북한군과 함께 다녔고 북한군이 한밤중에 모두 사라져 아버지는 도망쳐서 올라 오는데 국군이 와서 함께 풍기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색씨색씨, 풍기 성내리 또랑에 남겨진 발가벗은 용사"
우린 할머니의 이야기로 풍기읍내에 길거리에 군인이 죽어서 많이 있었다는 제보를 들었다. 그래서 풍기역 일대를 중심으로 마을회관 등을 찾아서 마을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한 할머니가 따라오라 한다. 전쟁을 이곳에서 모두 보냈다며 미군 욕을 한다. 전쟁하러 왔는지 여자 만나러 왔는지 군인과 같이 다니며 "색씨색씨" 하며 집집마다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밖에는 잘 나오지 못하는데 할머니는 임신을 한 상태로 한 번 집앞에 나갔는데 아니 발가벗긴 남자가 또랑 옆에 있어 너무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였어요?"
"아무리 전쟁때라 할지라도 여자는 여자고 남자는 남자지요. 엎드려 있는게 아니라 벌렁 누워 있어 좀 그러길래 발로 굴려서 또랑에 밀어넣었어요. 여기 근처예요."
그러나 이미 길이 복개되고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길을 파헤칠 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2) "이상한 대대장(제21-제1대대장 윤태현)"
제8사단이 죽령을 버리고 풍기로 물러서 V자형 병력배치로 5번 도로상에 살상지대를 구축하고 있을때에 '50. 7월 18일 02:00에 드디어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 되었다. 하지만 도로상 우측 제21연대의 좌일선 부대인 제1대대는 적의 기습을 물리치며 진내전까지 벌이고 물러나지 않는데 북한군 소수병력이 대대 관측소 부근까지 오자 바로 철수명령을 내리어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그 우측의 제2대대는 퇴로차단의 위협으로 철수해야 했다. 이로인해 사단의 방어계획이 차질을 가져오고 인접 제2대대 장병들의 원성이 높았다.
하지만 다음 안심리 248고지에 새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동안 빼앗긴 258고지의 북한군이 재편성하는 호기를 포착했음에도 역습을 하지않고 소극적으로 방어에만 치중하여 작전실패와 명령 불복종의 책임을 물어 즉결처분하게 되었다.
당시를 목격한 송모씨가 증언한 내용을 보면 그날 저녁 헌병 2명이 카빈총으로 팬티 차림에 구덩이 옆에 서있던 윤소령을 총살했다고 한다.
그 후 이문제는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유족의 청원을 받아들여 적법절차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라는 권고를 내리게 된다. 이유는 한국전쟁 때에 분대장 이상에게 즉결처분권은 7월 26일 0시부터 부여한다는 참모총장 훈령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지금 싯점에서 그 위중함을 옳게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한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주요하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속성은 한순간 실수나 오판이 가져오는 피해는 한두명이 아니라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 온다.
한 예로 실제 전쟁 초기에 우리 일선 지휘자(관)들의 사상이 불손하여 대대장이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들어가지도 했고(제8연대 표무원, 강태무 대대장), 전쟁이 발발하여 청량리에서 출동대기하던 이 제8연대에 이00 중대장이 아군의 이동 상황을 전령을 통해 첩자에게 알려(쪽지에 적흰 금액이 병력숫자와 일치)주려 한것을 평상시 수상하게 여기던 장교가 그 전령을 붙잡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당시 인접 중대장인 정승화, 후에 참모총장) 중대장에게 통보하고 정 중대장은 다시 서종철(후에 국방장관) 연대장에게 통보하여 즉결처분되는 상황도 있다. 그 당시는 불순 분자가 군내부에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전쟁은 비극이다. 준비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
(3) "천부산의 소대장"
유독히 책임을 엄중하게 물은 연대장이 제8사단에 다 있다. 제10연대장 고근홍대령도 두번째가라면 서러운 분이고 지금 제21연대장 김용배 대령도 그렇다.
그러나 전사를 들여다 보면 이런 연대장이 있었기에 제8사단은 2개 연대밖에 없으면서도 전쟁 초기 가장 동쪽에 치우쳐 누구로부터 지원도 없이도 적 제5사단과 제766육전대를 물고 늘어져 쉽게 물너나지 않았다. 그 포병들은 대부분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되어 진내전투도 육박전으로 하고 절대 북한군에 지지않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런 영향에서인지 5번도로 좌측을 담당한 제10연대는 장군봉과 바로 밑에 있는 천부산을 오르내리며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하다 우측 제21연대가 붕괴되면서 철수해야만 했다.
나는 풍기 동천사에 들러 인연이 있는 스님(계룡대 법당 근무)을 찾았다. 절을 안내받고 나와 점심을 밖에서 같이 했다. 그런데 식사도중에 어느 아저씨가 자꾸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무슨 하실 이야기가 있는냐고 물었더니 내 복장이 '유해발굴단'이란 조끼가 생소하여 지켜보았다 한다.그러면서 본인이 7살에 전쟁이 났는데 대촌리 주성골에 들어가 부모님과 숨어살다 나왔다 한다.
"장군봉에서 3구를 보았고, 천부산에는 소대장이 묻혔다."
본인이 직접 다 안다며 현장 안내도 가능하다고 하여 뜻밖의 제보자를 만나 나는 일단 차를 이용하여 천부산에 올랐다. 임도를 따라가니 천부산은 쉽게 올랐다. 차에서 내려 한 20분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 사이에 봉분이 무너져 내린 3기가 어렴풋이 보인다.
"내가 이곳에서 아버지가 묻는 것을 직접보았습니다."
"그럼 소대장이란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계급장이 있는데 소대장이라 했고 나머지 두분은 꺽기가 3개씩 있었는데 일등중사인지 상사인지 뭐라고 했어요."
우린 다시 나와 장군봉을 올랐다. 차로 밑으로 내려와 사과나무 과수원을 지나 올랐는데 산 능선에 호가 줄지어 있다. 열심히 호를 구축하여 적을 기다린 흔적이 뚜렸했다. 탐지기로 대보니 소리가 요란하다. 3구의 시신을 보았다는 곳은 능선에서 약간 북쪽으로 7부 능선정도 되는데 평평한 곳에 약간 볼록한 곳을 가리킨다. 그곳을 기초 굴토해보니 반합이 나와 우린 매우 희망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발굴결과 천부산에서 1구, 장군봉 일원에서 3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4) "달봉산아래 도로속에 묻혀진 국군"
남쪽에서 옛고개를 넘으면 바로 새터가 나온다. 옹천지구 전투가 되기전에 가장 격전이 이곳 평은면 옛고개를 중심으로 반경 5km내에서 벌어진다. 내성천이 흐르고 있어 천연적 장애물이 될 것이라 하지만 적 침투부대들이 사전에 들어오고 풍기-영주지역에서 적의 침투전술에 혼이난 제8사단 병력이 다시금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나는 새터에 있는 마을의 고추농사를 짓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집에서 만났다. 여기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은데 고추 농사를 3,000평이나 하는 집이다. 아마 20년 동안 이곳은 5번정도 탐문하게 되는데 집에 사람이 없어 별로 만나지를 못하다가 어떻게 부부를 함께 만났다.
"어르신 좀 쉬어가며 일하세요?"
"아이고 비오면 고추가 다 버려요. 빨리 말려야 하는데 이제 힘들어요."
"저희가 좀 도와드리면 안됩니까. 할 수 있으니 뭘 할까요?"
"고맙습니다. 지금 그렇게 큰일이 아니라 마당에 펼쳐 있는 고추를 갑바로 덥기만 하면 됩니다."
우린 바로 갑바로 고추를 덮고 마루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머니가 포도를 가지고 나오셨다. 집에서 포도밭을 조금 한다고 하신다.
"할아버지 전쟁때 여기 살았다고 저 밑에 아저씨가 말하던데 혹시 죽은 시신을 못보셨나요?"
"바로 저 길에 묻혀있어요."
"네, 저기 보이는 길에요?"
나는 깜짝 놀랐다. 옹촌에서 영주로 가는 935번 도로가 전쟁때는 달구지가 다니는 정도인데 국군이 길로 걸어서 넘어가는데 이미 좌우측에 북한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사격을 하여 길바닥에 널너히 죽었는데 총이고 수류탄이고 쌓였다고 한다.
날씨는 덥고 비는 내리고 사람이 썩어가는데 얼마나 미끄러운지 모른다고 한다. 너무 죽어있으니 빨갱이 들이 나타나 마을 사람을 긁어모아 길 바로 옆에 또랑에 집어넣고 묻으라 하여 시키는대로 했는데 나중에 미군이 들어오며 탱크들이 밀어붙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이 넓어졌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북한군 베낭을 메고 여기서 걸어서 다부동까지 밤중에 출발하여 갔다주고 새벽에 돌아오고 했단다.
"뭘 메고 갔어요?"
"뭔지도 한번도 열어보지안했어요. 그럴겨를이 없어요. 가면은 그곳에 받으러 온 군인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보면 아주 어린학생들이 많이 보여요."
"다른 곳에 군인들은 못받어요?"
"저기 산 능선 보이지요. 거기가 5번도로 오운터널이 있는데 그 능선을 타고 가면 천등산까지 이어져요. 국군도 후퇴할 때에 옛고개가 막히어 그 곳으로 내려갔고 북한군도 그 능선을 따라 내려갔고 나중에 올라올때도 그 능선으로 와서 강건너 풍기쪽으로 갔어요. 그래서 전후에 올라가 탄피며 철모며 많이 주어다 놓았는데 저기 철모 하나 있네요. 그때 것이요."
할아버지는 한 30년전에만 해도 산에 나무하러가면 송장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산에도 안가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러시면서 옛고개에서는 포장공사 하면서 따을 파니 전투화만 해도 한트럭 분이 나왔다고 한다.
(5) "이곳 영지산에 1개 중대가 죽었어요"
할아버지가 평온리로 들어가라 하셨다. 마을에 가면 노인들이 그동네는 많이 있다며 장 알려줄 것이라한다. 그리고 옛고개와 봉수산에도 시체가 쌓여 있었고 옹천역부근에 철도 승무원 관사가 있는데 그곳에도 수없이 국군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알려 주셨다. 고추 말리는 것을 한번 덮어주었다 우린 엄청난 제보를 들어 주변 일대를 거의 1주동안 정밀 탐사 및 탐문을 하였다.
먼저 평은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그런데 회관이 아닌 동네 입구에 무슨 일이 있는지 여러 어른이 나와 계셨다. 차에서 내려 씩씩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높은 사람이네 어떻게 왔습니까?"
"이 동네에 6.25전쟁 때 많은 군인이 죽어서 있다고 새터에서 알려주어 찾아왔습니다."
"에이, 없다. 너무 늦었어"
나는 어르신들께 없어도 좋은데 그 장소가 어딘지 알려달라 했더니 영지산(505m)정상 부근이라 하신다. 동네에서 밥을 지고 올라가다 동네 사람도 포탄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니 북한군 여군 장교를 묻어 놓은 곳을 아는데 그건 안찾아요?"
"네? 그곳은 어디 입니까. 발굴은 안해도 자료는 남겨야 하거든요."
동네 어른 함분이 우리차에 동승하여 영지산으로 올랐다. 임도를 따라 어느정도 갔는데 산개울을 지나는데 산속에 웬 좋은 집이 있다. 그런데 갑짜기 황소새끼만한 개가 달려와 짚차를 넘본다. 얼마나 떨렸는지. 그런데 주인이 부르니 곧 달려가는 모습이 귀엽게 보인다.
드디어 하차 장소에 서서 설명을 듣고 어르신은 차로 다시 내려가고 우린 산을 올랐다. 오르다 보니 5부능선에서부터 모두 개인호다. 드디어 정상에 올라서니 동북방향에 개인호보다 큰 10개의 호를 발견하고 탐지기를 대어보니 소리가 울린다. 고지 주변 일대가 온통 개인호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탐사내용을 이야기 하니 정말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중 한 분이 별도로 만나자는 제안을 하여 나는 양해를 구하여 일행을 남겨놓고 어른을 별도 만났다.
"넓게 파인곳은 전쟁중에 8사단이 와서 군인을 화장해 간 장소요. 이 산에서 1개중대가 포위되어 다 죽었어."
"그렇습니까. 혹시 어르신 연세가 그때 얼마셨는지요?"
"내가 그때 15살인데 키가 작아서 안잡혀가고 살아났어요. 아까 있던 사람은 잘 몰라."
"혹시 북한군을 만나 보았습니까?"
"우리 집에서 그놈들이 살다 갔어요. 아군이 왔을 때는 우리 집에서 먹을 것 다 가져갔고."
"사실 국군이 다 죽은 것은 동네에서 밀고를 해서 그래요."
동네에서 밥과 술을 군인들에게 주었다. 군인들이 얼마나 굶었는지 밥이 부족하여 밥을 더하여 지게에 지고 산을 올라 주고 내려오는 사람을 침투한 북한군이 잠복하다 붙들어가 정보를 캐내어 어둠이 오는데 기습하였는데 산 위에 불꼿이 오르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북한군 신호탄이었다 한다. 졸지에 모처럼 밥을 먹고 쉬고 있다가 총한번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곧이어 아군의 포격과 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북한군도 수없이 죽었다.
며칠 지나 한번 올라가보니 죽은 군인들이 널려 있고 어디서 왔는지 들개들이 몰려들어 물어뜯고 있어 겁나서 그냥 도망왔다고 한다.
그러다 9월에 이번에는 군인이 들어와 동네를 요절내 버렸다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북한군을 따라 떠나버려 애매한 사람들이 붙들려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집안이 꽤나 있다한다.
동네사람들이 동원 되어 시신을 모아서 지금 보이는 호구덩이에 모아 놓고 임시 무덤을 만들었고 이듬해 가을에 8사단이 와서 현장에서 파서 화장해 갔다고 한다. 우린 이 지역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럼 북한군 여군 대위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놈들이 여군 앞에 와서 경례를 올리고 군관동무라고 하는데 물어보니 대위라 했어요."
"그런데 조금전에 동네 분 한명이 지금 여군 대위 묘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아네요?"
"그 말을 믿을건 못됩니다. 왜냐하면 북한군이 밀려 올라갈 때는 반대로 국군이 이곳을 포위하여 북한군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포격으로 대부분 다 죽었는데 불타죽었어요. 원자폭탄을 쏘았다고 하던데."
이렇게 죽어간 산위로 국군과 마을 사람이 올라서 시신을 골라 아군은 별도로 한곳에 모아서 묻었고 북한군은 그 자리에 내버려 두거나 파인 포탄 구멍이나 개인호에 밀어 넣었다. 그런데 도망 간 것으로 알았던 동네에 머물었던 여군이 그 위에서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묻어주냐는 것이다. 여차하면 다 죽는데 묻을리 없는데 나중에 이야기로 주인없는 묘가 나즈막하게 한곳 있는데 그게 여군묘라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한다.
나는 그곳을 굳이 가보려 하지 않았다. 북한군일 확률이 많아서다. 그리고 내가 조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 발굴을 하여 30여구의 유해가 식별 되었다.
(6) "봉화읍에 남겨진 9인의 화장 유해"
봉화읍 참전전우회에서 박중태님이 연락이 왔다.
한번 저보고 오라고 한다. 동네에 자가 봉송된 유해인지 모르지만 9구가 있어 군에서 호국단체들이 관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일거에 달려가 현장을 보니 일정한 장소에 전사자 이름까지 새겨진 추모비가 있고 이름이 세분이 있다. 나는 용사님과 유족협회 회원님을 만나 관리하게된 배경을 들었다.
"지금 이곳에 여기 묻혀있는 유족이 한분이라도 있습니까?"
"벌써 몇십년 지났는데 한번도 온적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이분들이 이곳에 묻히게 되었습니까?"
"봉화 지구에 큰 전투는 없는데 우리가 제대하고 와서 보니 전쟁중에 군인들이 목함에 유해를 가지고 와서 동네사람들에게 묻어달라고 하고 갔다고 들었어요."
"그럼 아마도 잘못 자가 봉송된 유해인데 현재 자리에 있었는지요."
'처음에는 이자리가 아니고 다른 곳에 있던 것을 보훈회관 뒤편에 안장했는데 이곳에 묻을때 몇은 들어 왔어요."
참 딱한 이야기다. 유가족이 없는 유해다. 전시에 자가봉송 되어온 유해가 주소가 틀리거나 유가족이 피난이나 여타 이유로 살고 있지않으면 동구밖에 놓고 가버리는 경우가 사실 많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땅이 개인땅이고 이름이 있는 유해도 병적조회결과 나타나지 않으니 답답해 졌다. 결국 발굴하여 단에서 관리하기로 하고 발굴을 개시하여 파보니 정말 까만 재가 일부 있고 하얗게 타다남은 뼈 몇조각이 있을 뿐이다.
(7) "예천 백마산 골짜기에 국군 유해가 많다?"
우리 전사에 예천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찾기가 힘들다. 전사기록은 수도사단 제18연대가 이곳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기록만 있다.
그런데 예천의 지역주민 한분이 서약사 뒷산이 봉덕산-봉화산-백마산이 이어지는데 국군이 들어왔다가 몰살 되어 길바닥에 널여있고 일부는 오상골(?)이란 계곡에 몇삽 흙으로 덮어 매장했다는 제보를 해왔다.
나는 단양을 조사하면서 하리는 조사를 해본 적이 있다. 하리를 거쳐 단양으로 가는 루트가 미군의 비행기 폭격에 유리하기에 북한군 병력이 이용한 코스다.
하지만 바로 예천읍 뒷산에 국군이 점령(?)했다가 큰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처음이라 먼저 읍내에 가서 읍대장을 만나 마을 회관을 한군데 들렀다. 하지만 대부분 시큰둥산 답변이었고 한분이 28번도로 예천천문우주센터 가기전 갈머리재에 전투가 있어 군인이 죽었다고 한다.
"영주 용혈리 기찻굴(금광굴)에 시체가 쌓였다."
우리는 먼저 갈머리재로 이동하여 길 좌우측으로 200m내외의 야산이라 바로 현장 탐사를 해봤다. 개인호가 많지는 않아도 일부 굴토되어 있어 탐지기를 사용해보았으나 별 반응이 없다. 마침 경운기를 몰고 가는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하니 영주 용혈리 기차굴에 시체가 쌓여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한다.
"아니 어르신이 그쪽 소문을 어떻게 들었어요?"
"내가 지금 평온 파출지서 앞에 살다 이곳으로 온지 한 50년 됩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우리가 평온 지역 탐문시 들었고 그 당시에 북한군이 미군의 폭격을 피해 그 안에 탄약이며 여러가지를 숨겼다는 제보를 확인하여 이미 조사를 했었다.
"지금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고 북한군이 떠나갈 때 다 어떻게 처리해버려 아는사람이 없습니다."
어르신은 이곳에 이사와서 나무하고 산나물 채취를 위해 갈구리 매봉산(341m) 능선을 타고 북으로 자구산, 장군봉, 천부산, 소백산맥 도솔봉에서 묘적봉 등 안가본 산이 없다고 한다.
"그럼 혹시 어디에 개인호나 전쟁 유품이 남아 있습니까?"
"장군봉에 가장 많아요. 그 곳은 한다리 건너 호도 있고 탄피나 수류탄 박격포탄도 있었어요."
"여기 백마산이나 봉덕산에는 안갔습니까?"
"그곳은 예비군 훈련하러 갔어요. 우리가 호를 파고 했지."
잔득 부푼 희망을 안고 왔는데 난처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왔으니 올라가야한다는 고집으로 점심을 읍에서 해결하고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생각이상으로 호가 많은데 예비군이 판 호는 아니다. 예비군이 판 호는 벌써 형태가 다르다. 규격이 갖추어져 있고 각이 그래도 남아 있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에 호는 그렇지 않다. 탐지기를 돌려 소리가 들려 기초굴토를 해보니 탄피와 기관총에 쏘는 탄알를 물고 있는 삼발이가 나온다.
이곳 봉화산 백마산 사이에 용산리라는 계곡형 마을이 있는데 동쪽으로 길게 구릉이 있다. 이곳 앞 동네가 생천리인데 금곡천이 흐르고 남쪽에는 한천이 흘러 아마도 안동으로 들어가는 수도사단 병력이 거쳐간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그러나 골짜기에 국군이 많이 있다하여도 이미 훼손되어 찾기 힘들고 몇번의 수해로 다 씻겨 내려가 아무것도 없다는 지역주민 이야기다.
결국 이곳 일대의 개인호가 무려 400여개 식별되었지만 1구의 유해가 발굴 되었다.
나. 안동 부근 전투
7월 24일 금광리로 철수한 국군 제8사단은 내성천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한다. 이날 새로 편입딘 제16연대가 중앙에 배치하는데 이 연대는 제2사단 소속이었고 7월 21일 예속이 변경 되는데 병력이 1,340여 명인데 1,000명이 의성에서 모집한 신병이었다.
7월 25일에 제2군단에서 제1군단으로 배속이 변경되었다. 사단은 북한군 제12사단의 공격이 바로 시작될 것으로 알고 강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오히려 금광리 강건너 적 관측소로 판단되는 334고지를 공격하여 아군이 탈환하고 1개 중대를 대안상에 배치하였다.
이때 수미상의 병력이 예천과 안동 사이인 풍산으로 이동하고 있어 안동방어가 어렵다고 보고 좌측 영강전투에 투입된 수도사단 제1연대의 배속해제를 요청하여 28일 풍산으로 이동조치한다.
7월 28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되어 먼저 우측 제21연대(김용배 연대장)가 옛고개 북동쪽 천본리일대에서 남쪽으로 무려 11km나 후퇴하게 되는데 제1대대(대대장 임익순소령,차후에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금성지구 전투에서 '53.7월 14일 포로가 되었다 포로 교환시 돌아옴)가 지휘체계가 무너져 생긴 일로 대대장이 보직해임된다.
한편 중앙의 제16연대(김동수 중령)는 오합지졸로 저항 한번 못하고 옹천으로 뿔뿔이 흩어져 철수한다. 이에따라 제8사단은 다시 방어선을 천등산-204고지-연곡-오로봉-233고기를 잇는 선상에 설정하고 좌로부터 제10-21-16연대순으로 배치하였다.
7월 29일에 북한군은 내성천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이미 국군은 한단계 내려가 충동이 없었다. 그러나 30일에 다시 전 정면에 공격을 개시하여 우측 제16연대의 조기붕괴로 그 좌측 제21연대, 제10연대 순으로 배후가 차단되는 위기에 놓이며 한땐 역습성공 등으로 사기가 충천되지만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위력에 밀리게 되고 낙동강-반변천-오십천 연변에 설정된 낙동강 방어선으로의 철수지시가 7월 31일 하달되었다.
8월 1일부터 수도사단 제1연대의 엄호하에 철수작전이 개시되지만 안동교와 안동철교를 폭파하는 싯점에 부대별 제대로 연락이 안되고 철수시기가 지연 되면서 북한군이 안동교를 향하여 빠른 속도로 진입함에 따라 06시경 폭파할 다리가 선발대인 제10연대와 제21연대 일부가 통과한 07:30분경 폭파가 이루어 졌다.
이로인해 대 혼란에 직면한 제8사단 제21연대 1,2대대와 제16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는 무기를 강변에 유기하고 일부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죽고 일부는 북으로 북상하는등 아수라장속에 제16연대는 지휘체계가 마비되면서 장교 21명, 사병 814명이 전사 또는 실종 되었다.
(1) "내성천 전투의 진실을 말하다(?)"
내성천 전투(7.24~26)당시 제8사단은 신천리 위족으로 제21연대를 나중에 사단에 예속된 제16연대를 신천리-강동리 구간, 강동-석탑동간은 제10연대를 배치하는데 전사 기록에는 제10연대는 내성천 넘어 금왕리의 334고지를 공격하여 확보하는 등 공세적인 행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찾아간 강동리, 평온리 사람들은 많은 인원이 군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었다. 이유는 그렇다. 북한군이 오기전에 내려와서는 강변에 진지를 구축도 하지않고 동네에서 반 강제로 먹을 것을 해 갔다줘야 했다. 바로 제16연대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병력의 70%가 의성에서 입대한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니 제대로 훈련도 못받았고 무기도 제대로 없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갑짝스레 군대가 도망가 버렸다. 사실 북한군이 오지도 않했는데 무슨 연유인지 국군이 옛고개 선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지만 강가에 지뢰를 매설하고 떠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역민들이 또 아침밥을 해서 찾아가니 아무도 없다.
"아니 그렇게 매 끼니마다 밥을 해서 날랐어요?"
"이장이 나서서 해야 한다고 하니 집집마다 있는 것을 각출해 한 장소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해서 가져가는데 한번은 군인들이 와서 직접 해가기도 했지요."
"그럼 연기도 나고 적에게 노출되는데 어떻게 밥을 했어요?"
"다 집집마다 있는 마른 나무를 사용해서 하고 산에서 마른가지를 해서 했지요."
"그런데 왜 피해를 엄청 보게 되었습니까?"
"글쎄 지뢰를 강변이 아닌 우리들 논과 밭같은 곳에다 심어놓아 농사지으려 가다가 동네사람이 엄청 죽었어요. 지금도 부상당해 치료도 못받고 불구자 되어 있는 어른이 있어요."
(1) "총소리도 없이 북한군이 집앞에 왔어요."
우리는 낯이 뜨거웠다. 아무리 군기가 없다하더라도 총도 안쏘고 물러났다니 할 말이 없었다. 지뢰를 어떻게 묻었는지 알 수도 없다. 그러니 이곳에서 죽은 군인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잠자고 일어나니 국군은 없고 북한군이 나타나 강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는 금왕리 334고지로 향했다. 제10연대에서 공격하여 강 넘어 있는데 탈취하여 1개 중대가 머물렀다고 전사기록이 되어 있다. 이미 용혈리 금광굴에 죽은 시체가 많았다는 제보로 왔다간 적이 있기에 쉽게 찾아갔다. 올라서니 산고지 전체가 개인호로 되어 있는데 탐지기를 가동해 보니 별로 소리가 나지않는다. 뺏고뺏기는 혈전을 했다는데 전투흔적이 부족하다. 평은리에서도 영지산에 군인들이 싸우지도 못하고 포위되어 전사했다하더니 아마도 제16연대의 이런 모습에 좌우측의 연대들은 덩달아 철수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2) "내가 여기서 전투한 참전용사요."
옹천역 부근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찾았다. 대부분이 이곳에 사는 나이드신 어른들은 같은 이야기가 역 뒤에 열차가 들어오는 코너에 있는 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가장 많이 싸웠고 죽은 군인들이 여럿 있었다 한다.
"참전용사님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우리가 지금은 사용하지않는 역전 앞에서 지역 주민과 이야기를 하는데 참전용사 모자를 쓴 한 어르신이 할머니와 아들 되는 분과 여기를 찾았다. 알고 보니 당시에 제8사단 제16연대 참전용사였다. 싸웠던 곳을 가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아드님이 모시고 온 것이다.
"용사님, 우린 유해발굴단 입니다. 혹시 어디서 피해가 많았나요?"
"바로 저기 산에서 전차포를 맞아 1개분대는 죽었을 것이고 미군 비행기가 지원을 나와 적 탱크를 파괴하는 바람에 우리가 여기서 역습을 했어요."
"혹시 역습하여 점령한 곳을 아시겠어요?"
우린 졸지에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전투현장을 탐사하게 되었다. 바로 토골의 토곡지를 지나 291고지가지 걸었다. 등산화를 신고서 85세의 나이지만 잘 걸으셨다. 마침 대구 KBS방송국에서 현장 촬영이 나와 의미있는 취재지원도 되었다. 걸으시던 용사님이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에 우리가 이 일대에서 전사한 군인을 가매장하고 떠났는데 집이 지어졌네?"
"네? 혹시 집자리인지 아니면 집주변인지 구분이 되시는지요?"
용사님의 기억을 되살려 폐가인 집주위를 두세번 돌았다. 큰 소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집 뒤에 처마밑이 해당된다는 잠정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집을 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집은 왜 사람이 살다 아무도 없을까? 별별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입구에 있는 집에 사람을 만나 혹시나 저 집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구전되지않느냐고 물어야 했다.
"용사님 몇명정도 묻혔나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분대병력은 넘는다고 봐야지요."
(3) "너 누구냐? 나 3대대"
"용사님 또 어디서 전투하셨어요?"
우리는 용사님을 모시고 지금의 북후초등학교로 갔다. 옹천역에서 적과 전투는 미군의 비행기 폭격과 포병의 지원으로 승리하여 하루를 버텼다고 한다. 밤에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어디에 머물 곳이 없어 들어간 곳이 국민학교 였다. 교실에 들어가 군장을 풀어놓고 너나나나 곧 짗쳐서 잠에 들었다. 보초를 세우고 젖은 옷을 벗어 걸쳐놓고 곧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교실에 다른 군인들이 들어온다. 칠흙같이 어두운 상황에 같은 3대대라 하니 들어와 잠을 같이 잤단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한 지휘자가 소변을 보러 밖으로 나가니 보초가 없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교실에 들어와 자는 모습을 보니 북한군과 뒤엉켜 자고 있다.
"그럼 용사님은 어떻게 살아나셨어요?"
"글세 잠이 들어 얼마가 지났는데 갑작스레 교실안이 난리가 난거요. 보이지도 않는데 여기저기서 '억~억'하며 쓰러지는 소리야. 아차 싶어 교실 벽쪽으로 붙어서 창문으로 탈출하려 하는데 그럴 정황이 안돼. 결국은 철모가 손에 잡히어 누군지도 모르니 마구 내리쳤지. 결국 한바탕 했는데 누구하나 총을 쏠 여유가 없어 모두가 아무거나 들고 교실을 벗어난거야."
"그래서 일단 살아나신거네요."
"그렇지요. 기가 막힌일이지요. 알고 보니 보초가 정문에 서 있는데 비는 퍼붓고 있는 상황에 앞에서 걸어 들어오는 병력이 있어 몇대대냐고 물으니 3대대라고 답하여 교실을 안내까지 했다는 거야. 그러니 사실 오히려 포위되어 대량으로 죽지않게 되었다고 다행이라 생각했지"
"그럼 살아난 전우들 이야기가 어떻게 육박전을 했다고하는지요?"
"많이 들었을텐데 머리를 잡아 짧으면 대검으로 찌르고 길면 놓았다고 해요."
용사님의 무용담은 계속 되었다. 정말 운좋게 말단 전투병 역활을 한 용사님을 우연찮게 만나 옹천 전투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참 칠흙같이 어두운 심야에 육박전ㄴ을 하다 서로가 교실에서 물러나 아군은 남쪽으로 북한군은 북쪽으로 물러나는데 손에는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마침 해가 오르는데 미군 비행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아군 머리에 갈겨대는 바람에 일부 부상을 입고 다시 학교로 정찰조를 보내니 아무도 없어 아침을 그곳에서 먹어야 했다.
"전쟁이 하다보면 웃기는거요. 죽는 자는 죽지만 살자는 어떻게든 살아요."
(4) "저전리 둠벙에 버려진 유해"
나는 이곳 북후면의 웬만한 곳은 다 탐사를 하고 탐문을 했다. 도진리 어느집에 탐문을 갔다가 누구 맘대로 집안에 들어왔느냐며 ㅅ자 ㅈ자 ㄱ자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학교 선생을 하다 정년 퇴임한 아저씨인데 너무하다 싶었다. 청주 국사봉 아래서 멱살잡혀 고생하던 생각이 났다.
나름의 사연이 있겠지하며 죄송하다고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은 있다.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쟁 당시에 그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이천동 제비원 미륵에서 마음을 가다듬는 묵념을 올렸다.
나는 '14년에 5번도로 상 저전리에 가서 마을주민 간담회를 가졌다.
점심시간과 연계하여 이장님이 나서 모셔온 인원이 15명이나 되어 성대한 간담회가 되었다. 대부분 이야기가 국군은 길따라 주로 내려가고 그 뒤를 북한군이 따라가는데 죽은 군인이 길주변에 또는 논속이나 밭에 있어 대부분 7~8월 더위에 썩는 냄새에 질리어 북한군 통제로 마을에서 나가 다 치웠다고 한다.
"우물 속에 묻힌 유해는 어떻게 하나요?" 김종찬 어른이 물어왔다.
"지금도 우물인지요?"
"동네우물 이었는데 지금이야 우물이 아니고 길이되었어. 아스팔트가 깔려 있어."
전쟁 당시에 15살이었단다. 왕상골과 이곳 오산리, 이하리 일대는 보이는 것이 죽은 사람이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데 동네 개들과 그 당시는 웬 여우가 그리 많은지 이것들이 물어뜯고 다녀 입이 벌게 가지고 어슬렁 거리니 미친개라 때려 죽여야했다고 한다.
"동네 어른들이 매일 하는 일이 불려나가 죽은 군인 묻는 일이여"
동네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피난못가고 남아있는 사람은 죄다 불려나가 부역을 하는데 하는 일이 죽은 군인 묻는 일이 제일 많았다. 죽은 군인은 국군인지 적군이지 구별도 안된다고 한다. 이유는 대다수가 옷을 입고 있지않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좀 거시기 하지. 그런데 자꾸 하다보니 아무것도 아냐. 그저 보이는대로 괭이나 삽으로 끌어당기고 굴려서 개울이나 파인 구멍에 밀어넣고 몇삽 언지면 그만이지"
"그러면 곧 노출되어 보일텐데요?"
"그렇지. 그런데 얼마 있어 군인이 올라와 보이는 것은 다시 부역으로 가서 모아서 갔다주면 화장해 가져가요. 안보이는 곳은 누가 힘들여 다시파. 그냥 놓아두는거야."
"묻은 장소를 몰라서 수습이 안된 유해도 상당히 있을거 아니예요?"
"당시는 아차하면 붙들려가 반 병신이 되던지 감쪽같이 죽어버려요. 그러니 누가 안나서지."
"둠벙 속에 있는 유해는 찾을 수 있나요?" 한어른이 물어본다.
"물속이라면 조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명확히 남아 있다면 농촌 일하는 시기를 고려하여 물을 빼내고 발굴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둠벙이 다 모래로 메워져 논농사 짓고 있어 모내기 전에 파면 돼요."
나는 바로 아저씨를 모시고 현장으로 갔다. 5번 도로 상에서 한 200m밖에 안들어 간다.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모래가 쌓인 곳이 그리크지않다. 아저씨는 원래 이 자리에 둠벙이 있었는데 언제인가 수해로 둑방이 터져 둠벙이 다 메워졌고 논이 되어버렷단다.
"이곳에 유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요?"
"내가 8살인데 국군이 오산리 방향으로 산을 넘어 가고 있어 나와서 구경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 군인이 몇이 모여 있어 다가서니 오지말라 큰소릴 해 바로 못가고 조금있다 군인이 사라져 가보니 군인이 둠벙가에 쭉 길게 누워 있는데 10명이 넘어요. 그래서 집에 와 아버지께 이야기 하니 가지말라고 했어요."
"그럼 어떻게 이 속에 들어갔다고 말하시는지요?"
"나중에 들으니 북한군이 오고 동네 사람들이 불려나가 둠벙에 밀어넣었다고 들었어요."
"이 논 주인이 누구신지 아세요?"
"우리 일가인데 아직 모내기 하려면 한달이 남았으니 그안에 빨리 파내면 괜찮아요."
"발굴된 유해중 가장 완벽한 완전유해, 뼈의 색깔이 황색으로 너무 좋았어요."
우린 바로 기동발굴을 개시했다. 모래를 한삽 한삽 거둬내니 먼저 전투화가 보았다. 모래 색깔이 황색이라 나오는 모습이 모두 황색이다. 드디어 뼈가 보인다.
"일동 차렷, 경례!"
"아이고 정말 나오네. 이런 벼락맞을 놈들. 이렇게 사람을 물속에 버리다니."
제보자분이 눈물을 흘리며 본인이 절을 좀 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바로 약식제례를 준비하여 제보자 분을 술을 올리게 해드리고 발굴을 계속하였다. 전체적인 윤곽이 나오는데 수류탄도 나오고 M1탄창과 실탄도 나온다. 우리는 너무 기분이 좋았다. 검은 색의 유해라면 조금 마음이 우울해지는데 이렇게 황금색이 뚜렷한 유해가 손도 발도 발가락까지 완벽한 유해가 나온다.
하지만 그 당시에 물속에 던져 넣었다는 제보대로 엉켜서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한다. 드디어 발굴이 종료 되고 우리는 10구를 발굴하였다.
"북한군이 포로를 초등학교에 수용했다며 그 주변을 조사해 보세요". 손재덕 어른의 이야기다.
"왕살골 일대 산에는 다 해골이야. 마을 여기저기 온통 시체가 널렸어." 남규섭 어르신이 82세로 연장자인데 당시에 18살로 군대에 가야하는데 병걸려 못가고 나중에 전쟁 끝나고 갔다.
"전쟁 끝나고 피난갔다 와서 마을에서 소총을 수백정 걷어다 지서에 반납했어요." 남경섭 어른 이야기다.
(5) "나는 국군 포로, 밥좀 주세요"
가곡리를 지나는데 마밭에서 일이 한창이다. 이곳 안동이 마를 집중으로 재배하는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밭으로 들어가 찾아온 이야기를 했더니 얼시구 좋다고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아주머니들 틈에서 힘들게 일하다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6.25전쟁때 죽은 군인을 찾는다 이거요?"
"그렇습니다."
"아니 저기 학교있지 그때도 있었는데 저기가 포로 수용소였어."
"국군입니까 북한군 입니까?"
"북한군 같으면 말도 안해. 국군이 100명도 넘게 붙잡혀 있는데 나는 1학년이야. 그러니 형들이니 찾아가서 놀았지."
"그렇다면 부상을 당해서 죽은 인원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그렇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북한군은 안보여. 복장도 민간인 복장도 있고 학생복을 입고 있기도 하고 상의를 벗고 있는 사람 펜티만 입고 있는 사람 등 다양해요"
"얼마나 있었습니까?"
"한 한달은 있었다고 봐야지. 이 형들이 밥을 얻으러 집집마다 찾아다녀요. "배고파요 밥좀 주세요"라고 다니는데 그러다 비행기가 오면 얼른 숨어요"
지금까지 제보를 받으며 국군 포로이야기는 두군데다. 국민 방위군관련 이야기는 경남과 경북쪽에 가면 꽤나 된다. 국군 포로는 춘천에 횡성지구 전투에서 붙잡힌 제8사단 포로가 무려 몇천명 있었다는 내용인데 이 내용은 차후 기술하겠다.
참 마음이 아프고 눈물나는 것은 함부로 말할 수 없음이다. 제보자께서는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군인인 나는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였다. 얼마나 힘들고 죽음이 눈앞에 있으면 북한군이 없는데도 국군끼리 조를 짜서 함께 다니며 밥을 얻어 먹었을까. 분명 한명이라도 트릿하면 그 조를 싹쓸이로 죽여버렸을 것이다. 아예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게 무지막지한 모습으로 죽여버리니 저 한발만 건너 도망치면 살것 같은데 같은 동료를 생각하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다 북한군이 밀려서 올랑오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서 떠났다는 국군 포로 이야기~!
(6) "제2의 한강교(안동교) 폭파사건"
전사책에는 수도사단과 제8사단간에 옥신각신하다 명령을 전하는 시기가 늦어져 결국 '50. 8. 1일 06시경에 폭파하도록 통제 되고 있었다. 이미 7월 30일 폭약장치가 완료 되었다.
하지만 사단별 연대별 명령 접수시간이 상이하여 제8-16연대는 06시경에야 철수명령을 받았으니 그나마도 전투력이 약한 연대는 우왕좌왕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군이 다가서니 더이상 지체할 수 없는 폭파조의 능숙한 솜씨로 스위치가 눌려지고 인도교도 철교도 날아갔다.
"'50. 6. 28일 한강교 폭파로 절대 병력이 한수이북에 남겨지다."
쓰라린 과거를 알고 있던 군인들은 물에 뛰어들고 북으로 도망치고 제16연대 병력이 강건너에 모인 숫자는 250명 미만이었다. 1,100여 명이던 연대 병력이 전사 137명, 부상 120명, 실종 594명 등 총 851명이 손실 되었다. 1개 연대에서 이러니 그 당시에 미처 도하를 완료하지 않은 제21연대 일부와 수도사단 제1연대 등의 피해를 합치면 천명이 넘을 것이다.
서로가 먼저 강을 건너니 엄호부대는 누가 하느니 옥신각신 하더니 06시경 폭파토록 되어 있는 명령을 06시에 받았으니 말이다. 잘못은 반복되어서는 안되는데 우린 그런 지혜가 부족하다. 그래서 결국 누가 다 죽었는가!
우린 안동교가 있는 태화동일대 전 제71사단은 안고 있던 산을 샅샅이 뒤졌다. 강변에 내려가 혹시나 모래밭에 있을 용사님을 찾았다. 강변일대 모든 경로당을 찾고 시장에 장이 서는 날에는 길거리에서 할아버지를 찾았다. 하지만 전사한 국군을 보았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전사 137명에 실종자가 594명이라는데 본 사람이 없으니 이상하다.
(7) 서울 종로에 사는 권용화님이 전화가 왔다.
본인이 13세때 이하리에 살았으며 7월말 전투에 국군이 많이 죽었고 북한군이 물러간 다음에 국군이 와서 현지에서 화장해서 목함으로 유해를 가져갔다 한다.
"그럼 이제는 한구도 없다는 말씀인지요?'
"그게 그게 아니고 그 당시에 집이 방앗간을 했는데 국군 7명이 죽어 있어 한구덩이에 매장했으며 아버지가 지금 그곳에 살고 계시니 가서 만나보세요." 이렇게 해서 우린 그곳을 찾아 아버지를 만나고 해당지역을 찾아 굴토를 했는데 1구만을 발굴했다.
"어르신, 7명인데 어떻게 한 구 밖에 없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참 거시기한데 말하기가 곤란하네요. 그 당시에 문등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병에 좋다고~."
(8) "안동역에서 기차가 폭발하여 제2국민병이 몇백명은 죽었다?"
어느 날은 서울 강서에 사시는 김형욱님이 엄청난 전화를 했다.
국군이 반격작전으로 올라가는 '50. 9월에 동원된 군인이 안동역에서 북한군 잔당들이 기차를 기습하여 120여 명이 전사, 모두를 안동교회 뒷편 비탈진 산에 다 묻었다는 제보를 받았다. 안동교회는 백년이 넘은 교회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우린 혹시라도 교회 장로분들 중에 이런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까하여 몇 분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대부분 모르고 있고 한분이 교회 뒤에 과수원이 있는데 이곳이 시체를 묻은 곳이라 한다. 물론 안동역에서 기차사고로 죽은 국민방위군이 얼마나 묻혔는지는 모르지만 그 곳일대가 맞을거라 한다. 우린 과수원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서는데 한 집에 나이가 든 분이 계셔 물었다.
"어르신 혹시 저기 보이는 과수원이 언제쯤 만들어졌는지 아시는지요?"
"한 50년 되었지요. 저기가 야산이고 피난민촌이 학고방처럼 있었는데 모두 도쟈로 밀어 버리고 과수원이 만들어졌어요."
"그럼 도쟈로 땅을 밀때에 죽은 사람들 뼈가 나온다는 소문은 없었습니까?"
"그야 옛날에 공동묘지 비슷하게 있었으니 많이 나왔다고 봐야지요. 하지만 누가 관심을 갔었나요. 그냥 밀어버리고 어쩌다 유족이 있으면 파 갈 수도 있겠지요."
"나의 희망은 사라졌다. 아마 그 과수원 자리에 국군용사님이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하리.오산리 일대를 수없이 탐사.탐문하였다."
이곳은 모두 200m 내외의 낮은 산들이다. 올라서는데 부담이 없다. 바로 옆에 중앙선이 달리고 있다. 그러니 군인들이 길을 잃고 헤매이며 철길따라 강남가는 것이다. 어떤 용사님은 북으로 올라서고 어떤 용사님은 남쪽으로 내려선다.
(9) " '51. 5월 전투 예행연습"
'51. 5월 인제 현리지구 전투시 중공군과 북한군에 포위된 제3군단의 제3.9사단인원들이 흐르는 내린천을 따라 가면 남으로 가는줄 알고(내린천은 거꾸로 남에서 북으로 흘러 인제 합강리에서 소양강으로 흘러드는 강임) 떼지어 가다가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웃지못할 슬픈 이야기가 있는데 이미 이곳 안동에서 그런 사례가 있는 것이다.
요즘 어느 가수의 "안동역에서"란 노래가 대세인데 아마 그런 사연이 녹아들아 모두의 관심을 받는지도 모른다.
안동 대교는 파괴 되었지 어디로 가겠는가, 일부는 철로길을 따라 가다 아마도 포로가 될 것이고 바로 그 옆의 산에서는 용감한 군인들이 적에게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했을 것이다.
한 동네에 들어가 물으니 옥달봉(264m)에서 육박전이 벌어져 '헌병'도 이곳에서 죽어 있었다고 하며 우리는 산으로 안내했다.
"헌병이 어떻게 죽어 있는지 아셨어요?"
"헌병 철모를 쓰고 죽었는데 철모가 총구멍이 나고 죽은 군인의 두개골이 터져 있더라고."
"산이 온통 시체로 한 200명은 죽었지 , 우리 밭에도 2명이 묻혔소"
이하리에 사시는 김중동님이 연락이 왔다.
"피난 갔다 오니 마을 어른들이 공동묘지 아래쪽에 국군은 매장했다고 합니다."
오산리에 지역 분이 전화가 왔다.
"뒷산에 밤마다 살려달라고 꺼내 달라고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김연희씨가 말하는데 발굴해 달라"
오산리에 김규화님이 제보를 했다.
"밭머리에 큰 참나무가 있는데 피난 후에 들어오니 시신이 너무 많아 나무 밑에 매장하였다 한다"
이하리에 김00님이 전화다.
"산이 온통 시체였다. 100~200명은 죽어있었다 한다."
이하리와 오산리는 5번도로와 중앙선 사이에 있는 인접하고 있는 동네다. 이곳에 가면 산이 아니라 구릉성 야산이다. 동네 모든사람들이 산에 가면 시체가 굴러다녔다 한다. 지역 특성산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집성촌으로 대다수가 친인척 간이다. 하지만 동네에 가서 들으면 원수지간이 많다.
"저 집은 부역자 집이요. 그 아버지는 북한군 따라 가버렸어요."
나는 오산리 황새골에서 양의골을 거쳐 이하리 옥달봉(264m), 중앙선 이하역 아래 솔골에서 230고지를 거쳐 이하리 머질이로 탐사를 이어갔다. 야산에는 포탄이 터진 흔적들이 있고 개인호는 그렇게 많치는 않다.
머질이에 들어서니 한분이 경운기를 운전하여 들어서고 있있다. 말을 못하는 분이다. 원래는 그렇치않했는데 귀가 먹으면서 말도 목하게 되었다 한다. 나는 글을 써서 보였다.
"이곳에 국군이 많이 죽어서 묻혀 있다는데 혹시 아
시는 곳 없습니까?"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손짓으로 하시더니 발로 바로 옆에 작은 활엽수가 있는 곳을 올라서시며 장화 신은 발로 쿵쿵 내리 찍으셨다. 나는 직감으로 이 곳에 뭐가 있다는 눈치로 받아들이고 탐지기를 들이댔다. 삑삑 소리가 크게 울린다. 이때 저만치 있는 집에서 아주머니 한분이 나오셨다.
"뭐 하시는 분들이에요?"
큰소리로 억양이 화난 목소리였다. 그러면서 앞에 있는 남자분을 뭐라 하더니 빨리 오라는듯 경운기를 잡아 당겼다. 그런 아닌데 우리가 뭔가 이 어른을 이용하는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서 상황 설명을 드리고 한참을 설득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집도 전쟁의 피해자였다. 집이 다 타버리고 있는 먹을 것을 다 가져가 버려 굶다시피 한여름을 보내야 했다. 아저씨의 고막이 비행기 포탄 소리에 그만 나가버려 이렇게 되었단다.
"괜스레 말 한번 했다고 또 불려다니는 것은 아니지요?"
전쟁이 지나간 곳은 어디나 부역자 문제와 고자질 문제로 주민들간의 보이지않는 갈등이 무척이나 쌓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니 어쩌겠냐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죽고사는 문제였으니 집안간에 쉽게 그 응어리가 가실리는 없다.
우리는 이 일대에서 어른이 장화신고 쿵쿵한 곳에서 7구의 유해를 포함하여 2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해 냈다.
"그럼 나머지 유해는 어디로 갔는가?"
많은 의문점이 남는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국군이 전혀 유해처리를 안한 것이 아니고 낙동강선에서 반격으로 올라갈 때는 사단들이 후퇴할 때의 역순으로 38도선까지 주요 격전지를 거쳐서 지나갔다. 이때 유해처리를 일부 하게 되는데 화장을 하여 자가봉송 시키던가 아니면 특별한 경우에는 가매장을 하고 갔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이 유해를 처리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않아 대대별, 또는 가까운 전우나 지휘관이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도 작고 하셨지만 ㅔ1사단 13연대의 황대형 일등상사나 수도사단의 이종록 중령의 이야기는 전쟁중 휴가를 나와서 동료나 지휘자의 유해를 파서 그 집에 전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황대형 선배는 낙동강 칠곡의 328고지에 와서 같은 동네 전우의 시신을 찾아놓고 다시 저쟁터로 갔다가 다음 휴가때에 그 유가족과 갔는데 유해가 없어졌다는 일화를 알려 주었다.
이종록 선배는 청주 오근장 전투에서 대대장이 전사하여 그 유해를 짚차에 실고 미원에 가매장했다가 그 이듬해에 휴가차 와서 발굴해서 유족에게 보냈다고 한다.
문제는 지역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북한군 통제하에 있을 때에 부역으로 참가한 인원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모르쇠로 일관하다보니 같은 지역이라도 발굴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점이 발생했다.
(10) "전사에 없는 임동 마령리에 국군이 묻혀 있다.?"
전사책에 보면 전투요도에 임동의 마평리에 그림이 없다. 안동 철수 작전간에 이곳으로 이동한 부대이동로가 없다. 다만 내성천 철수작전간에 7월 28일 중앙의 제16연대가 무너져 우측의 제21연대가 덩달아 예안까지 철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제1대대장 임익순 소령('53. 7. 14 금성천 이청동 전투에서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옴)이 보직해임 된다.
이후 7월 30일 축차 방어선에서 좌일선의 제10연대가 천등산-도촌동선을 유지한 반면 중앙의제21연대는 연곡동-319고지선을 유지하다 우측의 제16연대가 예안방향에서 북한군 1개연대의 공격으로 붕괴되어 지리산(335M)-240고지선으로 물러나면서 축차 철수한다고 되어 있다.
대구 수성의 김호성의 제보다.
"마령리 야산 봉우리에 파편이 많고 유해가 매장된 것을 직접 보았다."
대구 동구 김창훈의 제보다.
"어릴적에 이곳에 살았는데 마령리에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적군과 국군이 대치중에 야간에 기습으로 국군 수명이 죽어 골짜기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께 들었다. 또한 아기산(591m)에도전투가 있었다."
우리는 일대를 정밀 탐사와 탐문을 실시했다. 그러나 전사에 없는 제보인데 실제 가서 보니 아기산같은 경우는 능선을 따라 개인호가 집중적이지는 않아도 실제 존재하고 있고 고천리나 갈전리 분들이 국군이 왔다가 내려갔다고 증언한다.
그런가 하면 마령리는 제보자의 말대로 해당 지역을 발굴 결과 2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지역주민 손익성 / 희방사 스님의 제보다
'어릴적에(12살정도) 산에 나무하러 다니는 길에 마을 어른들이 죽은 아군의 시신을 화장하여 매장하는 것을 목격하곤 했는데 얼마나 되는지 숫자는 잘 모른다. 당시에 산에 올라가면 사람뼈가 많이 있고 때로는 총도 있어서 주어다가 경찰에 주었다.'
이런 제보는 풍기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고, 희방사 절에 들러서도 많이 들었다. 당시에 말을에서는 계곡물을 먹지도 안했으며 목욕도 안했다고 한다. 스님들 이야기는 산에 가면 보이는게 사람뼈였다고 하며 그런 것이 어느날 한 60년 말 70년초가지는 보이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누가 수습을 한 것도 아닌데, 물론 당시에 유행한 문둥병 환자분들이 일부는찾아서 민간요법으로 사용한다고 하여 일부는 훼손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순간 산속에서 보이질 않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잘 모르겠다.
5. 참전용사 증언
가. 김현경(제8-공병-3중, '18년) : '49년 8월 15일 제8사단 공병으로 군대생활 시작했다. 소백산 죽령 일대와 연화봉 일대 8부 능선에서 경찰 1개 중대와 공병 1개 소대가 적과 전투를 했다. 밀려드는 적과 전투를 했으나 사실 여기 저기서 달려드는 적들에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대가 와해되어 버렸다.
당시는 이곳 죽령을 넘어서 풍기로 피난다는 피난민이 산속에 많이 숨어 있었는데 그 속으로 오열들이 들어와 울의 뒤통수를 갈기니 싸워볼 방도가 없었다. 결국 뿔뿔이 각자 흩어져 산을 타고 남쪽으로 도암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죽어가는 전우를 수습해서 간다는 것은 어려웠다. 지금도 당시 전우에게 미안하다.
우리가 산 밑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골짜기에 군장을 메고 엎드려 죽어있는 전우나, 민간인들을 많이 목격했다.
나. 전학규(8-10-2-7중, '18) : 나는 '48. 11월에 제8사단으로 입대했다. 강릉 교동에 위치하였는데 전쟁이 났다. 게속 후퇴ㅐ하면서 단양에서 풍기로 넘어가는 죽령 릴대에서 적과 전투를 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신을 수습할 방업이 없었다. 죽령재 밑에 있는 또아리굴에 민간인과 군인들이 많이 죽어 있었다.
당시에 후퇴하면서 전사한 전우를 대충 가매장하고 떠나기는 했지만 위치는 잘 모른다.
다. 진두섭(8-10-2-5중, '18) : '48년 3월에 입대하여 8사단으로 갔다. 강릉 교동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후퇴를 계속하다가 죽령 연화봉 일대 8부 능선쯤에서 저과 전투를 하다 전우 3명이 전사했다.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산길 야산에 가매장하고 후퇴했다. 전우에게 미안하다.
라. 남시현(8-21-3대, '17) : '48년 6월에 6사단으로 입대하여 10월에 8사단으로 갔다. 초기전투시 적의 기습공격과 전투준비 미흡으로 후퇴하면서 대관령 정망대 일대에서 전우들이 많이 전사했으나 수습하지 못했다. 다음에 소백산 줄기의 죽령재 일대에서도 적과 교전하여 전우들이 많이 전사했으나 그 당시는 어떻게 수습할 여유가 없었다.
마. 배윤환(8-21-3-10중' '17) : "본인은 '49.8.6일에 제8사단에 입대했다. 주문진 앞산에서 첫 교전을 하였으나 4시간만에 후퇴했다. 단양으로 철수하던 중에 죽령재를 내려오면서 간이역(희방사역으로 추정)을 따라 내려오면서 4KM가면 초등학교(봉현서초등학교 추정) 뒷산700-800M고지에서 교전중에 적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으로 160여 명이 투입되었으나 45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사 및 실종되었다. 그리고 안정면 옥녀봉 일대에서 교전하면서 적과 백병전을 하여 30-40명이 전사하고 기타인원도 분산되어 후퇴하면서 많은 피해가 났다."
안동 하회마을에 도착하여 낙동강을 건너기전 낮은 야산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적에게 포위되어 탈출하는 과저에 중대원 130여 명 중에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이 용사님의 증언은 많은 자료분석이 요구되었다
1. 첫번째 지역에 대한 분석이다.
가. 희방사역 부근 고찰이다
희방사역에서 남동쪽으로 중앙고속도로와 주앙선이 내려가고 바로 봉현면이고 그 봉현 교차로에서 남쪽으로 봉현초등학교가 있다. 풍기에서 남쪽으로 931번 지방도로가 발달되며, 이 도로를 타고 가면 하리면 하촌리를 나 예천에 이르게 된다.
이 양호한 도로인 931번 도로를 경계로 북서쪽에는 북동방향으로 봉현 유전리의 천부산(852)-대촌리 장군봉(730(-두산리 589-유정골 394로 이어지고, 중앙 고속도로와 철로를 건너 ,백리-금계리-교촌-미곡리로 분리된다
이 도로 동남쪽으로는 북동방향으로 시루봉(607)-용암산(633)-봉암리 424-냉고개로, 중앙 도로를 건너서는 안정면 안심리-오계리-대평리로서 이 공간에 옥녀봉이 어딘지는 불명확 하지만 안심리 전방에 257고지가 있고 그 우측으로 백골 지역에 309솢디가 위치하여 300M내외의 구릉이 펼쳐진다.
나. 안동하회마을 부근 고찰이다
이미 하회마을은 지구상에 많이 알려져 지형분석이 쉬고,우리도 몇차례 탐문을 갔다 왔다. 하회마을은 강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강북에 위치한다. 안동 풍산읍에서 남서방향방향으로 916번 도로를 따라 가면 풍천에 이르기전에 하회리가 나온다.
도로에서 좌측으로 들어서면 화회리이고 그 좌측이 병산리로 화산(328M)이 솟아있다. 하회리에는 강변에 실봉산(194)리 있고 하회리 마을 뒷산은 270M정도 된다. 길을 따라 좀더 남진하면 풍천이고 여기서 남쪽으로 기수를 돌리면 대교를 건너서 광덕리를 지나 다음장에서 언급될 마늘봉(295) 협곡이 나오고 의성군 신평에 이른다.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할 곳은 하회에서 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있고 그곳이 부용대로써 아마도 당시에 강을 건너려다 적에게 노출된 것으로 보면 실봉산과 누룻터 일대라 판단 된다.
2. 두번째로 전사적 고찰이다.
가. 먼저 단양에서 풍기로 철수하는 과정이다(제3권586~)
7월 10일 해질 무렵 북한군은 전 진지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 당시의 전선은 지금의 구단양이 있는 단양대교 및 적성대교가 있는 지역- 324고지(적성산성)-상진대교가 있는 신 단양역 부근및 남동쪽 664(슬음산)- 노동리-도담리.고수리(봉우동(636)-가곡대교 사평리선에, 최초 7월 6-8일어간에는 국군 제8사는 좌로부터 두악산 전방 남한강변에 제10-9중-구단양역 일대에 제10연대와 제21연대 지휘소-324고지에 제21-9중대가 그 우측으로 강변에 제21-11중대-제21-10중대-슬음산 전방에 제21-1중대- 고수동굴이 있는 기촌리 일댕에 제21-5중대-도담리 지역에 제21-6중대가 배치된다.
강건너 대안상에는 이미 북한군 제12사단이 평동리에 들어와, 천주봉(579)에서 도담리 전방에 1개 연대를 , 도담리 우측사평리 대안으로 적 1개 대대가 배치된다.
이때 사단은 제21연대를 남한강연안에 배치하고, 제10연를 공격부대로 천주봉 점령 후 단양-제천간 도로의 서측방을 따라 공격하며 그 진전을 보아 제21연대도 공격으로 이전키로 한다. 그런데 이무렵 남한강을 건너 남하한 피난민들이 매포리 매포초등학교에 적의 전방지휘소가 추진되고 있다는 정ㅂ보를 흘렸다. 이때 그 정보의 출처를 확인결과 제천의 유지와ㅑ 경찰관이라하여 믿을만한 첩보라 결론지었다.
[매포리 기습전]
이에 이성가 제8사단장은 제8-10-1대대만으로 적 전방 지휘소를 기습하기로 하고, 대대는 7월 6일 23;00시에 단양을 출발하여 7월 8일 04:00시에 매포초등학교를 바라보이는 평동리에 진입하여, 동틀무렵인 05:00시에 325고지 북쪽으로 진출하여 267고지의 북한군 매복조 1개 분대를 섬멸한 후 불의의 기습작전으로, 선두의 중대장 안동훈 중위가 전사하지만 선임장교 유학성 중위의 돌격 명령으로 수류탄을 투척하고 전과를 확대한 후 북한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금수산-학강산-일대로 분산 철수하여 부상자도 수습하지 못하고 18:00시에 하진리에서 도하하여 단양초등학교에 집결한다. 이날 제10-제1대대는 적 100여 명 살상과 3대의 장갑차와 10문의 소구경포 그리고 3대의 트럭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군의 남한강 도하]
매포리에서 기습을 당한 북한군은 주력을 신속히 남하시켜 천주봉-358고지에 전개하고 7월 8일 저녁부터 도담리 전방 하괴리 터널고지에서 국군 제8사단 진징에 포격을 가해왔다. 그러면서 지금 신단양역 전방 상진리와 고수리 전방 덕천링에서 남한강 도하준비를 준비한다.
드디어 북한군 7월 8일 23:30경부터 도담리 서안과 상진리에서 도하공격이 시작되었다. 도담리와 상진리는국군 제8-21-제2대대와 제1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계속되는 적의 배합전술에 9일 제1,2대대 지역은 슬음산산 선으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좌측의 제3대대지역인 324-현천리 일대는 적의 도하 징후가 발견되지않고 있었다. 다만 이곳은 상호 포격전으로 제9중대가 배치된 324고지 일대에 집중되고 있었다.결국 제3대대는 신기리 지역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18포병은 개전초 18문의 포중 2문만을 유기한 , 서북청년단이 주축을 이룬 제18포병대대(장경석 소령)는 덕상골에 포진하여 기동리-천주봉-매포리-덕천리 일대에 교란사격을 실시하였다. 그런다 적의 야포들이 매포리 남쪽 새터계곡에 포진하기 시작하면서 사단장은 신기리로 철수를 명한다. 그러나 대대장은 북상리 계곡으로 전환하여 계속하여 화력을 제공하게 된다.
[단양 외곾전투]
가. 324-슬음산-664-고지 확보
'50.7.8일 23:30경부터 시작된 적으이 도하공격으로 적은 제21연대 제2대대와 그 우측 제1대대 전방진지를 돌파한 후 교두보를 확보하고 후속 주력의 도하를 엄호한다.
이에 제21연대 제2대대는 도담리-고수리지역에서 9일 03:00싱에 695고지와 고수리 계곡을 방어하기 위해 기촌리 방면 능선으로 이동한다.
이 무렵 적은 05:00시경 주력이 도담리 방면으로 도하하여 695고지와 기촌리 방면으로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7월 9일 11:00시에 고수리-봉우동-중리-금곡리 일대를 북한군이 석권하였다. 이때 제18포병대대가 664고지 일대의 화력전투를 벌여 북한군의 기세를 일시적으로 무룍화신다. 하지만 계속되는 적의 포병 사격과 침투부대 운용으로 결국 제2대대는 퇴각하게 된다.
한편 324고지-현천리간을 방어중인 제3대대지역은 심곡리 돌출부로 침투한 적이 꽃거리 일대를 점령 중인 11중대의 엄호하에 511고지 일대로 324고지 제9중대와 고수리 제10중대가 후퇴하게 된다.(참전용사가 제3대대 10중대다)
이런 상황에서 7월 9일 정오 무렵에는 삼척과 정선의 경찰대가 단양지역으로 합류한다. 김두용 총경이 지휘하는 삼척경찰대는 제8사단이 제천으로 철수하자 도계=황지의 산악로를 거쳐 정선에 도달한다. 이곳에서 최형식 경감이 지휘하는 정선경찰대와 합세하여 1개 대대를 편성하여 영월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집결중인 경찰병력을 규합해 북한ㄱㄴ의 공격을 저지하다가 순흥-풍기를 거쳐 이날 12:00시에 단양으로 진출하였다.
이에 제8사단장은 경찰에게 소백산맥의 영마루를 차단하여 사단의 후방엄호를 요청하게 된다. 이에 경찰은 충분한 실탄과 보급지원을 받고서 백룡사계곡=희방사를 거쳐 자정무렵에 삼척경찰대가 국망봉(1421)에, 정선경찰대가 소백산 일대에 각각 배치되어 적의 우회에 대비한다.
나. 제21연대와 제10연대의 작전임무 교대와 반격전
제8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7월 9일 20:00시에 제21연대와 제10연대의 작전임무를 교대하라 명령한다.
사단 예비로 장림리와 대강초등학교에 집결 대기 중이던 제10연대 고근홍 중령은 제1대대(박치옥 소령)를 슬음산에, 제2대대(정순기 대위)를 가락동에, 제3대대(하병래 소령)를 현천리에 진출시켜 제21연대 지역을 인수하게 한다.
그러다 수정명령으로 제21-제3대대 9중대는 계속 324고지 일대에 남고, 나머지 부대는 23:00시를 기해 진지 교대를 완료하였다.
제10-2대대는 10일 05:00시에 공격하여 07:00시경 하양방-664고지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게속하여 진출 명령을 하달하였지만 적의 완강한 화력에 밀려 진출이 어려웠고 우리 105밀리등 야포는 사거리가 짧아서 적에게 심대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결국 다시 원위치하여 664고지 일원을 점령하고 적의 우회 공격에 대비한다.
제2대대 좌측에서 고음동-심곡리 공격을 담당한 제10-1대대는 05:00시에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여 진격하는 가운데, 하리 서쪽의 무명고지를 탈환하자 적의 화력이 분산하게 되면서 국군이 일제히 진격하게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순간, 적이 이 순간에 일제히 포문을 열어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다시 슬음산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단양에서 풍기로 철수]
7월 10일 해질 무렵 북한군이 전 저지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한다.그러나 우측 현천리 동쪽의 제10연대 전방은 견제공격만 진행된다. 그러면서 제21연대 제9중대가 방어중인 324고지군에 21:00시경 적 1개 대대규모가 공격알 감행하였다.
사단장 이성가 대령은 이곳이 피탈되면 지금의 구단양지역이 피탈되면서 사단이 양분되어 그 전방을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 장림리에 집결 보유중인 제21연대를 북상리-북하리에 투입을 명하였다. 이때 지난 7월 28일 대관령에서 강릉으로 반격작전시 실종되었던 제4중대 제3소대 소대장 신영철 중위가 2문의 81밀리 박격포와 소대원을 이끌고 원대 복귀한다.
제21연대장은 사단 명령에 따라 제2대대와 제3대대는 도로 좌측 북하리의 437고지와 두악산을 목표로 진출하고 단양 상실시 즉시 역습으로 제9중대를 구출하라 명하였다. 제1대대는 예비로 현위치에 대기토록 한다.
연대장 명령으로 7월 10일 21:00시에 제2대대는 5번도로를 따라 북상, 23:00시에 목표지점인 437고지에 진출한다. 후속 제대인 제3대대는 장촌리 능선을 타고 두악산으로 진출하게 되는데 산악지형으로 7월 11일 02:00시에 진출한다.(참전용사 3대대)
그러나 324고지의 제9중대는 상황이 악화되고 연대와의 통신 두절에 독단으로 가산리-도락산(964)-적성리를 거쳐 에천으로 철수하게 되고 부한군 제12사단은 단양(구단양)을 점령하게 되었다.
한편 이날 단양 서북쪽 23km 떨어진 청풍방면의 제21-7중대도 적의 공격ㅇ드로 에천방면으로 분산 철수하여 12일에 예천에 도착하여 단양에서 철수한 제9중대와 합류하였다.
[북상리-마조리 방어선 형성]
7월 11일 전날 단양을 탈취한 적은 전열을 정비하는 듯, 별 움직임 없었다. 현천리-슬음산-664고지 선을 확보하고 있는 제10연대지역은 소강상태였다. 19:30분경 30분간 미 공군의 단양시가지 폭격이 있고난 후에 20:30분부터 제10연대 지역으로 포문이 열렸다. 그결과 제10연대는 중과부족으로 결국 슬음산-664방어선에서 물러나 마조리-장현리 선으로 철수한다.
북한군의공격으로 방어선이 무너지자 제8사단장은 북상리-북하리-장현리 -마조리선에서 적을 저지하려 했다.
이 시간 사단 좌측의 제21연대는 437고지와 두악산에 위치하고 있는 연대는 적이 21:00시에 공격을 해오는 싯점에, 우측방 제10연대의 진지선이 무너져 철수하게 이르자 제5중대를 후곡리 고지로 올려보내 엄호하게 한다. 그리고 예비로 있던 제1대대를 936고지로 출동시킨다. 제10연대는 장현리에 3개 대대가 집결한뒤 7월 12일 674-장현리를 잇는 선상에 저지진지를 편성했다.
664-슬음산-현천리의 진지선을 탈취한 북한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공격을 감행하고 국군은 마조리-장현리선의 제10-1/3대대가 전 화력으로 일단 적의 진출을 저지한다. 그러나 674고지의 제2대대는 중앙이 돌파되면서 뒤로 물러난다. 이때 제21-1대대가 점령했다는 936고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계속되면서 제10연대는 퇴로 차단의 붕란감이 만연하게 된다.
이에 제10연대장은 후방이 차단될 위기에 있다고 보고하게 되고, 사단장은 제10연대를 우선 1178고지로 철수하도록 명령하고, 좌측의 제21연대를 북하리-북상리선에 진출한 제21연대 주력을 936고지로 급진시켜 제10연대의 대편과 진지선의 편성을 엄호하도록 한다.
이에 제10연대는 1178고지로 진지를 이동시키게 되는데 이 과정에 제2대대에게 936고지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공군이 F-51 2대가 나타나 포병의 백린탄 유도에 따라 적진에 로켓포 사격과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1178고지를 확보한 제10연대는 수류탄 투척까지 전개하면서 고지를 계속확보하였다. 그러나 다시 비가 내리면서 14:00시에 봉우동-어곡리-속칭 상의골로 우회한 적이 연화봉(1394) 일대에 배치된 경찰대를 고격해 진지선을 탈취취함으로써 1178고지의 아군이 협공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에 사단장은 1363고지 일대를 확보한 공병대대(-)의 엄호하에 제10연대를 죽령 서남쪽 두솔봉(13140 일대로 철수하도록 하여 분산철수로 18:00시에 진지를 급편하게 된다.
한편 제21-3대대는 제1대대가 936고지에, 제 2/3대대가 북하리-북상리선을 점령하게 되는데, 제1대대가 936고지 점령간 대대장 최취성 대위가 전사하면서 분산되어 방황하다 뒤이어 공격해 오던 제10연대 제2대대와 합류하고 , 일부는 분산 철수하여 풍기에서 연대와 합류한다.
그리고 제21연대 주력은 제10연대가 마조리-장현리선에서 물러서고, 936고지를 진출하는 제1대대가 우회한 적에 돌파되어 후방차단의 위협을 받게되자, 사단장의 명으로 긴급하게 06:00시에 포병의 엄호를 받으며 물러서기 시작해 09:20에 제21-제3대대가 똬리굴, 제2대대가 속칭 매바위에 전개한 후 936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참전용사 배윤환 용사 부대가 3대대다)
그러나 점차 적의 공격에 밀린 제21연대 주력은 제10연대 제2대대가 1178고지를 확보하고 지원하에 철수하여 942고지에서 병력을 수습한다.
당시에 제18포병대대는 대대장의 적극적인 화력지원을 위해 사단자의 철수 명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진지를 변화화하여 적을 타격하지 못한다면 야포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고 또 적 포가 남한강을 도하한 이상 대포병전을 전개하여 이들을 격퇴하지 않고서는 한 밣자욱도 물러설 수 없다"고 역설하며 죽령 부근 목장에 포진하여 화력지원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날리 개이며 진지가 노출되어 적의 침투조의 공격과 사거리가 긴 포병의 사격이 게계속되어 결국 20:30분에 풍기로 철수해 간다. 피해는 포차 1대와 방향틀이 파괴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연화봉-1363-죽령선에서 적의 우회에 대비하여 있던 경찰대대와 사단 공병대대도 20:0시경까지 모두 풍기로 철수하였다. 삼척경찰대가 7월 11일 연화봉-1363고지선으로 진지를 전환한 후 골병과 협조하며 적의 우회에 대비하던 주에 7월 12일 어의곡리와 금곡리로 우회한 적 1개 중대로부터 기습을 당하여 공벼이확보한 133고지로 밀린 후 공벼의ㅐ 엄호하에 희방사 골짜기로 들어서게 되는데 적의 집요한 추격으로 4~50명의 사상자를 낳았다.
1363고지-죽령선을 확보한 공병은 사단의 방어종심을 유지하고 있던 연화봉일댕의 경찰이 물러서자 1363고지의 제3중대(오명환중위)가 연화봉의 적을 격퇴한 후 제10연대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에도 죽령 서북쪽의 노출된 목장의 포병진지를 방호하다 20:30분경에 포병에 포병이 풍기로 철수하고 21:00에 사단 주력이 철수하자 그 뒤를 이어 풍기로 철수한다.
[풍기로의 철수]
942고지의 제21-2.3대대는 936고지에 대한 기관총과 박격포사격을 계속하면서 적의 공격을 견제하다가 제10연대가 두솔봉으로 물러서자 전 화력을 936-1178고지로 집중하여 적을 교란했다.
사단은 억수같이 퍼붓는 가운데 날이 어두워지자 21:00에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하게 된다. 이에 따라 21:00시에 942고지에서 물러나는 제21연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풍기로 물러난다.
지금까지의 전사 내용에서 참전용사 증언자인 배윤환님의 소속(제8-21-3-10중)인, 제21-3대대는 최초 구 단양역 324고지 일대에 편성되었고, 다음은 7월10일경 두악산으로 진출한다. 이어서 철수 단계에서는 936고지 공격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죽령을 넘어 철수하게 된다.
나. 풍기-안동선 철수간 전사분석이다(4권 324~)
그리고 안정면 옥녀봉 일대에서 교전하면서 적과 백병전을 하여 30-40명이 전사하고 기타인원도 분산되어 후퇴하면서 많은 피해가 났다."
풍기전투('50.7.14~22)간 제8-21연대는 사단의 우측방 방어부대로 우로부터 제1대대(258)-제2대대(277), 제3대대는 예비로 집결보유한 가운데 제11중대가 우측방 금계리 지역에 배치하고 , 차후진지는 도로 우측에 북동방향으로 제1-제2-제3-공병대순으로 배치된다. 여기서 제3대대 지역은 동원리 남쪽에 동촌리와 조와동 지역으로 공병이 우일선에 배치되었다.
좌전방 제10연대는 장군봉에 2대대, 426고지에 제1대대, 서남쪽 971고지에 3대대를 편성한다. 차후진지는 시루봉 - 용암산 - 망전산으로 내려선다
그러면 여기사 다시한번 참전용사 배윤환님(제21-3-10중)의 증언내용을 들여다 보면 아래와 갔다
용사님 증언내용이다, "단양으로 철수하던 중에 죽령재를 내려오면서 간이역(희방사역으로 추정)을 따라 내려오면서 4KM가면 초등학교(봉현서초등학교 추정) 뒷산700-800M고지에서 교전중에 적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으로 160여 명이 투입되었으나 45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사 및 실종되었다. 그리고 안정면 옥녀봉 일대에서 교전하면서 적과 백병전을 하여 30-40명이 전사하고 기타인원도 분산되어 후퇴하면서 많은 피해가 났다."
분석 1; "단양으로 철수하던 중에 죽령재를 내려오면서 간이역을 따라 내려오면서 4KM가면 초등학교 뒷산700-800M고지에서 교전중에 적의 수류탄과 박격포 공격으로 160여 명이 투입되었으나 45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전사 및 실종되었다"
가. 간이역이 어딘가와 초등학교가 어딘가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죽령에서 풍기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간이역으로 희방사역이 있고 좀더 내려가면 봉현동에 봉현초등교가 있다. 이 추론은 죽령에서 내려온다는 것에 맞춰서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거리상으로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4km라는데 죽령에서 봉현초등교까지는 15km정도 이격된 거리다. 다라서 이곳은 아니다라고 봐야 한다.
나. 그러면 죽령재에서 거꾸로 단양역 방향으로 내려가면 (이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간다고 볼 수 있다) 10km정도에 간이역으로 죽령역이 있고(전쟁 당시에 있었음. 실제로) 여깃 5km정도에 대강초등학교가 있다. 그리고 이 사이에 또아리글이 실제로 존재하고 다른 용사님이나 민간인 증언에서 많은 군인과 민간인 죽은 모습을 봤다는 증언이 있다. 그리고 제21-3대대가 북한군과 큰 전투를 벌이다 철수하는 진지가 936고지인데 바로 죽령역 북쪽에 매바위와 936고지가 위치한다. 전사내용에 충실해 보면 바로 남동쪽에 도솔봉(1314)가 있고 제10연대가 이곳 일대를 점령한 후에 제21연대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게 된다고 하다.
그럼 여기서 상세한 위치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유해발굴현황분석이다
앞부분에서 잠시 언급되었지만 이곳 단양에서는 실금산(슬금산)지역, 마조리지역, 장현리지역 등에서 전면발굴을 그리고 부부 발굴은 각 고지군에 대하여 진행했다.
[마조리 지역] : 61구('04: 38구, '08 :12구, '09 : 1구)
먼저 마조리지역에서 2004년도에 지역 제보자의 증언으로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다. 제보자는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살았던 분으로 본인은 어려서 군대는 가지 않았다.
(가) 1차발굴 : 그런데 어느날 전쟁 종료후에 자신의 밭이 있는 산쪽으로 가니 인근산에 부패되어 있는 시신들은 산짐승들이 물고 돌아다니고 있어 보가가 않좋아 자신의 밭 북쪽 산기슭에 마을 장정들과 함께 거두어 묻어 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곳 마조리는 차후 전사 소개에 나오겠지만 아군이 반격작전간에 미구미군이 이곳에서 네이팜탄 사격으로 엄청난 북한군을 섬멸한 곳이다.
'50.7월 초에는 국군 제8사단과 북한군 제8사단이 전투를, '51.1.15부터는 1.4후퇴이후 다시, 다시 북진간에는 미 제2-17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을 무력화시킨 곳이다.
제보지역을 경사가 약간 있었지만 칡뿌리만 무성하고 발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더욱이 1m쯤 발굴하자 유해가 노출되어 발굴지역을 크게 확장하여 발굴결과 완전유해 6구와 부분 유해 32구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2차 가매장되어 발굴된 곳으로 유해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았다. 따라서 개체 분류에 어려움이 있었고 모두 동양계로 판명되었다.
(나) 2차발굴 : 2008년도에 다시 전투지역 위주탐사결과를 바탕으로 양배산. 상진리. 죽령. 도담리. 장림리 일대와 노동리, 그리고 발굴간 제보가 들어온 마조리. 자현리에 대해 발굴결과 전투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았다.
[실금산 지역] 비공식 4구
사실 이곳은 실금산 정상에 가면 큰바위가 지금도 있다. 탐사간에 이 바위를 상세히 관찰하니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상세히 관찰하니 식별이 기능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마을에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개개인 수소문하니 마을 사람이란다. 그런데 당시에 군에 입대했는지 아니면 노무자로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북한군에 협력한 문제로 죽어서 그 곳에 그대로 묻었다는 이야기만 있다.
나는 전사자 명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그중에 명부에 있는 인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유족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그러니 구군으로 하기에는 마을사람들이 부역자가 죽었다는데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2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그 분들의 유해는 아마도 화장되어 국군 유해발굴단 감식소 보관실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나 제보지역인 장현리에서는 전투지역인 500-700고지군의 개인호에서는 1구가발굴되고, 지역 제보자 정석모(당시65)의제보지역에서 모두 11구의가 발굴되어 총 12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먼저 전투지역은 상진리 250m고지군 개인호 40여 개를 발굴하는 과정에 능선상에서 발굴 되었다.
장림리지역은 제보자 정석모님이 그당시로 20여 년전에 본인 밭을 가는 도주에 포크레인을 운전 중에 유해가 나와 인근에 가매장했다는 곳과 15년전에는 나무하러 산에 오르다 매장지역 옆에 동굴이 있어보니 유해가 널려 있어 인근 양지바른 곳에 가매장했다는 증언내용을 기초로 발굴지점을 선정했고, 다른 하나는 같은 제보자가 전쟁 후에 마을에 시체가 즓지한데 냄새가 심하여 마을 어른들이 구더이에 가매장했다는 곳을 안다는 제보지점이다.
발굴결과 처음 두곳에서는 비료포대로 덮개를 한 상태로 4구가 발굴되고, 다른 한곳에서는 통신선이 집단유해를 감고 있는 상태로 5구가 발굴된다. 이런 발굴 모습은 가평 설악면 전투현장에서도 중공군이 우리 제6사단 병력을 통신선으로 묶어서 묻은 곳이 발굴된적이 있다 . 다른 한곳은 제보자의 제보로 산악 능선을 탘사하는 과정에 능선에서 지표면 유해 1구가 식별된다.
(3) 3차발굴 : 3차 발굴은 제보지역인 연화봉 일대에서 1구를 가매장 유해 1구를 발굴한다.
936고지 위치분석도(1)
중
청풍 비봉산(531) 청풍대교 앙 매포 남 가곡 단양 구인사
남 덕천리 한
강
한 도담리
선
강 고수리 봉우동 696
고수동굴 어의곡리
중 신단양 남 기촌리
상진리 금곡리
남 도전리 한 천등동굴
상진교 강 871 1110
철교 1421
신단양역 노동리 851 국망봉
한
중도리 1440
강 비로봉
슬금산 677 노동동굴
남 연화봉1394
심곡리
앙 538
구단양/역 적성산성
적성대교/단양대교 324 장현리 미조리 1201
한 현천리 1357
하진리 하방리 덕상리 493 937 1174 희방사
강 중방리 상방리 446 후곡리
고 북하리 장림리 437 또아리굴 매바위
대강 / 초교 죽령역 죽령
북상리 속 도 로
두악산
도솔봉 1314
덕고개 사인암
대강면 미노리
도락산 964
방곡 울산리
황장산 지수재
문경 봉화 예천
그럼 지금까지의 장구한 기록 검토를 통해 참전용사님이 증언한 제21-3-10중대의 전사자 추적은 모두 죽령 이남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1연대는 풍기지역의 좌측 곶지대에는 배치가 없었고, 죽령철수 이전에 지금의 죽령역 북쪽 고지군인 936-1178고지군 일대에서 아니면 남한강변 고수리와 그 우측 696고지군 일대에서, 아니면 녹두봉일대에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작까지 이 고지군에 대한 제보나 발굴탐사는 미흡한 실태다
6. 민간인 피해 기록(경북지역 망라)
가. 김천형무소 학살('50.7.10~28) : 헌병대, 특무대가 재소자 1천여 명과보도연맹원 300여 명 학살
한국전쟁 발발시 김천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및 여수순천 관련자 등 1천여 며의 재소자가 있었다. 당시 위치는 현재 김천역 근처(평화동)에 있었다.
'50.10월 25일 당시 김천 형무소 직원 정원은 129명이며, 그 구성은 형무소장이하 148명으로, '49.5.1일 160명, '49.12.20일 176명이었다. 안동지소를 갖고 있던 대형 감옥으로, 전쟁당시의 직원은 103명으로 1천여명의 재소자를 수용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하를 계속하자 7월 10일 재소자를 대구형무소에 이송한 후 직원들도 대구,부산 등지로 대피하였다.('02년 김천소년교도소 발행) 그러나 기록은 확인되지않고 있다.
김천형무소 재소자의 학살에 대한 법무부의 공식입장은 대구형무소로 이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천시사와 유족들의 제보, 당시 학살에 참여한 목격자에 의해 학살지가 발굴되면서 재소자 학살 사실이 확인됐다.
실제로 당시 재소자들은 7.10~28일 사이에 김창룡 특무대장 지휘하의 국군(헌병)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이 된 것으로 보이며, 4.3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들과 일반 잡범 및 미결수 등 재소자 1천여 명이 모두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목격자들의 제보에 이하면 형무소에서 거창 방면으로 약 14km 정도 떨어진 구성면 돌고개. 구성면 과곡의 난로공장 자리. 직지사 근처 계곡. 상주가도 등이다.
2003년 5월에 3차 조사에서 유곡매장지로 추정되는 5곳 가운데 1곳인 돌고개 시험발굴해 매장지를 발견했다. 약 80cm 깊이로 파 들어간 지점부터 유골들의 잔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탄피 3개. 신발 1족 단추 1개 및 두개골 등의 유골을 일부 수숩하고 매장상태가 좋아 확인 작업을 중단했다.
나. 김천 구성면 돌고개 학살('50.7.10~28) : 김천 형무소 관련 내용의 연장선으로 헌병 및 특무대가 재소자 1천 여 명을 학살
당시 군은 구성지서장의 빰을 때리는등 구타하면서 구덩이 팔 인부로 동네 주민들을 동원하지않았다고 행패를 부렸고, 이에 돌고개 아랫마을인 상좌원 주민 4~5명이 동원돼 구덩이를 팠다고 한다. 군 지휘관은 권총으로 주민들의 머리를툭툭 치면서 "너희도 사상이 의심스러워, 눈도 돌리짐 ㅏㄹ고 구덩이를 파라"고 협박했고 약 5~6개의 구덩이를 파게한 뒤 미리 데려온 수인복에 삭발을 한 재소자 60여 명을 구덩이 주변에 서게 한 뒤, M1, 권총 또는 칼빈 초으로 뒤에서 발포 모두 구덩이 속으로 처넣고 동원된 망르사람들에게 매장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다. 김천 보도연맹원 학살('50.7.28) : 헌병대 특무대가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으로 300여 명 학살
김천시 보도연맹은 언제 결성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당시 김천검찰지청장이 위원장, 부위원장에 정열모, 지도위원에 경찰 간부와 지역 유력인사가 임명된다.당시 선산의 박상희, 상주의 황성태와 더불어 경북 서부지역 3대 공산주의자로 이름난 임종업이 간사로 활동한다. 임종업은 가맹 자격을 확대하여 여러 장의 신청서를 나누어 주면서 아무나 가맹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오게 해 연맹원이 1천 명이 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보도연맹원과 좌익활동 혐의자들에 대한 예비 검속을 실시(6.25일 당일 전국에 긴급 통지문이 하달 됨), 김천지역은 인근 지역인 상주.구미를 포함하여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각 경찰지서에 있다가 김천경찰서로 넘겨진 뒤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유족들은 증언한다.
소개령이 내려지기 전인 7월 28일 새벽부터 연맹원을 인수한 헌벼이 연맹원의진위도 가리지 않고 전원 트럭에 분승시킨 뒤 삼엄한 경호하에 직지사 근처, 구성면 송죽동 근처, 상주 가도로 천막을 싀운 채 호송하ㅕ 산골짜기에서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도열시켜 총살했다.
4. 문경 갈평리 학살('49.9.23) : 국군 제8사단 제16연대가 주민 17명 학살
사건 당시는 국군이 태백산 지구 작전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기간은 '49.9.28부터 '50. 3.15일까지이며 예천.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제2사단 10연대 3개 대대, 제8사단 21연대 1개 대대, 삼척 주둔 독립 1개 대대가 참여했다.
대구와 포항에 주둔하던 제6연대의 반란 주모자 80여 명이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면서, 태백산.문수산.일월산.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공비들과 합류하므로서 이들의 병력이 280명으로 대폭 증강됐고, 8월 4ㅇ딜에 이르러서는 경북지구 지휘체계를 재정비하여 제3병단을 편성한다.
김달삼(제주4.3사건 주모자)이 지휘하는 인민유격대는 태백산을거쳐 일월산까지 침투하여 지방공비를 규합하는 한편, 영일군 송라면 지경리에서 북한이 해상으로 수송한 무기를 인수하여 부대를 재편성한다. 이들은 남로당의 9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경북일대에서 지서습격, 교량파괴, 식량약탈, 민간인 학살과 납치 등의 활동을 한다.
육군본부는 이들 유격대와 지방 공비들로 인해 피해가 극심해지자 '49.9.28일 충북 단양에 태백산 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칳고 제2사단 제16연대장 이정일 대령을 임명한다.
사령부는 2-16연대의 3개 대대와 제8사단 제21연대의 1개 대대, 그리고 삼척에 주둔하던 독립 1개 대대 등 5개 대대로작전을 저개하게 된다.
사령관 이정일 대령은 먼저 "남침 공비의 활동지역에 있는 지방세포를 먼저 파괴시킴으로서 공비를 분리.고립"시키는 작전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사건은 '49.9.23일 문경 갈평리 안마을에 국군 제8-16연대 소속 이근실 소대장 일해이 와서는 마을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하고 다이너마이트와 실탄을 숨겼다고 쇠뭉이로 구타하고 마을 민보단장과 부단장 등 38명을 붙잡아 가서 그중 17명을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며 사살했다.
5. 문경 석달마을 학살('49.12.24) : 구군 제3-25연대 3대대 7중대 2.3소대가 주민 86명 사망 사살 외 가옥 전소 등
'49.12. 24일 24가구 127명이 거주하던 문경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 무장 군인 70명이 들이닥쳐 자신들에게 대접ㅇ디 소흘하다는 것을 트집 잡아 집 24가구 전체를 불태우고, 주민 모두를 마을 앞 논바닥과 마을 뒤 산모퉁이 두 곳에 모아 놓고무차별 사셕을 가해 사살했다.
군인들은 영문을 모륹 채 공포에 더는 마을 사람들에게 "빨갱이 새끼들"이라 욕설과 함께 무차별 총격을 가해 죽였다. 피학살자들은 5세 미만 어린이가 11명, 15세 미만이 32명, 65세 이상 노인이 10명, 여자가 42명 이었ㅎ고 타동네도 1명이 있었다.전가족이 몰살한 집이 6세대였으며, 대가 끊긴 집안이 6세대였다.
사건 다음날 문경경찰서와 산북지서 경찰관 몇 명이 점촌국민사진관 주인을 현장에 데려와 시신과 불타버린 마을 을 촬영해 갔다. 그리고 3주 후인 '50.1.1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마을을 방문하여 동행한 이정희 문경군수에게 위로금 100만환을 전달했다. 생존자 1인당 1만 6천원씩 전달되고, 1세대당 미군용 담요 1장과 약간의식량이 지원됐다.
이 일로 문경경찰서장 이기용과 산북지서 주임이 직위해제되는 일이 있ㅇ었으나 피학살자들의 호적에는 공비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6. 문경 점촌 보도연맹 학살) 경찰이 문경 점촌일대 보도연맹원 200여 명을 점촌면 주평 앞산에서 학살
국가보안법이 48년 12월에 제정돼 적용되면서 49년에만 11만 8,621명이 체포될(유엔조선위원단)정도로 반정부혐의자가 급증하게되었고,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체제내로 끌어들여 통제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하지만 조직을 급속히 키우면서 사상과 무관한 사람들이 대다수 가입하게 되고 이들 보도연맹원은 대부붖ㄴ 전쟁 초기에 예비 검속돼 학살된다.
7. 문경 포내마을 보도연맹 학살('50.7월 중순) : 경찰이 영순면 보도연맹원 300여 명, 별암리 주민100여 명을 야산에사 학살
8. 예천 산성리 미군 폭격('51.1.19) : 미 해군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2대 전투기와 미 제5공군 폭격기들이 마을 폭격으로 48명(임산부 8명), 부상 90여 명, 부상자 22명은 2년 이내에 사망, 가옥 88동 소실
이 지역은 순흥 안씨가 모여사는 집성촌으로 약 150가구에 1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51.1.19일 11시경 정찰기 2대가 저공비행하다 사라진 후 11시 30분 경 전투기가 나타나 무차별 기관총 난사와 폭탄 투하를 시작했다.
주민들은 폭격의 원인을 당시 안동 북후면 신전 1리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토벌이 목적이었으나 지형이 비슷한 산성리를 폭격한 것으로 추정한다.
폭격 3일 후에 미군이 폭격 장면을 전부 사진으로 찍어갔다고 하며 . 피해 주민들이 1966년부터 정부에 진상조사를 요구했으나 1999년 11월 16일 국방부장관 명의로 노근리 사건 해결 후 사안별로 검토처리할 계획이라 했다. 그러나 아직 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9. 예천 진평리 미군 폭격('51.1.19) : 미 제10군단의 네이팜탄 폭격('51.1.19) : 미군 폭격으로 사망 30명, 부상 15명 정도 발생
예천군 감천군 진평1리 도평마을은 북쪽으로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와 접하여 30여 호가 살고 있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폭격 3일전 인민군패잔병이 이웃 노죄리를 거쳐 주마산으로 해서 학가산 방면으로 지나갔고, 당일 마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니까 이것을 인민군 패잔병으로 오인해 무차별 폭격한 것으로 보고 있다.
1.19일 마을 주민 일부는 마을에서 젊은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있었고 타작을 하는 사람들과 삼베를 매는 부인 등 일부는각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오후 2시경 정찰 비행이 있은 후 주민들이 갑자기 기관총사격과 폭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산성리 폭격과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진행된 사건으로 진평1리에서도 주민 30명이 사망하고 15명 정도가 부상했다.
10. 안동 석탑동/대곡동('50.7월) 보도연맹 학살 : 경찰이 마을 주민 다수를 보도연맹원 또는 예비검속 후 학살
11. 영덕 지품면 학살('50.1.1) : 국군 1개중대(추정)가 송천리 주민 50여 명 학살
주왕산 부근 빨치산을 추적하던 국군 제1개 중대가 '49.112.31일 산아래 거주하던 송천리 마을 주민을 모든 뒤 주민 50여 명을 묶어 원전리로 글고 갔다. '50.1.1일 정보계 상사 2명이 이들을 조사 후 1월 2일 원전초등학교에서 중대장이 무작위로 각별계곡으로 끌고 가 15명을 학살했다.
12. 영덕 달산면 주응1리 / 영덕 영덕읍 화개 2리 보도연맹원 학살('50.7.14~15) :
주응1리 : 경찰이 '50.7.5일 마을 주민을 경찰이 잡아간 후 영덕에서 교육받았으며, 7월15일 매봉산에서 방공호를 파게 하고는 그 방공호에 몰아넣고 학살
화개2리 뫼골: '50년 7월초에 경찰이 영덕군내 보도연맹 등 주민들을 조사 및 교육 명목으로 소집했다.이들은 2일에서 1주일간 교육을 받은 후 남석이 소재 곡물창고에 1~2일 감금됐으며, '50.7.14일 160여 명이 군인(맹호부대, 김종원부대)들에게 인계돼 뫼골에서 학살됐다.
13. 의성 제오리 미군 폭격('51.2.4) : 의성군 금성군 제오2리 못동골에 미군 폭격으로 주민 17명 사망, 17명 부상, 마을 전소
당시 남쪽으로 피난갔다가 국군이 다시 북진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ㅇ이 서로 생사를 확인하며 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을은 잔치분위기였다. 주민들은 지형이 비슷한 금성산 뒤쪽 가음면 척화마을에 인민군 패잔병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2.4일 아침 9시 반, 잠자리 비행기가 한대 나타나더니 20여 분 후 비행기 네 대가 마을을 향해 소나기 폭탄을 쏟아부었다. 폭탄맞은 사람들의 팔 다리가 공중으로 날아다녔다.
000(목격자) : 집에서 기르는 소 있잖습니까, 소 등허리에 불이 붙어 소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려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 합니다.
부모 형제를 찾을 사이도 없엇습니다. 정신없이 도암을 다녔어요. 저역시 동네 개울에 머리를 처박고 덜덜 떨고 있엇습니다.말 그대로 생지옥 같은 20여 분이 흐르고 폭격소리가 멎었습니다.
14. 구미 이문리 학살('50.7~8월) : 국군이 피난갔다가 너무 일찍 돌아왔다는 이유로 구미 선산읍 이문리 사거리에서 20~30명을 총살했다.
15. 칠곡 신동재 학살('50.8.10) : 국군 헌병이 지천면 신동재 외 지역에서 500명 이상 학살
대구 지역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이 발발한 후에 대구는 거의 무법천지였으며 경찰들이 각 동네를 돌면서 그동안 경찰서에 보관중이던 주민들의 신원확인 자료를 토대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은 물론 시위에 가담한 경력이 있는 사람, 그 가족 친척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4.19 직후 진상규명 운동시 유족회 조사부장이던 이복녕 씨의 증언에 의하면 대구, 경북지역에서 3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끌려간 사람들은 가창, 월배, 코발트과ㅣㅇ산, 볼리동, 성서 등지에서 학살됐다. 이렇게 볼 때 신동재에서 학살된 사람들은 대구, 경북 지역 사람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50.7월에 칠곡 지천면 신동재 부근에서 3일에 걸쳐서 500여 명이 헌병대의 지휘하에 학살된다. 20대의 트럭에 실려 왔으며 12~13세 가량의 여학생도 있고 양복을 입은 젊은이도 많았다. 이 내용은 대구에 주둔한 미 제1기갑사단의 보고 문건에서 확인됐으며, 이는 학살에 가담한 민병대원 임종현의 증언, 그리;고 1960년 진상규명 운동 당시 매일신문에 보도된 현지 주민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미군 관련 자료는 워커 명의로 '50.8.18일 주한 미국대사 앞으로 보내진 A4지3장 분량으로 '50. 8.10일 오후 3시에서 4시 30분경 대구와 왜관 사이를 정기 순찰하던 미군이 대구 북쪽 8마일 지점에서 큰 충성을 듣고 골짜기로 가보니 헌병이 200~300명을 학살하고 있었으며 이미 200여 명이 학살된 후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서에 전하는 내용은 "피의자들이 20명 정도 일렬로 서 있었다. 피의자 정면에는군인들이 서 있엇고, 주변에는 카빔으로 무장한 다른 군인들이 있었다. 명령이 떨어지면 정면의 군인들이 총을 피의자의 머리에 대고 쏘았다. 한 번에 죽지 않은 경우 수 차례 발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학살 후 3시간이 지난 뒤에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서 골짜기의 시체 더미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시체 더미에서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채 아직 솜을 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자싡의 차례가 오지않은 삵람들은 뒤편에 사슬로 손이 단단히 묶인 채 성 ㅣㅆ었다. 죄수들은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는 울음을 뱉어냈다. 헌병들은 대단히 잔인했다.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치치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발로 차기도 했다. 학삵을 명령한 군인은 이 죄수들이 스파이 행동을 했다고 말했는데, 다른 정보는 없다. 시체는 제대로 묻히지 않았으며, 오물이나 나무 잔가지에 반쯤 덮혀 있다."
구자승(당시 동네 이장) 증언 : 음력 6월 27일 3시경 신동 고개의 골짜기에서 학살이 발생했다.약 500명 가량의 사람들이 20대 이상의 트럭에 실려와 이곳에서 학살되었으며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와 주민들이 기겁을 하고 도망가지도 했다. 그러나 이 즈음에 피난을 가던 싯점이어서 주민들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피난을ㄹ 갔는데 국군이 북상을 하면서 동네에 돌아와 보니 개천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두 지역에서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9월 말 이전까지 수습하였는데 그 중에는 동국대학교 뺏지를 단 학생과 여학생도 포함돼 있었다. 시체의 상당수는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일부는 흰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후 대구와 군산에서 유족이라는 사람들이 몇 명 찾아온 일이 있ㅇ었는데 그 이후에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16. 칠곡 왜관교 폭파('50.8.3) 미군(제1기갑사단 호바트 게이 소장과 장교들) : 다리가 폭파되어 피난민 수백명이 사망
다리 폭파를 명령한 미 제1기갑사단장 호바트 장군은 미군 전사를 편찬하는 사가에게 보낸 원고에서 "피난민이 퇴각하는 미군을 끊임없이 따라붙었지만 인민군의 남하가 임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라를 폭팧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인민군이 낙동강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흘 뒤인 7일께였다"고 참전 미군들은 증언한다.ㅣ
'50. 8월 김천-대구간 4번 국도를 잇는 유일한 인도교인 낙동강 연안의왜관교 부근에는 많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붐볐다. 당시 유엔군은 피난민들이 인도교를 건너 소개지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노근리 사건을 특종보도한 AP통신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증언을 빌어 노근리 사건 1주일즘 후인 '50. 8. 3일 낙동강의 전략적 요충인 왜관교와 현재 구 고령교를 폭파, 수백명의 피난민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미군 전사 비밀 해제된 미국방부 문서 등의 기록과 미 재향군인, 한국 피닌민 모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 6주 후인 '50. 8. 3일 인민군 3개 사단에 밀려 낙동강을 따라 후퇴하던 1기갑사단장 호바트 게이 소장과 장교들이 인민군을 낙동강 이북에서 저지할 목적으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50.8월 한국에 온 지 며칠밖에 안된 게이 미 1기갑사단장은 다리근처에서 부대의 철수를 지휘하고 있었다. 인도교 건너편에는 피난민들이 도강 기회를 보고 있다가 3일 해질 무렵 후위의 미 제8연대가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려고 할 때 뒤따라 몰려왔다. 피난민들은 경고 사격에도 남행을 계속했다.
'50.8월 3일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굉음과 함께 왜관교의 인도교 복선철교 각 1구간이 폭파됐다. 낙동강은 흰 옷 입은 사람들ㅇ의 절규로 가득찼다. 남행을 재촉하느라 아침도 걸렀던 많은 피난민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희생자는 주로 여자와 어린이 등 노약자였다. 다리가 귾긴 후 헤엄쳐 강을 건너려던 피난민들이 익사하기도 했다.
당시 왜관읍은 소개령이 내려져 피해가 없을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자 대부분은 외지의 피난민으로 보인다.
복수이(왜관교 폭파 목격자, 당시23세) : 미군들이 김천과 성주 등 강 건너쪽에서 피란 내려오던 사람들을 향해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게 총을 마구 쏘았다... . 많은 피난민들은 다리가 끊어지자 헤엄을 쳐서 가을 건넜는데 상당수는 수영 미숙으로 빠져 죽기도 했다.
김원기. 김상권(고령교 폭파 목격자) 증언 : 미군들이 다리폭파 전에 쏜 화염탄에 맞아 불에 타 숨진 어린이도 봤다.불이번쩍이;면서 소이탄으로 불리는 화염탄이 떨어졌는데 사람이고 식물이고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얼마나 죽고 다쳤느지 가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엇다. 당시에 숨지거나 다친 사람들이 이 고장 사람ㄷ르이 아니고 합천. 거창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이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의 관심이 적었다.
17. 대구형무소 학살('50.7월~8월) : 특무대, 헌병, 경찰이 대구형무소 인근 가창, 경산 코발트 광산, 삼천포 등에서 3천여 명 학살
재소자 학살은 정치범을 중심으로 이뤄졌지만 일반 잡범도 포함됐으며 미결수와 기결수의 구분이 없었다. 학실의 이유는 인민군이 남하하면 인민군에 동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25당시 대구형무소에는 8천26명의 수감자가 있었다. '60. 6월 7일자 매일신문은 이중 군경에 신병이 인계된 1천 402명의 명단이 확인되었으며 그들이 모두 사형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대구 인근의 가창계곡이나 경산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650년 국히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유골과 탄피가 확인된바 있다. 또 가창 계곡에서는 댐 공사를 위해 굴착작업을 하던 기사가 도망갈 정도로 수많은 유골이 땅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년 5월 15일자 한국일보는 1950년 8월 경 대구형무소에서 진주형무소로 이감시킨다며 데려간 미결수 300여 명이 삼천포 앞바다에 수장됐다고 보도했다.
2002년 4월 11일자 국민일보에 따르면 대구형부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처리된 1천 404명 중 1천 172명이 이감 도중 학살됐ㄲ다는 내용을 관련자들의 내용을 증언을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때 현재 확인된 피학살자의 수만 해도 3천여 명에 이른다.
18.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50.7~9월) : 군경이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청도.영천 지역 보도연맹원 3천 500여명
'50. 7~8월에 경북 경산의 코발트 폐광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있었다. 경신시 평산동 산42-1번지 일대 페광산 수싲갱도와 인근 골짜기에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산 청도 지역 보도연맹원 3천 5000여 명이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당시 목격자들은 하루에 열대 정더의 트럭이 사람을 실고 왔으며 이런 상황이 열흘간 진행되었다고 한다. 또 경산경ㄹ찰서에 근무했던 이가 임종 직전에 경산 코발트 광사네서 3천 500명이 죽었다는 증언을 자식들에게 남긴 점도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당시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은 포승줄에 묶인 채 군용트럭에 실려와 수직갱도 입구에 세워져 총살되거나 산 채로 수장되기도 했다. 또 예리한 흉기로 가격당하거나 기름에 태워져 학살되기도 했다.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에 인근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코발트 광산으로 끌려와 학살되었다.
1960년 4.19이후 유족회 활동을전개할 당시 경북 유족회가 결성된바 있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 후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하여 반 구가단체로 규정돼 강제 해산되고 유족회 간부들은 실혀을 언도받았다.
이후 잡ㅁ잠해 오다 2000년 유족들은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를 결성해 매년 위령제를 봉행하고 학살지 보존 등 진상규명을 위해 활동 하고 있다.현재 광산 수평갱도 상하 2개소와 대원골 골짜기에 유골 수백구가 방치돼 있으며 이중 일부를 연세대 법의학 팀에서 감식한 결과 1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남자의 유골로 총상흔, 둔기에 의한 외상흔, 하영ㅁ흔 등이 보인다고 감정했다.
사실 이곳은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이 발굴을 시행하여 많은 유해를 발굴 했고, 학교내 시설에 자체 보관 중이기도 하다. 지자체에서 에산사업으로 진행되었으나 그 처리과정에 정붕와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미루어진 상태다. 너무 많은 유해가 죽어 있어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도 한다.
[내가 한마디 부연하면---_
그런데 문제는 앞에서 잠간 기록된 5.16혁명 이후에 이 문제가 어필되었다가 반국가단체로 판명되어 그 간부들이 실형을 언도 받기도 한 지역이다. 이는 곧 모두가 전혀 무고한 이들이 아닌 일부는 북한을 옹호했던 인원들이 있었다고 봐야한다.
이 지역을 2000년도에 탐문시 많은지역주민들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분들의 증언이 트럭에 실려오며 "김일성 수령 만세"를 외치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죽일테면 죽여라, 곧 해방군이 들어와 너희들을 족칠 것이다 등 수상한 언행을 많이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 진실을 규명한다고 조사하는 과정에는 그런 분들은 모두 작고하셨다. 그러니 한 맺힌 유족들의 일방적인 주방만이 난무하고 진실처럼 되어 마치 무자비하게 아무런 죄가가 없는데 무모하게 학살되었다고 일방적인 기록만이 남길 수도 있다고 본다. 이것 또한 역사의 조작이라 볼 수 있다.
전쟁이 문제다. 분명 박헌영이 존재했고 남로당이 존재하고 있었고,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4연대 반란사건(10.29사건)과 대구폭동, 대구 6연대 반란 등 우리는 북한군이 남침시 북한군의 편이 되어 적화통일을 기도할(이유야 어지되었던 ) 지원세력이 많았고 이를 제거하는 것은 필요의 악적인 것은 현실 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 좀더 세밀하게 그리고 준법절차를 지키고 이런 일들이 벌어졌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계속되는 좌우익의 대결과 프락치 사건이 난무하고, 북한의 인민 유격대가 태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침투해 오고 , 지방 공비들이 준동하는 등 무정부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한,다시 말해 준비되지 못한전쟁을 강요당한 입장에서 시행착오가 크게 발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 전쟁은 비극이다. 다시는 이땅에 전쟁이 없도록 유비무환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영동지역 탐문시 한 참전군인을 만나 이곳에 얽힌 비화를 들었다. 본인은 대구 방직공장 부지에 모여 자원입대했다고 한다. 당시에 많은 인원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곳에 모여들어 며칠 훈련을 받고 전선으로 가는데, 모두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상 검증을 받는데 사상검증을 한다고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묘히 스무고개 문제로 고라낸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본인의 집이나 집안에 보도연맹원이 있거나 당시에 월북자가 많았는데 그런 사람이 있으면 밧줄을 길게 느려뜨려 놓고 갈라서라한다고 한다. 물론 미끼로 집에 가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니면 후방에 근무하게 한다는 것이다. 본인도 뭘 모르고 어느 순간 그런 쪽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현역 중에 같은 동네 형이 있어서 살며시 다가와 반대로 움직이라 하여 살았다고 한다. 바로 여기까지 라고 하고선 트럭에 태워서 떠났는데 바로 들리는 소문이 코발트 광산으로 가서 죽었다는 것이다.
19. 청도 곰티재 보도연맹 학살('50.7.16~20일사이, 8.14~15일) : 경찰이 보도연맹원 500여 명 학살(7월에 372명, 8월에 100여 명 추가 학살)
보도연맹 청도군 이서면 지부의 경우, 전현직 면장, 조합장, 교원, 면서기, 전 경찰 등 지역사회 중견인사들이 총망라돼 있었고, 7100명에 이르는 연맹원 중엔 공산주의자로 복역한 사람은한두사람뿐이었다. 나머지는 빨치산의 총칼에 강제당한 상태에서 봉홧불을 지르는데 따라간 사람, 곡식이나 의류를 탈취당한 사람, 빨치산의 삐라를 주워서본 사람, 짐을 잠못 운반한 사람, 몇 시간 동안 사랑방과 마루를 빨치산의 선동 장소로 징발당한 사람, 공산주의자인 아들이나 형제, 친구를 둔 사람 등이다
1950년 6월 중숮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한달 정도 교실 등에서 연금 상태로 집단생활을 하다가 현재의 청도 경찰서 남쪽 50미터에 있던 국민회당이라는 곳으로 집결되었다. 가족들이 가보니 400여 명이 모였는데 사흘 후 가족들이 찾았을 때는 회당이 텅비어 있었다. 이들은7월 16일 이서면 곰티재에서 학살되었으며, 이후 8월 14일 15일 경에도 곰티재, 한재 밤티골, 각북 헐티재 등에서 100여 명이 학살 되었다.
20. 포항 장기곶 보도연맹 학살('50년 7월 초) : 국군(해군 포항경비부), 경찰, 미군이 보도연맹원 최소 200여 명 학살
포항경비사령부는 '50년 7월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하달된 "좌익분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에 따라, 포항. 경주. 영덕 경찰서의 협조로 용공분자로 불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각 경찰서 관할지역 주민 400~500명을 체포한다. 이들에 대한 신원분류는 이종황 포항경찰서장, 이강주 경주경찰서장, 박주현영덕경찰서장, 포항경비부 정보참모 차병엽 중위, 헌병대장 고윤석 중위, 정보장교 박재옥 중위 등이 함께 했다. 이들 중에 200여 명을 처형 대상자로 분류하고 나머지는 귀가 시켰다.
처형대상자는 '50. 7월초에 영일만 장기곶 3~5km 지점에서 총살한 후 수장했다. 처형 대상자들은 군함에 실리어 포항을 출발, 이곳에 도착하여 함상에서 총살됐고 대부분 중장연 남자들이었지만 여자도 있었다. 피학살자들이 떠오르지 못하도록 몸에 돌이 매달린 채 바다로 던져졌다. 처형은 해군 장병들과 경찰이 집행했으며 군경의 수는 반반이었다.
이 사건은 2000년 1월 10일 한국전쟁 당시 해군 포항경비부 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에비역 해군 준장이 증언한 내용이다.
21 포항 흥해읍 북송리 폭격('50.8.16), 포항 송골계곡 미군포격('50.9.1)
흥해읍 북송리 : 당시 이 지역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시기로서, 주민들은 폭격이 있기 1주일 전에 북한군이 들어왔다 나간 상태였고, 신광 우학 동네에는 북한군이 있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낮 12시쯤 미군기 20여 대가 신광면을선회한 후 북송리에 폭격을 가해 3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했다.
포항 송골계곡 : '50.9.1일 새벽에 북한군이 포항시내로 진입했다. 학산동, 장성동, 항구동 등 포항지역 주민 1천여 명이 여남동 해변으로 몰려들었다. 백사장 바로 뒤에 경사가 80도가 넘는 가파른 산이 버티고 있어 총탄이 거기가지는 날아들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쑈기 때문이다.폭이 10m도 안 되는 좁은 백사장에 ㅂ천여 명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피닌민에게 함포 사격을 가한ㅇ 헤이븐 호는 1944년 진수된 배수량 3천 218통의 구축함으로 5.38인치 등의 포로 중무장대 있었다. 2004년 7월 부산일보가 헤이븐 호의 작전일지를 인용하여 미군이 피학살자들이 피난민임을 인지했으나 ㅂㄱ한군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는 이유로 폭격을 한 것이라고 보도함으로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주민 100여 명이 사상됐다.
이 헤이븐 구축함은 1973년 12월에 한국군에 넘겨진 후 "인천함(DD 918)"으로 명명돼 20년간 활동했다.
22. 포항 청하면 이가리 미군 폭격('50. 9.8일) : 미군 폭격기 4대가 청하면 이가리를 폭격하여 피난민 50여 명 사상, 다수 부상
이가리에는 청하면 일대 피난민과 영덕 방면에서 온 피난민이 있었다. 당일 오후 3시경 정찰기 1대가 공중종찰을 하고사라지더니 곧바로 폭격기 4대가 2차례에 걸쳐 폭격을 퍼부어 마을 주민 11명 명 등 50여 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주민들은 마을이 폭격당한 이유에 대대 폭격 전날 마을 창고에 북한군 군악대, 여성동맹 회원들이 모여 축하파티를 하며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았는데 이 정보로 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하고 있다.
23. 포황 송라면 광천리 미군 폭격('50.9.23) : '50. 8월 12일 광천 2리 인근 하천 주위에 300여 명이 천막을 치고 임시로 살고 있었다. 당시 마을에는 북한군 야전병원이 있었으나 은폐돼 있었다. 마을의 집들도 북한군 차지가 돼 주민들은 하천가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북한군 막사와는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50.9.23일 미군 폭격기 2대가 소이탕과기총사격을 퍼부어 주민 40여 명이 사망하고 6명이 부상했다.
24. 독도 미군 폭격('47.4월경, '48.6.8일, '52.9.15/22일) : 미 제5공군 B29 93폭격기 편대가 독도 조업 어민 150~300여 명 학살
1948년 일본 오기나와에 배치된 328, 329 , 330 비행대로 구성된 미 제93포격비행대대는 B-29 공중 요새 폭격기들이 배치되어 임무수행을 했다.
1948년 4월 15일자 전력공군사령부의 명령 16호는 미 93폭격비행대대의 3달간 일본 카데나 공군기지 내 배치목적에 대해 " 미 전략공군사량부에 배속된 B-29 비행대대의전반적인 전시대비체제 점검을 위해 오키나와 지역에 21차례에 걸쳐 폭격 임무를 실행하는 것"이라 요약하고 있다. 이 명령에는 폭격 목표들이 나열돼 있는데 독도는 21차례중 3번째 임무였다.
미 공군기의포격으로 우리 어민들이 희생당한 1948년6월8일에는 독도가 폭격 훈련지로 지정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후에 1950년 7월 6일에 폭격연습지로 지정되었고, 1952년 7월 26일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따른 행정명령에 의해 재지정됐다.
1948년 6월 8일의 폭격 희생자는 최소 150명에서 최대 3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애초 이 사건은 14명 혹은 1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알려졌으나, 강원에서 온 배 등 어선이 모두 32척이었고, 1척당 5~8명이 승선했으며 단 2척의 승선자만 생존했다는 생존자 공두업 씨의 증언으로, 추정하건데 최소 150에서 250명 까지 사망한것으로 보인다. 1952년 9월22일의 경우는 당시 독도 현지에 23명이 있었다고 하나 피해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완식(당시 324세, 강원도 묵도 궁장환 선장) 증언 : 울릉도의 미역 채취가 끝났으므로 1948년 6월 4일경 독도로 가서 일하고 있었다. 그날 12시쯤 비행기소리가 들렀으나 파도소리로 알고 있었더니 맨 처음에 독도 위에 잇는 샘멸 위에 폭탄이 떨어졌다.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에 배에서 물속으로 뛰어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때 3대의 비행기가 섬 동쪽 20미터 부근에서 미역을 따고 있는 어선 20여 척에 동맹이 같은 폭탄을 여러개 투하하고 있었는데 , 다른 비행기가 뒤를 이어 나머지 배를 향하여 폭탄을 던지고 다시 반대편에서 다른 편대가 날아와 폭탄을 뿌렸다. 섬 부근은 삽시간에 폭풍과 화약 냄새로 지옥과 같은 정경을 이루었다.
그때 다시 비 오는듯한 기관총소리가 들렸고바위와 배 위에 총알이 비오듯 하였다. 나는 황급히 물 속에 몸을 숨겼다. 이 통에 우리 배에서 밥 짓는 김중순(19)은 등에 총알을 맞아 즉사하였다. 그날 현장에 30여 척의 배가 있었는데 겨우 몇 척만 남고 침몰, 파괴되고 말았다,. 아마 4차례의 폭격이 있었고, 나중에 보니 바위 위에 다리와 팔이 떨어진 피투성이의 시체가 산란하고 바닷물은 뿌연 잿빛이 되고 여기저기 물 속에 배의 파편과 시체가 떠돌았다.
당시 미군은 독도가 폭격 연습장이었고, 배가 워낙 작아서 바위의 일부로 보여 폭격해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발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