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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김씨족보 원문보기 글쓴이: 죽산
編年駕洛國記(편년가락국기)
篇者(原文);金雲培(1914年甲寅譜載)
解釋; 206.6.19.金順大
按年表 檀君戊辰元年二千三百七十五年 ○箕子己卯元年一千一百六十四年 ○新羅始祖赫居世居西干甲子開國九十九年第三王儒理王十八年
연표를 살펴보면 단군의 무진원년(BC2333)으로부터 2375년 O기자의 기묘원년(BC1122)으로부터 1164년 O신라시조 혁거세 거서간의 갑자년(BC57) 개국으로부터 99년이 되었고 3번째 왕인 유리왕 18년(42년)이다.
□壬寅 馬韓王箕準南遷丁未開國二百三十六年 ○新羅儒理王十八年 ○高句麗大武神王二十四年 ○百濟多婁王十四年 ○漢光武建武十八年 ○西曆紀元後四十二年
임인(42년) 마한왕 기준이 남쪽으로 천도하여 정미(BC194)년에 개국한지 236년 O 신라 유리왕 18년 O고구려 대무신왕 24년 O백제 다루왕 14년 O서력 기원후 42년
元年春三月駕洛國王金首露立國號大駕洛
원년 봄 3월 가락국왕 김수로가 나라를 세우고 나라이름을 대가락이라 하다.
按國號大駕洛見東史略
국호를 고찰해 보면 대가락이라는 것은 동사략[1]에서 볼 수 있다.
[1]동국사략은 개국이래 고려말까지의 편년사략인바 조선태종의 명에 의하여 권근<權近>, 이첨<李詹>, 하윤<河崙> 등이 편찬했고 원본은 6권 2책으로 1질본이었다. 동국사략은 이후에 표제 음주동국사략<音註東國史略>이 활인<活印>되어 청천 유희령 편주<菁川 柳希齡 編註>와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아들 권준의 찬차<撰次> 11권 5책으로 간행된 바 있다. 상권에는 개국이래에서 고려초기까지의 사실이 실려있고 하권에는 고려중기이하로 되었다. 이 책의 간행된 시기는 서문이나 뒤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편집인과 지질 그리고 책의 체제로 미루어 조선 태종연간의 판본으로 추정한다.
○丁氏鏞弁辰考弁韓者今金海固城巨濟咸安等沿海之地
정약용(1762∼1836)은 변진고(弁辰考)[1]에서 변한은 지금의 김해, 고성, 거제, 함안 등 바다에 인접한 지역이라고 한다.
[1]정약용의 與猶堂全書 중 第六集地理集 第二卷疆域考의 弁辰別考亦名迦羅考 내용임
○後漢書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其國近倭
후한서에는 변진이 진한과 같이 섞여서 살고 있고 성곽과 의복이 모두 같으며 그 나라 가까이에는 왜가 있었다고 한다[2].
[2]後漢書, 東夷列傳, 원문;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絜淸而刑法嚴峻其國近倭
○魏書瀆虛國與倭接十二國亦有王施竈皆在戶西鏞按弁者駕洛也駕洛者伽倻也冠幘之尖頂者謂之弁亦謂之駕那至皂隸戴尖頂者名駕那亦謂金駕那駕洛國今金海或稱加羅或稱伽倻此乃弁辰之總主也新羅旣爲辰韓則駕洛爲弁辰漢史志弁韓與辰韓雜居羅史麗史駕洛與新羅雜居駕洛之爲弁辰無可疑也又曰作新羅史者宜作迦邏本記以當秦本記義例而金太史富軾闕焉作弁辰考及別考
위서에는 독로국이 왜와 인접하고 있고, 12국도 또한 왕이 있으며 부엌신(神)을 모두 문의 서쪽에 두고 있다[3]. 정약용은 생각하기를 변(弁)이라는 것은 가락이며 가락이라는 것은 가야이다. 정수리(이마)가 뾰족한 사람은 변한을 말하며 역시 가나(駕那)를 말하니 어린아이에 이르기 까지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녀 이마가 뾰족하게 된 사람을 가나(駕那)라 하니 역시 금가나(金駕那)를 말한다. 가락국은 지금 김해이며 혹은 가라(迦羅) 혹은 가야(伽倻)라 하였으니 이는 변진의 총 지배자이었다. 신라는 진한이 변하여 된 것이고 가락은 변진이 변하여 된 것이다. 한나라의 역사서(漢史志)[4]에는 변한은 진한과 섞여 살고 있다고 하고, 신라사와 고려사에서는 가락은 신라와 섞여 살고 있었다고 하니 가락은 변진이 변하여 된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말하기를 신라역사를 지은 사람은 마땅히 가라본기를 작성하였으니 당연히 <신라>본기를 지을 때 이 예를 따라야 하였으나 태사 김부식이 누락시켜 <정약용이>변진고(弁辰考)와 별고(別考)를 썼다고 한다.
[3]三國志, 魏書, 東夷傳, 원문; 弁辰與辰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祠祭鬼神有異施竈皆在戶西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4]漢史志; 漢書 또는 後漢書의 志를 말하는 것 같으나 이 들 책에는 위의 내용이 없고 앞에서 말한 후한서의 동이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大韓疆域考太史金富軾云南伽倻始祖首露與新羅同姓此猶以同姓言至慶州金氏古書始祖閼智首露王之後裔許尙書傳碑文卽以五加耶爲五弟瀆亂倫常朝野輯要以爲閼智乃桃山聖母所誕最得眞傳如皇太后弟寶玉仙來遊長遊之事而生子而遺世是爲閼智盖原始人氏之始闢恒見此異也
대한강역고[5]에서 태사 김부식이 말하기를 남가야의 시조인 수로는 신라와 동성(同姓)이라 하였고 이는 동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주김씨의 고서에 시조 알지(閼智)가 수로왕의 후예라고 되어 있다. 허상서가 비문[6]에서 전하기를 5가야는 5명의 동생이 만든 나라이나 인륜의 도리를 어지럽혔다고 되어 있고, 조야집요[7]는 알지는 도산성모가 낳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가장 진실되게 전하는 것에 의하면 황태후의 동생인 보옥선이 장유사에 놀러왔다가 아들을 낳아 세상에 전한 것이 알지가 되었다고 하니 대개 옛 사람들의 씨족의 시작은 항상 보는 바와 같이 서로 다르다.
[5]1811년 정약용이 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1903년에 장지연이 현대적으로 고쳐 쓴『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를 말함.
[6]허목(許穆)의 首露王納陵碑陰記(수로왕납릉비음기)인 것 같으나 위의 내용은 없음. 또한 허적(許積)이 쓴 駕洛國王陵碑文(가락국왕릉비문)에도 위의 내용은 없음
[7]조야집요(朝野輯要); 저자미상의 역사책
○舊譜駕洛國記有數本世傳後漢光武十八年壬寅三月三日駕洛九干我刀汝刀彼刀吾刀留水留天神天神鬼吾天等率其衆稧飮于水濱望見龜旨峯有異氣且聞空中語乃就而視之有紫纓懸金榼自天而下開而視之有金色六卵圓如日輪乃奉寘我刀家翌日九人咸會開榼六卵剖殼化六童子年可十五容貌奇偉衆皆拜賀日就岐嶷歷十餘日身長九尺是月望日遂奉其始生者一人推立爲主卽首露王也
구보(舊譜)의 가락국기는 여러 가지가 세상에 전해져 오고 있다. 후한의 광무 18년 임인(42년)3월 3일에 가락의 9간인 아도, 여도, 피도, 오도, 유수, 유천, 신천, 신귀, 오천 등이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물가에서 마실 것을 즐기면서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있었다. 또 공중에서 들려오는 말이 있어 이에 나아가서 바라보니 자주 빛 줄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매달려 있고, 하늘로부터 아래로 내려왔다. 열어서 보니 금빛의 6개의 둥근 알이 있었는데 마치 태양과 같아서 이에 받들고 와서 아도의 집에 모셔두었다. 다음날 9사람이 모두 모여 상자를 열어보니 6개 알이 껍질을 깨고 나와 6명의 동자가 되어 있었다. 나이는 15세 정도로 보이고 용모는 기이하고 위대해 보였다. 무리들이 모두가 절하고 경하하였다. 날이 갈수록 장성하여 10여일이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었다. 이달 보름날 마침내 그 아이들 중 처음 태어난 한사람을 받들어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니 즉 수로왕이다.
定版圖封伽倻五國
나라의 경계를 정하고 가야5국을 봉하다.
高麗史云金州本駕洛國新羅儒理王十八年駕洛之長我刀干汝刀干彼刀干等九人率其民稧飮望見龜旨峯有非常聲氣就視之有一童子年可十五容貌奇偉衆皆拜賀盡禮童子日就岐嶷身長九尺九人遂奉以爲王是首露王也國號駕洛又稱加耶後改爲金官國四境東至黃山江東北至伽倻山西南際大海西北際智異山卽位一百五十八年薨
고려사에서 말하기를 금주(金州)는 원래 가락국이고 신라 유리왕 18년에 가락의 촌장 아도간, 여도간, 피천간 등 9명이 그들의 백성을 거느리고 마실 것을 즐기면서 구지봉을 바라보니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어 나아가 바라보니 한 아이가 있었는데 나이는 15살 정도이고 용모가 아주 아름다웠다. 무리가 모두 절하고 경하하며 예의를 다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나 키가 9척이 되었다. 9명의 사람들이 마침내 왕으로 모시니 이분이 바로 수로왕이다. 국호는 가락이라 하고 또는 가야라 칭하였고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사방의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산강(현 낙동강), 동북쪽으로는 가야산에 이르고 서남쪽은 큰 바다와 접하고 서북쪽으로는 지리산과 접하였다. 즉위한지 158년에 서거하셨다.
○舊譜國記立爲王卽首露王也餘皆分封五伽倻王生于金榼故因以金爲姓以其始見於世故名首露國號駕洛
구보(舊譜)와 국기(國記)에 왕으로 된 분은 수로왕이고 나머지는 모두 5가야의 왕에 봉해졌다고 한다. 금합(金榼)에서 탄생하였으니 김(金)을 성으로 하고 그가 처음 세상에 나타났으니 이름을 수로(首露)로 하였고 국호를 가락이라 하였다고 한다.
○大伽倻今高靈小伽倻今固城碧珍伽倻今星州阿那伽倻今咸安古寧伽倻今咸昌
대가야는 지금의 고령이고 소가야는 지금의 고성이고 벽진가야는 지금의 성주이고 아나(阿那)가야는 지금의 함안이고 고령가야는 지금의 함창이다.
○東國總目始生者爲大駕洛遂以五伽倻爲王兄弟丁氏疆域考斥之至引崔致遠以大伽倻始祖朱日金官始祖靑裔爲兄弟以爲必有據之言則誣也
동국총목에는 처음 태어난 분이 대가락<의 왕>이 되고 뒤이어 5가야의 왕이 된 사람들도 형제이다.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이를 배척하고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였는데, ‘대가야의 시조는 주일(朱日)이고 금관의 시조는 청예(靑裔)이니 형제이다 라고 한 것은 반드시 무슨 근거가 있어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믿을 수 없다.
○按別考弁辰十二國皆隷金官金官者弁辰之總主也歷史弁韓與辰韓馬韓稱三韓盖此二國亦各統十二國凡二十四國見史略
별고(別考)에는 변진 12국이 모두 금관에 예속되었으니 금관은 변진의 전체 지배자이다. 역사에는 변한은 진한과 마한과 같이 삼한이라 칭하였다. 대개 이들 두 나라 역시 각각 12국인 무릇 24개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사락(史略)에서 볼 수 있다.
□甲辰 新羅儒理王二十年○東漢光武建武二十年○西紀後四十四年
갑진(44년) 신라 유리왕 20년(21년이다) O동한의 광무제 건무 20년 O서기 44년
春二月築都城于金官城營宮室
봄 2월 금관성의 도성을 쌓고 궁실(宮室)을 짓다.
按三國史金庾信十二世祖首露壬寅開國號曰伽倻後改爲金官國新羅史稱金官國主此皆因金官爲國都之號因以稱國之左證也亦稱迦邏此見梁書新羅百濟附庸於迦邏丁氏考迦邏爲主新羅附庸北史隨書皆信史云當時稱國不一或以駕洛而稱伽倻而伽倻謂迦邏亦以國都而稱國之類也亦十三世稱十二世之類其轉訛一也
삼국사를 보면 김유신의 12세조인 수로가 임인(42)년에 나라를 열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고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고 되어 있다. 신라사에서는 금관국주라 칭하고 있다. 이는 모두 금관이 나라의 수도의 이름이기 때문이 나라이름을 이렇게 부르게 된 증거이다. 또한 가라(迦羅)라 칭하는 것도 양서(梁書)를 보면 신라와 백제가 가라에 의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의 글에 가라가 지배자가 되고 신라가 이에 의지하였다고 한다. 북사(北史)와 수서(隨書)는 모두 믿을 수 있는 사서인데 여기서 말하기를 당시에 나라(國)라 칭하는 것은 하나가 아니었으니 혹시 가락을 가야라 칭하고 가야라는 것도 가라(迦邏)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나라의 수도도 그 나라를 칭하기도 한다. 또 13세라 하는 것도 12세가 잘못 전해진 것 중의 하나이다.
建宗廟于金官城西
금관성의 서쪽에 종묘를 세우다.
按國初建宗廟之文載於東史及丁氏別考故附見于此亦示人不忘其本之義
살펴보면 나라의 초에 종묘를 세웠다는 글이 동사(東史)와 정약용의 별고에 실려 있어서 이를 덧붙여서 보게 하니 이를 보는 사람들은 그 근본되는 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戊申 新羅儒理王二十四年○東漢光武建武二十四年○西曆紀元後四十八年
무신(48년) 신라 유리왕 24년(25년이다) O 동한 광무제 건무 24년 O서력 기원후 48년
秋七月丙申迎許氏立以爲后后生十子二子賜母許氏
가을 7월 병신일에 허씨를 맞아 왕후로 세우고 왕후는 10명의 아들을 낳아 2명에게는 모친의 성(姓)인 허씨를 내려주다.
按王理國七年戊申七月九干等朝謁而言曰大王未有伉儷請選入處子王曰朕降于玆天命也配朕作后亦天命之卿等無慮焉七月七日遂命留天于望山島神鬼于乘岾以候之果有大船緋帆茜旗自西南指北而至有媵臣男女數十侍一公主幷載石塔而到留天等馳奏以聞王乃於宮西設幔殿而迎后后乃維舟登陸憩於高峯解所着綾袴贄遺山靈王備儀仗親迎同入幔殿至三日同輩還宮立以爲后后嘗從容語王曰妾是阿隃陀國公主也 姓許名皇玉同年五月父王與母后顧妾而語曰夢中同見皇天上帝命曰駕洛國元君天所命而俾御大寶乃神乃聖只以新莅家邦未定賢后宜遣公主而配之夢覺而言猶在耳爾其往矣因載石塔曰可鎭風濤妾是故浮海遐尋而至耳旣配爲后有內助之美誕生十子以元子居登爲嗣後請曰妾受天命奉父敎涉海來侍大王於此妾於東土客也妾之死悲吾姓之不傳於東土也王亦悲之乃
使其二子爲許傳母姓於後焉
살펴보면 왕이 나라를 다스린 7년째인 무신(48년) 7월에 9간 등이 조정에서 아뢰기를 대왕은 “아직 반려자가 없으니 청하건대 처녀를 선택하여 들이소서.” 하니 왕이 말하기를 “짐은 천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러니 짐의 왕후를 세우는 것도 역시 천명을 따를 것이다. 경들은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7월 7일 드디어 유천간에 명하여 망산도에 가게하고 신귀를 승점(乘岾)으로 가게하니 과연 큰 배가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서남쪽에서 북쪽을 향해 왔다. 잉신(媵臣,몸종) 남여 수십명이 한사람의 공주를 모시고 또한 석탑(石塔;婆娑塔)을 싣고 도착하였다. 유천 등이 달려와 아뢰니 왕이 듣고 궁궐의 서쪽에 임시궁전(幔殿)을 짓고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는 이에 배(舟)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산에서 휴식하였는데, 거기에서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그것으로 폐백(幣帛)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왕은 의식을 준비하고 몸소 맞이하여 같이 임시궁전에 들어갔다. 3일이 지나 같이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와 왕후로 세웠다. 왕후가 생각에 잠기며 조용한 말로 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아유타국공주입니다.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皇玉)입니다. 올 5월 부친인 부왕과 어머니 모후께서 첩에게 말하기를 ‘꿈에 우리가 황천상제(皇天上帝)를 뵈니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락국의 임금은 하늘의 명령을 받아서 임금(大寶)에 오르도록 했으니, 이에 신령하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다만 새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아직 현명한 왕후를 정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공주를 보내어 짝이 되도록 하라. 하셨다. 꿈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씀이 아직 귀에 쟁쟁하니, 너는 그곳을 향하여 가라.’ 하셨습니다. 석탑을 싣고 바람과 큰 파도를 진압하여 저는 그래서 바다에 떠서 멀리 찾아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왕후가 되어 내조가 아름다웠고 10명의 아들을 낳아 맏이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였다. 후에 청하여 말하기를 “첩은 하늘의 명을 받아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고 바다를 건너와 대왕을 모셨습니다만 이 첩은 동쪽나라에서는 손님입니다. 첩이 죽고 나면 비통하게도 저의 성씨가 동쪽 나라에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도 역시 측은하여 이에 그의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가 되게 하여 모친의 성을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后舟到泊處曰舟浦下陸處曰夫人塘在熊川郡贄送綾袴處曰綾峴石塔在金海至今一片可鎭風濤非嚴君平之博雅何足以識之云
왕후의 배가 도착하여 머문 곳을 주포라 하고 배에서 내린 곳을 부인당이라 하니 웅천군에 있다. 비단바지로서 폐백을 드린 곳을 능현이라 하고 석탑은 김해에 있다. 지금 한편으로 바람과 큰 파도를 잠잠하게 하였다는 것은 엄한 임금이 다스리는 일이 아니니 그 아름다움을 어찌 충분히 알 수 있겠는가.
□戊寅新羅脫解王二十一年○東漢章帝建初三年○西紀後七十八年
무인(78년) 신라 탈해왕 21년(22년이다) O동한의 장제 건초 3년 O서기후 78년[1]
[1]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왕 21년조. 이때는 77년임. 신라는 즉위년 연호를 사용함.
秋八月新羅阿飱吉門與我師戰于黃山却之
가을 8월 신라의 아찬인 길문이 우리 장수와 황산에서 싸우다 물러남.
按羅史脫解王二十一年秋八月阿飱吉門與伽倻兵戰於黃山津獲千餘級
신라역사를 살펴보면 탈해왕 21년(서기77년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가야의 군사와 황산진에서 싸워 천여명의 목을 베었다고 되어 있다.
□戊子 新羅婆娑王八年○東漢章帝章和二年○西紀後八十八年
무자(88년) 신라 파사왕 8년(9년이다) O동한의 장제 장화 2년 O서기후 88년
[1]파사왕 8년은 87년임
秋七月新羅築加召今在居昌馬頭二城以距我
가을 7월 신라가 가소성(지금 거창에 있다.)과 마두의 두 성을 쌓아 우리와 분리되었다.
按羅史婆娑王八年秋下令曰家國西隣百濟南接伽倻德不能綏威不足畏宜繕葺城疊以待侵軼是月築加召馬頭二城 ○歷代史略此史繫丁亥
신라사를 살펴보면 파사왕 8년(서기 87년임) 가을 <파사왕이>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서쪽은 백제와 인접하고 있고 남쪽은 가야와 인접하고 있으나 <나의> 덕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이웃 나라를> 두렵게 하기에 부족하니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고 하였다. 이달에 가소와 마두의 두 성을 쌓았다. ○역대사략에서는 이 역사를 정해년(서기 87년)에 싣고 있다.
□丙申 新羅婆娑王十六年○東漢和帝永元八年○西紀九十六年
병신(96년) 신라 파사왕 16년(17년이다) O동한 화제 영원 8년 O서기후 96년
春二月我師伐新羅圍馬頭城羅將阿飱吉元將精騎一千禦之我師不利
봄 2월 우리 장수가 신라 변경 마두성을 토벌하자 신라 장수 아찬 길원이 정예기병 1천여명으로 방어하여 우리 장수가 불리하였다[1].
[1]파사왕 15년(94년임)내용임, 원문; 十五年春二月加耶賊圍馬頭城遣阿湌吉元將騎一千擊走之.
○秋九月伐新羅新羅遣加城主長世拒戰敗死羅王怒親率兵禦之我師退
가을 9월 신라를 토벌하자 신라가 가성주 장세를 보내어 막게 하였으나 <장세가> 패하고 죽었다. 신라왕이 노하여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방어해와 우리 장수가 후퇴하다[2].
[2]파사왕 17년(96년임)내용임, 원문; 九月加耶人襲南鄙遣加城主長世拒之爲賊所殺王怒率勇士五千出戰敗之虜獲甚多.
按自此以下凡駕洛多稱伽倻又曰新羅史戰史 在婆娑十七年錯一年也且系和帝永元七年又差各前後一年也其曰和帝之七年則是乙未年也婆娑十七年云則是丁酉事也故曰所錯前後各一年也
이로부터 이하 대체로 가락은 대부분 가야라 칭하고 있다. 또 신라사의 전쟁사에 파사왕 17년은 1년의 잘못이 있다[1]. 또 화제 영원 7년은 또 각각 전후 1년의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화제7년은 즉 을미년이고 파사왕 17년 이라고 하는 것은 이 정유년의 일이다. 따라서 말하자면 전후 각 1년의 착오가 있다.
[1]신라연표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이 아닌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을 사용하기 때문임. 글쓴이가 착오하고 있음
□丁酉 新羅婆娑王十七年○東漢和帝永元八年○西紀後九十七年
정유(97년) 신라 파사왕 17년(18년임) O동한 화제 영원 8년 O서기후 97년
春正月新羅擧兵欲侵我遣使謝乃止
봄 1월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침략하려 하였으나 우리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중지되다.
□壬寅 新羅婆娑王二十二年○東漢和帝永元十四年○西紀後百二年
임인(102년) 신라 파사왕 22년(23년임) O동한 화제 영원 14년 O서기후 102년
秋八月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我巡于新羅以所爭之地屬音汁伐國己而滅之
가을 8월 음즙벌국이 실직곡국과 영토문제로 다투자 우리가 신라를 순방하여 분쟁지역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킴.
○悉直今三陟郡押督今慶州郡二國降于新羅
실직 지금의 삼척군 압독 지금의 경주군 두 나라가 신라에 항복하였다.
按歷代事蹟秋八月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詣新羅請決之王謂金官國首露王年老知識邀問之首露立決以所爭之地屬音汁伐國於是王命六部以饗首露五部皆以伊飱儐之惟漢祇部以位卑者儐之首露怒命殺漢祇部主而歸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王使人索其奴陁鄒不送王怒以兵伐音汁伐國其主與衆自降悉直押督二國降于新羅
역대사적을 살펴보면 가을 8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문제로 다투면서 신라에 찾아가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신라의> 왕이 말하기를 “금관국(金官國) 수로왕(首露王)은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 하고, 그를 불러 물었더니 수로가 결정을 내리기를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수로를 위한 잔치를 베풀었는데, 5부는 모두 이찬으로서 접대 주인을 삼았으나 오직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주관하게 하였다. 수로가 노하여 한기부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종은 도망하여 음즙벌국의 우두머리 타추간(抒鄒干)의 집에 의지해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抒鄒)가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을 치니 그 우두머리가 무리와 함께 스스로 항복하였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 나라도 신라에 항복하였다.
○按此史載大韓歷代史略羅史在破娑王二十三年所差亦一年茶山丁氏撰弁辰別考上同而此文下云鏞按駕洛王十五歲卽位云至是年七十五亦云老矣又按東史諸說初無十五歲卽位之文丁氏所按抑何書也
살펴보면 이 역사도 대한역대사략의 신라사에 파사왕 23년에 실려있어 연도의 차이가 역시 1년이 있다. 다산 정약용이 찬한 변진별고도 위와 같으며 이 글 아래에 써있기를 정약용이 생각하기에 가락왕이 15세에 즉위하여 이해에 이르러 75세가 되었다고 한다. 또 동사의 여러 설의 처음에는 15세에 즉위하였다는 글이 없었으니 정씨가 어떻게 이렇게 썼는지 모르겠다.
○封一子于進禮城設王宮寘太子壇建瞻星臺
한 아들을 진례성에 봉하고 왕궁을 세우고 태자단을 두고 첨성대를 세움.
按古蹟無編年故附見于此詳見銍知王建王后寺
고적을 살피건대 연도가 없으므로 첨부한다. 이것의 상세한 것은 질지왕이 왕후사를 세웠다는 내용을 보라.
□丙午 新羅婆娑王二十六年○東漢煬帝延平元年○西紀後一百六年
병오(106년) 신라 파사왕 26년(27년임) O동한 상제 연평 원년 O서기후 106년
秋八月新羅命馬頭城主侵我不利
가을 8월 신라가 마두성주에 명령하여 우리를 침범하게 하므로 우리가 불리하였다.
□乙卯 新羅祗摩王四年○東漢安帝元初元年○西紀後百十五年
을묘(115년) 신라 지마왕 4년 O동한 안제 원초 원년 O서기후 115년
春二月伐新羅 ○秋七月新羅王侵我羅兵渡黃山河我伏兵發圍羅王數重羅王奮擊決圍而退
봄 2월 신라를 정벌하였다. O가을 7월 신라왕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신라병사가 황산강을 넘자 우리의 복병이 신라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니 신라왕이 분발하여 싸워 포위를 뚫고 퇴각하다.
許穆駕洛列傳於是國益疆至居陀州百濟爲界
허목의 가락별전에는 가락이 점차 강성하여 영토가 거타주(居陀州)에 이르렀으며 백제와 경계를 이루었다고 한다.
□丙辰 新羅祗摩王五年○東漢安帝元初二年○西紀後百十六年
병진(116년) 신라 지마왕 5년 O동한 안제 원초 2년 O서기후 116년
秋八月新羅遣將侵我羅王以精騎一萬繼之我嬰城固守會久雨羅兵不利退
가을 8월 신라가 장수를 보내어 우리를 침입하고 신라왕이 정예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우리는 성에 들어앉아 굳게 지키고만 있었는데, 마침 오랫동안 비가 내렸으므로 신라병사가 불리하여 물러가다.
□壬寅 新羅阿達羅王八年○東漢桓帝延熹五年○西紀後一百六十二年
임인(162년) 신라 아달라왕 8년(9년임) O동한 환제 연희 5년 O서기후 162년
太子居登攝軍國事
태자 거등이 군사와 국사를 지휘하다.
按許尙書納陵碑曰漢延熹壬寅王年一百二十一傳位于太子
살펴보면 허상서의 납릉비[1]에서 말하기를 한나라의 연희 임인년(162년) 왕의 연세 121에 다스리던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1]허목(許穆)의 首露王納陵碑陰記(수로왕납릉비음기)인 것 같으나 위의 내용은 없음. 또한 허적(許積)이 쓴 駕洛國王陵碑文(가락국왕릉비문)에도 위의 내용은 없고, 허전(許傳)의 김해숭선전(金海崇善殿)신도비문(神道碑文)에 내용이 있음.
○延熹壬寅王一百二十一歲則是卽寶位之建武壬寅王乃一歲也是建武壬寅三月三日誕降與舊譜駕洛國記東史諸說無異辭也忽倡王誕降于建武八年年甫十歲建武十八年壬寅三月望日登位先倡邪說後蹈眞傳韓文公天禍之戒吁公預題
연희 임인년(162년)을 왕이 121세라고 한 것은 왕위에 오른 건무 임인년(서기 42년)을 왕을 1살이라고 본 것이다. 이러한 건무 임인년 3월 3일 탄강하셨다고 하는 것은 구보의 가락국기와 동사의 여러 설명들이 다르지 않다. 갑자기 왕이 탄강한 것이 건무 8년(32년)이고 나이 10세 때인 건무 18년 임인(42년) 3월 15일에 왕위에 오르셨다고 주장한다. 먼저 주장한 틀린 말들을 후세가 따르는 것은 진실을 전하는 한문공이 하늘의 벌을 받는 것과 같으니 아! 공이 이미 나타낸 것이다.
太王宮成時馬韓遺民五十四國皆來賀上尊號
태왕궁이 완성되었을 때 마한의 유민과 54개국 모두가 찾아와서 임금의 존호를 경하하다.
按納陵碑威德遠被奄有卞韓之故地五十四國皆來朝獻尊王爲太王元君號曰普州皇太王后曰普州皇太后
납릉비를 살펴보면 위엄과 덕망이 멀리까지 퍼졌다고 하고 문득 변한(卞韓)의 옛 땅(故地)을 차지하시고, 54개국이 모두 찾아와 조공하였고 왕은 태왕원군이 되어 호를 보주황태왕이라 하고 왕후를 보주황태후라 하였다.
○五十四國載史略其曰五十四國今全羅之域不書國名者撰記者省之也
54개국은 사략에 실려있고 여기서 말하기를 54개국은 지금의 전라도 지역이나 나라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아 이를 기록한 사람이 생략한 것 같다.
○王與太后居太王宮
왕과 태후가 태왕궁에 거하다.
納陵碑築別宮于知品川之方丈山中與太后移居山曰太王山宮曰太王宮越三十八年己卯薨
납릉비에 의하면 별궁을 지품천의 방장산중에 짓고 태후와 같이 이거하셨다고 한다. 산은 태왕산이라 부르고 궁을 태왕궁이라 하였으며 38년 뒤 기묘(199년)에 서거하셨다.
○蓋知品川太王宮卽水晶宮宮以太王山以太王國人追慕指稱之辭也又按知品川爲今山淸郡距國都西三百里則疑當時遷都而蓋當時駐蹕之地也又如檀君旣都平壤又都開原也蓋山淸乃太王舊宮故至太王十世孫仇衡王旣禪位于武力王入于知品川太王宮實還于舊宮也山淸王山有太廟舊址
대개 지품천의 태왕궁은 즉 수정궁이니 이 궁은 태왕산으로서 태왕국의 사람들이 추모하여 모두들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또 살펴보면 지품천은 지금의 산청군으로서 나라의 수도(김해)에서 서쪽으로 300리 정도 떨어져 있으니 즉 당시에 천도를 하지 않았는가 의심되나 대개 당시에 잠시 머물기만 한 곳이다. 또 이는 단군이 이미 평양에 수도를 정하였으나 다시 원(原,어디?)에 도읍을 연 것과 같다. 대개 산청은 태왕의 옛 궁궐이므로 태왕의 10세 자손인 구형왕에 이르러 이미 무력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지품천의 태왕궁으로 들어간 것은 실제로 옛 궁궐로 돌아간 것이다. 산청의 왕산에는 태묘의 옛 터가 있다.
□己巳 新羅伐休王五年○東漢靈帝中平六年○西紀後百八十九年
기사(189년) 신라 벌휴왕 5년(6년임) O동한 영제 중평 6년 O서기후 189년
三月朔日太后許氏薨國人悲慕如喪其母追慕不己后生于上國
3월 1일 태후허씨가 서거하시자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며 그리워하기를 저희들 모친상과 같이 하고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후는 큰 나라에서 태어났다.
上國猶春秋楚治兵于上國之類例是也
큰 나라는 비록 춘추시대의 초나라를 가리키나 큰 나라에서 병사를 다스리는 것은 이와 같은 예이다.
十六歸于洛在后位百十五歲太后位二十八年壽百五十七葬于金官城西北龜旨峰南號曰后陵
16세에 가락에 와서 왕후로 115년을 있었고 태후로는 28년을 지내어 나이는 157세였다. 장사는 금관성 서북의 구지봉 남쪽에 지냈다. 능호를 후릉(后陵)이라 하였다.
按舊碑后東漢建武癸巳七月七日生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薨壽一百五十七國人如喪其母追慕不己葬龜旨峯東北號普州太后陵后之宗國或曰阿隃陀國或曰許黃國或曰南天竺不知其詳
옛 비문을 살펴보면 왕후는 동한의 건무 계사년(서기 33년) 7월 7일 태어나 영제 중평 6년 기사년(189년) 3월 1일 서거하시니 나이는 157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저들 모친의 상을 당한 것처럼 추모하고 그치지 않았다. 장례는 구지봉의 동북쪽에 지내고 능호를 보주태후릉이라 하였다. 왕후의 고향나라는 간혹 아유타국, 허황국, 남천축국이라 하나 그 상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古譜王世系后誕十男一女七子離妻子皆化佛並享于七佛庵一子曰居漆君一女昔太子
옛 보첩의 왕세계에는 왕후가 10남 1녀를 낳았는데 7명의 아들은 처자식과 이별하여 모두 부처가 되어 다 같이 칠불암에서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아들 한명의 이름은 거칠군이고 딸은 석태자에게 시집갔다.
□己卯 新羅奈解王三年○東漢獻帝建安四年○西紀後一百九十九年
기묘(199년) 신라 나해왕 3년(4년임) O 동한 헌제 건안 4년 O서기후 199년
春三月二十三日太王薨王生于壬寅在王位百二十年在太王位三十八年壽百五十八葬于首陵國人如喪考妣國除後以大牢祀之至
봄 3월23일 태왕이 서거하셨다. 왕은 임인년(42년)에 탄생하시어 왕위에 120년을 계셨으며 태왕으로 38년을 계셨고 나이는 158세였다. 수릉에 장사지내니 나라 사람들이 자기 부친이 돌아가신 것처럼 슬퍼하였다. 나라에서 제단을 쌓고 이후에 성대히 제사를 지내어 이르고 있다.
○德壽宮戊寅命建閣設官一依箕子陵例以奉其祭
덕수궁에서 무인년(1878)에 제각을 짓고 관리(陵官)를 파견하여 기자릉에 대하여 하는 것처럼 그 제사를 받들라고 하였다.
按首陵又曰納陵詳見本陵崇善殿誌
살펴보면 수릉 또는 납릉이라고 하는 것은 상세하게 본 릉을 숭선전지에서 볼 수 있다.
○金氏世譜王理國一百五十八年漢獻帝建安四年新羅奈解王四年己卯三月三日薨葬龜旨峯南號曰納陵又云首陵
김씨세보에서 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158년이었고, 한나라의 헌제 건안 4년 신라 나해왕 4년 기묘(199년) 3월 3일 서거하시어 구지봉 남쪽에 장사지내었는데 능호를 납릉 또는 수릉이라 한다.
○丁氏鏞撰卞辰別考按王十五歲壬寅卽位仰何按也西漢建安十八年距漢獻帝建安四年己卯壽乃一百七十二非一百五十八歲也丁考又按鄭史首露王在位一百五十八洪氏萬宗以享壽一百五十八洪義似長今從鄭說貴古也雲按壬寅誕生壬寅開國故壽之年卽位之歲合此二說亦可以定論爲萬世金石之按也
정약용이 찬한 변진별고(卞辰別考)를 살펴보면 왕은 15세 때인 임인(42년)에 즉위하였다는 것이 어떤 근거인가. 서한[1]의 건안 18년(213년?)은 한의 헌제 건안 4년(199년) 기묘와 떨어져 있으니 나이는 이에 172세가 되고 158세가 아니다. 정약용의 별고는 또 정인지의 역사를 참고하여 수로왕의 재위를 158년이라 하였고 홍만종은 나이가 158세라 하였는데 홍씨의 뜻이 비슷하니 지금 이에 따른다. 정인지의 설은 귀중하나 오래되었다. 운배가 살펴보건대 임인년(42년)에 탄생하여 임인년에 나라를 열었으니 나이와 즉위한 햇수가 맞아야 한다. 이 두번째 설이 역시 정론이라 할 만하니 오래도록 금석과 같은 안(案)이라 하겠다.
[1]서한(西漢); 동한(東漢)을 잘못 씀
太子居登立
태자 거등이 왕위에 오르다.
按本姓譜有王以世孫冊封太子之文
본 성의 보첩을 살펴보면 왕이 세손을 태자로 봉했다는 글이 있다.
王之世作招賢臺
왕의 치세에 초현대(招賢臺)를 세우다.
招賢臺古譜作招仙臺高麗史云金州有首露王陵在州西招賢臺在州東世傳居登王登此臺招七点山人旵始乘舟而來因名焉金氏世譜王招仙臺在都城七里許廣野中居登王招七點山人名神始乘船抱琴來相歡喜王之所幸石曰蓮花石石上有文如棋局之跡至今猶存王之所造伽倻琴至今傳于樂府
초현대는 옛 보첩에는 초선대라 되어있다. 고려사에서 말하기를 금주(金州)에는 주(州)의 서쪽에 수로왕릉이 있고 주의 동쪽이 초현대가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거등왕이 이 대(臺)에 올라가 칠점산인을 초대하니 해가 비칠 때 비로소 배를 타고 왔다고 하여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김씨들의 세보에는 왕이 초선대가 있는 도성의 7리 정도에 넓은 들이 있고 그 가운데에서 거등왕이 칠점산인을 초대하니 유명한 신이 비로소 배를 타고 거문고를 끼고 와서 서로 환영을 받으며 기뻐하니 왕이 행복해 했다고 한다. 돌은 연화석이라 하고 돌 위에 글이 있는데 바둑판의 형상과 같으며 지금에는 오히려 왕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가야금은 지금 악부에 전해지고 있다.
○又按金氏王世系居登王己卯王子諱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離去王欲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故俗傳王招仙臺
또 김씨의 왕세계를 고찰해 보면 거등왕의 기묘년(199년)에 왕자인 휘 선(仙)이 속세를 바라보다 쇠약해져 장사지내니 신여(神女)와 같이 구름을 타고 이별하여 가버려 왕이 도강(都江)의 돌섬바위(石島巖)에 올라가 아들인 선(仙)을 불러 초상을 새겼는데 속칭 전하여지기를 왕의 초선대라 한다.
□辛巳 新羅奈解王五年○東漢獻帝建安六年○西紀後二百一年
신사(201년) 신라 나해왕 5년(6년임) O동한 헌제 건안 6년 O서기후 201년
春二月與新羅平
봄 2월 신라와 화평을 맺다.
按歷代史略春二月加耶國請和干新羅弁辰別考建安與奈解俱系六年
역대사략을 보니 봄 2월 가야국이 신라에 화친을 청하였다 하고 변진별고에는 나해왕과 화평을 맺은 것이 6년이라고 한다.
□己丑 新羅奈解王十三年○東漢獻帝建安十四年○西紀後二百九年
기축(209년) 신라 나해왕 13년(14년임) O동한 헌제 건안 14년 O서기후 209년
秋七月浦上八國侵我遣王子請救於新羅新羅命太子于老及利音將兵救之奪所虜六千人還于我
가을 7월 포상8국이 우리나라를 침범해 와 왕자를 파견하여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태자 우로와 이음(利音)장군과 병사들에 명하여 구원하라하니 포로가 되었던 6천명을 빼앗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按蒲上八國智異之北藍水出焉至晋州南折東北流至咸安北與潢水合在潢水之南者東曰金海次曰熊川曰昌原曰漆原曰咸安曰鎭海曰固城曰泗川最西曰昆陽羅史浦上八國皆指此盖古弁辰之地加以高靈星州咸昌弁辰十二國合所謂漆浦者漆原古浦者似固城餘不可考見弁辰考
살펴보면 포상8국은 지리산의 북쪽 남수(藍水)에서 나와서 진주에 이르러 남쪽으로 꺾어져 동북으로 흘러 함안의 북쪽에서 황수와 합쳐진다. 황수의 남쪽에는 동쪽에서부터 김해 다음이 웅천, 창원, 칠원, 함안, 진해, 고성, 사천이고 가장 서쪽이 곤양이다. 신라사에 포상8국은 모두 이것들을 지칭한다. 대개 옛날에 변진의 땅에는 고령, 성주, 함창이 더해져서 변진 12국으로 합쳐졌다. 소위 칠포라는 곳은 칠원이고 고포라는 곳은 고성과 비슷하나 나머지는 고찰할 수 없다. 변진고를 보라.
□壬辰 新羅奈解王十六年○東漢獻帝建安十七年○西紀後二百十二年
임진(212년) 신라 나해왕 16년(17년임) O동한 헌제 건안 17년 O서기후 212년
春三月我王子質于新羅
봄 3월에 우리 왕자가 인질로서 신라에 갔다.
□辛亥 新羅助賁王元年○蜀後帝建興九年○西紀後二百三十一年
신해(231년) 신라 조분왕 원년(2년임) O촉 후제 건흥 9년 O서기후 231년
秋七月我兵合羅將昔于老伐甘文國滅之
가을 7월 우리 병사가 신라 장수 석우로와 연합하여 감문국을 토벌하여 멸하였다.
按古譜居登王辛亥甘文叛討滅之甘文今開寧郡
옛 보첩을 살펴보면 거등왕 신해년(231년)에 감문의 반군을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감문은 지금의 개령군이다.
□己巳 新羅沽解王二年○蜀後延熙十二年○西紀後二百四十九年
기사(249년) 신라 첨해왕 2년(3년임) O촉한 연희 12년 O서기후 249년
倭侵新羅殺于老奈勿王子我擊之斬二百級
왜가 신라에 침입하여 우로를 죽이니 우로는 내물왕자이다. 우리가 쫓아가 2백명을 베었다.
按古譜居登王己巳新羅使于老使於洛及還朝倭要中露執殺于老王聞之發兵擊殺二百級史略初倭葛耶吉來聘于老儐之戱言激之倭主聞之怒來侵于老單騎赴之燒殺之此取禍自于氏後使來于老妻請私饗乘其醉執而焚之以報之單騎赴之要路見執之事所以紀者戒爲人臣者而亦以戒使命私饗之失按此役在日后攝政四十九年
고 보첩을 살펴보면 거등왕 기사년(249년)에 신라의 사신인 우로가 가락에 왔다가 신라 조정으로 돌아갈 때에 왜가 중요한 길목에서 우로를 잡아 죽여 왕이 이를 듣고 병사를 출발시켜 쫓아가 2백명을 죽였다고 한다. 사략에 의하면 처음에 왜의 갈사길(葛耶吉)이 우로의 초청을 받고 왔으나 주빈이 허튼 말을 격렬하게 하였다. 왜의 왕이 이를 듣고 분노하여 침입하여 오니 우로가 홀로 말을 타고 가서 태워 죽여 이로서 화를 불렀다. 이 일이 있은 후 우씨가 사신으로 갈 때 우로의 처가 자신이 지어준 밥을 먹고 가기를 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취한 상태에서 말을 타고 갔다. 혼자서 말을 타고 갔다는 보고를 <왜가> 듣고 중요한 길목에서 그를 잡게 되었다. 벌을 준 사람은 역시 벌을 받게 된다는 뜻이며 이 사건은 일본역사에 실려 있다. 왕후가 49년을 섭정하였다.
□癸酉 新羅沽解王六年○蜀後後帝延熙十六年○西紀後二百五十三年
계유(253년) 신라 첨해왕 6년(7년임) ○촉후 후제 연희 16년 ○서기후 253년
秋九月王薨世子麻品王
가을 9월 왕이 서거하시자 세자인 마품이 왕에 오르다.
按古譜居登王在位五十四年一云戊寅薨
고 보첩을 살펴보면 거등왕은 54년간 왕위를 지냈고 한편으로는 무인년(258년)에 서거하셨다고 한다.
□辛亥 新羅儒禮王七年○晉惠帝元康元年○西紀後二百九十一年
신해(291년) 신라유례왕 7년(8년임) ○진 혜제 원강 원년○서기후 291년
春三月王薨
봄 3월에 왕이 서거하시다.
按本姓一譜王母本神女諱琉冕庚辰有孕九年誕王于戊子五十二春三月三日與父王離塵世同去有事蹟云
우리의 한 보첩을 살펴보면 왕의 모친은 본래 신녀(神女)였으며 휘는 유면(琉冕)이라 하고 경진(200년?)에 임신하여 9년만인 무자(208년?)에 왕을 탄생하였다고 한다. 52세(년?) 되던 봄 3월3일에 부왕(거등왕)과 같이 속세와 이별하여 같이 가버렸다고 하며 사적이 있다고 한다.
世子居叱彌立
세자 거질미가 왕위에 오르다
按舊譜麻品王延熙甲戌立晉元康庚戌薨在位三十七年一云己卯立
구보를 살펴보면 마품왕은 연희 갑술(254년)에 왕위에 올라 진나라 원강 경술(290년)에 서거하시니 재위 37년간이다. 한편으로는 기묘년(259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丁巳 新羅儒禮王十三年○晉惠帝元康七年○西紀後二百九十七年
정사(297년) 신라유례왕 13년(14년임) ○진 혜제 원강 7년 ○서기후 297년
伊西古國攻新羅金城敗歸我遣將討之滅
이서고국에서 신라의 금성을 침입하여 <신라가> 패하고 돌아가니 우리가 장수를 보내어 토벌하고 멸하였다.
按舊譜叱彌王丁巳伊西古國叛鷄林王遣將討滅史略伊西古國已亡而更見於此豈遺民之未盡滅者乎此洛羅二邦相救之一
고 보첩을 보니 질미왕 정사년(287년)에 이서고국이 계림왕에게 반란을 일으켜 장수를 보내 토벌하고 멸하였다고 되어있다. 동국사략에는 이서고국이 이미 망하였으나 여기서 다시 나타나는 것은 그 유민들을 전부 멸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는 가락과 신라 두 나라가 서로를 구원해 준 것이다. 라고 하였다.
□壬申 新羅訖解王二年○晉懷帝永嘉六年○西紀後三百十二年
임신(312년) 신라흘해왕 2년(3년임) ○진 회제 영가 6년 ○서기후 312년
倭請婚不納歸于新羅羅王以阿飱急利女歸之
왜가 청혼을 하였으나 (가락이) 받아들이지 않자 (왜가) 신라로 돌아가니 신라왕이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按古譜與歷代史略同以戒二邦婚姻之異宜
고 보첩과 역대사략을 살펴보면 같은 일에 대해서 두 나라의 혼인에 대한 것이 다르게 적혀있다.
□丙午 新羅訖解王十六年○東晉穆帝永和二年○西紀後三百四十六年
병오(346년) 신라 흘해왕 16년(37년임) ○동진 목제 영화 2년 ○서기후 346년
秋七月王薨世子伊尸品立
가을 7월에 왕이 서거하시고 세자 이시품이 왕위에 오르다.
按舊譜居叱彌王在位五十六年
구보를 살펴보면 거질미왕의 재위는 56년간 이었다.
□丁未 新羅實聖王五年○東晉安帝義熙三年○西紀後四百七年
정미(407년) 신라 실성왕 5년(6년임) ○동진 안제 의희 3년 ○서기후 407년
夏四月王薨世子坐知立○擯傭女于荷山島
여름 4월 왕이 서거하시고 세자 좌지가 왕위에 올랐다. ○용녀를 하산도로 쫓아내었다.
按史略王得傭女而嬖之又寵任女黨國大亂新羅謀伐之其臣朴元道諫之又卜士爲王筮之得解卦其辭曰解而拇朋至斯孚坐知謝之擯女于荷山島又按舊譜伊尸品王永和丁未立在位六十一年一云丙午立丙午薨
동국사략을 살펴보면 왕이 용녀를 얻어 사랑하고 또 총애하여 그녀의 무리에게 나랏일을 맡기니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 신라가 <이 기회를 타서> 쳐들어오기를 모의하였다. 어떤 신하 박원도가 간하고 또 점쟁이가 왕을 위해 점을 쳐서 풀어보고 여쭙기를 “네(而:汝) 손가락(拇:小人)의 의미는 어진 사람(朋:君子)이 와(至)서, 이(斯)에 신임(孚:信任)하리라”고 하니, 좌지는 사과하고, 용녀(庸女)를 물리쳐, 하산도에 귀양보냈다고 한다. 또 구보를 보면 이시품왕은 영화 정미년(347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61년간이었다고 한다. 또는 병오년(346년)에 왕위에 올라 병오년(406년)에 서거하셨다고 한다.
國以大治
나라를 크게 다스리다.
許穆駕洛列傳擯女荷山島國以治强
허목의 가락열전에는 여자를 하산도로 내쫓고 나라를 강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戊申 新羅實聖王六年○東晉安帝義熙四年○西紀後四百八年
무신(408년) 신라 실성왕 6년(7년임) ○동진 안제 의희 4년 ○서기후 408년
倭始寘營于馬島
왜가 처음으로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다.
按古譜坐知王戊申倭始寘營於對馬島自王失地洛羅二邦自是爲憂史略實聖王六年春二月新羅王聞倭始寘營于對馬島鍊兵儲糧將襲之欲發兵先擊未斯品諫止之此是任那國事之所係亦洛羅古域所擊故及之此卽失地之跡也○此按日本史在日皇反正三年
고 보첩을 살펴보면 좌지왕의 무신년(408년)에 왜가 처음으로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왕은 국토를 잃어버리고 가락과 신라 두 나라는 이로서 근심하게 되었다. 동국사략에는 실성왕 6년(7년임) 봄 2월 신라왕이 왜가 처음으로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병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쌓아두고 장차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먼저 격파하고자 하였으나 미사품(未斯品)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자고 하였다. 이는 임나국의 일에 관계되는바 역시 가락과 신라의 옛 영토를 공격하게 되니 이는 영토를 잃어버린 흔적이다[1]. ○이는 일본역사를 살펴보면 일본 황제의 반정(反正, 406.1.2.~410.1.23.) 3년의 일이다.
[1]이 내용의 뜻은 가라에 왜국의 정복지인 임나국이 있었는데 신라가 이를 정복하자 왜가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찾기 위해 준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허구라고 하며, 일설에는 대마도를 정복한 고구려(광개토왕 때)가 그 땅을 지키기 위하여 병영을 설치하고 병사와 무기를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辛酉 新羅訥祗王四年○宋武帝永初二年○西紀後四百二十一年
신유(421년) 신라 눌지왕 4년(5년임) ○송 무제 영초 2년 ○서기후 421년
夏五月王薨世子吹希立
여름 5월에 왕이 서거하시고 세자 취희가 왕위에 올랐다.
按舊譜坐知宋義初庚申立在位十四年
구보를 살펴보면 좌지왕은 송나라 의초(永初?) 경신년(420년)에 왕위에 올라 재위 14년간이었다.
□辛卯 新羅訥祗王三十四年○宋文帝元嘉二十八年○西紀後四百五十一年
신묘(451년) 신라 눌지왕 34년(35년임) ○송 문제 원가 28년 ○서기후 451년
春王薨世子銍知立
봄에 왕이 서거하시고 세자인 질지가 왕위에 올랐다.
按舊譜吹希王永初辛酉立元嘉庚寅薨在位三十年一云壬寅薨
구 보첩을 살펴보면 취희왕은 영초 신유년(421년)에 왕위에 올라 원가 경인년(450년)에 서거하시니 재위 30년간 이었다. 한편으로는 임인년(462년)에 서거하셨다고 한다.
□己未 新羅慈悲王二十一年○齋高帝建元元年○西紀後四百七十九年
기미(479년) 신라 자비왕 21년(22년임) ○재 고제 건원 원년 ○서기후 479년
我遣使於南齊
우리가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南齊書伽倻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伽倻王荷知欲闕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남제서에는 가라국은 삼한의 종류이다. 건원 원년(479년)에 나라의 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널리 헤아림은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 먼 이(夷,오랑캐)가 감화되었다. 가야왕 하지가 동쪽의 먼 바다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들고자 하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고 되어 있다.
○鏞安首露子孫有坐知王銍知王鉗知王荷知王亦是三知之一也
정약용이 생각하기를 수로왕의 자손중에 좌지왕, 질지왕, 겸지왕이 있었으니 하지왕도 역시 이런 3개의 지(知)중의 하나이다. 라고 하였다.
□辛酉 新羅炤智王二年○齋高帝建元三年○西紀後四百八十一年
신유(481년) 신라 소지왕 2년(3년임) ○재 고제 건원 3년 ○서기후 481년
春高句麗與靺鞨入新羅北邊取孤鳴等七城我師與新羅及百濟合兵奪擊破之斬首千餘級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같이 신라의 북쪽 변경에 들어와 (고명)등 7개 성을 빼앗자 우리의 장수가 신라와 백제와 같이 연합하여 <다시> 되찾고 격파하였으며 수천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按炤智王二年卽高句麗長壽王六十八年
소지왕 2년이며 즉 고구려 장수왕 68년이다.
□丁卯 新羅炤智王八年○齋武帝永明五年○西紀後四百八十七年
정묘(487년) 신라 소지왕 8년(9년임) ○재 무제 영명 5년 ○서기후 487년
春遣白雉于新羅
봄에 신라에 흰 꿩을 보냈다.
按羅史駕洛國送白雉于新羅尾長五尺歷代史略闕何以紀記其異也且貴古而存古之志也
신라사를 살펴보면 가락국이 신라에 흰 꿩을 보냈는데 꼬리 길이가 5척(1.5m)이다. 라고 되어 있다. 역대사략에서는 생략했는데 어떻게 기록하는 규칙들이 그렇게 다른가? 또 귀중하고 오래된 것은 오래도록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壬申 新羅炤智王十三年○齋武帝永明十年○西紀後四百九十二年
임신(492년) 신라 소지왕 13년(14년임) ○재 무제 영명 10년 ○서기후 492년
王薨王之世建王后寺初首露王封一子于進禮城設王宮太子壇設瞻星臺王就幔殿合婚處建寺曰王后寺者誌其史也
왕이 서거하셨다. 왕의 세대에 왕후사를 세웠다. 처음에 수로왕이 한 아들을 진례성에 봉하고 왕궁과 태자단을 설치하고 첨성대를 건설하였다. 왕이 임시궁전으로 나아가 결혼한 곳에 절을 짓고 왕후사라 한 지지(地誌)가 그 역사이다.
按舊譜銍知王齊永明辛未薨在位四十一年一云癸卯立 世子鉗知立
구보를 살펴보면 질지왕이 제나라 영명 신미(491년)에 서거하시니 재위 41년간이었다. 또는 계묘(463년)에 세자 겸지가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丙戌 新羅智證王六年○梁武帝天監五年○西紀後五百六年
병술(506년) 신라 지증왕 6년(7년임) ○양 무제 천감 5년 ○서기후 506년
新羅遣其將襲小伽倻取之自壬寅開國至是凡四百六十五年亡其歷世繼統史逸無傳
신라가 그 나라 장수를 보내어 소가야를 습격하여 빼앗았다. 임인년(서기 42년)에 개국한 것으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무릇 465년이 되어 망하였다. 그 후의 이력과 세대의 계통은 역사에서 없어지고 전하지 않는다.
按史略至證王六年遣異斯夫取小加耶又按羅史異斯夫傳異斯夫爲沿邊官襲居道用權謀以馬戱誤伽倻取之此乃五伽倻第次之亡
동국사략을 살펴보면 지증왕 6년에 이사부를 보내어 소가야를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신라사를 보면 다른 이사부가 전해지는데 이사부는 연변관(沿邊官)이 되어 그들이 살고 있는 도를 습격하고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말 장난감으로 오인하게 하여 가야를 빼앗았다. 이에 5가야는 순서대로 멸망하였다.
□丙戌 新羅法興王二年○梁武帝天監十四年○西紀後五百十六年
병술(516년) 신라 법흥왕 2년(3년임) ○양 무제 천감 14년 ○서기후 516년
新羅侵伽倻日本遣將救之
신라가 가야에 침입하니 일본이 장수를 보내어 구원하였다.
按日本史宣化天皇二年新羅侵任那遣大伴金村及二子磐狹手彦授之赴任那府
일본사를 보면 선화천황(535.12.18.~539.2.10.) 2년 신라가 임나[1]를 침입하자 대반금촌(大伴金村)과 두 아들인 반협(磐狹)과 수언(手彦)을 보내어 임나부를 맡게 했다고 한다.
[1]임나가 있었던 지역이라고 말하는 경상도 남부 즉 금관가야 지방은 이미 532년에 신라에 망하였다. 따라서 선화천황 때에 나오는 임나는 금관가야지방에 있을 수가 없다. 이때의 임나는 대마도 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凡日史稱任那者大伽倻也不信伽倻稱任那者伽倻凡有六國故區而別之也或寘司戍兵而指稱之辭也
무릇 일본역사에서 칭하는 임나라는 것은 대가야이다[1]. 가야를 임나라 칭하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가야는 모두 6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구역이 별도로 있다고 생각한다. 간혹 수병[1]을 두었다는 것은 이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1]대가야는 현재의 경북 고령지방으로 육지이나 아무리 군사력이 막강하여도 신라영토의 육지 가운데에 왜가 임나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2]수병(戍兵); 국경을 경비하는 병사
□辛丑 新羅法興王七年○梁武帝普通二年○西紀後五百二十一年
신축(521년) 신라 법흥왕 7년(8년임) ○양 무제 보통 2년 ○서기후 521년
王薨世子仇衡立
왕이 서거하시고 세자인 구형이 왕위에 올랐다.
按舊譜鉗知王梁普通庚子薨在位二十九年
구보를 살펴보면 겸지왕은 양나라 보통 경자년(520년)에 서거하시니 재위 29년간이라고 한다.
□癸卯 新羅法興王九年○梁武帝普通四年○西紀後五百二十三年
계묘(523년) 신라 법흥왕 9년(10년임) ○양 무제 보통 4년 ○서기후 523년
春三月北伽倻王遣使請婚于新羅羅王以伊飱此助夫妹歸婦之
봄 3월 북가야 왕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청혼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내어 부인으로 삼게 했다.
按此文見新羅史又按崔致遠釋順應傳大加耶月光太子乃正見之十世孫父曰異腦王請婚于新羅迎夷粲比女生太子
이 글을 신라사에서 보고 또 최치원의 ‘중 순응(順應)전’을 살펴보면 대가야의 월광태자(月光太子)가 정견(正見)의 10세손으로서 부친인 이뇌왕(異腦王)이 신라에 청혼하여 이찬비(夷粲比)의 여자를 맞이하여 태자를 낳았다고 되어있다.
○丁鏞曰東鑑諸史凡加耶六國通稱伽倻在南界及黃山者孫之金官此文則崔氏之文係于大伽倻
정약용이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의 여러 역사에서 무릇 가야는 6개 나라로서 통칭하여 가야라 하고 남쪽 국경과 황산에 사는 자손들은 금관 사람들이다. 하였다. 이 글은 즉 최치원의 글은 대가야와 관계있다.
□甲辰 新羅法興王十年○梁武帝普通五年○西紀後五百二十四年
갑진(524년) 신라 법흥왕 10년(11년임) ○양 무제 보통 5년 ○서기후 524년
秋九月王會新羅王于北境
가을 9월 왕이 신라왕과 북쪽 국경에서 만났다.
按新羅史及東鑑新羅王巡于南境伽倻王來會
신라사와 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신라왕이 남쪽 국경을 순행할 때 가야왕이 가서 만났다고 한다.
○書法書兩王何重其事也重其事何兩國之大事也
서법(書法?)에는 두 왕은 그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써있다. 그 일의 중요성이 어찌 양국의 큰일이 아니겠는가.
□辛亥 新羅法興王十七年○梁武帝中大通三年○西紀後五百三十一年
신해(531년) 신라 법흥왕 17년(18년임) ○양 무제 중대통 3년 ○서기후 531년
冬毁燕子樓
겨울 연자루를 헐었다.
按古譜仇衡王辛亥冬燕子樓鳴驚動長安王命毁樓有太祖王牒曰燕子卽壬子傳國羅王不逆天
고 보첩을 살펴보면 구형왕 신해년(531년) 겨울에 연자루가 울어서 장안(수도)을 깜짝 놀라게 하여 왕이 연자루를 헐어버리라고 명했다. 태조왕의 책에서 말하기를 연자는 곧 임자년(532년)에 나라를 신라왕에게 넘길 것이니 하늘의 뜻을 거를 수 없다고 하였다.
○此卽移御方丈宮禪位之起本凡史貴古故記者及以備謠俗之當誡也
이는 곧 방장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왕위를 물러줄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하니 무릇 역사는 귀중한 옛 일을 기록하는 것이니 또한 이에 방비하라는 세상의 풍문으로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었다.
□壬子 新羅法興王十八年○梁武帝中大通四年○西紀後五百三十二年
임자(532년) 신라 법흥왕 18년(19년임) ○양 무제 중대통 4년 ○서기후 532년
冬王傳位于太子曰世宗王移御于方丈山之太王宮以終諡曰讓王
겨울에 왕위를 태자인 세종에게 물러주고 방장산의 태왕궁으로 거처를 옮겨 종말을 고하였다. 시호는 양왕이다.
辛丑立壬子傳位凡在位十二年按東國遺史王在位四十二年周保定壬午降于新羅歷年五百二十一年周保定壬午卽與眞興王二十二年武力王傳國之歲合蓋讓王在位四十二載之間闕二王之傳授雖不得世次亦可謂思過半矣
신축년(521년)에 왕위에 올라 임자년(532년)에 왕위를 물러주니 재위 12년간 이었다. 동국의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왕으로서 재위 42년간 이었고 주나라 보정 임오년(56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으니 지난 햇수가 521년이었다고 되어 있다. 주나라 보정 임오년은 즉 진흥왕 22년이고 무력왕에게 나라를 전한 햇수를 합한 것이다. 대개 양왕이 재위 42년간이라고 실려 있는 것은 그 사이 빠진 두 왕이 전해 준 것을 비록 세대의 순서를 알지 못한 때문이니 이 역시 반 이상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世宗禪位于世弟武力亦久于太王宮以壽終世弟武力卽王位
세종이 동생 무력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또한 오래도록 태왕궁에 있다가 수명을 다했다. 동생인 무력이 즉 왕위에 올랐다.
按歷代史略冬駕洛國王金仇衡降于新羅羅王授位上等以其國食邑自始祖首露王至仇衡王凡十五世而共四百九十一年
역대사략을 살펴보면 겨울에 가락국왕 김구형이 신라에 항복하자 신라왕이 상등(上等)의 직위와 그 나라를 식읍으로 주었다. 시조 수로왕으로부터 구형왕까지 무릇 15세 491년이다.
○按安東金氏舊譜及金海金氏譜皆有武力王之文又曰武力王在位七年又三韓歷代圖駕洛國十世十二王歷年合五百二十一年此乃玉牒之眞傳而私刊僞牒瀆亂史筆一錯萬錯以誤後世三史僞歎豈獨錢氏益謙哉三史謂國史野史家史也又按王率太子妃嬪抱宗廟樂器遯于知品川方丈山中太王宮以終陵在今山淸縣西三十里纍石爲級制度朴古似箕子墓
안동김씨 구보와 김해김씨 보첩을 살펴보면 모두 무력왕이라는 글이 있고 또 말하기를 무력왕은 재위 7년간이었다고 한다. 또 삼한역대도에는 가락국이 10세 12왕으로서 햇수가 합계 521년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보배로운 보첩이 진실을 전하는 것이니 개인이 사사로이 간행한 가짜 보첩이 더럽히고 어지럽혀 역사가가 한번 잘못 쓴 것이 만번의 오류가 되어 후세의 3사(三史)가 허위로 되었으니 개탄스럽다. 어찌 전익겸[1]의 혼자만의 일이겠는가. 3사는 국사와 야사와 사가들이 쓴 역사를 말한다. 또 살펴보면 왕이 태자와 비빈을 거느리고 종묘악기를 안고 지품천의 방장산중으로 피하여 태왕궁에 종말을 고했는데 그 능은 지금 산청현의 서쪽 30리에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제도가 박혁거세 묘와 옛날 기자묘와 비슷하다.
[1]전겸익(1582∼1664). 중국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 학자·시인.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 장쑤성[江蘇省(강소성)]창서우[常熟(상숙)] 출신. 1610년 진사가 되었다. 남당의 후예로 태어나 건문 성조 2백년 후(1600년대 초), 난폭했다는 두 황제(혜제와 성조)는 덕이 있었다고 하여 누명을 벗겨 주었고, 두 조상의 3백년의 한을 그 사람을 신격화하여 더욱 더 치켜세웠다고 함.
○見碑文及東京記與沿革圖本姓璿系皆以讓王傳位於弟仇亥降于新羅是眞傳兼誣贋也眞者指世宗授受於武力眞者傳弟之稱也贋者謂衡王欲降于新羅則傳弟立一王何也駕洛旣有一王則又何降于羅哉蓋可以見父傳于子兄傳于弟者皆由於衡王父子將入于伽倻也 故今正之千載以下知我罪我亶在于此案余不敢辭也
비문과 동경기와 연혁도를 보면 우리 성씨의 선계(왕의 계통)는 모두 양왕이 동생인 구해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실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거짓이다. 진실은 세종이 무력에게 물러주었다고 하는 것이 진실로 동생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하고자 동생에게 전하여 한사람의 왕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락은 이미 한사람의 왕이 있었는데 또 어찌 신라에 항복하였겠는가. 대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형이 동생에게 전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구형왕의 부자(父子)에게서 유래된 것이며 장치 가야로 흘러 들어갔다. 따라서 지금 바로잡아 천년이후로 알고 있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믿음이 이 생각안에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않는다.
□戊午 新羅法興王二十四年○梁武帝大同四年○西紀後五百三十八年
무오(538년) 신라 법흥왕 24년(25년임) ○양 무제 대동 4년 ○서기후 538년
百濟移都泗沘國號夫餘
백제가 도읍을 사비로 옯기고 국호를 부여라 하였다.
○新羅滅阿戶良國以其地爲郡是曰阿那伽倻自駕洛封五伽倻國至是凡四百九十七年亡
신라가 아호량국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군으로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나가야는 가락이 5 가야국을 봉한 것으로 여기까지 이르러 무릇 497년에 망하였다.
輿地勝覽及三韓歷代圖與歷代史略弁辰考阿尸良國卽阿那伽倻國今朝鮮咸安郡此乃五伽第次之亡
동국여지승람과 삼한역대도와 역대사략, 변진고에서는 아시량국 즉 아나가야국은 지금 조선 함안군이며 이것으로 5 가야가 또다시 망하였다.
□壬申 新羅眞興王十二年○梁元帝承聖元年○西紀後五百五十二年
임신(552년) 신라 진흥왕 12년(13년임) ○양 원제 승성 원년○서기후 552년
命樂師于勒造樂器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악기를 만들다.
按大韓歷代史略新羅眞興王十二年壬申初伽倻王嘉悉法唐樂部箏而製十二絃琴命樂師于勒造十二曲後勒知國將亂携樂器投新羅羅王召見令奏其樂至是王命法知階古萬德等學樂於勒勒因其才敎階古以琴法知以歌萬德以舞三人旣傳十二曲相謂曰此樂繁淫不雅乃約爲五曲勒始聞而怒及聽終歎曰正聲也遂奏之王大悅名其琴曰伽倻
대한역대사략을 보면 신라 진흥왕 12년 임신년(552년) 초에 가야왕 가실이 당나라의 악부의 쟁(箏, 거문고)를 본받아 12현금을 만들고 악사인 우륵에게 명하여 12곡을 지으라 하였는데, 후에 우륵이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신라왕이 불러서 그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 이르자 왕은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등에게 명하여 우륵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세 사람에게 이미 12곡을 전하자 서로가 말하기를 이 음악은 많이 음란하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며 이에 대략 5곡을 합쳤다. 우륵이 처음 듣는 것이라 화를 내다가 듣기를 끝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진정한 소리이다. 라고 하였다. 비로소 왕 앞에서 연주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그 금(琴)을 가야금이라 하였다.
又有玄琴王山岳因晉人所送七絃琴製者也奏時有玄鶴來舞遂名玄鶴琴後稱玄琴又玉寶高者入地理(疑卽智異山)學琴五十年自製三十曲傳之續命得傳之貴金貴金亦入地理山不出王恐琴道不傳使伊飱允興親往致禮以傳其秘鄕琵琶又與唐制大同小異其音有三調一宮調二七賢調三鳳凰調
또 현금(玄琴)이 있었는데 왕산악이 진(晉)나라 사람이 보내 준 일곱 줄의 현금으로 만든 것이다. 연주할 때 검은 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마침내 이름을 현악금이라 하였고 후에 현금이라 칭하였다. 또 옥보고라는 사람이 지리(地理, 지리산이 아닌지 의심된다.)에 들어와 금을 배우고 50년에 스스로 30곡을 만들어 전해주고 계속 전하라는 명을 받아 귀금에게 전해주었다. 귀금도 역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왕을 두려워하여 거문고 타는 법을 전해주지 않자 이찬 윤흥이 친히 와서 예를 다하여 그 비법의 비파를 전수받았다. 또 당에서 만든 것도 거의가 비슷한데 그 음이 3조 1궁조 27현조 3봉황조가 있다.
○此史係于駕洛何夫伽琴玉笛固駕洛之製故曰造樂器至眞興之世此伽琴之傳其道而擴其調謂難於必無之事也
이러한 역사는 가락과 관계있는 것인데 어찌 가야금과 옥적이 진실로 가락에서 만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말하기를 악기를 만드는 것은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이 가야금이 그 연주법을 전해졌고 그 조(調)가 다양해 졌으나 반드시 없던 일이라 어렵다고 한다.
□壬午 馬韓王箕準南遷丁未開國七百五十六年○高句麗平原王三年○百濟威德王八年○陳文帝天嘉三年○日皇欽明二十三年○西紀後五百六十二年
임오(562년) 마한왕 기준이 남쪽으로 내려와 개국한 정미년으로부터 756년 ○고구려 평원왕 3년 ○백제 위덕왕 8년 ○진 문제 천가 3년 ○일황 흠명 23년 ○서기후 562년
駕洛國王金武力以國傳于新羅新羅眞興王以賓禮待之後以駕洛爲金官小京封食邑奉先祀拜武力爲新州大總管後至角干年至九十卒於是駕洛平不書在位何史闕文也
가락국왕 김무력이 나라를 신라에 전해주자 신라의 진흥왕이 손님의 예로서 대하고 후에 가락을 금관소경으로 하고 식읍으로 봉하였으며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무력을 신주대총관으로 삼았다. 후에 각간에 이르러 나이 90세에 돌아가셨으니, 이 가락을 다스리며 왕으로 있었다는 것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니 어찌 역사가가 그 글을 누락할 수 있겠는가.
○國初建宗廟其祀禮以仲春仲夏端午冬至爲重國俗至今尙傳
나라의 초에 종묘를 세우고 그 제사를 2월, 5월, 단오, 동지에 지냈으며 중요한 나라의 풍속이 되어 지금에 전해지고 있다.
按每年仲春端午冬至見趙氏 東窓日記
매년 2월, 단오와 동지에 대한 조동창의 일기를 살펴보라.
○東史金官國初建始祖廟於首陵之側享祀必於孟春三月七日仲夏重五仲秋五月十五日又載疆域考
동사에는 금관국 초에 수릉의 옆에 시조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반드시 1월과 3월 7일, 5월5일, 8월과 5월15일에 지냈다. 또 강역고에 실려 있다.
○雲按古書於太王之降于龜旨峯也一則曰有異氣且聞空中語一則曰有非常聲氣一則曰雲中語黃帝之孫少昊之胤此卽空中語非常聲氣之稱也此乃千載眞傳故開國公碑乃金石之祖而豈非昭穆之左証乎余觀國初建廟之文則是建廟在太王之世甚明也太王祀始祖則是祀少昊黃帝以正昭穆也鳴呼非千載隻眼何足以質諸而無疑乎夫建者重建之辭也創者始設之辭也或者創宗廟而重建在於首露之側也
운배가 고서를 살펴보면 태왕은 구지봉으로 하강하였다. 하나는 이상한 기운과 또 공중으로 부터의 소리가 있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이상한 소리와 기운이 있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구름 중에서 황제의 손자인 소호의 후손이라는 것이니 이는 즉 하늘에서 나오는 말로 아주 이상한 소리와 기운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로 천년간의 진실을 전하니 옛날 개국공의 비석과 그 금석에 적힌 조상이 어찌 그 소목을 증거하는 것을 돕지 않는가. 나는 나라의 초에 종묘를 세웠다는 글을 보고 이 종묘를 세운 것은 태왕의 시대임이 분명하다. 태왕이 시조에게 제사를 지냈으니 즉 이는 소호황제에게 제사를 지낸 것으로 이것이 올바른 소목이다. 아! 천년동안의 남다른 식견(隻眼)이 아니겠는가. 어찌 질문에 충분하지 않겠으며 의심이 있겠는가. 대체로 세운 사람은 또다시 세우는 것을 사양한다.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비로소 말할 것이다. 혹자는 종묘를 창건한 것은 수로왕이 또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秋駕洛謀復國羅將異斯夫擊之諸臣不克皆死之於是駕洛亡自太王壬寅開國至是凡十一世十二王歷年合五百二十一年
가을 가락이 나라의 부흥을 꾀하다가 신라장수 이사부가 격퇴하자 여러 신하가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으니 이로서 가락이 망하였다.[1] 태조왕 임인년(42년) 개국으로부터 여기까지 무릇 11세 12왕으로 합계 521년을 지냈다.
[1]이로 보아 무력이 왕이 되어 신라에 나라를 넘겨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按東史及諸史皆以壬子仇衡王率太子降于新羅待以上賓封上爵至編年國記以壬午革世何曰衡王若降于新羅則衡王固新羅之臣何以謂之衡王且衡王何以無爵位如武力之都督乎且武力曰都督曰角干而猶有王號如慶州金氏璿系譜稱武力王哉
동사와 여러 역사책을 살펴보면 모두 임자년(532년)에 구형왕이 태자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여 최상의 손님으로 대접받고 높은 벼슬에 봉해졌다고 되어있다. 편년국기에 이르러 임오년(562년)의 세상을 변혁시킨 것이 어찌 구형왕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신라에 항복하였다면 구형왕이 진실로 신라의 신하가 되었을 것인데 어찌 구형왕이라고 부르겠는가. 또 구형왕이 어찌 무력이 도독이 된 것 같이 작위가 없었겠는가. 또 무력은 도독이라 하나 각간에게 오히려 왕호가 있는 것은 경주김씨선계보에서 무력왕이라 칭하는 것과 같다.
本姓世譜亦一則曰武力王二則曰武力王在位七年其歷年亦然一曰四百九十一年一曰五百二十一年其五百年之文終不可沒於斷管遺編之後而凡作史者一錯而萬訛可勝言哉夫納陵香祝文定鼎伽倻傳祚十二此載祭享祝則不可誣也又按三韓歷代圖及三韓分據圖皆爲十世十二王歷年五百二十一年此其證也東國遺史亦一佐也
우리 세보에도 첫째는 무력왕이라 하고 둘째는 무력왕이 재위 7년간이라 한다. 그 역년도 역시 그렇는데 하나는 591년이라 하고 또 하나는 521년이라 하니 그 5백년의 글은 끝내 나라가 망하였어도 없어지지 않고 기록이 후세에 물려졌다. 무릇 모든 역사를 쓰는 사람들의 하나의 착오가 만가지로 와전되어 전해지는 것이다. 대체로 납릉의 항축문에 나라를 세운 가야가 12세까지 복록을 전하였다고 하니 이 실려있는 향축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삼한역대도와 삼한분거도를 살펴보면 모두 10세 12왕으로서 521년을 지냈다고 하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동국의 유사도 역시 증거에 하나의 도움을 준다.
又史稱壬午大伽倻叛夫大伽倻本非新羅之臣鄰何以書叛乎駕洛稱伽倻諸史皆然大字之稱固大駕洛之恒稱非可疑也特以叛言者卽駕洛旣革而謀復國蒙叛逆之稱也其羅史如左眞興王壬午秋大伽倻國叛新羅羅王怒命伊飱異斯夫爲將斯多含副之攻滅其國師還策功含爲最王賞以良田及所稱三百口含乃分與將士只受閼川不毛之地生口放爲良人無一留者國人美之是也蓋當時無史大加耶之亡實不知任那之亡又何獨有於駕洛之史哉故今正之
또 역사가 말하기를 임오년(562년)에 대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나 대체로 대가야는 본래 신라의 신하인 이웃이 아니니 어찌 반란을 일으켰다고 써있는가. 가락이라 칭하는 가야의 여러 역사는 모두 그렇게 대(大)자를 붙여 대가락이라 항상 칭하였으니 의심할 것이 아니다. 특히 반란이란 단어는 즉 가락이 이미 멸망하여 부흥을 모의하는 반역을 숨기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신라사는 진흥왕을 보좌한 것과 같이 임오년(562년) 가을 대가야국이 신라에 반란을 일으켜 신라왕이 노하여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장수로 삼고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그 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돌아오자 그 공로에 대한 대책으로 최고가 되어 왕이 상을 주었는데 좋은 밭과 3백명의 종을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다만 받은 알천(閼川)은 불모의 땅이고 산사람들은 놓아주어 양인이 되게 하니 남아 있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으니 나라사람의 아름다움은 이것이다. 대개 당시에 역사가 없어 대가야가 망한 것은 실제로 알지 못하였고 임나가 망한 것도 또 어찌 홀로 가락의 역사에 남아 있겠는가. 지금 바로 고친다.
○又接歷代史略自太王至衡王只序十世而曰凡十五世若序次十世爲正史則五世閏位何也十五世爲正傳則只叙十世闕五王之史何哉且如本記武力王壬子卽位至壬午爲在位三十一年豈皆王之歷數哉當時無文必有逸史故此己斷以告陵香祝之文佐以諸書以正諸家之說所以見忠臣不死人國不亡烈士旣沒社稷亦亡之義則此春秋大義所以戒萬世君臣之義至矣
또 역대사략을 접해보면 태왕으로부터 구형왕까지 단지 순서로서는 10세이다. 말하자면 무릇 15세가 만일 순서대로 10세가 정사(正史)이고 5세가 정통이 아닌 왕이라면 어찌 15세가 바르게 전해지게 되겠는가. 단지 순서가 10세이고 5왕이 빠진 역사는 어떻게 되겠는가. 또 본기와 같이 무력왕이 임자년(532년)에 즉위하여 임오년(562년)까지 재위 31년이라면 어찌 모든 왕의 역수를 알겠는가. 당시에는 글이 없었으니 반드시 빠진 역사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는 그치고 그만두어 릉의 향축문에도 보고되어 여러 서적의 도움을 받아 여러 사람의 설들을 바르게 할 것이다. 충신이 죽지 않으면 사람과 나라는 망하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에 열사가 이미 없어지면 사직도 역시 망하는 것이 도리이다. 즉 이는 춘추대의이니 이를 경계하는 것이 만세의 군신의 도리이다.
○通典曰新羅襲滅駕洛任那諸國此乃駕洛與伽倻幷亡之文也
통전에서 말하기를 신라가 가락과 임나의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이로서 가락은 가야와 더불어 같이 멸망하였다는 글이 있다.
是歲新羅遣將滅高靈伽倻高靈伽倻一曰北伽倻亦曰大伽倻日本史稱任那是也其任那則重譯之辭也其始祖曰伊珍阿豉王亦曰內珍朱智又曰惱窒朱日自駕洛元年壬寅開國
이 해에 신라가 장수를 보내어 고령가야를 멸하였다. 고령가야는 북가야 또는 대가야라 하고 일본사에서 말하는 임나가 이것이다[1]. 그 임나는 즉 이중번역된 말이다. 그 시조는 이진아시왕 이라고도 하고 또 내진주지 또는 뇌질주일이라고도 하는데 가락원년 임인년(42년)에 개국하였다.
[1]앞에서도 설명하였으나 신라의 육지 가운데에 왜가 임나를 두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按金太史富軾地理誌高靈郡大伽倻國鄭麟趾地理志大伽倻國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崔文昌侯致遠利貞傳大伽倻任惱窒朱日卽伊珍
태사 김부식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고령군이 대가야국이다. 정인지의 지리지에는 대가야국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은 또는 내진주지라고 한다. 문창후 최치원의 이정전에는 대가야는 뇌질주일 즉 이진이 다스렸다고 한다.
至道設智王凡十六世世與新羅相攻伐南與日本通競寘司戌兵及駕洛平羅兵乘勝長驅猝入王城建白幟城中震駭異斯夫引兵繼之伽倻人一時皆降於是大伽倻亡以其地爲伽倻郡凡歷年合二十一年
도설지 왕까지 이르러 무릇 16세였다. 도설지 왕 때에 신라와 같이 서로 남쪽을 공격하여 정벌하고 일본과 통하여 경쟁적으로 수병(戍兵)을 두었다. 또 가락을 평정한 신라병사가 승승장구로 갑자기 왕성으로 들이닥쳐 백기를 세우니 성 중은 놀라고 소란스러워졌다.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계속 공격하니 가야인이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이것이 대가야가 망한 것이고 그 땅이 가야군이 되었다. 무릇 역년은 21년을 지냈다.
按大伽倻國境則北自星州咸昌南至浦上八國皆其域也見張氏志淵弁辰考註釋
대가야의 국경을 살펴보면 북쪽은 성주와 함창으로부터 남쪽은 포상8국에 이르니 모두 그 영역이다. 장지연의 변진고 주석을 보라
○通典新羅襲滅駕羅任那諸國
통전에는 신라가 가야와 임나의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고 한다.
○此乃駕洛國與大伽倻是歲幷亡之又一證也
이것이 이에 가락국과 대가야가 이 해에 같이 망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雲按大伽倻十六世載鄭麟趾地理誌又按弁辰考崔孤雲以月光太子之父異惱王於始祖朱日王八世孫則此時惟九王傳授其曰十六王茶山之考以爲崔說鄭史必有一誤不可兩合
운배가 고찰하건대 대가야는 정인지의 지리지에 16세로 실려 있다. 또 변진고를 보면 고운 최치원은 월광태자의 부친인 이뇌왕이 시조 주일왕의 8세손이라 하니 즉 이때는 생각해 보면 9왕이 전해졌고 거기서 말하는 16왕은 다산 정약용의 생각이다. 최치원의 설과 정인지의 역사는 반드시 하나에 오류가 있을 것이고 양쪽은 같지 않다.
○右與駕洛十二王而曰十五王又如壬午國革而曰壬子之文其傳訛而亂眞則一也
가락 12왕은 말하자면 15왕이다 또 임오년(562년)에 나라의 변혁과 같이 임자년(532년)의 글도 그 전하는 것이 와전되어 어지럽게 되었으나 진실은 하나이다.
○按以日史考之則大伽倻卽任那而其通聘日本則在高句麗東明王卄五年新羅赫居世二十五年漢元帝建昭五年卽日本崇神天皇六十五年戊子之歲其後至駕洛元年壬寅爲七十五年至壬午伽倻國革之歲合五百九十五年則宜乎張氏志淵於任那本考斥崔說鄭史及丁考爲失於考而此其駕洛固弁韓而駕洛開國之前新羅始祖赫居世十九年漢元帝永光五年壬午有弁韓來降之文是先駕洛六十九年己有國於南伽倻也此皆老於典古者皆足以識之也蓋朱日繼統任那而國號伽倻外史仍稱任那如箕子朝鮮衛氏仍之也又如駕洛起于卞地因謂弁韓之類凡於東史指不勝記也其於外交則北加最著如日本史新羅沽解王二年遣荒田別等定任那七國
일본역사를 고찰해보면 대가야는 즉 임나이다. 그들은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다. 고구려 동명왕 25년, 신라 혁거세 25년, 한나라 원제 건소 5년은 즉 일본 숭신천황 65년의 무자년(BC33)이다. 그 후 가락 원년 임인년(42년)에는 75년이 되었고 임오(562년)에 이르러 가야국에 변혁이 있을 때에 595년이 되었으니 즉 당연하다. 장지연의 임나본고는 최치원의 설과 정인지의 역사를 배척하였고 또 정약용의 고(考,변진고?)에서는 이 고찰을 잘못하고 있다. 여기서 그 가락은 진실로 변한이고 가락이 개국하기 전, 신라 시조 혁거세 19년, 한 원제 영광 5년 임오(BC39)에 변한이 와서 항복하는 글이 있었고 이보다 앞서 가락 69년 이미 남가야에 나라가 있었다. 이러한 것을 모든 늙은이가 옛 일에 있어서는 모두들 충분히 알고 있었다. 대개 주일(朱日)이 임나의 계통을 이어받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는데 외부의 역사책에서는 거듭하여 칭하기를 임나라 하니 이는 기자가 조선의 위씨 땅을 차지한 것과 같고 또 가락이 변한(卞韓)땅에서 일어난 것과 같다. 이러한데 변한(弁韓)과 같은 종류라고 동사에서 말하는 지적은 참을 수 없는 기록이다. 외교적으로도 북가야는 가장 뛰어났고, 일본사에서와 같이 신라 첨해왕 2년(249년?)에 황전별(荒田別)등을 파견하여 임나7국을 정하였다.
○神功皇后庚辰冬十月后男裝誓師至新羅羅主波沙寐錦降乃寘司戌兵振旅而還
신공황후 경진년(200년?) 겨울 10월에 왕후가 남장을 하고 스승으로서 훈계하기 위하여 신라에 오자 신라 지배자인 파사매금(波沙寐錦)이 항복하고 이에 수병(戍兵)을 설치해 두고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다.
○新羅法興王十三年丁酉遣近江毛野將兵六萬赴任那復新羅侵地
신라 법흥왕 13년 정유년[1]에 근강모야(近江毛野)와 장수와 병졸 6만명을 파견하여 임나로 보내 부흥을 꾀하였으나 신라가 습격하였다.
[1]정유년(517년)은 법흥왕 4년임(즉위년칭원법에 의함. 이글의 방식대로 유년칭원법에 의하면 법흥왕 3년임)
○欽明天皇二十三年眞興王十三年壬申春新羅任那毁我官府以紀男麻呂爲大將率兵討新羅我軍不利三十二年眞興王二十一年春遣使新羅責其滅任那
흠명천황 23년, 진흥왕 13년 임신(552년) 봄에 신라가 임나인 우리의 관부를 쳐부수자 기남마려(紀男麻呂)가 대장이 되어 병졸을 이끌고 신라를 토벌하려 하였으나 우리 군이 불리하였다. 32년 진흥왕 21년(560년) 봄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임나를 멸망시킨 것을 책망하였다[1].
[1]여기서도 임나가 고령지방의 대가야를 말한다면 신라 땅의 육지 한 가운데에 왜의 주둔지가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임나가 김해의 금관가야를 지칭한다면 금관가야는 532년에 망하였는데 임나의 관부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임나는 대마도에 있던 고구려의 정복지 관리 관청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서기에서는 임나를 고구려가 설치한 관청으로서 고구려가 정복한 백제, 신라의 남부와 대마도 일본열도 서부를 관할하던 기구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왜가 설치한 것처럼 꾸미고 있다는 설이 있다.
○夏四月天皇不豫召太子入臥內執其手曰朕欲征新羅復任那不果汝繼朕志遂崩
여름 4월에 천황이 예상치도 않고 태자를 불러 들어오게 하여 일을 맡기며 그 손으로 말하기를 짐은 신라를 정복하여 임나를 부흥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니 너는 짐의 뜻을 계승하라 하고 별세하였다.
○此史以後至于眞平王八年梁後主至德五年丁未紀男等率兵二萬餘屯筑紫遣使新羅行成遂復任那
이 역사는 이후 진평왕 8년에 이르러 양나라 후주 지덕 5년 정미(587년)에 기남(紀男)등이 병사 2만여명을 이끌고 축자에 주둔하며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이윽고 임나가 부흥되었다.
○此於東史不現豈止任那而實非伽倻之再興所以書者備考於五伽倻史也
이것은 동사에 나타나지 않으니 어찌 임나가 없어졌겠는가. 실은 가야가 다시 부흥한 것이 아니니 글 쓴 사람이 참고로서 5가야에 썼다.
至是五伽倻皆亡其碧珍伽倻古寧伽倻二國與弁韓十二國史無傳於後史迭也
이로서 5가야는 모두 망하여 그 벽진가야, 고령가야 두 나라는 변한 12국과 같이 역사가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
編年駕洛國記終
편년가락국기 끝
編年駕洛國記에 나오는 문제점(김순대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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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운배공은 여러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셔서 국승의 역사책에 나오는 가락에 대한 부분을 정리하신 것은 높이 살만 하나 다음의 내용에 있어서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1. 신라왕의 칭원문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고려 김부식이 작성한 신라본기의 각 편년체 서술부 분에서 왕들의 칭원이 즉위년칭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든 모양입니다.
2. 가락의 마지막 왕 문제
구형왕 -> 아들인 구해(이분을 세종이라 함) -> 동생인 무력으로 설정한 세 계는 억지가 너무 심합니다.
현재는 김해의 가락과 고령 땅의 옛 대가야의 멸망이 혼합되어 기술되어 있 기 때문에 이런 혼선이 빚어지고 있지않나 하는 것이 역사학계에서 우세한 설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입니다.
3. 임나가야 문제
일본측 기록을 너무 맹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을 작성하던 시 대가 일제시대라 출판을 하기위해 이런 아부(?)를 해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 또는 고사기는 황당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고 알려 져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나 우리 정사서인 삼국 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역사관과 일본서기를 저술한 舍人親王의 역사관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김부식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또는 중국의 눈치를 보아가며 역사서를 저술하 였다고 하는데, 일본은 간섭받을 일이 없으니 제 마음대로 입니다. 일본서기 보다 먼저 나온 고사기(712년 백제인 안만려 간)에는 임나라는 단어가 하나 도 없는데 일본서기(720년 천무천황의 아들인 사인친왕 간)에 갑자기 임나라 는 단어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오고 일본이라는 국호도 없던 시절(일본서기를 보면 BC600년의 기사에도 일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허구 입니까. 일본이라는 국호가 최초로 보이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역사서인 삼 국사기의 670년의 기사에 나옵니다.)에 임라일본부라는 것이 있었다고도 합 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일본의 양식있는 역사가들은 이 를 허구라고 하지요.
4. 왜 문제
아직도 고대사에 나오는 왜가 실제로 지금의 일본이었는가 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오히려 고대의 왜는 지금의 일본이 아니라 경상남도 서부지방에서 전라남도의 남해안에 거주하던 고대인들이란 설도 유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도 삼국사기를 보면 500년에서 608년사이 왜에 대한 내용이 신라나 백제본기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500년 이전에는 거의 2~3년마다 한번씩 나오는데 이때의 왜는 가야지방 부근의 왜였고 가야가 망하자 울타리가 없어진 왜가 백제나 신라에 복속되어, 왜에 대한 기사가 없다가 608년 이후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왜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일 것입니다.
서기 500년 전에는 백제나 신라가 정부차원에서 중국조정에 조공을 바치는 것도 힘들었는데(신라는 560년 이전에는 아예 조공의 기록이 없고, 백제는 육로를 이용하다가 고구려에 막혀 해로를 이용하게 되었으나 풍랑때문에 고생한 것으로 보임), 하물며 해적집단과 같이 왜가 신라나 백제에 시도때도 없이 자주 출몰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일본땅에서 오기란 그때의 조선기술(땟목정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500년 이전의 왜는 한반도 남부의 왜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위의 임나가야도 일본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가야지방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서 멀리 일본의 대마도까지 지배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고구려가 가야(김해지방과 일본 큐슈지방을 포함)를 지배하기 위한 임시정부였다는 설도 있지요.)
저의 생각을 적어보았습니다. 끝
첫댓글 글 나눔을 허용하신 ,분 께 감사드립니다
글에 나오는 금주에서 산있는 방향이 한반도 김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주는 서방 소호금천씨의 나라이고 소호금천은 신라 김씨들의 조상신 입니다
한반도 가야산은 김해에서 서북쪽에 있다 본문에서 동북쪽에 있다고 하니 이는 히말라야이고 내가 희말라야라고 주장함은 동국여지승람에 가야산은 설산이라고 나온다 인도의 구델리 락양에서 히말랭이는 동북쪽이다 지리산도 한반도 김해에서 보면 정서에 있다 그런데 본문은 서남쪽에 있다고 한다
진주람강은 본문에서 지리산 북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와 진주에 와사 남으로 꺽여 다시 동북쪽으로 흐른다고 하니 한반도 진주 남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