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경, 절망을 요설체로 노래한 시인 ―6.25 후 암울하고 비루한 사회 풍자의 시들
강인한
대체로 우리나라 현대시는 주요한의 「불놀이」 이후 소월을 거치고 청록파를 지나오면서 동양적 관조나 엄숙주의로 일관해오고 있다. 심지어 어떤 시인은 가장 슬픈 시가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까지 말하기도 하였다. 눈물과 한, 설움의 정조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건 마치 한국적인 시가 아닌 양 이른바 순수 전통시의 흐름이 그것을 말해준다. 6·25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온 변화는 시에도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모두다 남들은 소위 대학교수가 되어 꼬까옷에 과자 부스레기를 사들고 모두 다 자랑 많은 나라에 태어나서 산으로 바다로 금의환향을 하는데 걸레 쪼각 같은 얼굴이나마 갖추고 돌아가야 하는 고향도 집도 방향도 없이 오늘도 남대문 막바지에서 또다시 바지저고리가 되어보는 것은 배가 아픈 까닭이 아니라 또다시 봄은 돌아와 꽃은 피어도 뒤 받쳐주는 힘 없고 딱지 없고 주변머리가 없기 때문에 소위 대학교수도 꼬까옷도 과자 부스레기 하나 몸에 지니지 못하고 쓸개빠진 사나이들 틈에 끼어 간간이 마른 손이나마 설레설레 흔들며 떠나보내야 하는 남대문 막바지에서 우리 모두 다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 모두 다 밑천을 털고 보면 다 똑같은 책상물림이올시다 삼월은 가고 사월은 돌아와 있어도 봄을 싣고 산으로 바다로 아스라이 멀어만 가는 기적소리 못다 울 설움에 목이 메인 기적소리를 뒤로 힘없이 맥없이 내딛힌 발끝에 채이는 것은 어머니 돈도 명예도 지위도 권세도 자유도 아무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뿐이올시다 ―전영경 「봄 소동(騷動)」 1956 신구문화사의 『한국 전후 문제 시집』에서 작자는 말한다. “이 작품은 1956년의 것이오. (…) 형하고 서대문 주변에서 청춘을 연소시키던 계절의 것이오. 번민과 방황, 그리고 어쩌자는 것인지도 모를 좌충우돌 시대의 유산이오. 일언이폐지하면 고독이라는 박래품(舶來品)에 병들었던 때의 것으로 내 딴에는 퍽 아끼고 소중한 작품이오.” 「요강 뚜껑으로 물을 떠먹던 시절」이라든가 「사본 김산월 여사」, 「소녀는 배가 불룩했습니다」 등 세태를 풍자하는 그의 시는 그 당시 젊은 문학도들에게는 즐거운 충격이었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다다이즘 혹은 조향의 쉬르 리얼리즘에는 한 번 눈길을 주고 지나칠 뿐이었을 그 때, 전영경이 요설체로 풀어내는 시들에는 모두들 환호하였다. “모두 다 자랑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 산으로 바다로 금의환향을 하는” 상황적인 아이러니, 돈(딱지)도 없고 빽(뒤 받쳐주는 힘)도 없는 힘없는 지식인 청년의 발길에 채이는 건 지위도 권세도 명예도 아닌 돌멩이뿐이라는 자조적(自嘲的) 표현에 깃들인 것은 웃음 이상의 페이소스일시 분명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서로 마주치는, 똑같은 책상물림의 지식인들의 절망이 예리한 냉소 속에서 빛을 발한다. (2001.8.22)
―강인한, 『백록시화』, 73~76 「세상의 바보들을 보고 웃는 방법」 중에서
전영경全榮慶(1930~2001) 함경남도 북청 출생. 6년제 배재중학교를 거쳐 1954년 연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1955년 조선일보에 「선사시대」, 1956년 동아일보에 「정의와 미소」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동아일보 문화부장, 수도여자사범대학, 국제대학 국문과 교수 역임. 시집 『선사시대』1956, 『김산월 여사』1958, 『나의 취미는 고독이다』1959, 『어두운 다릿목에서』1964, 평전 『고하 송진우전』1965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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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이즘[dadaism];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고 야유하면서, 비이성적, 비심미적, 비도덕적인 것을 지향하는 예술 사조
쉬르리얼리즘[surrealism]; 비합리적인 잠재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
페이소스(paths); 불쌍한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