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받아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다.
전날 필리핀 병원에 가서 PCR 검사를 받고 음성 확인서도 받았다.
막상 떠나려니 그동안 오래 살았던 터라, 모두 버리고 나눠줬어도 내 짐가방은 엄청 크다. 추가 비용으로 짐을 모두 부치고 나니 그래도 출발 시간은 세 시간이나 남아서 여유롭다.
출국장에 나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어 일찌감치 줄을 섰다. 한두 번 해 본 일도 아니고 걱정없이 능숙하게 여권을 제시했는데 여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안된다고 한다.
그녀는 나에게 트레블 비자를 만들어야 나갈 수 있다고 한다.
처음엔 이게 뭐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때부터 나는 진짜로 나갈 수 없이 붙들려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트레블 비자를 만들어야 나갈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은 없었다. 늘 이렇게 다녀왔기 때문에 그게 왜 이제와서 문제가 되는지도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다. 은퇴청에서 여권만 돌려주고 가라고 했다는 것까지. 그리고 짐도 다 부쳤는데 이제와서 트레블 비자를 만들라니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간곡하게 말했다.
그녀는 내 휴대폰으로 여기서 만들라고 한다.
나는 내 하얀 머리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당신 어머니뻘 되는 노인이야. 당신 어머니가 트레블비자를 그렇게 손쉽게 만들 수 있어? 더구나 나는 외국인이야."
그러니 제발 나를 내보내 달라고 사정도 하고 화도 내고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갔다.
내 뒤에 줄섰던 사람들은 옆줄로 가고 나만 하염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이 타들어 갔다. 세 시간씩이나 여유가 있어서 느긋했는데 이젠 사람들도 거의 다 나간 듯 불안하고 겁이났다.
휴대폰을 뒤적여서 에이전트에 전화를 했다. 간곡하고 겁에 질린 소리로 이쪽의 사정을 설명했더니 가능한 빨리 만들어보겠다고 한다. 내 인적사항을 모두 갖고 있으니 되는대로 폰에다 보내주겠다고 한다.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가능할 지 모를 일이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빨리 부탁을 해 볼걸.
나를 가로막는 출국장 여직원에게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사정을 해 보았다.
"미안하지만 저 사무실 안쪽에, 높은 분한테 나를 좀 데려가 줘요. 내가 직접 설명하고 사정해 보고 싶다."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던 그녀가 그래도 나를 데리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누군가에게 인계를 해 준다.
그곳에서 나는 아주 절박하게 내 사정을 설명하면서 도와달라고, 비행기를 꼭 타야된다고 빌고 또 빌었다. 짐가방도 이미 부쳤는데 그건 또 어찌되겠느냐고 울상을 지었다.
진짜 울고 싶을 만큼 애가 타는데 높은 사람이 내 예기를 듣고는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먼저 나의 이메일 주소를 묻는다. 내가 ss.....골뱅이 하자 그녀가 골뱅이? 하고 되묻는다. 아아, 이건 한국말이지.
"한메일 점" 하는데 또다시 곧바로 "쩜?" 날카로운 반응이다. "I am sorry, 한메일 닷 넷"
그밖에도 서울의 주소와 필리핀 주소 및 여러가지를 다시 묻고 입력을 하더니 드디어 되었다고 한다.
내 화면엔 은퇴청 로고가 떠 있었다. 아마 은퇴비자로 들어온 내가 취소를 했기때문에 트레블비자로 바꿔야 했나보다.
급한 김에 그걸 다시 은퇴비자로 전환해서 내보낼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에게 빨리 출국장으로 나가서 늦지않게 비행기를 타라고 한다. 나는 그녀를 껴안고 감사하다고 수없이 말했다.
출국장으로 뛰어가는데 내 폰의 벨이 울린다. 에이젠시의 전화다. 급히 내 트레블패스를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미 출국장에 나왔다니까 그쪽에서 더 놀라는 눈치다. "아니, 어떻게? "
나는 그에게 무슨 일처리를 이렇게 했느냐고, 은퇴비자를 철회하면 곧바로 트레블 비자로 바꿔서 나가야 한다고 고객에게 왜 알려주지 않아서 이 고생을 시켰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너무 너무 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탑승수속은 시작되었고 겨우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거의 실신상태가 다 되었다.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애간장이 다 탔으니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어쨌든 해냈다.
첫댓글 대단 하시네요.
그런 경우 닥치면 진짜 머리속이 하예 질 것 같아요.
한국도 아니고 필리핀에서......
이민을 가고
되돌아 온다는게
그리 쉬운일은 아니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