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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20
12월25일 [주님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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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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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BPHojEc3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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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내려오신 하느님!>
4년 전 근처 낚시터에 유기된 작고 예쁜 믹스 강아지 두 마리를 구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 강아지는 뒷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동물병원에서 큰 수술과 재활을 마친 후 입양을 보냈습니다.
동생 강아지는 저희 수도원에서 입양했는데, 이곳에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안정되고, 영양 섭취도 잘 되서 그런지 인물도 살아나고 털에 윤기도 반질반질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서울로 입양간 언니 소식이 없길래, 잘 지내고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니 강아지의 부고장이 날아온 것입니다. 예쁜 꽃들 한 가운데 언니 강아지의 영정 사진이 있는 걸 봐서 장례식까지 잘 치렀나 봅니다.
4년 여간 행복하게 지내던 언니 강아지가 얼마전 산책나갔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장례를 잘 치렀고 화장해서 납골당에 잘 모셨다고, 사별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노라고...
언니 강아지의 부고를 들은 저는 갑자기 저희 집 식구가 된 동생 강아지 바둑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혈육인데,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둑이를 불렀습니다. 품에 안고 알아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바둑아! 이제 너 어떡하냐? 서울 간 언니가 며칠전 세상을 떠났단다! 교통사고로. 누구든 언젠가 다 떠나는거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여기서 잘 살아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고 몸을 흔들었지만, 바둑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멀뚱멀뚱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바둑이하고 말이 좀 통했으면 참 좋을텐데...참 안타깝다. 내가 강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가 되었으면... 그럼 언니 소식도 전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을텐데...
만일 말이 통하게 되면 언제나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 털도 그리 많지 않은 바둑이가 강추위에도 지붕 있는 집에 절대 안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을텐데...
제가 이 웃기는 체험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 신비의 열쇠가 제 작은 체험 안에 어느 정도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우리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시려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아마도 그것이 육화강생의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성탄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둑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정말로 강아지가 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고개를 가로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고개를 세로로 흔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정녕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당신 키를 극도로 낮추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포기하시고 나와 하나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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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코로나 백신처럼 오시는 예수님>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fHByO8t-g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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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예수 부활 대축일과 마찬가지로 많은 본당에서 대축일 미사가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로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되니까 주님께서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태어나시기보다 ‘우리 마음’에 태어나십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모신 작은 마구간입니다. 이런 의미로 ‘미사’는 사실 매번 드릴 때마다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 대축일이 반복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옷을 입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나, 그 예수님께서 밀떡의 옷을 입고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나 본질적으론 다를 게 없습니다. 매 미사가 성탄이 되지 못하면 성탄 미사도 그 사람에게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나, 성체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 우리에게 도대체 왜 기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요즘 같아서는 코로나 백신 접종이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주식이 폭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우리가 모두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의 바이러스에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죄를 없애는 백신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오히려 코로나 백신 보다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울까요, 죄 바이러스가 더 무서울까요?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칫 우리 생명을 잃게 만들 수 있지만,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도 아주 가끔은 존재합니다. 호주에 사는 세 아이는 부모가 코로나에 걸렸지만 멀쩡했습니다. 막내딸은 부모와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잤지만, 전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자칫 우리도 죄의 바이러스에 이처럼 면역력을 지니고 태어났다거나 걸렸어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바이러스는 코로나바이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전파력이 강력하고 걸렸다면 자가 치료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모르니 백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은 백육십팔만 명입니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사망한 유태인 수만 육백만 명입니다. 또 그가 일으킨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그 열 배인 육천만 명입니다. 과연 어떤 바이러스가 더 위험할까요? 당연히 죄의 바이러스가 더 위험합니다.
히틀러가 죄 바이러스의 최초 보균자는 아닙니다. 죄는 우리 안에 있고 끊임없이 생성됩니다. 누구도 그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물론 히틀러의 집은 그 원죄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 죄의 바이러스로 가득 찬 가정에서 자라나 히틀러가 더 완전한 죄의 보균자가 된 것입니다.
히틀러에게 죄를 더 감염시킨 장본인은 아버지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폭력적인 남편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여인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밖에서는 유능한 공무원이었고 집안에서는 매우 폭력적인 남편이요 아버지였습니다. 알로이스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를 여의고 삼촌 밑에서 자란 고아였습니다. 누구도 그의 자아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아줄 백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아의 열등감을 세상 명예와 돈과 쾌락으로 극복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폭력으로 모조리 제거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죄의 바이러스가 무서운 것은 그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 각자 안에서 솟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아에서 솟아나는 재물에 대한 욕심과 성욕, 그리고 명예나 권력욕 등입니다. 사탄이 똑똑한 이유는 이것들의 위험성을 사람들이 모르게 하고 오히려 이 바이러스에 취해 살아도 된다고 믿게 만든 것입니다. 히틀러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결국 아버지처럼 자아에게서 솟아나는 죄의 바이러스를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은 무엇일까요? 이 백신은 2차에 걸쳐 접종해야 합니다. 1차 접종은 이 세상의 부모로부터 받아야 하고, 2차 접종은 하느님의 부모로 받아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죄 바이러스를 죽이는 백신입니다.
히틀러는 1차 접종에 실패하였고, 그러니 2차 접종도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통제되지 않는 죄의 바이러스는 온 독일을 물들였습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자라 자아를 통제할 줄 알았던 독일인들도 히틀러의 엄청난 바이러스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부모가 있어도, 그리스도를 믿어도 그들은 학살과 전쟁의 공범이 되었습니다. 물론 몇 안 되는 1차,2차 접종을 모두 한 사람들만 이 물결에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본인이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교만이 극에 달해 있어서 독일 총통까지 오른 것은 엄청난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그런 착각에 빠져있으니 1차 접종의 중요성을 알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는 순수한 아리아인의 피만 남겨야 한다고 말하며 아기 생산 공장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독일 남자나 여자라면 그 공장에 들어가 아기를 만들고 낳으면 그냥 나라에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히틀러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완전한 히틀러의 바이러스 안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1차 접종부터 거부당한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부모님의 사랑 안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1차 접종입니다. 1차 접종으로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자랍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지 못한 부모에게서 자랐더라도 일단 인간으로 성장했다면 1차 접종은 어떤 형태로든 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접종 없이 1차 접종만으로는 어른으로 성장하여 솟아나는 바이러스를 잡을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2차 접종입니다.
그런데 이 2차 접종은 개인의 자유의사가 매우 존중됩니다. 1차 접종 때 사랑의 필요성을 깨달은 사람만이 2차 접종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맞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맞지 않습니다.
오늘 성탄 때 이 접종을 한 사람들은 목동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천사들을 시켜 이들에게 가장 완전한 죄의 백신인 거룩한 하느님 사랑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몸을 먹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체이십니다. 성체는 하늘의 아버지, 하늘의 어머니의 사랑 백신입니다. 이 사랑을 맞으면 더는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의 항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어떻게 돈에 집착할 수 있고, 육체의 쾌락을 좇으며, 남의 험담을 하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런 욕구나 행위가 나와도 바로 고해성사를 통해 이전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죄의 바이러스를 이기며 살게 됩니다. 그리고 이 2차 접종은 계속되는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반복됩니다.
부모에게서 사랑이 아닌 무관심이나 폭력이 온다면 자녀는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바이러스에 지배당하여 히틀러나 혹은 그와 비슷하게 이웃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속-육신-마귀의 바이러스가 좋은 것처럼 여기라는 사탄의 방해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부모는 자신들의 사랑으로 사랑이 아니면 죄의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이 성장하여 2차 백신 접종을 스스로 받게 됩니다. 아이들이 성체를 거부하는 이유는 부모가 사랑보다는 죄의 가치를 더 크게 알려주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의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면 구유 위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은 코로나 백신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귀한 영원한 생명의 백신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성체를 영하며 기쁨으로 주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기쁨을 되새기라고 잠시 이번엔 언제든 받을 수 있는 2차 백신 접종의 기쁨을 미루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기쁨으로 성체를 영하면 그날이 참 성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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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낮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8)
<(2)임마누엘: 사람은 ‘본성’상 혼자이어서는 안 된다>
연탄길 2’에 ‘어미새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짧은 사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영훈이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어미새를 따라 둥지 밖으로 나온 새끼 때까치 한 마리를 잡았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도 못한 새끼 새를 손에 쥐고 신이 나서 집으로 와서 끈으로 다리를 살짝 묶어 감나무 아래 밑동에 매어 놓았다. 그리고 싸리나무로 만든 흑갈색 병아리 막으로 새끼 까치를 덮어 놓았다.
그런데 잠시 후부터 그 감나무 꼭대기에서 새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분명 때까치였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영훈 머릿속에는 잡혀온 때까치의 어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불쌍한 새끼새를 빨리 놓아주라는 사촌형의 말에도 영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어두운 밤에도 어미새와 새끼 새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영훈은 일찍 일어나 메뚜기를 잡으러 뒷동산에 갔다. 새끼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다.
이슬비에 바지가 다 젖도록 돌아다닌 뒤 겨우 메뚜기 몇 마리를 잡아오고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새끼 때까치 주변에 죽은 메뚜기와 거미가 몇 마리 있었던 것이다.
“혹시 형이 이 새끼새에게 먹이를 준거야?”
“아니” “참 이상하네! 형이 넣어준 줄 알았는데”
아무도 먹이를 넣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어미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 틀림없었다.
영훈은 그때, 자신이 어린 새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끼는 어미새의 보살핌과 사랑 속에 자라야 하는 것이다. 곧바로 다리에 묶여 있던 끈을 풀어 동산으로 날려 보냈다. 새끼 까치가 어미새의 품에서 잘 자라기를 소망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사연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사랑의 위대함을 많이 보아왔고, 또한 이 사랑이 인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작은 동물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새끼새를 사랑해도 어미새 만큼 사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생명들은 이런 ‘사랑의 본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성이란 그것이 그것이 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만약 기러기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동해야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계절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본성 또한 무시된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태국에서 쓰나미가 단 10분 만에 5,000 명, 30분 만에 13만 명, 그리고 30만 명을 삼켜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성탄절 휴가차 여행을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한 스페인 가족의 실화를 영화가‘더 임파서블’이란 제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늘 일 때문에 바쁘기만 했던 ‘마리아’와 ‘헨리’는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세 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는 가족이었지만 또한 특별히 사이가 좋은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맞는 큰아들 루카스는 늘 부모에게 불만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거북하고 필요 없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쓰나미로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루카스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엄마는 물에 휩쓸려가는 루카스를 잡기 위해 자신이 잡고 있던 나무를 포기합니다.
그러다가 심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루카스는 자신을 위해 부당당한 엄마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는 말썽부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빠와 동생들을 찾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성탄 선물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며 살아왔던 가족간의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의 울타리, 또 그 사랑이 부담스럽고 거북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무시될 때 절대 인간 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절에도,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랑의 표징으로 사람이 되셨어도 우리는 그 사랑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으로 더 자신을 채우려고 합니다. 마구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보다는 베들레헴의 도시의 어지러움을 택합니다.
그렇게 올 해 성탄절도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또 그래서 외로우면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 즉 우리의 창조자의 사랑이 아니면 결코 만족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사랑을 인정하려면 먼저 지금 내가 그분 없이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내 외로움을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채우려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혼자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제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엔 혼자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평택 시골에서 수원까지 봉고차를 타고 통학하였는데,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가 불량배에게 길에서 끌려갔다고 해서 저는 불량배들이 모여 있다는 곳까지 혼자 친구를 찾아갔고, 또 반 친구가 불량학생에게 맞고 있을 때 저 혼자 그들과 맞선 적도 있습니다.
영화가 애들 다 망친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런 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그 땐 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는 우정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싸움 잘하는 친구와 시비가 붙게 되었습니다. 물론 싸우지는 않았지만, 학교 쌈짱이라고 하는 학생에게 맞서는 제가 어리석어보였는지 저의 친구들은 모두 저를 나무랐습니다. 제가 잘못했더라도 친구들은 저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저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때였지만 저는 ‘결국엔 세상에 나 혼자구나.’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외롭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우울하게 다니자, 한 개신교 신자 친구가 우리가 다 아는 상투적인 충고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신데 왜 외로워~?”
저는 성당을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속으로, ‘웃기네!’ 하면서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나도 성당 오래 다녔는데 그걸 모르겠냐?’ 그러나 학교 갔다 왔다 하면서 그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사실 친구들이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금 외로움을 채워 줄 수는 있었지만 영혼의 외로움은 채워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친구들의 우정으로 제 외로움을 채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진정으로 그분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예수님은 제 마음에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태어나셨습니다.주님께서 처음으로 저와 함께 계셔주신 것입니다. 아니 항상 함께 계셨지만 처음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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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어제 밤 미사의 전례는 하느님 아들의 탄생의 신비에 대한 흥분과 두려움으로 차 있다고 한다면 오늘 낮미사는 기쁨 외에 서정적이고도 풍부한 신학적 내용으로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본기도에서는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면서 인간이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아들을 통해 이미 신성(神性)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신학적인 사색을 보여준다.
복음: 요한 1,1-18 :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14절)는 말은 단순히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순히 우리와 같은 나약성, 죽음, 한계성, 죄와 더불어 존재해야 하는 일반적 의미의 인간의 의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항구한 ‘거처’를 실현시키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표현보다도 ‘우리 가운데 그분의 장막을 치셨다’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광야생활을 한 것처럼, 예수님의 유랑체험 또한 계약의 ‘장막’ 안에서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 야훼의 현존(출애 25,8; 민수 35,34)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인간에게 다가오셨다.
그분은 말씀이시며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며, 하느님과 함께 창조주이심을 복음은 고백하고 있다. 즉 나자렛 예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강생의 기적 안에서 당신 자신의 작품을 만드신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그분이 당신 스스로를 시공 안에 가두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을 ‘영광’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14절)
즉 하느님 사랑의 위대함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바로 스스로의 낮춤을 통해 들어 높여진다는 사실을 요한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십자가상의 죽음’이 곧 하느님 아들의 ‘영광을 받음‘의 표현이라고 가르친다.(요한 12,23-24) 그리스도의 ’영광‘은 죽는 밀알 하나가 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 죽음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열매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렇게 역설적이면서도 결국 애매모호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황하거나, 그분을 거절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절). 이 ‘백성들’이란 예수께서 유다 베들레헴에 빛으로 태어나셨을 때나, 그분의 공생활 동안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그분을 매달았던 당시의 유다인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생활 속에 받아들였으며 받아들이고 있는지, 더 솔직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발견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생활 속에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신앙을 통해 순진한 어린이나, 죄 없는 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을 나누어주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존재로 스스로를 낮추신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12-13절) 즉 우리는 그분을 맞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육이나 육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루가 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가질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성탄 자체가 우리에게 충만한 은총이다. 그 은총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형제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당신 자신의 신분을 우리 인간에게 신비스럽게 참여시킴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신다.
진정으로 성탄의 신비는 단순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신비이다. 매 순간의 삶에 충실하여 그 안에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여러분들 가정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풍성한 강복을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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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대축일 - 새벽)
루카 복음사가는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때에 세 가지 이야기를 전합니다. 호적 등록에 관한 이야기와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어지는 새벽 미사의 복음은 루카가 전한 양치기들의 주님 경배 이야기입니다. 이 경배는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와 선물을 바치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와는(마태 2,1-12 참조) 다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을 뵙고자 지난밤 천사가 알려 준 곳으로 발길을 재촉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가 자신들에게 약속한 바를 봅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들은 기쁜 소식의 뜻을 해석합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가 ‘구원자 주 그리스도’(루카 2,11-12 참조)이시라는 메시지를 직접 확인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에게 자신들이 들은 바를 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갑니다.
그렇습니다. 루카가 전한 주님 탄생 소식은 그 끝맺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의 중요함을 일깨웁니다. 목자들의 행동을 보십시오. 가서, 보고, 그리고 알리기 위하여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에 천사의 말을 듣고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렸던 여인들의 행동과 일치합니다.(루카 24,1-10 참조)
이 새벽녘 어슴푸레 밝아 오는 여명이 주님 탄생의 기쁨을 더해 줍니다. 분명히 깨달았다면 일어서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처럼 온 세상에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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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의 복음 말씀은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입니다. 장엄한 별, 천사들의 천상 찬미가, 가난하고 겸손한 목자 그리고 구유 안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선포하는 지난밤이나 오늘 새벽 복음과 달리 오늘 복음은 ‘말씀의 육화’, 곧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은 시적 구절들과 담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적 구절이 한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을 노래한다면 담화 부분은 사람이 되시어 오신 말씀에 대한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에 요한 복음서의 머리글을 묵상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동화 같은 예수님의 탄생을 좀 더 깊게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그저 환상으로만 남지 않기를 선포하면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음을 마음속 깊이 새기라고 초대합니다. 성숙한 눈으로 강생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연약한 사람의 살을 취하신 말씀을 바라보는 “은총에 은총”이 필요합니다.
로마 제국 치하에서 여러 정치적, 종교적 신념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에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뚜렷한 자기 주관에 고집까지 더해진 사람들과 함께하시고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고집스럽고 더 확고한 정치적, 종교적 신념 속에 살아갑니다. 게다가 성탄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기보다는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만 바빠 보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바라보고 깨달을 “은총에 은총”이 더욱 간절한 때입니다. 성탄의 신비를 노래한 요한 복음사가의 시를 다시 한번 읊어 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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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 - 밤 미사)
구세주께서 탄생하신 밤, 천사를 통하여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전달받은 이들은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나 들에서 야영하며 양들과 지냈기에 몸에서 늘 가축 냄새가 배어 나던 이들입니다. 게다가 흙먼지로 불결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다니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세주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이들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을 대표하던 목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목자들만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된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비추어진 큰 빛이야말로 그들이 오랫동안 짊어진 멍에를 부술 평화의 한 아기의 태어남을 뜻한다고 예언합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신 그 밤의 천사도 태어난 아기로 말미암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려 준 아기는 “구원자, 주 그리스도”로서 이사야의 예언대로 “평화의 군왕”이십니다.
또한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며 구세주 탄생의 신비를 더욱 확실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끝없는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뵌 목자들처럼, 세상 눈에는 변변하지 못한 인생일지라도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의무감이 이 밤에 절로 생깁니다. 평화가 끝없이 이어지기를 이 거룩한 밤에 오신 구세주께 은총을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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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1)예수님>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생명을 주려고 오신 ‘생명이신 분’이고,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이신 분’입니다.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라는 말은, 사실을 전하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생명이신 분’이고,
우리에게 참 빛을 주시는 ‘빛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로 해석되는 말입니다. (‘생명의 빛’의 반대말은 ‘죽음의 어둠’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라는 말과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라는 말도 사실을 전하는 말이 아니라,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을 알아보아야 하고,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라고 신앙을 촉구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의 백성’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말인데,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뜻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는 뜻입니다. 수는 적었지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겨자씨’ 역할을 했고, 그 씨는 큰 나무로 자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고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않고, 맞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적이 아니고, 신앙인들의 적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들’은 신앙인의 이웃이고, 형제이고, 선교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이 말씀은, ‘이리 떼’ 같다고 ‘안 믿는 사람들’을 비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제자들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선교활동은 ‘이리 떼’ 같은 사람들을 ‘양들’ 같은 사람들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활동입니다. 선교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봉사활동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라는 말씀을,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속의 처세술이 아니라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함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려면 성령의 지혜와 예수님의 온유함을 갖춰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기도해야 하고,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요한 1,12-13)
이 말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재산’을 받을 수 있는 ‘상속권’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재산’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기서 ‘권한’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권한이라는 말보다는 ‘은총’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권한이 있어서 그 권한으로 요구해서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일입니다. (‘자비’이기 때문에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바라지 않는 사람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기를 바라는 ‘희망’과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상속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중간에 멈추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상속권을 잃게 됩니다.)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은 인간의 자연적인 출산 과정과 다르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부모가 신앙인이라고 해서 그 자녀가 자동적으로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아세례는 아기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부모가 결정하는 일이지만, 아기가 자라서 참으로 신앙인이 되고, 신앙인으로서 사는 것은 그 자신이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라는 말은, “신앙인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다.”라는 뜻입니다(요한 3,5)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여기서 ‘영광을 보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직접 보았고, 믿는다.”라는 증언입니다. 보았어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본 것이 아닙니다. 또 믿는다고 해도 증언하지 않고 믿음을 감추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신앙의 증언은 말로도 이루어지고, 삶으로도 이루어지는데,
삶으로 하는 증언이 더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인생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고,
인생 전부를 걸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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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미사)
<(2)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4-7)
아기를 구유에 뉘었다는 말은, 외양간에서 출산을 했다는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것은 여관비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관에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관에 방이 없었다는 것은, 베들레헴에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베들레헴의 주민들 가운데에는 이제 곧 아기를 낳을 산모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상황에 대해서, 왜 좀 더 일찍 가지 않았느냐고 요셉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칙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곧바로 나자렛을 출발했더라도, 마리아가 만삭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들레헴에 도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방을 구하지 못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던 요셉과 마리아의 상황에서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방을 구하려고 애를 쓴 요셉과 마리아는 ‘가장 작은 이들’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방을 내주지 않은 베들레헴 사람들과 먼저 와서 여관방을 차지한 사람들은 모두 ‘가장 작은 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외면한 사람들입니다. (호적 등록을 하려고 베들레헴으로 간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관방을 먼저 차지하고서 그 방을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은 요셉과 같은 집안의 사람들이었을 텐데, 같은 집안이라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남이야 어찌 되든지 자기 한 몸 편안하면 그만이라는 이기심 앞에서는......)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루카 2,8-9)
베들레헴에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목자들’은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에게 외양간을 빌려 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그 지역의 외양간은 가축들이 잠을 자는 우리와 목자들이 잠을 자는 임시 숙소가 함께 있는 동굴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목자들의 임시 숙소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야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난 것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 탄생 후에 그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뵌 사람들입니다. 그 목자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줌으로써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입니다(마태 25,40; 히브 13,2). (그들은 첫 번째로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첫 번째로 메시아를 뵙는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라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일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1,10-12)
‘온 백성에게’는 사실은 ‘온 인류에게’입니다. “큰 기쁨이 될 소식”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다는 소식입니다. 그 소식이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큰 기쁨의 진짜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고, 진짜로 기쁜 소식은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는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입니다. 마르코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마르 12,37) 예수님 말씀의 뜻은, “메시아의 임무는 다윗 왕조의 회복이나,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국가의 독립이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이다.”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메시아는(예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나를’ 위한 날이고, ‘나에게’ 큰 기쁨이 되는 날입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천사의 말은,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은, 그 아기가 곧 ‘너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라는 표시다.” 라는 뜻입니다. “아기가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이 왜 메시아의 표징인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이 말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7-29)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는 ‘가장 약하고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또 힘이 세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자신을 모두 비우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은 바로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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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온다고 했습니다.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방에 촛불이 하나 켜지면 밝아집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으니 온 세상이 밝아졌습니다. 외로움도, 슬픔도, 고통도, 절망도 벗어버리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하면 좋겠습니다.
‘유튜브’는 동영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승강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공유합니다. 승강장에는 가판대가 있고, 자동판매기가 있고, 마트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이용하듯이 유튜브는 좋은 품질의 영상을 제공하면서 광고로 수익을 창출합니다. 저도 유튜브를 애용하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강의를 듣기도하고, 뉴스를 듣기도 합니다. 책을 읽거나 강론을 준비할 때면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유튜브는 광고를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저도 광고를 보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습니다. 핸드폰을 켜두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다른 영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광고를 듣다보면 흐름이 끊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광고가 나오면 ‘건너뛰기’를 누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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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상 구원의 봉사자가 되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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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께서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신 날
오늘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는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처럼
구유 같은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날
오늘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모신 것을
뉘우치는 날
오늘은
여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거칠고 메마른 곳으로 내몬 것을
뉘우치는 날
오늘은
거친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부드러운 내 품에
곱게 모시는 날
오늘은
쫓겨나고 버려지고
잊힌 사람들을
내 삶의 한가운데에
정성껏 들이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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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정운광 마태오 신부님]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1,9) 알렐루야! 알렐루야!>
찬미 예수님! 메리 크리스마스!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베들레헴 마굿간에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새 희망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시작을 주시는 아기 예수님 탄생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첫째, 성탄절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혼란스러움에 특별한 교훈과 용기와 은총을 주시는 뜻 깊은 날입니다. 하느님이시고 온 우주의 왕이신 구세주 예수님은 화려한 왕궁에 태어나져 않으시고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대림 3주일에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자들은 왕궁에 있다.”(마태 11, 7-8) 요셉 성인과 성모 마리아 어머님과 목동들, 그리고 목동들의 순박함과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박함 속에서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 축복하십니다. 소박함 속에서 진정으로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축복하십니다. 이 참된 축복을 받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겉껍떼기의 허망한 권력이나 순간적 환상의 화려함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시며
마굿간에 들판을 지키는 목동들에게 오셨음을 감사합시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참 생명의 빛,구원의 빛으로 오셨음을 감사합시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빛을 필요로 합니다. 그 참 빛이 예수님이심을 다시금 명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원죄의 그늘에서 해매일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입니다. 육신의 한계인 죽음을 직면하는 비참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입니다. 그 상황 속에 영원한 생명의 존재를 가르쳐 주시고 희망의 빛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쁨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 때문에 성탄절인 오늘 다 같이 행복합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구원의 나눔을 받았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먼저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보증과 삶의 새 혁명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시기 위해 아기 예수님으로 오셨습니다. 참 구원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항하여라.’(요한 13, 34-35)고 하시며 ‘서로 나눔을 실천하여라. 서로 희생을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희는 행복해질 것이다’를 가르치기 위해 오셨음을 명심합시다. 이것을 실천하여 다 같이 행복하게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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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순교복자수녀회 민병섭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모든 수녀님들께 전하며, 그 옛날 목동들이 들판에서 양을 지키며 모닥불을 쐬고 있을 때 하늘에서 영광의 빛이 비치며 천사가 나타나 그들에게 전해준 축복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내리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오늘 밤 우리의 구세주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암흑의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빛이 비쳐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묵시록에서도 우리의 주님은 자신을 ‘나는 다윗의 뿌리에서 돋은 그의 자손이며 샛별이다.’(묵시 22,16)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새로운 별이 떴습니다. 옛날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하였던 그 별이 이제 우리들의 마음속에 떠올랐으며 우리들을 절망의 늪에서 새로운 희망의 언덕으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시인은 노래하기를 성탄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입맞춤”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죄에 사로잡힌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이 입맞춤”이 인간이 애써 하늘을 향해 발끝을 곧추세워
바둥거림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비우시고 낮추셔서 인간의 세계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내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나 자신밖에 모르는 그런 삶을 살기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우리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은 땅에 대한 하늘의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늘의 사랑을 맞아들이며, 하늘과 입맞춤하며 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들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그 중에서도 여관집 주인과 목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묵상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관집 주인은 자신의 집에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탄생하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행운이 찾아왔지만, 동방박사들처럼 먼 거리를 걸어서야 겨우 만날 수 있는 메시아를 가만히 앉아서 만날 수 있는 큰 축복이 왔지만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여관집 주인은 이러한 큰 축복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너무나도 바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면에서 바빠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할 일없이 빈둥대는 사람이 많을 때는 더욱 바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수녀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맡겨진 소임이 없어 그냥 쉬고 있는 처지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영광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너무 바쁘게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관집 주인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지금 내가 어디 서 있는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과연 나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하고 항상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맡겨진 소임에만 얽매여서 ‘바쁘다, 바뻐’하면서 보다 중요한 일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하는 일의 마지막 목적이 하느님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주변을 돌아볼 수 있고 또 이웃들의 모습에서도 주님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관주인은 그러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바벨탑을 쌓기 위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높은 곳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정도로 일에만 매어있는 너무 바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관집 주인은 최소한의 인심도 베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관이라는 특성상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만원이 될 수도 있고 또 나중에 온 사람에게 방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관집 주인은 요셉과 마리아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만삭이 된 산모에게 방을 줄 수 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손님을 잘 대접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천사들을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성경에서뿐만이 아니라
현대에서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관집 주인은 메시야께 자기 방을 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우리의 소임에 바뻐 우리의 동료들을, 또는 우리들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소홀히 함으로 주님의 천사를 맞아들일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여관집 주인은 너무나도 무관심했습니다. 그는 자기 방을 내어주지는 못했어도 최소한 만삭이 된 여인에게 이부자리를 내어줄 수는 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여관집이니 그 정도의 여유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너무나도 무관심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무관심’입니다. 함께 살아가면서 이웃들에 대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 사람들, 자신의 속한 공동체에 아무런 감각과 감정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왜냐면 무관심은 바로 사랑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도도 없고, 형제 자매들 간의 친교도 없으며, 형식만 무성하고 쓸데없는 전통만 주장하며
권위만 내세우는 죽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하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착한 목자들처럼 천사의 말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별을 보고 먼 길을 달려 찾아오지는 못할지라도 천사가 나타나서 말할 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라는 직업은 24시간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 직업인 것입니다. 더구나 밖에서 방목을 할 때에의 밤에는 피곤하고 졸리고 그래서 더욱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밤에 이 목자들은 천사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당시 세리와 같이 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던 목자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 구세주의 탄생의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어도 마음이 깨끗하여 아무런 편견도 없는 이들에게 주님의 소리가 들여왔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천사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마음에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보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우리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천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목자들처럼 즉시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 바로 다음 구절에 보면,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하고 말하며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빨리 할 것과 천천히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천히 할 일은 빨리 하고 빨리 할 일은 천천히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일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도하고 천천히 해도 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는 일은, 그것이 기도이건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건 빨리 그 때에 하지 않으면 큰 축복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입니다.
우리들이 연금술사의 저자로 잘 알고 있는 파울로 코엘료가 전하는 아름다운 성탄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프랑스 피레네 산맥의 생 마르탱에 있는 작은 마을의 본당 사제는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놀라운 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던 것이다. 꽃이란 꽃은 이미 모두 져버린 지 오래인 겨울에, 대기 중에 퍼지는 향긋한 향기는 마치 때 이른 봄을 알리는 듯했다.
신부는 호기심이 일어 이 경이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보려 성당 밖으로 나섰다가 마을 학교 교문 문턱에 쭈그리고 앉은 한 소년과 마주쳤다. 소년의 곁에는 황금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이런, 정말 멋진 나무로구나!”
신부가 말했다.
“천상의 축복을 받아 성스러운 향기를 뿜어내는 게로구나. 게다가 황금으로 만들어졌다니! 대체 이 나무를 어디서 찾은 게냐?”
신부가 감탄했지만, 소년은 별로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제가 여기까지 이 나무를 끌고 오는 동안 나무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잎사귀가 점점 더 단단해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게 금 일리는 없어요. 게다가 전 부모님이 이걸 보고 뭐라 하실지 걱정이 태산인데요.”
소년은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에 어머니가 돈을 주시면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 멋진 나무를 사오라고 하셨어요. 전 타르브 읍내로 향했죠. 도중에 마을 하나를 지나다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사람도 없이 홀로 지내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어요. 크리스마스를 혼자 맞는다는 건 너무 슬프잖아요. 나무를 살 때 값을 좀 깎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저는 따뜻한 식사나 하시라고 제가 가진 돈 중 얼마를 그 할머니께 드렸어요.
그리고 타르브에 도착해서 큰 감옥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죄수들과의 면회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었어요. 그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낼 수 없어서 슬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 중 누군가가 파이 한 조각 살 돈도 없다고 말하는 게 들리더라고요.
그 순간, 저는 저보다 돈을 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가진 돈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 또래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점심 사 먹을 돈만 남겨 두고 다 드리고 말았죠.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 나무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나무 파는 분이 저희 집안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 제가 다음 주에 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하면 나무를 그냥 얻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장에 도착해보니, 그분은 그날은 나무를 팔러 나오지 않았더라고요.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 나무 살 돈을 빌려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일단 뱃속을 든든히 채우고 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싶어서 식당엘 갔는데, 처음 보는 아이가 제게 다가오더라고요. 아마 다른 마을에서 온 아이 같았어요.
그 아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면서 돈을 좀 빌려줄 수 있겠냐고 제게 물었어요. 전 예수님도 어렸을 때 이렇게 배를 곯은 적이 한 번쯤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점심 사 먹으려고 남겨둔 돈을 아이에게 털어주고 집으로 향했죠. 오는 길에 저는 전나무 가지를 하나 꺾었어요. 그걸 다듬고 잘라서 근사하게 만들어보려 했는데, 나무가 쇳덩어리처럼 무거워지더니 결국은 이렇게, 우리 어머니가 기대하신 멋진 크리스마스트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고 말았어요.”
신부가 말했다. “얘야, 이 나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이 나무가 천상의 축복을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단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내가 알려주마. 네가 그 불쌍한 할머니와 헤어지자마자, 그 할머니는 역시 한 사람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께 자신이 받은 예기치 못한 축복을 너에게도 베풀어 주십사 하고 기도를 올렸지.
감옥에서 면회를 기다리던 사람 역시 천사를 만난 것이 분명하다 생각하고 파이를 살 수 있게 된 데 대해 천사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단다.
식당에서 네가 만난 그 낯선 소년도 배고픔을 면하게 된 데 대해 예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지. 성모와 천사들 그리고 예수께서는 도움 받은 자들의 기도를 들으셨어. 그래서 네가 그 전나무 가지를 꺾을 때 성모께서는 그것에 자비의 향기를 불어넣으셨지. 네가 나무를 끌고 걸어가는 동안 천사들은 그 잎사귀를 어루만져 황금으로 바꾸어 놓았구나.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만지는 모든 이들이 죄 사함을 받고 소원을 이루도록 하셨단다.”
전설에 따르면, 생 마르탱 어딘가에 아직도 그 축복 받은 전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그 능력은 너무나 커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이웃을 도운 사람은 아무리 외지고 작은 마을에 살고 있을지라도 그 나무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들 합니다.
오늘 이곳 수녀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저는 수녀님들의 공동체 안에 축복 받은 전나무가 자리하고 있기를, 그리고 오늘 밤의 목동들처럼 주님의 일에 바쁘고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러분들에게 또한 여러분들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사랑의 축복을 듬뿍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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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창훈 바오로 신부님]
<우리 삶의 자리에 오신 정겹고 사랑스러운 하느님>
불경과 속된 욕망으로 황폐화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간들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계획을 세우시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영광과 지혜를 쉽게 체험할 수 있도록 임마누엘 주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표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인식을 깨달아갈수록 하느님의 배려가 얼마나 신비스럽고 구체적인가를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신 표현을 거창하고 요란하게 드러내시지 않고, 아주 정겹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심으로써 인간들이 하느님을 가까이하기에 쉬운 분으로 받아들이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유에 탄생하시어 초라하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생동감이 있으신 주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구유를 관상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생동감과 사랑스러우신 모습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는 체험을하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칙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가는 힘든 길을 걸어갔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중에 베들레헴에 도착했지만 인간들의 욕심 즉,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욕심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은 거처할 장소가 없어서 마구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그동안 여정에서 겪은 어려움은 모두 사라집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든든한 힘이 솟아오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거창한 모습은 아니지만 생활 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목동들에게‘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이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정겨운 주님을 만나서 용기를 얻은 목동들의 거친 생활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용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한 광경을 관상하면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과 용기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도 정치 지도자들이 저지른 혼란 때문에 어지러운 상황이지만 우리를 삶의 근원에서 구원해주시고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 정겹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오시기에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정겹고 사랑스러운 주님과 함께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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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어느 해 성탄 미사 강론에서 ‘엘리 비젤’이라는 유대인이 전한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제셀’이란 아이가 친구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다가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술래 친구가 자기를 찾지 않고 집으로 갔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아이의 슬픔에 공감이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숨어 있어서 찾지 못한다고 좋아하고 있었지만, 한참을 숨어 있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밖에 나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적막감이 흐르는 가운데 억울함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이 아이 역시 그런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이렇게 눈물로 범벅이 된 손주의 호소에 랍비인 할아버지는 이 사실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깨달음을 담아서 이렇게 타이릅니다.
“그랬구나.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얘야. 하느님도 마찬가지란다. 그분이 숨으셨는데 우리가 찾지 않는 거란다.”
술래가 숨어 있는 친구를 찾지 않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면 숨어 있는 사람의 입장은 기가 막힐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고 자기 편한 곳으로 그냥 가버리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해야 한다고 교황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성탄에 마구간에 태어난 한 아이 안에 하느님이 숨으셨습니다. 그리고 숨은 하느님을 발견한 사람만이 성탄의 큰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때에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성모님, 요셉 성인, 동방박사, 목동….
그들 모두 큰 기쁨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초라한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숨어 계십니다. 내 이웃 안에 특히 고통과 시련 속에 힘들어하는 이들 안에 숨어 계십니다. 이 하느님을 발견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당연히 큰 기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쁜 성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이웃 안에 숨어 계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시간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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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보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세뱃돈으로 받은 돈을 들고서 동네 문방구에 가 망원경을 샀던 기억이 있습니다. 책에서 본 하늘에 떠 있는 많은 별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동네 조그마한 문방구에서 파는 오천 원짜리 망원경으로 볼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흐릿해서 아무 별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별을 보려면 고가의 천체 망원경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책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고 아름다운 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만약 오천 원짜리 망원경으로 하늘의 별을 보겠다고 한다면 어리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주님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습니까? 주님의 뜻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서도 자기 뜻을 다 이루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해주세요. 저것을 해주세요.’라면서 끊임없이 청원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도로 주님을 설득시켜야 자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청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시도록 하느님을 설득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주신 그분의 선물을 알아차린다는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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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매일의 성탄>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어둠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구세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가정에, 온 누리에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셨다는 것은 겸손과 당신을 밥, 양식으로 내어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을 보면, “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1,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1,14).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셨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시고자 하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오늘도 밥이 되어주십니다. 영양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하셨습니다. 구유에 모셔진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예수님을 더 잘 모실 수 있기를, 더 자주 영성체할 수 있도록 다짐하는 봉헌의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비대면 미사를 봉헌하니 안타깝습니다. 하루빨리 영성체를 직접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 겸손함으로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웃에게 또 하나의 양식으로, 영양으로 복이 되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구원하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역사 속으로 들어온 뜻 깊은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나를 위해서 내 앞에 오신 날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하필이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 사는 집에는 방을 얻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내어놓은 방이 없었습니다. 그분께서 구세주인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 방을 내놓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비천한 마구간을 통해서 모든 가난한 사람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습니다. 말구유에 눕혀져서 한없이 낮아지는 당신의 앞으로의 삶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도 목수인 아버지 요셉과 함께 일하심으로써 사람들의 노고와 땀, 보람을 몸소 체험하심으로써 위로와 격려를 주십니다. 그러나 끝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한 이들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총독은 그분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사형선고를 내리고 손을 씻었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고 죽으셨으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셨고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시어 영원히 사시는‘임마누엘’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오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는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오늘, 이 성탄축일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 안에서 거듭거듭 태어나시도록 마음의 방을 내 드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천 번, 만 번, 태어난다 해도 내 마음 안에 그분을 낳아드리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탄은 단순히 과거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날 소명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어 오지만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그 어둠을 비추어야 합니다. 죄악의 어둠, 시기와 질투, 분노, 적개심, 미움으로부터 벗어나 용서와 화해, 기쁨과 평화,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성탄입니다.
어느 날, 마더데레사 수녀님께서 길을 지나시다가 한 어린이의 고름을 만지며 치료하고 있을 때 함께 살고 있던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은 잘사는 사람이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사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질투나 시기심이 생기지 않나요? 수녀님은 정말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그랬더니 수녀님께서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수녀님께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는 주님의 삶을 이미 살고 계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28) 하신 말씀이 가슴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끝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구세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못 박았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하면 당연히 자신들을 찾아와서 메시아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잘난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잘 믿고, 교리도 많이 알고 그래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자신만만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겐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헤로데 왕은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처음부터 자기가 아닌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나중에 동방박사들에게 경배하겠다고 했을 뿐 마음으로는 이미 아기를 죽여 없애버렸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학식이나 인물, 돈을 잘 번다든지 인기가 높다든지 칭찬을 더 받든, ‘나보다 더 나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 정말 이것도 큰 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고유한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을 활용하기도 힘든 데 말입니다.
진실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분은 성 데레사 수녀님처럼 허리를 굽히는 사람입니다. 허리를 굽혀야 하고 말구유로 내려오신 밥통 안에서 ‘나는 네 밥이야’ 하고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
주님께서는 높은 데가 아니고 낮은 데에 계십니다. 우리가 이런 분을 생각하면 거기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니, 거기에 이미 와 계십니다. 혹 우리가 이미 와 계신 분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의 문이 아직 그분에게 향하고 있지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마음을 그분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 돌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매일 매 순간 사랑하는 것이 매일의 성탄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사랑에 굶주려 그대를 바라보십니다. 친절에 목말라 그분은 그대에게 구걸하십니다. 충절에 헐벗어 그분은 그대에게 희망을 겁니다. 그대 안에 머물 집이 없어 그분은 간청하십니다. 그대는 그 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성 마더 데레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또하나의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을 밝게 비추고 기쁨과 평화를 나누어 주시길 희망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여러분을 만난 것이 참 기쁨이 되고 큰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도록 그에 걸맞은 삶을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을 낳아드리는 매일의 성탄을 이루시길 기도하며 다시 한 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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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성탄을 축하합시다>
-말씀사랑, 말씀예찬-
예수님 탄생하셨습니다.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절망의 세상에 희망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죽음의 세상에 생명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시니 비로소 살맛나는 세상이,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동시에 우리의 성탄입니다.
이래서 주님 성탄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제1독서 서두 말씀도 성탄의 기쁨을 한껏 고무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구나!”
그대로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하여 화답송 후렴처럼 우리는 ‘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다.’고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고백합니다. 아침 주님 성탄의 기쁨을 노래한 아침 찬미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영원한 천주성의 찬란한 광명,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 오시네
병들어 신음하는 만민낫우려 구원의 문되시려 찾아 오시네
천사들 합창소리 땅을 흔들고 천상의 노래소리 세세상일세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드리고 우리게 전해주네 평화와 기쁨”-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의 서두로 시작하는 ‘말씀 찬미가’입니다. 지난 밤미사의 목가적牧歌的이고 동화童話같은 분위기와는 판이합니다. 탄생하신 예수님의 정체를 밝히는 참 장엄한 말씀 찬미가입니다. 과연 지난 밤 작은 아기, 무력한 작은 아기로 태어 난 예수 아기의 정체에 대한 답을 바로 오늘 말씀 찬미가가 줍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바로 탄생하신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빛이며 희망이요 생명으로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요한 복음 사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신비를 참으로 깊이 관상하는 복음 사가 요한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우리 인간의 신비도 해명됩니다. 바로 인간의 원형은 그리스도요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참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될수록 주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신비를 푸는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지 소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능동적입니다. 명사라기 보다는 동사입니다. 만들고, 생산하고, 창조하는 동사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살아 약동躍動케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삽니다. 바로 인간의 본질을 말씀임을 밝힙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말씀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들은 혈육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야 하는 우리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어제 읽은 글귀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매일이 크리스마스 성탄입니다(Everyday is Christmas).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매일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참 사람이 되는 데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일치도 구원도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하느님을 사랑하십니까?
참 하느님의 자녀가, 참 내가 되고 싶습니까?
날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열쇠가 바로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공부에 한결같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치유의 구원에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빛과 생명과 영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주님의 영광 가득한 삶입니다. 말씀의 빛만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과의 일치를 통해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참 나의 실현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성소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도 되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될수록 참 평화에 기쁨이요, 영육의 건강에 참 사람의 성인이요 이는 우리 필생의 과제입니다.
그러니 온힘을,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신비만이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인간의 신비를 해명해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탄 대축일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 함께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한결같이 말씀공부와 실천에 충실하게 하십니다. 주님 탄생을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 탄생하심으로 비로소 우리 모두 살맛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 탄생의 축복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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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십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요한 복음서는 '말씀 찬가'로 문을 엽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께서 말씀이시지요. 하느님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모든 것은 말씀이신 성자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말씀은 우리 영혼을 비추는 빛이십니다. "빛이 생겨라."(창세 1,3) 하신 하느님의 첫 말씀이 심연을 덮은 어둠을 걷어내며 세상 창조를 시작하셨지요. 말씀은 인간 존재 안에 빛으로 스며들어 새 창조를 이루어가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자께서 어떤 분이신지 밝힙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을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성자는 빛이시고 하느님의 완전한 모상이십니다. 그리고 강력한 말씀으로 만물을 지탱하고 계십니다. 한없이 연약하고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의 약함이 곧 창조하시는 힘이라니 놀랍지요. 인간의 권력자는 강함을 무기로 휘두르지만, 하느님의 주권은 약함의 힘으로 행사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빛으로 오신 말씀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그분께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계십니다. 말씀의 힘으로 영의 눈이 뜨이면 자신에게서, 이웃에게서, 세상에서 그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눈을 뜬 이상, 영혼이 열린 이상 빛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빛은 우리 주변을 맴돌며 한없이 따사로운 손길로 우리를 어루만지시다가, 어느날 우리 내면을 파고 들어와 우리를 가득 채우십니다.
제1독서는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본다 ...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이사 52,8-9)
말씀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이십니다. 특별히 오늘 같은 날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위안이 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와 식민지 압제 상황 속에서 더욱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렸듯이 말입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과 의학 기술에 자신만만하던 인류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혼비백산해서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중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주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대축제일에 그나마 온라인 매체 덕분에 미사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구유에 경배하지도 성체를 영하지도 서로의 손을 잡아주지도 못하니 마음이 몹시 아프고 고통스럽지요.
그동안 여러 이유로 성사생활에서 소외되었던 분들, 신앙생활은 꿈도 못 꾸며 생계를 이어가는 분들,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차가운 길에서 지내는 분들, 이국에서 값싸게 노동력을 제공하며 존엄성을 잃어가는 분들, 병고에 지친 분들, 차별에 시달리는 분들...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든 이웃들의 굶주림이 더욱 커다란 허기로 몰려와 영혼을 쓰라리게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그럼에도 말씀은 주님의 충만함을 이야기합니다. 부족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그분의 충만함은 물질과 소유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어떤 결핍의 상황에서도 충만할 수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이는 발가벗겨지고 모든 걸 다 빼앗기고 목숨까지 내놓아야 해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니까요.
하느님이 당신을 비우고 또 비워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시면서 우리에게 건네신 충만함이 곧 은총이고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총에 은총을 , 사랑에 사랑을 받아, 죄의 짐에 짓눌리면서도 결핍과 결함투성이인 자신의 실존을 부여잡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우리 힘으로 당장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한계와 결핍이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는 단초가 된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받은 충만함을 내내 잃지 않을 겁니다. 공기만 차 있다면 구부러지고 흔들리고 넘어질망정 쪼그라들지 않는 '바람인형'처럼, 우리의 종잇장 같이 가벼운 실존도 그분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이 복되고 기쁜 성탄날, 말씀 묵상이 다소 무거워졌네요. 주님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를 특별한 은총으로 위로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긴 터널을 함께 통과하는 우리가 서로 연민의 사랑과 기도를 나누며 빛으로 가득한 주님의 충만함을 잃지 않게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거듭거듭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난함 안으로 들어오셨으니 함께 기뻐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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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빈집>- 아무 걷는 이 없고 인기척 없는 거리는 비참하다.
옛적에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진노하시어 그들의 도읍 예루살렘을 원수들에게 구경거리로 넘겨주심으로써, 유다인들이 자기들을 증오했던 자들의 통치 안에 들어가 버려져 더 이상 축제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명을 어기는 영혼에게 진노하시어 그를 원수들에게 넘겨주시고 원수들은 그를 꾀어내서는 완전히 못쓰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가족이 살지 않는 집이 어둠에 싸여 버려지고 천시되며 먼지와 더러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처럼, 하느님을 모시지 않는 영혼도 죄의 암흑과 정욕의 수치와 온갖 치욕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아무도 걷는 이 없고 인기척 없는 거리는 비참합니다. 그곳은 야수의 잠복처가 되고 맙니다. 주님이 거닐지 않으시고 그분의 목소리로써 악의 영적 야수들을 쫓아내지 않는 영혼도 비참합니다.
-성 마타리우스 주교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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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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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코로나19’의 위험 속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지도 못하고, 찾아 나서기도 주저하는 이 암울함에도 아기 예수님은 기어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방호벽을 뚫고, 그 두려움을 넘어, 그 비참함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비참함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슬픔과 무능에 짓눌려 있는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사실, 오늘은 기쁜 날이라고 말들 하지만, 참으로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 역사 안에서 둘도 없는 당혹스럽고 황당한, 신비롭고 믿기지 않는 대체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날입니다. 이 무시무시한 일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는 앞의 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셨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하느님이 사람으로 나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직역하면 ‘살을 취하였다’는 뜻으로 “말씀”이신 하느님이 육을 지닌 사람의 약함 안으로 들어온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다바르)이라는 히브리어의 그림문자의 뜻은 놀랍게도 ‘아들의 길’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첫째의 뜻은 ‘아들에게로 가는 길’이란 뜻이고, 둘째는 ‘아들이 이룬 일, 곧 사건’, 역사를 뜻이며, 셋째는 ‘아들이 걸어갈 길’, 곧 아들들이 걸어갈 모범임을 말하며, ‘길’(데레크)이란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창세 3,24)을 가리킵니다. 결국,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살게 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는 빛이심을 드러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셨다”는 것은 ‘천막을 치고 우리와 함께 거주한다.’는 뜻입니다. 곧 거처를 사람인 우리 가운데 두고 우리와 함께 사람으로 사신 것을 말합니다. ‘천막(장막)’이란 당신의 임재와 현존을 상징합니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성막은 이제 하느님께서 산 위에가 아니라, ‘하느님이 백성 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성막과 성전에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렀듯이, 이제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사실, ‘아들’(바르)이라는 단어의 그림문자의 뜻은 ‘집에 거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말씀”은 우리 안에 아버지의 집을 짓고 거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유대 랍비 아브라함 여호수아 헤셀의 표현대로 ‘성막’이 공간 속의 성소이고 ‘안식일’이 시간 속의 성소라면, 이제 ‘사람’이 하느님의 성소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그러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그러기에, 이는 단지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셨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오시어 ‘바로 여기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나아가서는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가운데서 사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함께 거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함께 구원의 공동작업을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함께 벌이는 ‘사랑’입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 사랑의 행위가 바로 강생의 신비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극진한 사랑이 우리에게 오셨으니, 그 사랑이 우리에게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비우시니 우리도 비워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져야 할 일입니다.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사랑과 기쁨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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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주님!
당신께서는 저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 안에 빛을 불어넣으시고 어둠을 몰아내소서.
빛의 아들로 세상의 등불 되어 당신 빛을 비추게 하소서.
빛을 증언하여 세상이 당신의 말씀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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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2,11)
"주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주님 성탄의 큰 축복이 복음 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여러분 모두의 마음 안에 충만히 내리기를 빌면서, 성탄 인사를 드립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지럽고 불안하고 혼란한 가운데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십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지만, 주님 성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힘으로 이 힘듬을 함께 이겨내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20년 성탄 메시지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의 삶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성탄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어디에 있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형제는 우리 가운데 하나이며, 이들이 바로 구유에 계신 예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시대에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는데, "하지 못하는 것에 불평하지 말고, 덜 가진 이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산교구 교구장이신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님께서는 이번 성탄 담화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갈수록 훌륭한 사람, 똑똑한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들로 꽉 차가고 있습니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덜 훌륭하고, 덜 똑똑하고, 그저 삶의 일선에서 허덕이는 분들을, 하느님께서 예수 성탄을 통해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따뜻이 감싸고 어루만지며 보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 성탄을 맞이하여 함께 미사드릴 수 없고, 친교의 시간도 가질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지만, 이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조용한 성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성탄, 무엇보다도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이웃에게 다가가는 그런 의미 있는 성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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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DMwWDAqKO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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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 7)
대림 뒤에
맞이하는
뜻 깊은
성탄이다.
성탄의 시간이
우리에게로
왔다.
힘겨움 뒤에는
분명 우리를
살리시는
성탄이 있다.
성탄은
자리바꿈의
사건이다.
우리 삶의
자리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셨다.
삶의 애환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는
성탄이다.
그러나
성탄을
받아드릴
빈 자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빈 자리를
찾으신다.
빈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성탄의
기쁨이다.
내어드림으로
우리의
나날들은
하느님의
나날들이 된다.
고개를 숙여
구유에 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본다.
하느님 없는
우리 삶에
하느님께서
오셨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성탄의 별빛과
성탄의 햇살을
흠뻑 받으며
다시 시작하는
희망의 성탄이다.
하느님께서
오셨기에
모든 것은
은총이
될 것이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하늘과 땅
영광과 평화
하느님과
사람은
다시 치유와
행복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맞아들임이
성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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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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