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
[히브리서 12장 1-2절]
얼마 전 <거인의 노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인 김익한 교수는 성공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1) 기록하라
2) 반복하라
3) 지속하라
먼저 기록에 대해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를 듭니다.
다빈치는 자신의 아이디어 스케치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글과
발명품의 설계도,
심지어 요리법까지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책의 분량은 자그마치 1119쪽이나 됩니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나라의 위인 중에서도
기록의 대가를 찾았습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죠.
그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꾸준히 기록해 놓은 「난중일기」는
고전 중의 고전이죠.
그의 일기에는 일상뿐만 아니라
업무, 회의 기록,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풍성합니다.
특히 회의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앞에 닥친 문제의 핵심을 꿰뚫는 동시에
새로운 작전까지 생각해 내었습니다.
이처럼 기록은 한 사람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할 수도 있던 것이죠.
이걸 계속 반복하고 꾸준히 지속하면
인생의 방향을 찾는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며 기록과 반복,
지속이라는 단어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특히 반복과 지속은 한글자로 하면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습관이 매우 중요합니다.
단순하지만 그걸 반복하고 지속할 때
한단계씩 성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어떤 것을 반복하고
지속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바로 앞장인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만큼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인물 중심으로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가 등장할까요?
노아가 있죠.
그는 영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대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늘 하나님만
경외했던 자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배를
지으라고 하십니다.
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의의 상속자라고
칭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친척 본토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지만
믿음으로 광야 길을 걸어갔죠.
이 정도도 정말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더 큰 시험 문제를 내십니다.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죠.
10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바치는 게 쉽습니까?
어제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당장 달려가서 아들의 상태부터
물었습니다.
“괜찮아? 아들 다친데 없어?”
“네 저는 괜찮은데 자전거가 좀...”
당장 이렇게 말했죠.
“아빠는 자전거는 중요하지 않아.
아들이 더 중요해.
너만 안 다치면 괜찮은 거야.”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저도 이렇게 아들이 사랑스러운데,
아브라함은 얼마나 더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아들이
이삭과 모리아산에 오릅니다.
아들을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날카로운 칼로 이삭의 숨통을 끊으려는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죠.
“내가 이제 알았다.
이삭보다 날 더 사랑하는구나.”
아브라함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이 외에도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 기드온,
삼손, 다윗, 등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히브리서 11:38a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자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히브리서를 읽고 있던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나요?
우리 함께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절의 시작이 ‘이러므로’입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앞선 믿음 장에 나온 이야기에
‘이어서’ 간다는 말이죠.
허다한 증인들이 바로 믿음의 선조들이죠.
이들처럼 우리가 뭘 해야 할까요?
1) 죄를 벗어 버려라.
죄를 벗는 것입니다.
왜 여기서 ‘벗으라’고 했을까요?
죄가 가진 특성 때문입니다.
죄는 무겁습니다.
죄를 입는다는 말은
무거운 추를 가득 매달고
물속을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골인 지점을 향해 나아가기는커녕
제대로 뜰 수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또한 죄는 우리를 옭아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방심하면
사탄은 곧장 죄의 그물을 던집니다.
가느다란 낚시줄 같은
죄의 그물에 한 번 걸리면
그대로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했던 말과 연결됩니다.
골로새서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예수를 믿기 전에 입고 있던
더러운 죄의 옷을 벗어버리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새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이렇게 나왔습니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cf) 어릴 적 밖에서 놀다가 집에 오면
엄마가 꼭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
그땐 몰랐습니다.
부모가 되어 보니 생각보다
빨래가 많더라고요.
만약 제가 빨랫감이 많아지는 게 싫어서
아이들에게
“오늘은 축구한 옷 그대로 입고 자.
일주일만 더 입자.”
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싫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듯이
날마다 더러워진 죄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죄의 옷은 벗어 버리십시오.
새로운 옷, 의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첫 번째 걸음입니다.
2) 인내로써 경주하라.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인내로서 경주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은
고난과 죄의 장애물을 넘어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게 되죠.
설교를 준비하는데 아들이
자꾸 찾아왔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제 집중력을
흐려 놓았습니다.
설교문이 계속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결국 아들에게 나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불편한 겁니다.
순간적으로 제 모습에 대해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너는 지금 인내로서 경주하고 있니?’
생각해보니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이 와서 있는 걸
‘관심과 사랑’이 아니라
‘방해’로만 생각했습니다.
방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거절과 약간의 협박이라는 기술을
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인내로서’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회개했습니다.
여전히 문틈으로 얼굴을 비추고 있던
아들이 보였습니다.
웃으며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혼자 논다고 하더군요.
귀여운 아들을 옆에 두고
다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로서 우리 앞에 있는
신앙의 길을 달려갑시다.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때문 아니겠습니까?
3) 예수를 바라보라.
이런 의미에서 2절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르케고스’로서
‘창시자’, 또는 ‘앞서 인도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 백성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다’는 원어로 ‘아포라오’입니다.
이 단어는
“신념을 가지고 고정하여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고 주목하고
또 주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하면서
자꾸 내 형편만 보아서 되겠습니까?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민족 대표 33인 중에서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자그마치 16명입니다.
대단하지요?
어두운 역사적 터널 안에서
한 줄기 빛으로 도약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올곧게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
박희도, 정춘수란 자들은
그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어요.
모진 고문과 감시로 인해
믿음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하늘에서 상이 클줄 믿습니다.
일례로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들은
믿음의 씨앗이 되어
순교의 제물로 천국에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반에 잘했다고 자만하지 마세요.
페이스 조절이 중요합니다.
반대로 아직 믿음에 대한
확신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말처럼
우리는 끝까지 견디며
믿음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날마다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즘 수영을 배웁니다.
빨리 배워서 멋지게 수영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숨쉬기와 발차기만
시키는 겁니다.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는 거지?’란
생각이 들 때쯤,
강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제가 매일 발차기만 시켜서
이상하죠?
빨리 자유형, 배영, 접영 배우고 싶으신 거
다 알아요.
그런데 발차기와 숨쉬기가 안 되면
다른 것도 할 수 없어요.
이게 기본입니다.”
맞습니다.
강사님의 말씀처럼
숨쉬기와 발차기가 잘되어야
팔 돌리기도 잘할 수 있죠.
지겨워도 해야합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어요.
믿음의 기본기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일 습관처럼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나라 높이 뛰기의 희망인
우상혁 선수 하시나요?
그런데 그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약점이 있어요.
오른발이 왼쪽 발보다 1.5cm정도 작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지나가던 택시가
우상혁 선수의 오른발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로 인해 양발의 길이가 서로 다르게 되었죠.
그는 어릴 때부터 육상을 좋아해서
달리기를 하다가 높이 뛰기로
전향하였습니다.
남다른 소질이 있었던 그는
2016년 만 19세의 나이로
리우 올림픽에 참가합니다.
아쉽게 예선 탈락을 했지만
그래도 한국 대표가 될 만큼
실력이 있었죠.
그러나 2019년에 큰 슬럼프가 찾아옵니다.
국가대표에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것을 포기했죠.
얼마 후 김도균 코치로부터 연락을 받습니다.
그는 우상혁 선수의 가능성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도균 코치가 우상혁에게 가르친 건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상혁의 장점을 파악했습니다.
30미터까지 정말 빠른 스피드를 가졌기에
이걸 역이용하여 높이뛰기에 적용했습니다.
이를 위해 매일 기본기를 다졌죠.
시간이 흘러 우상혁은
지금의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
우상혁 선수를 향해 코치가 해준 말이
인상 깊습니다.
“너는 얼마든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어.
너를 믿는 나를 믿어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얼마든지
세계적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어.
너의 가정은 얼마든지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어.
너를 믿는 나를 믿어봐.”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을 원하십니다.
그 믿음의 기본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기본으로 시작하여 영광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