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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 앞에 있습니까? (시2-54)
2026년 3월 13일 (금요일)
찬양 :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본문 : 시54:1-7절
☞ https://youtu.be/6qVl8x-SE10?si=oEkMJIbIvZunSWQX
어제 목회사관학교에 독감으로 아프신 한 분이 참석하지 못하셨다. 늘 건강의 약함을 가지신 목사님, 그러나 마음으로는 누구보다 열심히신 목사님께서 속히 강건하시기를 기도한다.
어제 사관학교 강의를 하면서 모두의 열정과 주님의 일하심에 감동이 되었다.
하나같이 최선을 다해 달려오셔서
하나님께서 장학금을 주시기를 소망할 정도로 모두가 멋진 열정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 일하신 은혜임을 안다. 그래서 기대가 된다.
나도 그래서 어제 늦게까지 이분들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다음 주 교재에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되도록 새로 작성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분명한 증거다. 오직 사랑만이 부족함을 채우는 능력이 됨을 배운다.
오늘은 박종오 목사님의 금요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목사님의 친절하고 섬세한 강의가 많은 사역자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시는 시간이 되며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의 임재로 충만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이날 주님은 어떤 말씀으로 인도하실까?
오늘 본문에는 표제어에 다윗이 십 사람의 고발로 인해 이 상황이 펼쳐졌음을 말하고 있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부르짖는 다윗의 고백이 나온다. 1-2절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기서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십 사람이 과연 누구냐는 것이다.
표제어에 나오는 이 설명을 주목해야 한다. <십(Ziph)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것은 삼상 23:19, 26:1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뼈아픈 사실은 '십 사람'들이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즉 혈연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족이었다는 점이다. 다윗은 이방인이 아닌, 자신이 보호해야 할 동족으로부터 고발당하는 극심한 배신감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 이 시를 지었다.
여기서 그는 주의 이름으로, 주의 힘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변호해 달라고 요청하며 자신의 피할 길 없는 답답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자신이 당하는 현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3절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셀라)’
다윗은 여기서 자신을 밀고한 동족을 향해
"낯선 자(strangers)"와 "포악한 자(ruthless)"라고 부른다.
혈통으로는 동족이지만,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이나 다름없다는
정확한 영적 진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 <셀라>라는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편에서 음악적 기호로 목소리를 높이다, 혹은 잠시 멈추어 묵상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험악한 분위에 함몰되지 않고 잠시 멈추어 묵상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향한다.
여기 십 사람들은 왜 다윗을 고발하여 넘겼을까?
왜 이들은 낯선 자들이 되고, 포악한 자가 된 것일까?
다윗은 이들이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시선과 그분의 뜻이 아닌 자기의 욕망과 안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우리의 삶에서 낯선 자들이 되고, 포악한 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본다.
이들은 당대의 최고 권력인 사울에게 잘 보여 자신의 '안전'과 '성공'을 담보 받으려는 욕망에 자기 동족마저도 고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현대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어디서든 이익을 위해 동료를 밟고 올라서는 무한 경쟁, 그리고 힘 있는 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약자를 소외시키는 냉혹한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렇게 생겨난 것임을 묵상한다. 이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사울의 권력'을 자기 앞에 둔 자들이다.
이런 세상의 한 가운데를 살면서 다윗은 그럼에도 이렇게 외친다. 4절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자신을 고발하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며 그들을 원수로 대하며 마음에 분노를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순간 다윗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은 사람임을 발견했고 즉시로 자신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외친다.
다윗의 외침에는 두 가지 핵심 단어가 등장한다.
첫째, <돕는 이 (עֹזֵר, 오제르)>라는 단어로 '돕다'라는 동사(아자르)의 능동태 분사형이고, 두 번째 단어는 <붙들어 주시는 이 (סֹמֵךְ, 소메크)>로 '붙들다, 지탱하다'라는 동사(사마크)의 능동태 분사형이다. 모두 능동태 분사형이다.
히브리어에서 분사(Participle)는 명사처럼 쓰이기도 하지만, 동사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현재의 상태나 동작'을 나타낸다고 한다.
오늘 본문을 히브리어의 뉘앙스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나를 돕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 생명을 계속해서 붙들고 계시는 중이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돕고 계시며 내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중이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다. 믿음의 눈은 참으로 우리의 삶을 땅을 밟고 살지만, 하늘 위로 날아오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지금 억지로 위안을 삼기 위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라고 외치는 것도 아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고발로 당하는 심각한 고난의 현실로 숨이 꽉 막히고
분노의 게이지가 끝까지 올라간 순간에도
바로 지금 여기가 하나님의 맹렬한 도우심과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팔이 안아주시는 현장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쫓기는 유대 광야의 한 가운데서 그는 낙헌제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감사를 올리겠다고 한다. 이유는 단 하나, 주의 이름이 선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7-8절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구약의 제사 제도 중 화목제의 일종인 낙헌제(히브리어 ‘네다바’)는 어떤 의무나 율법의 규정 때문에 드리는 제사가 아니다. 낙헌제는 아무런 조건이나 요구 없이, 오직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그분의 성품 자체가 너무나 좋아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기쁨과 자원함으로 드리는 예물이다.
다윗은 메마른 유대 광야에서 당장 끌고 올 제물도 없고 오직 사울의 군대가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는 상황에 낙헌제로 제사를 드리겠다고 외치면서 이미도 주께서 자신을 건지시고 보응하셨다고 선언한다. 그의 시선이 믿음을 타고 이미 거룩한 자리에 머물고 있음을 본다.
십 사람들은 사울 왕 앞에 있기에 그의 요구에 반응하여 자신의 동족 마저도 고발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머물고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낙헌제를 드리며 감사로 제사하며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고 있음을 본다.
오늘 아침 주님은 다윗을 통해 내게 주신 믿음으로 현실의 광야를 날아올라 다윗처럼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여 낙헌제를 올리는 사람이 되라고 요청하신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막막함에 빠진 내게 다윗처럼 낙헌제를 올리기를 요청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압권이다.
나는 솔직히 내 마음에서 다윗처럼 낙헌제를 올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지금 없다.
다만 종이 되어 후반전을 살기로 작정한 나로서
주님의 이끄심에 순종하여
오늘 감사함으로 낙헌제를 올려드리는 날로 살아갈 것이다.
주님, 오늘도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다윗의 믿음과 같지 못하지만, 주인되신 주님의 명하신 일에 순종하며 감사함으로 낙헌제를 올려드리는 하루로 살아가겠습니다. 주여, 나를 받으소서.
한줄 묵상 :
<다윗 같은 믿음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함이 하늘을 감동시키는 가장 향기로운 낙헌제입니다.>
적용 질문 :
나는 지금 나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눈에 보이는 사울(세상의 힘과 조건)' 앞에 서 있습니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2. 기쁨이나 감사가 메말라버린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오늘 내가 의지적인 '순종'을 결단하며 하나님께 올려드릴 나만의 '낙헌제'는 무엇입니까?
3. 내게는 십 사람이 어떻게 보여지고 느껴지고 있나요? (분노 vs 영적 분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