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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효심의 영사정.........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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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남원 영사정(永思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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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위한 정자 남원 영사정(永思亭)
시절이 시절인 만큼 황금물결이 기대되는 남원시 금지평야는 여름의 막바지 섧리를 어기지 못하고 이
미 작은 붓을 꺼내 노란 물감을 덧칠하고 있었다. 노랑은 밝은 색이며, 낙관적이고 유쾌한 색이다. 스
마일 운동의 로고가 노랑이다. 달을 상징하는 노랑은 일반적으로 즐겁고 흥겨운 인상을 주는데 가령
주황과 빨강과 배색한 노랑은 삶의 환희와 에너지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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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영사정(永思亭)을 찾지 못해서 마을을 온통 뒤집다 못해서 마을 회관까지 문을 열고 찾아 낸곳 ‘영
사정’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아 영사정 관리 회장님의 전번을 받아들고서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
요? 누구시죠? 아~` 이차저차 해서 서울에서 온 여행객인데 ‘영사정’과 ‘영사정사재당(永思亭과思齋
堂)’을 좀 볼려고 하는데 혹 영사정과 사재당을 좀 볼수 있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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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자, 아~~이거 미안한데 내가 지금 용산역인데 내려 갈려고(남원으로)한데. 당장 갈수는 없고 대신
나의 조카에게 키가 있으니 연락처를 줄테니 가서 도움을 받으라는 전언 이었다 그러면서 내가 전화
를 해 놓을테니 찾아 가보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끊는다. 조금 있으니까 띵동.. 연락처가 도착, 곧
바로 연락을 하고 집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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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찾아가 대문의 벨을 누르니 기달렸다는 듯 문을 열어주면서 아~ 금방 연락 받았어요 하시면
서 반갑게 맞이해 주신다. 어르신께서 목이타니 시원하게 한잔하고 가자면서 음료한잔을 건넨다. 가
뜩이나 무더위에 목이 말랐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받아들고 한번에 원샷 시원한 창량감이 목을 타고
가슴.아니 심장까지 한기를 느끼게 해준다. 역시 도심같지 않은 남원 윤씨 시골 인심이란 어디를 가
나 풍요로운 가을 같아서 세상 살맛나는 것 아닌가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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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암처사(竹巖處士)로 불리는 그는 정자 이름을 부친을 오래도록 사모한다는 뜻으로 '영사정(永思亭)'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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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 주련;을 소개해 본다, 주자의 경제잠(敬齊箴)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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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其衣冠 尊其瞻視(정기의관 존기첨시)의관을 바로 하고 존경하는 눈빛을 띄도록 하라.
潛心以居 對越上帝(잠심이거 대월상제)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앞에 모시고 살듯 하라
足容必重 手容必恭(족용필중 수용필공).걸음걸이는 무겁게 하고 손의 자세는 공손하게 하라.
擇地而踏 折旋蟻封(택지이답 절선의봉).땅을 골라 밟되개미 둑에서도 피해 돌아가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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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님의 안내를 받아 택내리 내기마을 깊숙한 곳, 언덕길을 오르자 언덕위엔 넓다란 주차장이 자릴
하고 있었다. 그 주차장 끝 자락 절벽 언덕위엔 한 채의 목조건물이 무더위에 지친 나머지 강한 햇빛
에 목마름을 참지못해 허덕이면서 가끔씩 불어오는 하늬바람에 맞서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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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담장은 무너져 있고 유랑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약간의 관리소흘이 남긴 게으름의 상징이리라...
아님 정부 문화재 지원 미흡?? 유랑자는 반심반의 하면서 정문을 통해 사당 안으로 빌을 들려 놓는다.
정면과 옆면엔 주련으로 가득하고 주련엔 과거 선인들의 시문들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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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은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 내기마을 야산에 있는 누정으로 기묘명현(己卯名賢) 사제당 안처순
의 아들인 죽암 안전이 건립 하였으며 1590년 중수 이후에 서당으로 사용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
의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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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永思亭)의 이름은 하서 김인후가 짓고, 편액과 주련의 글씨는 명나라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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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묘소를 자주 찾아볼 수 없어 이곳에서 망배하기 위하여 영사정(永思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부
친을 오래도록 사모하였다고 전한다. 영사정(永思亭)의 이름은 하서 김인후가 짓고, 편액과 주련의 글
씨는 명나라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주지번은 영사정에 오지 않았고 글을 받았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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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번은 남경 사람인데 중국 북경에 와서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계속 낙방하였는데 익산 장암에 사는
표옹 송영구가 조선 사신으로 연경에 갔을 때 주지번의 사람됨을 보고 과거보는 방법과 학문하는 자
세를 지도한 인연이 있어 이 둘은 사제지간의 예를 갖추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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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주지번이 장원급제하여 조선 사신으로 오게 되어 익산 장암의 망모당 편액, 전주 객사 풍패지관
편액, 그리고 남원의 영사정 편액을 휘호하였다 한다, 영사정 편액은 해서로 썼으며 주지번의 낙관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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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영사정에 오르면 멀리 지리산 자락이 눈에 잡히고 금지 평야를 적시는 섬진강이 한눈에 조망된다. 그러나 운무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볼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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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글씨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써 주었으며, 전국에 많은 글씨가 남게 된 연유도 이러한 이유인
듯하다. 또, 영사정은 유명한 정자로 김인후, 기대승, 양팽손, 송순 등이 교류하던 곳이며, 정철, 윤두
수, 안위, 이후백, 안정, 양사형, 한준겸, 임제 등 많은 제현들이 찾아와 시를 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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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에 오르면 멀리 지리산 자락이 눈에 잡히고 주련이 온 기둥을 감싸고 있다.현재 건물은 1994년
보수한 것으로 모두 21개의 현판이 있으며 분실을 염려하여 안씨 재실에 많은 현판을 보관하고 있다.
영사정은 순흥 안 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교유장소였다. 명나라 장수 사대수
의 시가 있어 소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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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은 순흥 안 씨 가문의 효의 상징이자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교유장소였다.
*영사정 주련;을 소개해 본다.
出門如賓 承事如祭(출문여빈 승사여제).문을 나서면 손님 대하듯, 일을 처리 할 때는 제사를 드리듯 하라.
戰戰兢兢 罔敢或易(전전긍긍 망감혹이).조심조심 두려워하여 잠시도 안이하게 말라,
守口如甁 防意如城(수구여병 방의여성).입을 지키기를 병(甁) 입을 막듯하고, 뜻 지키기를 성문 지키듯 하라.
洞洞屬屬 罔敢或輕(동동속속 망감혹경).성실하고 진실하여 감히 잠시도 경솔히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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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 팔경도] 전체 8폭 중 1폭과 8폭이 누락되어 6폭만 남아 있다. [영사정 팔경도]의 일부 화제
가 양대박이 지은 (영사정 팔영)의 시제와 일치해 [영사정팔경도]라 명명되었다.
<제1경> 창송냉월.蒼松冷月:푸른 솔에 걸린 쓸쓸한 달빛
<제2경> 수죽청풍.脩竹淸風:대숲에 이는 맑은 바람
<제3경> 순강모우.鶉江暮雨 :순자강에 내리는 저녁 비
<제4경> 방장청운.方丈晴雲:방장산에 피는 청운
<제5경> 야도고주.野渡孤舟:나루터의 외로운 배
<제6경> 단안쌍루.斷岸雙樓:단안의 쌍루
<제7경> 폐성잔조.廢城殘照:황폐한 성터의 낙조
<제8경> 장교효설.長橋曉雪:장교에 내리는 새벽 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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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 주련;을 소개해 본다.
不東以西 不南以北(부동이서 불남이북).서쪽으로 간다 하고 동쪽으로 가지 말며, 북쪽에 간다 하고 남쪽으로 가지 말아라.
當事而存 靡他其適(당사이존 미타기적).일에 당하여 오직 한 곳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다른데로 마음이 가지 않도록 해라.
弗貳以二 弗參以三(불이이이 불삼이삼).두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두 갈래로 하지 말고, 세가지 일이라고 마음을 세갈래로 하지 말라.
惟心惟一 萬變是監(유심유일 만변시감).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하여 만 가지 변화를 살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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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사정(永思亭)이 있는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집성촌인 내기(內基)마을은 어떻게 이루어 졌
을까?. 금으로부터 약 360여년전 순흥 안씨(順興安氏)가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후 부안 김씨가 이주
정착 하였다가 다시 이주 하고, 안씨들만 사는 안씨 집성촌이 되었는데 안씨의 터라하여 마을이름을
안(安)터라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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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입구, 높은 곳에 바라보이는 영사정(永思亭)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사제당(思齊堂) 안처순
(安處順 1492년 (성종 23~1534년 중종 29)의 아들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유학자 죽암(竹巖),
안전(安瑑: 1518~1571)이 부친인 안처순의 묘소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1534년에 지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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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 주련;을 소개해 본다.
從事於斯 是曰特敬(종사어사 시왈특경).이와 같이 일에 임하는 것이 敬(경)을 지니는 것이다.
動靜弗違 表裏交正(동정불위 표리교정).움직일 때나 멈추어 있을 때 그 사이에도 서로 어기지 말고 밖이나 안이나 서로 바르게 하라.
須臾有間 私欲萬端(수유유간 사욕만단).잠시라도 마음에 틈이 나면 만가지 사욕이 일어난다.
不火而熱 不氷而寒(불화이열 불빙이한).불길이 없어도 뜨거워지고 얼음이 없어도 차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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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永思)는 영언효사(永言孝思)의 준말로 시경 대아 하무(大雅 下武)의 “길이 효심으로 사모하니,
효심으로 사모하는 것이 법도가 되었도다(永言孝思 孝思維則)”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스로 효를 다
할 뿐만 아니라 한 가문이 배우고 널리 펼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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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친 안처순은 1492년(성종 23) 광주(廣州)에서 태어났으며, 전주 부윤을 지낸 안지귀가 조부이
며 같은 남원출신으로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조카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경연에서 임금의 마
음을 흡족히 할만큼 경륜과 문장이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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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9년 기묘사화에 판관을 지내다가 이행(李荇)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겨우 화를 면하고 평소에 친분
이 깊었던 유배중인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와 자암(自庵 ) 김구(金絿)가 유배되자 적소(謫所)로 방
문하였고 이듬해에는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갔다. 1521년 사제당(思齋堂)을 짓고 사제(思齋)라
고 자호(自號)하고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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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록보유(己卯錄補遺)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안처순 전(安處順傳)에는 안처순 자는 순
지(順之)이며 갑술년에 급제하였다. 홍문관 박사로 있다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 고을 현감이 되
기를 청한 다음 파직 되었다. 남원에서 대대로 살았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구례 현감 자리를 정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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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 주련;을 소개해 본다.
毫釐有差 天壤易處(호리유차 천양이처).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이 그 자리가 뒤 바뀐다.
三綱旣淪 九法亦두(삼강기윤 구법역두).삼강이 무너지고 구법이 없어진다.
於乎小子 念哉敬哉(어호소자 염재경재).오오! 소자여 생각하고 조심하라.
墨卿司戒 敢告靈臺(묵경사계 감고영대).먹으로 써서 경계를 삼아 마음에 고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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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지]‘기문‘편에 안전의 아들 안창국이 정자를 중수한 뒤 최철견(崔鐵堅)이 쓴 영사정 중수기가 있다.
최철견은 선조 9년(1576)에 사마시에 합격, 1585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90년 전라도
도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관찰사 이광이 패주하자 전주를 수호하였다. 황해도관찰사·호
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판서 안위(安瑋)를 비롯한 많은 현인들이 이곳에서 다음과 같이 글로써 효심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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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 안위(判書 安瑋)
.抱樹增悲感(포수증비감)나무를 붙잡고 더욱 비통해 하더니,
名亭寄孝思(명정기효사)좋은 정자 지어 효심을 더하는구나.
鯉庭當日事(리정당일사)어버이를 따름은 응당 할 일이니,
學禮又言詩(학례우언시)예를 배우고 또한 시로써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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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서서 나무를 붙잡고 망배하던 효심이 이제 정자를 지어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구나. 자식이 어
버이를 섬김은 당연한 일이거늘 돌아가도 그 도리는 변함이 없다. 예를 다하고 마음으로 사모하는 깊
은 효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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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伯珍) 안위는 중종 16년(1521)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명종 13년(1558) 5월 전라도관찰사
로 부임하였다. 호조판서·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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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孝德傳前世(효덕전전세) 선조에게 효덕을 다하고자
亭名永思현(정명 영사) 판을 영사정이라 걸었구나
醉狂渾不省(취광혼부성) 몹시 취해 정신이 흐릿하니
却作興中詩(각작흥중시) 여흥 중에 시작은 거두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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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게 효를 다하고자 현판 이름을 영사정이라 걸었구나. 술이 취해 정신이 맑지 않아 여흥을 즐기
며 시를 읊는 것은 사양해야 겠구나. 김인후는 오대정에 시가 있어 그곳에 자세히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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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거사(淸溪居士) 안영(安瑛)정려각(旌閭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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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수(査大受)
永思亭上啓朱扉(영사정상계주비) 영사정의 붉은 문을 열고 들어가
入座玲瓏爽 龍(입좌령롱상 룡) 앉고 보니 고아한 효성이 영롱하다
巖下七松凝晩翠(암하칠송응만취) 바위 아래 칠송은 저녁 푸름 깃들고
庭前疎月浸餘輝(정전소월침여휘) 뜰 앞의 성긴 달이 석양빛에 들어오네
靑城 業殘還復(청성 업잔환부) 왕조의 창업은 스러졌다 다시 서건만
芳草王孫去不歸(방초왕손거불귀) 명가의 왕손은 가면 다시 아니 오네
千古興亡多少恨(천고흥망다소한) 천고에 흥망은 한도 많은데
夕陽和淚濕人衣(석양화루습인의) 석양에 화락한 눈물은 옷깃을 적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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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은 어버이를 사모하며 지은 집이다. 그 효성이 너무나 맑고 지극하여 분위기가 경외롭기 한량
없다. 바위 아래 일곱 그루 소나무에 푸른 저녁 안개가 스며들고, 뜰 앞에는 7월 초승달이 황혼 빛에
서둘러 모습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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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업은 달처럼 차면 스러지기를 반복하건만, 왕손은 한번 끊어지면 다시 잇지 못한다. 오랜
세월 흥망의 한은 많고 많은데 늙어서 흘리는 지극한 효성의 눈물은 남의 옷깃을 젖게 한다.
1593년 7월 6일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남원에 왔던 부총병 사대수(査大受)가 영사정에 진을 치
고 있을 때 시를 지었는데 효에 대한 경외감이 잘 나타나 있다. 전란 중에도 시를 짓는 선비의 품위와
풍류적 여유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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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수찬관청계안공(안영)정려비(春秋館修撰官清溪安公㫌閭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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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오종도(唐將 吳宗道)
萬里征人暫倚樓(만리정인잠의루) 만리 정벌을 앞두고 잠깐 누대에 의지하여
黃昏獨坐晩風秋(황혼독좌만풍추) 황혼에 홀로 앉아 가을 저녁 바람 쐬는구나
千山蒼翠何年盡(천산창취하년진) 천산의 푸르름은 어느 해에 다할 것인가
四壁煙花此地收(사벽연화차지수) 도처에 포화 연기 이 땅에서 거두는구나
丹鳳帝城遼海闊(단봉제성료해활) 황제가 계시는 궁궐은 바다 건너 멀리 있고
望雲親舍越山幽(망운친사월산유) 아득한 고향생각에 산너머 구름만 바라보네
不堪抱樹增悲韻(불감포수증비운) 복받치는 이 슬픔 견딜 수 없어 시를 짓는데
搔首中華坐白頭(소수중화좌백두) 앉아서 나라를 걱정하니 흰머리만 느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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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 타국에 왜를 정벌하러 왔다가 잠시 누각에 앉았다. 황혼에 홀로 앉아 가을 바람을 쐬니 만감이
교차한다. 지루한 전쟁은 끝나지 않고 세월은 왜 이리 더디 가는지. 도처에는 전쟁의 포화소리 가득
하니 어서 빨리 싸움을 끝내고 나라를 지켜야지. 황제의 궁궐은 황해 바다 건너 멀리 있는데 문득 떠
오르는 어버이 생각. 머나먼 고향 쪽 뜬구름만 바라보네. 환국과 향수와 밀려오는 어버이 생각을 시
로써 달래보고자 하나 마음만 심란하여 흰머리만 더하는구나. 오종도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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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못다한 일을 슬퍼하는 사모하는 깊은 효성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또한 바로 근처에 있는‘사제당 기념관’에는 안처순의 유품을 모아놓았는데 보물(기묘제현수필’과 ‘기
묘제현수첩’)이 있으며 한석봉이 표제를 쓴 글씨와 조광조 친필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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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국보급인 각종 시판들이 있는 사제당으로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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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b2345/9toB/1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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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영사정길 35-13
(지번) 금지면 택내리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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