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애지문학상 / 이순희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 / 이순희
그는 글 동냥하며 근근이 살았다
언어에 굶주려 극심한 눌변에도 시달렸다
어쩌다 곳간이 찼다 싶어 열어보면
가득 들어찬 망상과 허상들.
어느 새벽 그는 길을 떠났다
詩는 말과 절이 합쳐졌으니
말의 신전으로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말씀을 확인해 보리라 작정했다
험준한 산길 올라 들어선 산사에는
아무리 찾아도 말은 보이지 않고 풍경소리만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 바람 고요해지자
가부좌 틀고 면벽한 말씀의 뒷모습,
묵언 수행 중인 듯 말줄임 알로 염주를 굴리고 있다
그 염주 다 닳아 한 점으로 남게 될 때까지
결코 일어서지 않을 듯 꼿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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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시 앞에 다시 옷깃을 여미며
얼마 전 이사를 하면서 저는 많은 시집을 버렸고, 그러고 나서도 많이 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제 시집은 누구에게 읽어보라고도 못하고 작업실 벽에 기대어 빽빽히 쌓여있습니다. 버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애지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갓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기쁨보다는 왠지 당혹스러움이 앞섰습니다. 그동안 연유야 많겠습니다만 저는 시에 올인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을 잘 알기에 기쁨보다는 자괴감 같은 것이 먼저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수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저 또한 여느 수상자들처럼 기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면 이번 수상이 그동안 제 시업의 성취가 특별해서가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시에 자신을 다 걸고 사는 시인도 있는데, 저는 시를 때로는 소홀히 때로는 너무 무심하게 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시는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 주는군요. 사실 저도 새벽에 앉아 시를 마주 대하면 언제나 마음이 열리곤 합니다. 일상에 묻어둔 이런저런 응어리도 다 풀어주고 하소연도 묵묵히 받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시가 언제까지 저의 이런 푸념들을 받아주기만 하겠습니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저는 시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 곧추세우려 합니다. 옷깃을 여미고 경건하게 시 앞에 서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시와 함께 동행 하겠습니다. 저의 삶이 바로 시가 되도록 정성을 다 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부족한 저의 시를 수상작으로 선고(選考)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상을 제정하고 운영에 진력하시는 반경환 선생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려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시를 쓴다고 이러저러한 저를 한결같이 지켜봐 준 남편과 딸, 아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본질에 이르는 길 찾기의 시학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란 사물의 본질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루카치에 따르면 시는 원초적 고향, 곧 선험적 고향에 이르는 길이다. 그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험적 고향으로 가는 길 찾기이다. 루카치는 이 선험적 고향을 사회철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하이데거는 언어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꿈꾸는 세계는 다르지 않다. 루카치가 말하는 선험적 고향은 에덴과 같은 낙원인데, 그곳에서는 인간의 언어와 사물이 분리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꿈꾸는 시적 세계와 다르지 않다. 서정시의 꿈은 언어와 사물이 일치하는 상태, 곧 언어가 그 본질적 능력을 회복하는 상태이다. 즉 모든 언어가 대화적 능력을 회복하는 상태이다.
제20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작이 된 이순희의 시 「말이 머리 깎고 절로 간 까닭」은 언어의 본질적 능력을 찾아가는 구도자로서의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말(言)이 머리를 깎았다는 행위는 말이 자신의 머리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에 이르는 인식을 방해하는 것을 제거해버렸다는 뜻이다. 그는 시의 세계, 곧 언어의 신전(言+寺)을 찾아간다. 언어의 신전이란 언어와 사물이 일치하던 원초적 시의 세계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해서 모든 시어가 본질적인 상태로 진입하는 것을 말한다. 보들레르가 말한 만상조응(萬象照應)의 경지이기도 하다. 시인이 언어를 매개로 사물과 일치하는 경지, 이것이 바로 물아일체이고 소요유(逍遙遊)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경지는 시인, 아니 모든 예술가가 꿈꾸는 절대미의 경지이고 절대자유의 경지이고 황홀경의 경지이다.
이순희 시인은 이제 본격적인 시의 세계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어쩌면 그런 열락(悅樂)의 세계를 이미 맛보았는지도 모른다. 사실 법열이니 열락(悅樂)이니 하는 것들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막힘이 없고 서로 통하는 게 그런 상태이다. 그게 바로 도에 이르는 길이다. 이순희 시인의 시들이 그런 도에 이르는 길을 찾고, 그 도를 즐기는 것, 도락의 입문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면서 심사평을 마무리한다.
- 심사위원 최서림, 반경환(심사평: 최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