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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적으로 장수필을 써 보았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
이야기라고 하면 소설적 기법이 되는 걸까. 이야기를 하니까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면 독자가 읽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하여간에 실험적인 수필이니까. 선생님들께서 한 번 읽어주시고 ---
느낌 등 의견도 달아주시면 더 고맙고요;.
두 스승
이동민
아내와 서울에 갔다. 모 화랑에서 조선시대 회화의 전시회를 한다 하여, 서울에 온 길에 이왕이면 전시회도 들려보자고 했다. 화랑의 사장님은 예전에 얼핏 인사를 나눈 적은 있지만 안면이 두터운 사이는 아니었다. 마침 사장님이 계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내의 서예 이야기도 나왔다. 누구에게 배우느냐고 하여 스승이 없다고 하니, 소개장을 한 장 ‘써 주겠다고 했다. 그 분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랬으니 아내가 그 분과 스승-제자의 끈은 맺은 것은 우연이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게다. 그 분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아내는 화랑 사장님의 소갯장 한 장 들고 찾아갔으니 말이다.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서 배웠고,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다. 학교라는 기관을 중간다리로 해서 만났는 선생님보다는 사람과 사람이 바로 만나는 스승님이 더 좋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아내는 서예를 하면서 스승님에게서 서예기법을 익혔다. 아내가 전해주는 말을 들어보면 그 분은 선생님이 아니고,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에 나오는, 영락없이 스승님이었다. 나는 아내를 통해서 스승님을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아내가 스승을 모시는 것은 순전히 배움이 목적이었다, 그러니 스승님을 만나는 길은 우리가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나는 것과는 달랐다. 학위 때문에 나가야 하는 학교의 공부보다는 순수하게 공부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아내를 보면 소개를 받아야 했고, 제자로 받아주어야 문하생이 되어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이유로 스승-제자 관계가 기계적으로 맺어지는 선생님보다는 더 끈끈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맺어진다. 아내도 그런 방법으로 두 분의 스승님을 만났다. 그러니 나는 스승님이 더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아내가 또 한 분의 스승을 만난 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여기에도 내가 관여하였으므로, 어쩌면 아내의 스승-제자의 관계맺음에는 내가 아주 묘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내가 이 글을 쓸 생각을 하였었나 보다.
대구의 G대학에 서예과가 신생학과로 태어났다. 교수로 오신 분이 아내의 스승이 된 Y교수님이다. 그 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은 아닌데, 내가 취미생활로 미술공부를 하는 탓인지 식사 모임의 자리에서 그 분을 만났다. 나는 아내가 서예공부를 하려면 대학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서예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어 한다고 했더니, 그러면 대학원에 적을 두라고 했다. 자기의 전공이 한문서예이니 자기에게 오라고 했다. 그래서 아내는 대학원에서 Y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한문서예를 공부하게 되었다. 서울의 스승님에게도 한문 서예를 공부하고 있으니,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아내는 선생님과 스승님의 두 분에게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부부로 살면서 우리를 묶어주는 또 하나의 인연을 미술이라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미술을, 그것도 중국과 연관이 있는 미술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대구 박물관의 산책로를 산책하면서 미술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아내는 한문을 나보다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내가 모르는 것을 아내에게 배우기도 했고, 미술사나 미술이론은 내가 말해주기도 했다. 그래서 상당히 죽이 맞는 부부라고 믿는 만큼, 나는 아내의 공부에 관한 세세한 부분까지도 알고 있었다. 아내도 자기의 미술작업에 관하여 나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조언을 구할 때마다 내 대답은 판에 박힌 듯한 전통서예에서 벗어나서, 나만의 새로운 작품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예술가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것은 내가 미술공부를 하면서 배운 이론이다.
젊은이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이유를 대라면 여러 가지 이유들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무어니무어니 해도 졸업 후에 더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많이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서예과는 조건이 아주 불리하다. 미술대학이라 하더라도 미술교사 자격증도 주지 않았으니 서예인들이 생업으로 나아가는 손쉬운 방법이 서예학원을 운영하는 일이다. 나중에 학생들이 왁자왁자하여 미술교사 자격증을 가진다 했지만, 학교에서 채용해주지 않으니 자격증이 있어도 헛일이었다. 서예학원은 수강생이 모여야 하고, 수강료를 납부하는 것이 수입원이 된다. 그ㅡ런데---, 서예학원의 운영에 서예과 졸업보다는 국전에서 입상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 수강료도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수강생도 더 많이 몰린다. 대학이 정통 아카데미즘이라면, 국전은 재야 서예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도 서예학원 운영에는 국전의 입,특선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서예를 하시는 분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고, 스승-제자의 인간관계가 특이하게 만들어진다. 말하자면 국전에 영향력을 더 많이 행사하시는 분이 서예인들에게는 우상이 된다. 그런 서예가에게 사람들이 몰린다. 국전에 영향력이 없는 대학 교수는 뒷전이 된다.
Y교수는 왜정시대는 미술분야에서 서예의 비중이 아주 높았는데, 지금은 미술분야에서 미술로 인정받기도 어려우리만치 낙후 된 이유가 대학의 학과로 편입하지 못한 때문이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Y교수는 서예가 미술대학의 학과로 편입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러기 위해서 발벗고 뛰었다. 그래서 서예과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양화와 동양화가 대학 중심의 아카데미즘이 대한민국의 미술 분야를 장악하여 이끌고 있으나, 서예는 대학이 없었으니, 재야 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이 국전을 장악하여 심사권을 쥐고, 서예세계를 좌지우지 하면서 세력화 하였다. 지금으로서는 국전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세력이 주인이고, 대학은 오히려 재야권으로 밀려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요즘의 젊은이들이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은 분노라고 할까, 비감한 심정도 실려 있어 말이 조금 거칠게 들렸다.
“나를 지도 교수로 하여 대학원에 들어온 원생들이 거의가 떠나가버렸어. 내게 와서 분위기를 알아 보고는, 내가 국전과는 관계가 없다는 걸 알고, 국전과 끈이 닿아있는 서예가에게로 떠나갔어. 자기도 밥 먹고 살곘다며 하는 일인데 내가 어쩌곘어. 그래도 배신감으로 입맛이 쓰더라고.”
제 아내는 밥벌이 걱정을 안함으로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고 하였더니 자기도 안다고 하였다. 정말 아내는 Y교수를 떠나지 않았다. Y교수의 지도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아내와 나는 Y교수와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끈을 유지하고 있다.
Y교수를 떠난 젊은 서예인을 만났더니, 그 사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우리도 밥 먹고 살려면,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해서 안 될 짓이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나는 그 말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젊은 서예인이 전해준 말로는, Y교수님은 국전을 장악하고 있는 들플 선생님과는 원수지간이라고 하였다. 그럴 수 밖에. 두 분이 지향하는 예술의 세계가 달랐다. 들풀 선생은 전통 서예를 하면서, 그 분야에서는 누구로부터도 인정받는 명필이고, 서예대가(大家)이다. 추사의 맥을 잇는다고까지 하였다. Y교수를 떠난 분의 말로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예 글씨로서는 Y교수는 들풀 선생에게 비교가 안 되지요. 그러나 자기 분야를 가지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 ------두 분은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가진 만큼, 사이는 더 나쁩니다, 그래서 두 분은 이 바닥에서 원수지간이라고 소문이 났어요.’ 라고 했다.
저녁에 집에 와서 아내에게 두 분이 ‘원수지간’이다 더라는 말을 했다. 아내는 ‘엄마야,’하면서 기겁을 했다. 자신의 앞날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서울의 화랑 사장님이 소갯장을 써준 곳이 바로 들풀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Y교수께 서울의 ‘들풀 선생’에게 서예를 배우러 다닌다고 했더니, ‘아. 그러세요.’라면서 얼굴 색이 별로 좋지 않더라고 했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두 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서예공부를 하라고 조언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내 길을 개척해야 할텐데 두 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면서, 어느 한 쪽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 말은 국전에도 도전하겠다는 의미였고, 그럴려면 들풀 선생님에게도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1990년 대의 대한민국의 서예 세상은 국전에서 입, 특선을 해야 서예인으로 대접해주었다. 서예단체에 얼굴이라도 내밀려면 국전 입,특선이라는 명찰을 달아야 했다. 그런 것 없이 나이가 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태당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서예과는 국전에서 아무런 존재가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서예를 하시는 분들이 대학을 외면하고 국전으로 몰려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게다. 아내도 서예인의 단체에도, 모임에도 참여하면서 국전의 인증서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국전을 통과한 서예인이 목에 힘을 주고 설치더라고 하였다. 아내는 말로는 그냥 취미 생활로 서예를 즐긴다고 하였지만, 어찌 그 말을 믿을 수가 있나. 4시간이 걸리는 무궁화 기차를 타고 서을에 가는 것이 그냥 취미생활이라고? 대학의 서예과를 지원하는 학생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내가 대한민국 서예계의 흐름을 전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서예계란 바다에서 항해하는 아내가 풍랑으로 겪는 심리적 갈등이 수필의 좋은 소재라 싶어서 이글을 쓴다.
세평이 서로 원수지간이라는 말을 듣고도 한 분을 선택해지 않고 두 분을 스승으로 모신 아내의 꿍심은 바로 국전 때문이다. 한 번은 Y교수님이 들플 선생의 안부를 묻더라면서,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해주시니 내가 그 스승님에게서 공부하는 것을 인정해준다 싶어, 마음의 짐을 벗은 기분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들풀 선생님을 통해 국전을 통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내도 다른 이에게 서예를 하는 이유를 말할 때는 취미 생활이니, 수행을 통한 인격도야라고 하면서 말을 번지르하게 한다. 옆에서 본 내 눈에는 아닌 듯한데 말이다.
한 번은 서울의 서실에서 대구의 **선생님에게서 서예를 동문수학한 B 선생을 만났다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B선생은, 들플 선생님에게 배운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하였다. 제자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라, 전국에 깔려 있는 제자들의 수는 셀 수도 없으며, 모두 자기 지역에서는 중진 서예가들이라고 하였다. 추사의 전통 서예를 이었으며, 글자 또한 예술적 가치가 높고 높아 그를 능가할 서예가는 대한민국에서는 없다고 했다. 아내의 말을 듣고, 나는 추천서를 써 준 화랑 사장님이 나와 인연이 있음을 내세워 ‘내 덕’이라고 아내에게 으쓱했다.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가을에 국전이 있다면서 서울의 서실이 대학 입시를 앞 둔 교실마냥 시끌시끌하더라고 했다. 국전에 제출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선생님에게 체본을 받아야 한다나. 체본을 받아서 그 글을 백 번 이상이나 되풀이, 되풀이 연습한 후에 공모전에 제출한다고 했다. 그게 무슨 공모전이니, 사전에 시험 문제를 아르켜 주는것과 무엇이 달라. 했더니, 서예의 모든 공모전이 그렇다고 했다. 그럼 당신도 체본을 받아서 연습을 하려므나,라고 했더니 그럴 작정이라면서 체본 값이 꽤 비싸다고 했다. 사회생활의 바탕은 돈이란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선생님이든, 스승님이든 벌이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싶어서 당신도 그렇게 하렴 이라고 했다. 해마다 국전에서는 들플 선생의 서실에서 입, 특선자가 수십 명이 나온다나. 그러면서 자신도 거기에 끼이기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를 보면 스승님은 하늘이다. 그림을 배우러 가서 3년 동안 붓 한 번 잡아보지 못한다. 마당을 쓰는 마당쇠에. 겨울이면 스승님의 방을 데우려 군불을 지펴야 하는 돌쇠이고 ---, 그렇게 3년을 보낸다. 명분은 인격도야이다. 작가가 되기 전에 인품을 닦아야 한다. 인품이 흰 종이마냥 깨끗해야 하고, 그 흰색 위에 예술의 탑을 쌓는다. 머슴살이 3년이 지나고서야 붓을 잡는 이유이다. 어차피 대학의 밖에서 서예를 배우는 일은 스승을 모시고, 스승의 수발을 들면서, 인격을 닦은 후에야 기초를 배우는, 전통적인 도제 제도를 따른다. 4시간이나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는 것도 인격도야의 한 과정이다. 도제제도에서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정해진 점심시간이 없다. 선생님이 용무를 끝내고 서실로 들어오는 시간이 오후 수업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군소리를 하면 인격도야가 덜 된 사람이다.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표를 끊어두었으니 재깍재깍 흘러가는 초침 소리는 마치 고문하는 소리 같았다. 기차 시간 때문에 체본도 못 받고, 밤 12시가 되어서 동대구 역에서 내린다. ‘그 날은 비가 부실부실 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나도 몰래 눈물이 쿡 솟드라.’ 약간은 젖은 목소리였다. ‘서울에 안 가면 될 걸. 그래도 또 서울에 가는 걸 보면, 나도 귀신이 씌운거지.’
그랬다. 말로만 취미삼아 서예를 한다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는 국전을 거치고 싶은 욕망이 가득 했다. 그래야만 대구에서 서예가로 행세할 수 있다는 욕망, 그 욕망을 버리지 못하여 서울로 간다. 도제제도에서 스승은 그와 같은 인간의 욕망을 교묘히 이용한다. 선생님이 아닌 스승님으로 모시고 공부하면 마음이 허정(虛靜)해 진다고---. 아내를 옆에서 지켜보 내 생각으로는, 그건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의 주인공은 예술이란 마음을 비우고 난 뒤에 시작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3년 간의 머슴살이를 하였다. 이것이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는 전통의 서예 공부법이다. 스승에게 공부하는 것과 선생님에게 공부하는 것의 차이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도제제도로 인격 수양이 잘 된 수련생들이어야 하는데------, 그 인품이란 것이 기차를 놓치지 않도록 조금 양보해주지는 않고------.내 말에, 아내가 감정도 넣지 않고 무덤덤하게 내뱉는 말이, 서울 사람들 다 깍쟁이다. 절대로 양보하는 법이 없더라. 대구서 왔다고 선생님이 체본을 두 장 써주면 자기 시간을 잡아먹는다고 투덜투덜하더라. 이곳의 서실에 오래 다니면 수양이 잘 되어 있을텐데, 참 이상하지. 이 서실의 사람들의 인품이 이렇더라니까. 마음이 비어지도록 다니려면 얼마나 오래 스승님께 배워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어쨌거나.그렇게 서울을 다니기를 15년이나 했다. 내가 햇수를 잘못 알고 14년이든가 하면, 아내는 즉석에서 아니야 15년이야 라고 수정해준다.
아내가 나의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저어, 우리 아파트 쓰레기 장에 Y교수의 서예 작품이 버려져 있는 것을 제가 수습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교수님의 제자이시지요. 제가 그 작품을 가지고 갈테니 선생님의 작품과 바꾸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Y교수의 작품이 아파트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고, ’왜 내 작품과 바꾸려‘ 했는지도 모른 일이다. 라고 했다. 서실에 가져 온 걸 보니 교수님 작품이 맞드라면서, 그 분이 원하는데로 나의 전통 서예 작품과 바꾸어드렸다고 했다. 그는 실험 작품보다는 전통 서예 작품을 원했던 것이다. 그것이 일반인들이 서예를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그러면서 아내는 말을 이었다.
Y교수는 요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전통 서예가 아니고, 현대서예라면서 새로운 양식의 서예를 한다면서------, 선생님의 서예작품을 전통 서예의 잣대로 보면 서예가 아니라는 것이다. 글씨는 들플 스승이 뛰어나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래서 아파투 쓰레기장에 버렸을 것이라는 것이 아내의 말이다. 요즘에는 또 도판에 음각으로 파내고, 도예로 굽어서 ------, 그걸 다시 탁본으로 떠낸 것을 작품이라면서 전시장에 걸더라. 도판만이 아니고, 청동판으로도 하더라. 종이에 붓으로 쓱쓱 써내려가는 글씨보다도 내 눈에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던데. 라고 했다. 아내의 말투로는 선생님의 작업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선지 Y교수는 자기의 방법을 따르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는 아내더러, ’예술가란 새로운 기법으로 도전하여 자기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전통 기법을 그대로 답습하여, 이미 유행이 지난 고전 양식의 작품을 사진처럼 베껴서야 어떻게 자기 작품이라고 히겠어.‘라고 했다. 복제하듯이 작품 만드는 사람은 장인이지 ,어떻게 예술가야’ 내 말을 듣더니, ’그건 그러네,‘ 하면서 자기도 자기나름의 실험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자기도 도판을 이용하여 서예작품을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졸업 전시회를 앞두고, 별의 별 기법들을 실험해 본다고 했다. 이건 순전히 Y교수의 영향이다. 나는 Y교수의 수업방법이 예술을 기술자가 아닌 창작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맞다고 말해주었다. 하여간에 아내의 대학원 졸업 전시회 작품은 도예로도, 청동으로도, 심지어는 압화 등을 종이에 붙이고, 서예 글씨로 조화를 모색해보는 작품도---, 하여간에 그렇게 만든 작품으로 꾸렸다. 들풀 선생에게 배운 전통 서예 작품도 물론 있었다. 어쨌거나, 전시회를 다녀간 사람들은, 여러 반응을 보였다. 이건 서예가 아니다,에서,, 그래도 재미있다. 까지 다양했다. 그러니까 서예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였다.
전시회를 가진 작가 본인의 느낌이 중요하다. 아내는 그런데로 반응이 괜찮더라고 하는 걸 보니, 조금은 만족하는 듯했다. 아내는 이번 전시회를 바탕으로 자기의 작품 세계를 열어보겠다고 하였다. 전시회로 새롭게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실망한 것도 아닌 듯하다.
아내는 서울 서실의 분위기에 휩쓸려 국전에 작품을 응모하였다. 한 해에 수 십 명씩 인상한다고 하였으니, 은근히 기대도 하는 듯하였다.
밤 늦게 현관으로 들어서는 아내의 표정이 무척 어둡다. 뻔하다. 국전에 낙선했나 보다. 내가 첫 번 도전에 대꺽 붙으면 국전이 너무 가볍게 보이잖아. 이번 응모는 처음 도전이잖아. ’그래, 맞다‘ 대답이 시원찮다. 축 늘어진 목소리다. 다음 날에야 맥이 빠진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첫 번 째 도전에서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기의 눈에 형편없는 작품인데도, 입선도 아니고 특선을 하였다잖아. 도저히 수긍이 안 되어서------, 라고 했다. ’그야 당신 눈에는 형편없어 보여도 심사위원들 눈에는 좋은 작품일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상식 수준을 벗어났을 정도로 형편 없으니 하는 말이지.‘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뭐 그럴 수도 있겠다면서.‘ 아내는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이후로도, 작품을 평하면서 아내가 ’형편없는---‘ 이라고 하는 말을 나는 수도 없이 들었다. ’형편없는------‘이 말은 아내의 상투어가 되었다. 서예를 보는 내 안목이 짧으니, 나로서는 아내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다.
국전이 있는 가을이면, 어깨가 축 처지고, 어두운 표정을 하고 현관을 들어서는 일이 자꾸 쌓여만 갔다. 이제는 여러 번이나 도전하였지만 여전히, 여전히 낙선이었다. 그러다가 아내도 잘 아는 분이 국전 서예부분에서 최고의 상을 받았다. 아내는 또 ’형편 없는---‘이라는 말로 평을 했지만, 이번은 교실 분위기가 다른 해와 달리 더 많이 어수선하더라고 했다. 교실 분위기는 최고상을 받은 분을 성토하는 자리이더라고 했다. 아내 말로는 형편없어도 너무 형편없는 작품이 ------, 이것이 서실 회원들이 수상자를 성토하는 이유였고, 교실을 어수선하게 하는 이유이더라고 했다.
그제서야 아내는 서실 회원이 쑥덕거리는 소리를 듣고,’뭔가 이상하다‘는 분위기기 느껴지더라고 했다. 최고상을 받은 분이 바로 대구에서 함께 공부한 분이었고, 그분의 서예 실력을 훤히 알고 있는, 아내도 좋은 작품으로 생각한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은근 슬썩 물어보았다고 했다. ’입상하는 무슨 길이 있느냐고‘ 그 분은 펄쩍 뛰더라고 했다.
들풀 선생님은 고향의 자기 옛 집터에 문화재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멋진 한옥을 지었다. 불탄 남대문을 복원한 전통 가옥의 명장이 짓는다고 하였다. 명필 서예가와 명장이 지은 전통 한옥은 무척 어울리지 않는가. 그는 일주일 중에 금, 토, 일은 시골의 고향집에 머물면서 옛 선비의 정취를 한껏 즐겼다. 아내는 체본을 받으러 서울에 가지 않고 시골집을 찾아가도 되겠느냐고 하였더니, 그러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아내를 차에 태워 시골에 있는 스승의 고향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서툰 운전에, 아직은 구불구불한 신작로 길이어서 그의 시골집을 찾아가는데도 자동차로 서 너 시간이나 걸렸다. 새로 지은 시골집은 마당이며, 정원이며, 담장이며 뒷 손을 봐야 할 일거리가 수두룩 했다. 많은 남정네들이 괭이질도 하고, 나무도 심고, 정원 가꾸기 일에 분주하였다. 몇 번을 갔고, 갔을 때마다 그랬다. 나는 집구경을 하면서 마당으로, 뒤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뒷 축담에 젊은 분이 앉아서 쉬고 있었다. 힘드시지요, 라고 말을 건넸더니, 허리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허리가 아프면 쉬어셔야지 일을 하면 안 되잖아요 했더니, ’나는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서 서실을 운영하는데, 스승님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지요.‘ 나에게는 그 말이 충격이었다.
서울이 아닌 시골집에 갔어도, 스승님이 찾아온 손들과 술을 마신다든지, 이것저것 일거리를 지시한다든지 하여 시간을 내어주지 않으면 체본도 못 받고 돌아오는 날도 많았다. 이것이 도제제도의 스승님이었다.
그날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Y시에 사신다는 분과, G시에 사신다는 여자 분이 내 차에 탔다. 대구로 나와야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하여서 였다. 대구까지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더구나 Y시에 사신다는 분은 추천을 받으려면 10년이나 걸린다는 시간을 모두 채웠고, 이제 입선 한 번만 하면 추천작가가 된다고 하였다. 아내는 부러워서 ’좋으시겠네요. 좋으시곘네요.‘ 란 말을 하고, 또 하였다.’좋기는요‘ 그 분의 말이 뜻밖이었다. 입선 한 번이면 끝나는데, 그걸 주지 않고 질질 끌고 있잖아요. 그러니 나는 앞에 가서 죽는 시늉을 해야 하고,’ 조금 과장한다면서 대구까지 올 내내 스승님을 비난하였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가만히 듣기만 했지만, 말을 들어보면 Y시에 산다는 그 분은 풀어내지 못할 수많은 사연이 가슴에 맺혀있는 듯이 보였다. 서예계에서 신처럼 모시는 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자꾸만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시골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의 식당으로 점심식사를 하려갔다. 나도, 아내도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동석하신 분이 들플 선생을 왕희지보다 더 위대하는 식으로 추켜세웠다. 내 귀가 간지러웠다. 들플 선생은 듣다. 듣다. 거북하였는지 ‘아부성 발언은 그만 하시고---’라면서 그 분의 말을 제지했다. 이후로 나도 남을 지나치게 칭찬하는 분을 만나면 ‘아부성 발언’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게 배운 말을 버릇처럼 하다 보니 지금은 거의 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후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전에 ‘아부성 벌인’이라고 핀잔 듣던 분 있잖아. 그 분은 4년을 내리 특선을 해서 속성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며. 재주도 좋지,‘ 내가 ’재주보다는 명필이니까 그러했겠지.‘ 라고 말하니 아내는 입을 비쭉했다.
아내는 다시 서울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대구의 유명 서각가의 전시회에 갔다. 아내는 전시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내는 말했다.
“서예의 미적 효과는 조형미라고 하더라. 이 서각 작품을 봐. 서예로서 어떻게 이런 조형미를 따라갈 수가 있어.”
나도 그렇게 느꼈다.
“당신은 이것저것을 조합하여 작품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잖아. 서예와 서각을 조합하는 작품을 생각해보렴.”
“그것 괜찮겠다. 각(刻) 하시는 분의 말이 자기의 글씨를 각으로 파야 자기의 작품이라더라, 자서자각(自書自刻)을 하는 작가이어 야 진정한 자기 작품을 만드는 것인데, 요즘 서각하시는 분이 서예 공부를 안 하니, 남의 글씨를 받아서 각만 한다더라. 그건 서각가가 아니고, 그냥 나무를 파는 기술자라는거야. 서각쟁이라는 거래.”
“당신은 서예도 하잖아. 서각가가 되겠네;”
그때부터 아내는 서각과 서예를 곁들여서 작품을 만든다. 내가 보기에는 아내는 이렇게 한 걸음, 한 걺음씩 자기의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나는 이것이 작가로 태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서각과 서예를 결합하여 작품을 만들었다, 민화도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였다. 아내는 늘 말했다. 자기는 그림을 좋아했다 그림에는 색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형태보다 색을 강조하기로는 민화가 뛰어나다. 민화는 원색을 사용하여 색상이 선명하다. 아내는 민화까지 조합하여 작품을 만들고자 하였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졸업 전시회까지 한 아내는 Y교수를 정기적으로 만날 일은 없었다. 그래도 작품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Y교수는 판화처럼 그림을 도판으로 그리고 탁본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서예작품과 조합하는 작품을 하였다. 색은 먹색이라 칙칙하였다. 그러나 민화와 조합한 아내의 작품은 밝고, 맑고, 산뜻 하였다. 아내의 작품을 본 Y교수는 서예작품에 색상이 너무 밝지 않느냐며, 약간은 부정적이더라고 하였다. 그래도 아내는 자기 방식대로 민화의 원색을 서예작품에 그대로 담아냈다.
그때는 중국과 문호가 개방되었고, 일본의 현대서예라는 작품도 우리나라에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중국과 달라서 문화교류가 자유로웠는데도 왜 일본의 현대서예가 이즈음에서야 선을 보였을까. 우리의 서예인들이 전통 서예에 매달리어 현대서예를 거부한 탓이 아닐까.
그런데 어떤 작품을 현대서예라고 불러야 하는지에는 정립된 이론이 없었다. Y교수도 자기 입으로 현대서예라고 말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표현내용과 기법이 개방적이다. 다시 말하자면 장르의 개념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표현 영역을 확장한다, 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내가 지향하는 서예는 현대서예이다. 아내도 현대서예라는 말을 한 적은 없다. 막연히 Y교수의 작업방법을 따라 자기 세계를 만들려고 하였을 뿐이었다.
이때, 서울의 예술의 전당 서예전시관에서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국제 서예 전시뢰를 개최한다고 하였다. 아내에게도 작품 의뢰가 왔다. 아내는 민화를 섞은 알록달록한 작품을 제출하였더니, 서예관 축에서 색이 없는 작품으로 보내달라고 하여, 전통 서예 작품으로 바꾸어서 보냈다. 전시회를 개관하여 서울에 가 보았다. 중국관과 일본관은 알록달록한 꽃밭이었고, 한국 전시관은 어둡고 컴컴하여 그믐 밤 같았다. 전시회를 관람한 후에 아내는 색을 넣은 자기의 작품을 긍정하고, 신뢰하는 눈치였다. 이후로는 작품의뢰가 왔을 때 색이 있는 작품을 보내도, 주체측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을 겪고 난 아내는 자신을 시대를 앞서 간 작가라도 되는 듯이 자부심을 가지는 눈치였다. 자신이 첨담 미술의 전위병이나 되는 듯이 생각하고 있다.
한국의 유명 서예인들이 나라의 문을 연 중국에 가서 중국 서예인과 교유하는 일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졌다. 내노라 하는 서예가들은 모두 중국을 다녀와서 중국과의 교류를 자랑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에서는 전통 서예는 거의 말살되었고, 개인이 혼자서 취미로 전통 서예를 해온 서예인만이 가뭄에 콩 나듯이 남아 있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전통서예의 맥이 끊어진 마당에 북경의 무슨 서에협회니, 상해의 무슨 서예협회니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예의 본 바닥이라는 중국에서 현대서예란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을 갔다온 한국의 저명 서예가들은 중국의 대가를 만나 교유한 듯이 포장을 하여, 한국에 와서 자기를 광고하였다.
국전에서 거듭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젖어 있는 아내더러 당신이 실험한 작품을 가지고 서울의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한 번 가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였더니, 마음이 내키는 것 같았다. 아내는 전시회 준비를 하느라 몸도, 마음도 바빴다. 거기에 서울의 들플 선생 서실에도 나가야 하고.
그해 가을의 국전에 입선을 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국전이 끝나면 몇 십 명씩 국전을 통과하는 들풀 선생의 제자들이 자축연을 가진다. 아내는 초청이 오리라 기다리고 있었는데. 소식이 없었다. 자축연이 끝난 뒤에서야 총무로부터 미안하다는 연락이 왔다. 자신들의 입상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나. 발표를 보고 명단을 만드는데 왜 이름이 빠질까. 응모할 때 미리 만든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아내의 입선은 들풀 서실과는 전혀 무관했고,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대구분이 뽑아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자축연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조언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내도 국전에 목을 메지 않고 나의 작품으로 전시회를 하여, 작품으로 나를 알리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사동의 백악 겔러리를 전시장으로 정하고 열심히 준비했다.
아내도 십 수 년 간의 경험이 쌓이면서 무엇이 서예계의 위계질서를 만드는지를 대강이나마 눈치를 챈 듯하였다. 나의 조언을 따라서 작품으로, 전시회를 통해 나를 드러내자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세상 물정을 모르고, 책에서 읽은 논리만으로 말한 터인데. 내 말을 따른 아내도 세상물정 모르기는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Y교수는 아내의 작품 활동에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전시회를 할 때는, 전시장을 주선해 주는 등, 뒤를 봐 주었다. 본인이 전통 방식의 서예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지만, 그의 전시회에서는 도판에 글자를 새기고, 다시 탁본으로 떠내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림도 넣었다. 먹색이거나 회색의 그림을, 그것도 미숙하기 짝이 없는 솜씨로 그린 그림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므로, 작품이 자아내는 느낌은 무겁고 칙칙하였다. 그래선지 아내의 작품이 너무 밝고 화려하다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은 눈이 부시도록 밝음을 추구하는 것이 미술 경향이라면서, Y교수의 조언을 반드시 따를 이유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아내는 백악 갤러리 전시회를 앞두고, 정말 열심히 준비하였다, 내 눈에는 지금까지 해온 방법으로는 앞 날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전시회라는 새로운 방법에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전통 서예 작품도 만들고, 서각과 민화를 혼합한 작품도 만들었다.
도록도 만들고, 안내문도 만들었다. 전시 장소가 서울이니만큼 서울 사람이 많이 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들플 서실에서 회원으로 활동한 햇수도 자그만치 15년이니 그곳 회원님들의 전시회 관람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아는 서울 사람은 그들 회원이 전부라고 했다. 서실을 관리하는 여사무원에게 도록과 안내문을 맡겼다. 들플 선생은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시 날자가 겹쳐져서, 백안 갤러리의 바로 맞은 편 화랑에서 스승님이 전시회를 가진다는 소식도 들었다.
들풀 선생이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거는 날에 스승님께 인사도 드릴 겸 아내는 찾아갔다. 서실 회원님도 나와서 일을 거드느라 와글와글 했다. 지난 날의 시골에 한옥을 지을 때의 분위기이더라고 했다. 들풀 스승이 얼마 전에 중국에 가서 그쪽의 유명 서예인을 만났고, 대륙의 서예를 배우기도 하였고 --- 이번 전시회는 그 기념이라고 하였다.
백악 갤러리의 아내 전시회장에는 예상 외로 낯선 사람들이 와서 둘러 보았다. 민화를 한다는 분은 그리기 기법이 잘못되었다는 지적도 해주었고, 년세가 많으신 분은 작품의 한문시룰 쥴쥴 외우시며, 작가도 몰랐던 오묘한 뜻풀이도 해주더라고 하였다. 이 분들은 취미삼아 수시로 인사동에 나와서 화랑을 둘러보시는 분들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분이 계시니까 전시회를 하고, 전시회를 통하여 성숙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하였다.
전시회가 끝나고 작품을 거두어 차에 싣는 날이었다. 그날은 나도 서울에 올라가서 작품 철거하는 일을 거들었다. 아내의 얼굴이 너무 어두웠다. 일주일 내내 들풀 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서실 회원님은 한 명도 전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들플 선생의 전시장이 바로 앞이니 틀림없이 대부분의 회원님이 이 앞을 지나쳤을 것이다. 그런데도 약속이나 한 듯이 전시장에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약속을 한 듯이‘가 맞다. 아마도 무언의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해주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하였지만, 당신의 뭔가가 회원에게서가 아닌 들플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스승의 눈치를 보느라.
이것이 아내가 들풀의 서실에 발길을 끊은 이유가 되었다. 내가 14년 동안 서울을 다녔다고 하면, 아내는 꼭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15년이다‘ 15년을 강조하는 그 기간 동안 맺어온 인간 관계가 너무 허무하다는 것이다. 이후로 아내는 자기의 길로 나아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Y교수도 작품을 탐탁찮아 하니까. 이제는 혼자서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간간이 Y교수에게 자문을 구하러 갔지만 서울과는 연을 완전히 끊었다. 국전에의 미련도 버렸다. 한 번은 내게 Y교수가 자신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보더라면서 좋아했다. 무어랬는데, 라고 하였더니, ‘밝은 색이 들어가도 작품이 괜찮네.’ 라고 하더란다. 더는 말이 없고? 하니 그 말이 전부라고 하였다.
아내는 혼자서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면서도 혼자서 걸어가기로 결심하였다. 작품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전시장을 지나가면서 그냥 ‘이것도 괜찮네’ 라며 툭 던지고 가는 말에 용기를 얻어서, 계속하여 작업했다. 그러나 아내는 자기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면서 실망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왕희자같다는 아부성 발언을 듣고 싶어.’
근래에 와서 괜찮은 기분을 느낀 일이라면, 거의 잊고 있었는 국전의 소식이었다. 어떤 분이 자기가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어 내일 서울로 간다는 전화를 하더란다. 그래서 예 축하합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하였다. 세상이 바뀐 것을 상전벽해 라고 한다든가. 이건 밭이 아닌 산이 바다로 변한 꼴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앞으로는 국전의 입상이 영광이 아니고 수치의 대상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국전에 입상했다고 서실 앞에 프랑카드도 내걸었다고 하던데. 이렇게 수치스런 일로 바뀐다면---, 이것이 바로 상전벽해가 아닌가.
자기의 작품세계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혼자서 가는 물소의 길만큼이나 어렵고 힘이 든다. 그렇더라도 아내는 그 길을 찾으려 16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개인전을 가진 화랑도 서울의 가나아트로부터 파리의 루불 박물관까지 다양하다. 다른 서예인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전에 서울에 다니면서 인간에게 상처받았던 허무감보다는 훨신 낫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의 마지막을 생각해보았다. 주인공은 자기의 작품을 왜 모두 불태우라고 하였을까. 도제제도에서 배우면 스승님의 작품을 복사하듯이 베끼는 일이 전부가 아닐까. 체본을 받아서 베끼는 것은 자기의 작품이 아니다. 예술가라면 자기의 작품을 남기고 싶어한다. 금시조의 주인공은 죽음의 순간에 자기의 작품을 찾으려고 하였다. 마지막 한 장까지도 자기의 작품은 없었다. 스승의 아류 작품 뿐이었다. 그런데 작품해설에는 자기가 인정하는 좋은 작품이 없어서라고 하였다. 아니다 좋은 작품이 아니고 자기의 작품이 없어서라는 것이 나의 해설이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을 남기고 싶어하고, 남겨야 한다.
예전에 국전에서 서예의 최고상을 받은 B선생이 오랜 만에 연락을 보내왔다. 개인전을 가진다는 내용이었다. 마침 예전에 함께 서예공부를 하셨던 분이 가자고 해서 아내는 그분을 축하해주려 갔다. 무척 반가워했다. 서울서 함께 공부하였던 분들의 얼굴은 물론 없었다. 서울의 들플 선생 서실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내가 놀랐다면서 내게 전해준 말이, B선생은 마음이 고와서 절대로 남을 나쁘게 말하는 분이 아니라고 했다. 나도 그 분과 안면이 있으므로 그 말은 사실이다. 아내는 계속해서 말했다. B선생이 격하게 들플 선생을 비난하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 나는 왜 인지 짐작은 갔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인간관계란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었다.
Y교수가 연락했다. 모 대학에서 자기의 작품을 전시회도 열어주고 작품 소장도 해주겠다고 하여 대구로 온다고 하였다. 나는 대구에서 점심식사를 하자면서 약속하였다. 얼마 전에 불교재단에서 성철스님 백주기를 맞아 예술의 전당 서예관의 전시실 전부(6전시실이 있다.)를 성철스님에 관한 작품으로 채우는 전시회를 가졌다. 아마도 Y교수의 그런 전시회들이 대학에서 작품을 소장하겠다고 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작품으로는 들풀 선생이 월등 낫지요, 하면서 대학원의 제자들이 떠나갔다. 월등 낫다는 작품 대신에 제자들이 떠나 간 그 분의 작품을 대학에서 소장하고 싶어 한다지 않는가.
교수님을 만나러 아내와 함께 나갔다. Y교수는 거듭 미안하다면서 식사 약속이 줄줄이 이어져 있어서, 개인이 아니고 단체와 하는 식사라서 우리와 약속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야 축하할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취소하였다.
소설 ‘금시조’의 주인공은 죽음의 순간을 맞아서 자기 작품을 한 점도 남기지 않고 불태웠다. 들플 선생이 작품을 불태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 선생님의 작품은 어떤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을까.
조금 전에 서예전문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았다.
들플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자들이 몰려가면 장례식장은 시장바닥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진은 장례식 후에 묘지를 참배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가족들과 제자와 지인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에게, 스무 명도 안 되잖아. 여기에 가족을 뻬고 나면 몇 명이 남아.’ 그 많던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들풀 선생님은 이런 사진을 한 장 남기려고 그렇게 사셨나.
24. 10. 31
*호를 들풀'로 가칭한 것은 그분의 원래 호가 시골 냄새가 풍기므로, 이렇게 바꾸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