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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1천년이 넘게 오랜 기간에 걸쳐 번영해온 신화와 종교문명의 대표적 사례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리아(아크로폴리스 신전입구), 에레치씨엠 신전, 나이키 신전 등 고전시대 그리스 예술의
최대 걸작품들이 산재 이곳은 세계유산의 이상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함
현재의 아테네 시(고대의 아테나이) 남서부에 있고, 해발 156m, 길이(동서) 270m, 최대폭(남북) 156m의 표면으로 된
석회암 언덕. 동과 북은 자연의 절벽이고 남쪽은 키몬이 확장한 인공절벽으로 되어 있어, 서쪽에만 오르는 길이 있다.
B.C. 3000년대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산 흔적이 있고, 미케네 시대에는 왕궁과 궁인들의 집이 있고
서쪽 입구 밖에 외벽이 축조되었다. 그후 B.C. 6세기에 성주 페이시스트라트스가 여기에 살았으나,
그 아들의 치세가 끝나자 아크로폴리스는 완전히 신역이 되었다. B.C. 480년 페르시아 군이 파괴한 후 페리클레스 시대에
현재의 파르테논, 프로피라이아와 조금 늦게 엘렉테이온과 아테나 니케 신전을 세웠다.
그후 파르테논은 비잔틴 시대에 아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터키 시대에는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위에도 사람이 살게 되었으나, 1687년 9월 27일 베네치아 군의 포격으로 파르테논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19세기 초에는 엘긴 경 토머스 브루스(Thomas Bruce, 7th Earl of Elgin and 11th Earl of kincardine, 1766~1841)가
아크로폴리스에서 많은 조각을 가지고 갔다(⇒엘긴 마블스). 그리스 독립 후, B.C. 5세기의 유구를 남기고
다른 건물은 모두 철거, 조직적으로 발굴을 하였다.
동남쪽의 에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이 있다.
[출처:위키백과]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고대 그리스어: Παρθενών)은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현존하는 고전기 그리스 건축물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도리스식 기둥 양식 발전의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신전의 장식 조각도 그리스 예술의 정수로 여겨진다. 파르테논 신전은 고대 그리스와 아테나이
민주정의 오랜 상징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기념물로 인정받는다.
현재는 그리스 문화부에서 복원 및 개축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이 건설된 자리에는 원래 아테나 여신의 옛 신전으로 역사가들은 이를
옛 파르테논 신전(Pre-Parthenon)이라 칭하는 건물이 있었으나,
기원전 5세기 중반, 아테나이의 아크로폴리스가 델로스 동맹의 중심지가 되고,
아테나이가 당대 문화 중심지가 되면서 페리클레스는 야심찬 건설 계획을 세워 5세기
후반기까지 이어졌다.
오늘날 아크로폴리스에서 보이는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
프로퓔라이아, 에렉테이온, 아테나 니케 신전은 이 시기에 세운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총 감독을 맡았으며, 조각 장식도 그가 맡았다.
건축가인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는 기원전 447년에 작업에 착수하여,
건물은 432년에 사실상 완공되었으나 장식 작업은 431년까지 이어졌다.
파르테논에 관한 일부 재정 기록이 남아있어 아테나이에서 16km 떨어진
펜텔리코스 산에서 캐온 돌을 아크로폴리스로 운반하는데 단일 항목으로
가장 많은 비용이 들었음을 보여준다.
건축 자금의 일부는 델로스 동맹의 금고에서 끌어다 썼는데,
이 곳 금고는 기원전 454년에 델로스 섬의 범그리스 성소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옮긴 바 있었다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파괴되었다.
여타 그리스의 신전과 마찬가지로 파르테논 신전도 국가 금고로 쓰였으며,
특히 이곳은 한때 델로스 동맹의 금고로 쓰였다. 기원후 6세기에 파르테논 신전은
성모 마리아에 봉헌된 기독교 교회로 쓰였다.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한 뒤에 1460년대 초에 모스크로 쓰였고 첨탑이 건설되었다.
1687년 9월 26일 파르테논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불이 붙었다. 화약이 폭발하면서 신전과 그 조각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1806년 엘긴의 7대 백작, 토머스 브루스(엘긴 경)이 오스만 제국의 허가를 얻어
파르테논에 남은 일부 조각을 떼어냈다.
이 조각물은 오늘날 엘긴 대리석 조각군 또는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으로 불리는데,
1816년 런던의 대영 박물관에 매각되어 지금까지 그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엘긴 대리석 조각군을 다시 그리스로 반환해 주도록 노력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는 상황이다
맨 위쪽 단에서 측정했을 때 파르테논의 기단 면적은 69.5m x 30.9m의 사각형이다.
구조상 지부을 받치기 위해 필요한 두 줄로 된 내부 주랑을 비롯하여
성소 안치실(cella 또는 naos)은길이는 29.8m이고, 폭은 19.2m이다.
바깥의 도리스식 열주는 직경이 1.9m이고,높이는 10.4m이다.
각 모퉁이의 기둥은 직경이 약간 더 크다.
파르테논 신전은 외부에 46개의 기둥이 있고, 안에는 23개의 기둥이 있다.
스타일로베이트는 가운데 부분으로 갈수록 높아져, 가운데 부분은 동쪽과
서쪽 끝 부분보다 60mm 높아지며, 측면보다 110mm 높다.
지붕은 임브렉스와 테굴라(imbrex, tegula, 지붕에 덮는 기와)라는 큰 대리석 기와로 덮혀 있었다
출처:위키백과
▼네레이스 기념비적인 무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소크라티스[*],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의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원전 399년에 고소되어 사형을 당했다.
흔히 공자, 예수, 석가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실존철학의 거장인 카를 야스퍼스의 저서
위대한 사상가들에서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서양의 2000년 철학은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말했으며,
시인 에머슨은 "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 이라 평하였는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이다.
플라톤이 20대인 시절, 스승 소크라테스가 민주주의에 의해 끝내 사형당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개했으며,
이는 그의 귀족주의(철인정치) 지지의 큰 계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소크라테스의 증손 제자로,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 플라톤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
역사상의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이 문제를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글을 쓴 적이 없다. 소크라테스 자신과 생애, 철학에 대한 지식은 그의 제자들과
당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플라톤의 기록이며,
그 밖에도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파네스도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런 저작들은 정확한 사실이 아닌 철학 또는 극적인 글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제" 소크라테스를 알기는 어렵다.
당대 고대 그리스에서 투퀴디데스(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나 철학자들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를 제외하고는,
소크라테스 시대를 사실에 입각해서 서술하는 사례가 없다. 이런 결과,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 사료들은
역사적으로 정확성을 내세울 까닭이 없었으며, 때론 당파적이기까지도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처형한 사람들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업적에 대하여 정확하고 일관성있는 역사를 쓰기 위해 당대 인물들이 쓴 여러 사료들을 일치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반드시 사실적이지는 않으며 다만 일관성을 갖추었을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삶과 철학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하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일부 저작에서 플라톤은 자신이 저작속에서 구현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실제 소크라테스의 언행보다 더욱 미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저작이나 유물을 통해서 소크라테스가 단지 플라톤이 날조한 인물은 아님이 드러난다.
크세노폰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플라톤의 저작에 나오는 일반적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조각가인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해산술을 업으로 하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여
아테네의 서민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조각을 하면서 다른 청년들처럼 철학·기하학·
천문학 등을 배웠고, 중장보병에 편입되어 세 번이나 전투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한 일이 있고,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다.
그는 자연 철학을 배웠으나, 그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을 품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적·개인주의적·비판적 정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였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소피스트들처럼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으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사상-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 없는 소크라테스의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 라이르티우스, 크세노폰, 특히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그는 델피의 신탁인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 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시키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옳은 판단으로
유도시켰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이다.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다이몬은 일종의 귀신에 포함됨)
그가 다룬 문제는 종래의 철학이 대상으로 한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었으며 '정신의 배려'를 사명으로 삼았다.
덕은 인간에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윤리상의 개념을 설교하고 다녔다.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다.
변론과 크리톤
'악법도 법이다'(라틴어: Dura lex, sed lex)라는 말이 회자되지만, 소크라테스가 직접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없다.
이 경구가 처음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며 말한 사람은 도미티우스 울피아누스로 기록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출처:위키백과]
아프로디테 석상(밀로의 비너스)
아프로디테(그리스어: Ἀφροδίτη, 라틴어: Ven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
그녀가 태어난 키프로스와 키테라에서는 키프리스와 키테레이아로 불린다. 로마 신화의 베누스와 동일시된다.
머틀, 비둘기, 참새, 백조가 대표적 상징물이다.
헤파이스토스는 그의 외모와 불구 때문에 아내가 없었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에게는 올림포스 신들 중 최고의 손재주를 지녔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티탄족들과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헤파이스토스는 번개라는 무기를 발명하여 이것을 제우스에게 선물로 줬다. 당시 제우스는 티탄족을 무찌를 수 있게
해주는 자에게 신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번개로 제우스는 티탄족들을 하나하나 토벌했다.
그 댓가로 제우스는 아프로디테를 그의 아내로 맺어 주었다.
하지만 헤파이스토스가 대장간 일을 핑계로 아프로디테와 함께 하지 않자 아프로디테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밀회를 하기 시작하였다.
호전적인 성격임에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받았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 함께 그녀의 남편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를 피해 자주 밀회를 즐겼다.
이를 지켜본 태양신 아폴론이 헤파이스토스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자,
헤파이스토스는 청동을 가늘게 늘여서 짠 그물을 만들어 아프로디테의 침대에 쳤다.
이것을 모르고 아레스와 밀회를 즐기던 아프로디테는 헤파이스토스를 보자 아레스와 함께 자리를 피하려 하지만
그물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여러 신들에게 망신을 당하였다.
포세이돈이 두 사람을 풀어주라고 설득하자 헤파이스토스는 아레스가 보상을 하겠다는 포세이돈의 보증을 받고
두 사람을 풀어준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계속 교제를 하였다.
서로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였는데,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에게 반하자 아레스는 멧돼지로 변하여 그를 받아 죽이고,
아프로디테는 에오스가 아레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가 사랑하게 되는 인간은 모두 죽는 저주를 내린다.
아레스는 아프로디테와의 사이에서 공포를 뜻하는 포보스와 두려움을 뜻하는
데이모스, 에로스,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에로스는 아프로디테와 에로스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후에 추가된 것이라고도 한다.
출처:위키백과
첫댓글 사진 감사합니다. 대영박물관 견학 기억을... 덕분에 회상해 봅니다.
유럽여행중
하루 머물렀던 영국
대영박물관에 간기억이 나네요
짧은 시간이라 자세히 보지못하고 수박 겉핡기식이였어요
니케의 여신상
이집트 미이라 생각이나요
자세한 지식정보 감사
못보고온 유물이 넘 많아여~
일주일은 봐야한다나욤~
사진찍기도 바쁘고~ 한국관 동양관 들릴생각도 못했쥬~
런던타워 야경 보러가야니깐~
생전 사진이라도 처음보는 조각들 너무너무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박물관 구경잘하고갑니다. 비행기값 안들이고 ㅎ ㅎ ㅎ 감사합니다.
아 애네들은 말야... 꼭고추를 그렇게 자랑스레 내밀고 있어야만 되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