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노수옥
가을을 번역하면
한 무리의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공중이 무거워지고 가벼워진 활자가
수직으로 떨어지거나 시나브로 쌓인다
작년보다 훨씬 살이 빠진 산등성이는
사라진 여름을 편집중이다
나무의 행간이 느슨해지질 때
글자가 빼곡한 벌레집 한 채가 겨울잠에 든다
짐승의 털이 무성해지고
여름 동안 휑하니 굶고 있던
작은 굴이나 흙 속은 겨울잠 자는
존재들의 잠을 조금씩 헐어 먹으며
긴 겨울을 버틸 것이다
햇살의 가격이 올라가는 저물녘
마른 고추들이 내는 구어체의 목소리가 들린다
낱장으로 펼쳐진 산그늘 쪽엔 얇고 두꺼운
햇살이 맞교대를 하고 있다
돌 밑을 파고드는 한결 낮아진 물소리
물은 차가워지고 돌 밑은 미지근해진다
숲의 한쪽 어깨가 기울어지면
주머니가 체온을 높이고 소매 끝이 시려온다
햇살이 마지막 붉은 것을 찾아다니며
물기를 서둘러 말릴 즈음
씨앗은 그 미닫이문을 닫는다
곧 다가올 쌀쌀한 지면 위에 찍힌
짐승들의 발자국은 끝내 오독으로 읽힐 것이고
날아오르는 새들의 날갯짓을 엮어
별책부록으로 엮었다
그 밖의 가을 번역판은
파본으로 분류돼 서쪽에 전해진다고 한다
사라진다
노수옥
손을 씻으면 열 개의 냄새가 사라진다
반면, 빨래를 하면 어제와 정다웠던 수십 개의 상점이 지워진다
소멸된 열 개의 냄새 중엔 엄지와 검지 약지 같은 명칭이 있지만 아직까지 비누에 굴복한 냄새는 없다
매일 목욕을 한다 해도
몸짓이나 습관은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형 물체인 비누,
오늘을 없애는 일로 닳는다
과산화수소를 부으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과거와 닿으면 거품이 일어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또 최근 무렵이다 꽃과 나비가 꽃의 딸림이 듯 비릿한 꼬리지느러미의 냄새는 생선의 소속이다
최악과 차악遮惡을 저지른 손이 맞잡고 모의하듯
거품은 서로에게 협력하는 사이
소속을 찾아 빠져나간 어제와 오늘은 내 손에 착착 달라붙어 있던 것들이지만 무색무취인 지나간 기억엔 미끌미끌한 시간의 타협점이 다 닳아 있다
집착이 엉킨 껍데기가 세탁기 안에서 돌고
웅웅 앓는 소리내던 거품이 하수구에 박은 코로 쏟아진다
구겨진 물이 거뭇하게 흘러나오는
어제와 오늘 사이의 아가미에서 킁킁 비누의 원형을 찾는다
그 어디에도 없는 방심의 한때
씻은 두 손을 부주의하게 흔들어 턴다
노수옥 시인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2013년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8회 김포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10회 경북일보 청송객주 문학대전 시 부문 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