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798호 소조 석가여래 삼존상으로 유명한 수락산 흥국사
흥국사(興國寺)는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다. 덕절이라는 사찰로 조용하고 볼거리도 많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창건역사를 보면 599년(진평왕 21) 원광(圓光)이 창건하여 수락사(水落寺)라 하였으며, 그 뒤 조선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1568년(선조 1)에 왕이 이 절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원당(願堂)을 짓고 편액(扁額)을 하사하여 흥덕사(興德寺)로 개칭하였는데, 민간에서 덕절(德寺)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 원당 때문이다. 1626년(인조 4) 다시 흥국사로 개명하였다.
1793년(정조 17) 왕실의 시주를 받아 기허(騎虛)가 대웅전을 중수하였으나, 1818년(순조 18) 만월전(滿月殿)과 양로실(養老室)을 제외하고 모든 요사(寮舍)가 불타버린 뒤, 4년 만에 왕명에 의하여 기허가 대웅전 등 법당과 요사를 중건하였다. 1856년(철종 7) 은봉(隱峰)이 육면각(六面閣)을 중수하고 단청하였으며, 1870년(고종 7) 시왕전(十王殿)을 중수하였다. 1878년에 다시 불타버린 것을 용암(庸庵)이 중건하였으며, 1888년 제암(濟庵)이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고 단청하였다. 이 절은 덕흥대원군의 묘소를 모신 이래 왕가(王家)에서 편액을 내리고 중수·중건을 몇 차례 실시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던 특별한 사찰이다. 흥국사는 조선 후기 7대 승풍규정소(僧風糾正所) 중 한 곳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규정소란 조선 후기 승려의 기강을 북돋고 승풍(僧風)을 올바로 세우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기구를 말한다. 전국적으로 다섯 군데의 규정소를 두었는데, 광주의 봉은사(奉恩寺), 양주 봉선사(奉先寺), 남한산성 안의 개운사(開運寺), 북한산성 안의 중흥사(重興寺)와 수원의 용주사(龍珠寺)다. 이들 5개 규정소는 전국의 승풍을 규정하는 직책을 맡게 하였다. 이들 5개 규정소에는 각각 관할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봉은사는 강원도 사찰을 관할하였고, 봉선사는 함경도 사찰을 관할하였으며, 개운사는 충청도와 경상도, 중흥사는 황해도와 평안도, 용주사는 전라도의 사찰을 관할하였다. 단지 경기도의 사찰은 5규정소의 공동관할구역으로 삼았다. 이 밖에 두 곳의 공원소(公員所)가 있어서 5규정소를 도왔다. 두 곳의 공원소는 서울 동쪽에 있는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와 서대문 밖에 있는 봉원사(奉元寺)이다. 이곳에는 사무원이 주재하면서 규정소의 서무를 맡아보았다. 이 두 공원소를 합해서 7규정소라 하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靈山殿),시왕전, 독성전(獨聖殿), 만월보전(滿月寶殿), 단하각, 승방(僧房) 등이 있다. 전해 오는 보물로는 조선 중기의 작품으로 보이는 경판(經板)이 보존되어 있다. 원래 안해장전(安海藏殿)에 보관되어 오던 것으로, 미타경족자판(彌陀經簇子板) 1부, 연종보감판(蓮宗寶鑑板) 1부, 미타경판(彌陀經板) 1부, 십육관경판(十六觀經板) 1부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남호대사(南湖大師)가 직접 써서 판각한 것이다. 이 밖에 어필병풍(御筆屛風) 1권 및 십장생화병풍(十長生畵屛風) 1좌가 있고, 이름이 전하지 않는 고승의 부도(浮屠) 2기가 남아 있다. (대방) 남양주 흥국사 대방(南楊州 興國寺 大房)은 흥국사에 있는 법당으로, 2011년 4월 29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471호로 지정되었다. 남양주 흥국사 대방은 「흥국사사적(興國寺事蹟)」, 「흥국사만세루방중건기공문(興國寺萬歲樓房重建記功文)」등 사료에서 그 연혁이 잘 나타나며, 정토 염불 사상이 크게 성행하던 근대기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염불 수행 공간과 누ㆍ승방ㆍ부엌 등의 부속 공간을 함께 갖추고 대웅전을 실제적ㆍ상징적 불단으로 삼아 염불 수행을 하도록 구성된 독특한 형식의 복합 법당이다. 기존의 전통적 방식을 벗어나 복합적이고 기능적인 근대적 건축의 성립을 보여주고 있는 이 대방은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특한 건축 형식과 공간 구성 및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대방 뒤편으로 영산전과 대웅보전, 시왕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1)영산전에는 보물제1798호로 지정된 소조 석가여래 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에는 현재 소조 석가여래 삼존상만 봉안되어 있지만, 원래는 소조 석가여래상과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16나한상이 모셔져 있었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은 높이 54.5㎝, 미륵 보살상(좌)은 높이 51.8㎝, 제화갈라보살상(우)은 높이 50.5㎝이며 나한상들의 높이는 44.5㎝이며, 재질은 소조와 나무로 조성된 것이다. 영산전 왼쪽처마, 용머리 조각이 아름답다. 영산전 우측처마
흥국사 영산전에 봉안된 소조 석가여래 삼존상과 16나한상은, 문화재 조사과정 중에 발원문과 바닥 면 묵서 기록을 통해 1650년에 중수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원래의 조성 시기는 1650년보다 빠른 조선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2011년 3월 소조 석가삼존 불좌상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4호로 지정되었다가 이후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소조 석가삼존 불좌상을 포함한 모든 존상들이 보물 제1798호로 지정되었다. 흥국사 영산전에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고 16나한상, 제석천상, 사자상 2구, 인왕상 1구 등의 권속 상들은 남양주시립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복장유물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 석가여래상 발원문에는 1650년 8월 조성 기록과 발원 목적 등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제1존자상 발원문에는 1892년에 16성상을 전라도 고산(高山) 안심사(安心寺) 약사암(藥師庵)에서 흥국사로 이안(移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이들 영산전 불상들은 1650년에 중수된 상으로, 원 봉안처는 전라북도 완주 안심사 약사암이며 1892년 왕실의 상궁들에 의해 현재의 봉안 사찰인 흥국사로 이안해 왔음이 확인된다. 흥국사는 1568년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원당을 지어 편액을 하사받았던 사찰로 이후 정조, 고종 등 꾸준하게 왕실의 후원을 입어 중수와 중건이 있었으며 19세기에 가장 많은 불사가 있었다는 사실도 근거가 된다.
석가모니불 @석가여래 삼존상은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에 턱이 좁은 갸름한 얼굴형, 상반신이 길고 무릎이 넓고 낮은 길쭉한 신체비례 등이 특징이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은 왼손은 배 부분에 두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손끝을 가지런히 둔 항마촉지인을 취한 자세로 앉아 있다. 머리는 육계와의 경계 없이 둥그스름한 타원형 중간계주만 표현하였으며 얼굴은 눈 아래 광대뼈가 강조되었고 눈꼬리가 올라간 작은 눈, 작은 입 등을 표현하여 고요하고 침울한 인상을 풍긴다. 착의법은 변형 편단우견 식으로 대의를 왼쪽 어깨 위에 살짝 걸치고 왼쪽 팔을 드러내었고 밋밋한 가슴 아래에는 자연스럽게 주름 잡힌 승각기가 보인다. 옷주름들은 간결하면서도 굴곡이 깊어 풍만감이 있으며 흙의 재질적 특성으로 부드럽게 처리되었는데 특히 무릎 부분의 옷 주름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다.
현재 영산전의 봉안되어 있는 삼존불 (전시되어던 삼존불, 미륵보살상이 완전 다르다.)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석가의 좌·우측 보살상들(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앉아 있는데 좌협시는 왼손을 가슴 부위에, 오른손을 배 부분에 두었고 우협시는 그 반대의 손 모습을 취하였다. 신체비례, 얼굴 표현 등은 본존불상과 유사하다. 현재 영산전에 모셔진 미륵보살은 보물로 지정된 원 미륵보살과는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 영산전에 모신 미륵보살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원 미륵보살은 정수리에 상투형 머리를 올렸으며 어깨 위의 머리카락은 생략되었다. 신체에는 화형 귀걸이, 수식이 세 줄 드리워진 목걸이, 간결한 팔찌 등을 착용하였다. 착의법은 편삼 위에 대의를 걸친 변형 통견식이나 옷 주름 세부 표현에서는 역시 본존불상과 같다. 길쭉한 신체비례와 낮은 무릎, 도드라지게 표현된 무릎 위 옷 주름 등은 1458년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82호), 1482년 천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과 비교되고 보살상의 상투표현과 어깨 위 머리카락의 생략 등은 16세기 보살상들의 특징적인 요소로 이 삼존상은 15~16세기에 조성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16 나한상들은 이 탱화들 앞에 모셔져 있었던 모양이다. 빈자리만 댕그란히 남았다.
16나한상은 현재 영산전에 모셔져 있지 않고 별도 장소에 모시고 있는 모양인데 위키백과에 나온 설명만 옮겨 놓는다. 「16나한상은 현재 표면을 짙게 채색한 상태로 1892년 흥국사로 이운하면서 다시 채색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한상들은 상반신이 길고 무릎이 낮은 길쭉한 비례에 마른 모습이며 사실적으로 묘사한 얼굴은 표정이 다양하여 실재적인 특징을 보인다. 나한상들은 사자, 호랑이 등의 동물과 함께 앉아 있거나 염주, 불자, 파초, 경책을 든 모습, 합장한 모습 등 독특하고 다채로운 자세와 지물을 표현하였다. 의자에 앉은 제석천 상과 두루마리를 든 사자상, 칼을 쥔 인왕상 등은 규격이 작고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나한상은 작은 얼굴과 길쭉한 신체비례에서 삼존상과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 불상들과 비교되며 턱이 좁은 갸름한 얼굴은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1501년, 보물 제415호)과 닮았다. 나한상의 제작 시기는 조선 전기인 15~1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남양주 흥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16나한상은 15~16세기경에 조성되어 1650년에 중수된 중요한 불상이다. 즉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나한상 가운데 일괄로 조성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비교적 작품 수량이 적은 조선 전기 불교 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이며 소조 상이나 나한상 연구에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웅보전 흥국사 대웅보전은 졍조17년 (1973)에 고쳐 지었고 순조 때 화재로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언제 누가 지었는지 분명한 기록은 없다. 규모는 앞면 3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이루어져 조선 후기 왕가에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의 석가삼존 좌불상의 목조로 조성된 후불화염탱은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이러한 화염상은 신라 때부터 비로자나불 후불탱으로 조성되어 온 것이 많다. 대웅보전 왼쪽처마, 영산전의 조각수법돠 동일하다. 대웅보전 오른쪽처마 대웅보전에는 석가여래삼본불이 봉안 되어 있다. 후불탱은 화염상(불꽃모양)을 부조하여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다. 보현보살 문수보살 석가모니불 독성각 @만월보전 흥국사는 정릉의 봉국사와 같이 만월보전에 모신 약사여래 도량으로 유명하다. 일반 사찰에서는 유례가 드문 육각형으로 지어진 만월보전은 순조 18년(1818) 큰불이 났을 때 전각 대부분이 소실 되었을 때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흥덕사에서 흥국사로 절 이름을 바꾼 인조4년(1626) 이후 정조 14년 (1790)까지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 하면 늦어도 정조14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로 추정된다.
@만월보전 내부에는 헌종13년(1847년)에 만들어진 불탁 위에 선조(1567~1608) 때 그려진 대형 탱화가 걸려 있다고 하는데 현재 만월보전에는 보이지 않고 별도 장소에 모신 것 같다. 만월보전의 중 약사여래는 태조 이성계와 승려로 출가한 그의 딸이 관련된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태조 이성계의 딸로 출가한 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태조가 중병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릉 봉국사에 약사여래를 조성하고 아버지의 건강을 위해 지성의 기도를 드렸는데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는지 태조 이성계가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한다. 이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많은 참배객이 찾아왔는데 어느 날 봉국사의 약사여래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다행히 수소문 끝에 어느 골짜기에서 이 약사여래를 발견하고 원래 자리로 옮기려 하였지만, 바위 처음 꼼짝하지 않아 옮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부처에게 스스로 절을 택할 수 있도록 나라 안의 이 절 저 절 이름을 나열하였는데 흥국사라는 이름이 나오자 부처가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신 약사여래가 흥국사 만월보전의 약사여래라고 한다. 이 설화에 나온 태조 이성계의 딸이 경순공주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이는, 경순공주의 생모였던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라는 것과 태조 1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편과 두 동생 (방번과 방석)이 방원에게 죽자 다음 해에 경순공주가 태조의 권유로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한 설화이다. 역사를 사찰과 접목하여 설화로 꾸민 것이 아닌가 사료되지만 경순공주의 출가 내력을 살펴보면 가공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순공주의 어머니는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이며, 방번과 방석의 누이가 된다. 1392년(태조 1)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나자, 전 왕비 한씨의 소생인 여섯 왕자를 제쳐두고 강씨 소생인 제8남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이에 1398년 8월 방원(뒤의 태종)이 자기 휘하의 사병을 동원하여 방석과 그를 보좌하던 정도전 일파를 죽였다(제1차 왕자의 난). 이때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도 죽임을 당하자 이듬해 이성계는 그녀의 신변 보호를 위해 강제로 출가시켰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경순공주가 출가한 절이 지금의 동대문 밖에 있는 청량사인데 그 후 유점사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청량사는 오늘날에도 비구니들의 도량으로 유명하다. 정릉의 봉국사에도 같은 전각(만월보전) 이름에 동일한 약사여래가 봉안되어 있다. 단하각이다. 단하각이란 이름이 어디서 유래되었지 알 수 없다. 어떤 절에는 삼성을, 어떤 절에는 독성을 모시고 있는데 흥국사의 단하각에는 산신을 모시고 있다. 단하각 위쪽에 위치한 3층석탑 @흥국사 시왕전은 조선국 22대 왕 정조의 후원으로 조성되고, 1786년 정조 나이 35세 때 외아들인 문효세자를 홍역으로 잃게 되자 후사를 보기 위해서 후궁 수빈박씨를 맞아들이고 정조 13년 (1789)에는 아버지 사도세자 묘를 서울 광진구 화양동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기고 윈찰인 용주사를 건립했는데 이때 용주사 건립을 담당한 사일과 보경 두 스님이 그해 10월 공사를 마친 뒤 왕자 탄생을 빌기로 약속하고 수락산 흥국사와 삼각산 진관사로 나누어서 백일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부처의 가피를 받았는지 정조14년 (1790) 왕자(순종)가 탄생하였고 이에 정조는 왕자 탄생에 대한 보은으로 수락산 흥국사와 삼각산 진관사에 왕실 운영 경비인 내탕금을 내려 시왕전을 짓게 했고 정조16년(1792)에 흥국사 시왕전은 완공되었다.
@흥국사 시왕전에 봉안된 목조 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무독귀왕으로 구성된 삼존상을 중심으로 한 시왕상과 일괄 조각상으로서 제4 오관대왕, 제7 태산대왕 및 제9 도시대왕의 복장유물을 통하여 1792년(정조 16)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2011년 3월 8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업경대) @흥국사 시왕전에 탱화가 걸려 있는데, 원래는 13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중 6점이 도난당하고 7점만 진본이 남아 있어 그 도난 사실 여부를 두고 많은 분쟁이 야기되고 있다. 현재 탱화는 도난당했던 6점을 모조품으로 보안하여 모신 것이라고 한다. |
출처: 현림의 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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