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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igraphy - 조현.>
20) 그림자밟기
“날씨 좋다! 출근 하는데 길가에 벚꽃이 아주 흐드러지게 폈더라.”
“그러게요, 지기 전에 빨리 구경하러 가야 되는데.”
“같이 갈 남자는 있고?”
“에이,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은우씨가 뭐라고 말 좀 해줘.”
“하하.”
공원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그 날로부터 벌써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후 일절 그 애와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교내에서 마주치는 일이 늘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지금처럼 점심시간마다 근처 계단에 진을 치고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리 중에서도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는 세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풀어 헤친 교복 셔츠를 입은 한 명이 무언가 단단히 다짐하듯 주먹을 쥐며 말했다.
“동명고 병신들, 이번 기회에 작살을 내줘야지.”
“박 태영, 몇 살 인데 주먹질 타령이냐. 현석이 넌 여기저기 그만 좀 찝쩍거려. 너 때문에 자꾸 시비 붙는 거잖아. 이 자식 얼굴에 상처 안보여?”
개중에 제일 단정한 차림새의 남자애가 격양된 어투로 옆에 있던 그 애의 눈가를 가리켰다. 그만 하라는 듯, 말없이 제 눈앞에 있는 친구의 손가락을 툭 하고 쳐 내리는 그 애. 신 호.
그러고 보니 공원에서 만났던 그 날 이후로 입을 여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원체 입이 무거운 성격인 건지, 남들 앞에서 점잔을 떠는 건진 알 수 없었다.
“민찬주 넌 무슨 얘 엄마냐? 나도 맞았다고. 너야말로 이 잘생긴 얼굴에 상처난거 안보이냐고.”
“쳐 맞아서 머리가 쳐 돌았나. 니가 잘 생긴 거면 나는 뭐, 장 동건 이냐?”
“왜 갑자기 끼어들고 지랄? 야, 못 믿겠음 민희 불러. 걔가 그랬거든? 나 잘생겼다고. 객관적으로다가.”
잘생겼느니 어쩌느니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저 아이, 그 때 정류장에서 봤던 애였다. 역시 친구였구나.
“정은씨, 번지수 잘못 짚었어. 은우씬 애인 있잖아.”
“예? 정말요? 실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전에 퇴근하고 나가는데 웬 비싸 보이는 차가 교문 앞에 떡 서 있는 거야. 게다가 차 옆에 훤칠한 미남이 누굴 기다리는 듯이 서있어서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니까? 무슨 드라마 촬영이라도 하는 줄 알았어.”
행정실 안으로 들어서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실장님. 정은씨는 귀를 쫑긋 세우며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엄마 오리를 쫓는 아기오리마냥 실장님 뒤를 졸졸 쫓았다.
다소 과장된 실장님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어이없어 웃고 말았다. 애인이라니, 나랑 정진이가 애인? 5년 후에도 정진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면야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글쎄, 내색은 않고 있지만 나보다 맞선 보는 횟수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애가 과연 마흔이 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기적인 내 옆에 얼마나 더 있으려고 하는 것일까 궁금하다가도 계속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빼꼼히 머리를 내미는 게, 요 근래 들어 하루 이틀이 아니니 갑갑할 노릇이었다.
이럴 땐 담배 한 개비 태우면서 잊어버리는 게 최곤데. 옛날처럼 화장실 안에서 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금연건물이다 뭐다 해서 눈에 안 띄는 장소를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교내를 휘젓고 다니다 최근에 발견한 별관 뒤편에 숨어있는 창고 옆은 끽연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창고 건물과 담장 사이에 사람 한명 들어갈 정도의 틈새가 있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 피우면 담장 너머에 있는 소각장에서 흘러나오는 연기 덕에 담배연기가 자연스레 묻혔다.
“은우씨, 어디가?”
“아무래도 찝찝해서, 이 한 번 더 닦고 올게요.”
서랍에 넣으려던 칫솔 통을 다시 쥐고 행정실을 빠져 나왔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계단께서 죽을 치고 앉아있던 무리들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점심시간이라고 해 봤자 10여분 남짓 남았으니 저마다 교실로 돌아갔으리라.
왜 자꾸 그 애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정진이 때문에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다. 서둘러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니 온 몸의 긴장이 풀렸다. 그 상태로 건물 벽에 기대어 서자, 여간 안락한 게 아니었다. 무거웠던 눈꺼풀은 저절로 감겨왔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한 3분정도 흘렀나보다. 담배 한 개비가 제 수명을 다하고 허연 재가 되어 사라졌다. 불을 끄면서도 아쉬움이 남아 신발 밑창만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휴대폰 번호는 저장이 안 되어 있는 번호였다.
이 시간에 나한테 걸려올 전화가 있었던가? 잘못 걸려온 전화가 아닐까? 일단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신호 옆에 있으면 바꿔줘요.]
발신자의 명령조에 빛도 못보고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간 내 목소리. 생전 처음 들어보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짜고짜 누굴 바꿔달라는데 그게 왜 하필 그 애인지는 알 턱이 없었다. 황당하기도 하고 기분이 상해서 뭐라고 한 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는데 마땅히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은데요.”
우습게도 나보다 한참 어린 상대방에게 아주 공손히 대답을 하고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조금 전 까지 안락했던 틈이 왜 이리도 갑갑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미 장렬히 압사당한 애꿎은 담배꽁초만 두어 번 더 짓이긴 후 건물 틈에서 나왔다.
[보름 전에 이 번호로 저한테 문자가 왔었는데요. 신 호 모릅니까?]
누군지 알기야 하지만, 굳이 알려줄 이유가 없었다. 학교 안에서 마주치는 것도 충분히 껄끄러운데 여기서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모른다는 대답을 한 후 일방적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누군가의 출현에 그 자리에서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내 눈앞엔 그 애가 서 있었다. 방금 전 통화했던 젊은 남자가 찾던 그 애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꽂고 비딱하게 서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서 있었던 거지? 담배 피는 거, 다 봤을까?
“눈물 날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뭐?”
그 애는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며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눈물 날 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왜 자꾸 다가오는 거야?
“여기, 금연건물인데.”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렇담 악의가 느껴질 법 한데, 그런 기색 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 싶어 놀자는 심산인가보다.
“미안한데, 내가 바쁘거든. 심심하면 교실 가서 네 친구들이랑 놀아.”
“말해도 되나? 교내에서 흡연….”
“학생 신분에 술 담배 하는 애 말을 누가 믿겠니.”
간질거리던 뱃속에서 불이 이는 것만 같았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알고 있냐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정류장에서 본 건 기억도 나지 않을 텐데 괜한 소리를 지껄이는 바람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언제, 본 적 있어요? 내가….”
수업시작을 알리는 예비종이 말꼬리를 씹어 삼켰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둘러 행정실 건물 쪽으로 향하였지만 그 애가 한 발 더 빨랐다.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 애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여리 여리하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빼내려 하면 할수록 더 조여드는 그 애의 손아귀는 흡사 덫과 같이 느껴졌다.
“종 쳤는데, 안 들어가니?”
“여기서 얼마나 일했어요?”
“이 손 좀 놔줬으면 좋겠는데.”
“원래 서울 살았어요?”
내 말은 들으려고도 않으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알아봤자 하등 쓸 데 없는 질문을 퍼부었다. 손목 언저리가 저려와 자칫하면 들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뜨릴 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휴대폰 진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그 애는 내 손안의 휴대폰을 빼내어 허락도 없이 통화를 감행했다.
“형, 나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목소리는 전화를 받자마자 묘하게 축 처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면 전화건 남자는 무안해서 목소리가 작아질 법도 한데 외려 휴대폰 스피커가 찢어질 만큼 크게 고함을 질러댔다. 거리가 있어서 말하는 속도도 빠르고 거칠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냐, 그냥 계단에서 굴렀어. 집… 오늘 들어갈게.”
통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 애.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집에 들어가네 마네 하는 걸 보니 친형인가보다. 지금 상황에선, 불량아 동생을 둔 형의 심정이 어떨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다.
“얘.”
“걱정 마요. 다신 전화 올 일 없을 테니까.”
“전화고 뭐고 이 손 좀 놓으라고.”
아프다는 티를 팍팍 내며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손아귀의 힘이 빠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다였다.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종 칠 텐데.. 양치질 하러 간 사람이 여태 안 돌아오니 사람들이 눈치를 챌 지도 모르겠다. 어떡하지?
“하나만 대답해줘요. 8년 전에, 유….”
“신 호! 너 교실 안 들어가고 뭐하냐?”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 안에서 학년부장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등장에 놀랐는지 반사적으로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버렸다. 나는 그 애의 손에 들려있던 휴대폰을 낚아챈 후 선생님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은우씨, 요즘 양치질 너무 자주 하는 거 아냐?”
“네? 아,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청결하면 좋지. 안 그래? 애인 없는 정은씨.”
“실장님!”
나한테 무슨 질문을 하려고 했던 걸까? 8일전도 아니고 8년 전이라니.. ‘8년 전에 유….’ 8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가 뭐냐고 물어 보려던 게 아닐까? 그땐 유행가는커녕 뉴스도 안 보고 살았는데. 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런걸 알아서 뭐하게. 하여튼 그 애만 만나면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켜 복잡해진다. 이제 옛날 일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예나 지금이나 글자 들여다보고 전화 받고 하는 일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종이 대신 모니터, 펜 대신 키보드로 일을 하다 보니 눈은 물론 어깨부터 목 까지 삐걱 거리기 시작 한다. 당분간 렌즈 대신 안경을 끼고 다녀야 하나?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했어요.”
퇴근을 알리는 인사와 함께 바람같이 사라지는 직원들. 의도 한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사무실에서 맨 마지막으로 퇴근 하는 사람은 내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집 아닌 다른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정진이도 요즘 한창 바쁜 것 같고, 그나마 통화라도 할 수 있는 걸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먼저 전화하는 건 피하면서 쓸쓸한 기분이 들 때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맺고 끊는 걸 확실히 하는 것만이 나와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입히지 않는 방법이란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책장을 넘기다 무심코 종이에 살짝 베인 정도밖에 안 될, 그 작고 사소한 상처가 생기는 게 무서운 거다 나는. 작은 상처가 큰 상처보다 더 아리고 아프게 느껴지니까.
나이를 먹을수록 겉은 번지르르 해지지만 속은 점점 더 옹졸하고 비겁해지니까, 더 이상 어린 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른이라고 하는 지도 모른다.
“후….”
혼자 있는 시간이 좋긴 하지만 잡생각이 늘어나면 한도 끝도 없으니.. 정신 차리고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대충 정리를 한 후 사무실에서 나와 현관문으로 향하는데, 현관 쪽 모퉁이 너머로 남자애들 둘이 실랑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럴 거면 야자신청은 뭐 하러했냐 멍청아!”
“멍청이가 야자해서 뭐하겠어. 집에 가서 잠이나 자련다.”
“민희 때문에 그래?”
슬쩍 엿보니 한 명은 책가방을 맨 채 나가려고 하는데 다른 한명은 그 앞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그 둘의 얼굴이 눈에 익어 모르는 척 지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하필이면 그 애의 친구들이..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고 말았다. 신호 그 애와 관련된 모든 것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피해야 하는지 순간 의문이 들었지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생각해서 좋을 일도 없을 테니까.
“알면서 뭘 물어. 만날 그 새끼 옆에 들러붙어서 염장을 지르는데.”
“그래서 신호가 눈길이라도 줘? 그냥 걔 혼자 좋아하는 거잖아.”
“그게 열 받아. 조민희 마음 내 치는 거 눈에 다보이니까, 보기 싫다고.”
“그렇다고 받아주길 바라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도 신호 요새 많이 힘들어 하는데….”
“걔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차라리 지금이라도 잉글랜든지 뉴질랜든지 다시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참겠다잖아. 그 잘난 우정이라는 거 지켜보겠다고 발악하는 나는, 니 눈에 안보이냐? 너한텐 3년밖에 안된 그 새끼는 친구고, 10년이나 붙어 있었던 나는 들러리야? 실망이다 민찬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나는… 태영아, 박태영!!”
결국 가방을 매고 있던 남자애는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친구의 어깰 치며 나가버렸다. 고작 고등학생 밖에 안 된 청소년들의 대화 내용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듣고 나니 나도 저 나이 땐 저렇게 심각했나 싶었다.
“여보세요? 호야, 미안한데 이따 같이 못 있겠다. 너도 그만 집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부모님 오신다며.”
민찬주란 애는 통화를 마친 후, 조금 전까지 저와 있던 친구의 뒤를 쫓아 순식간에 건물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얼굴 마주치고 민망해 할 상황은 면하게 됐지만, 집에 가는 내내 의도치 않게 들은 그 애들의 대화 내용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너무 방심했던 터였다.
풋풋한 십대 아이들의 사랑과 우정에 관한 성장드라마 같은 한 장면으로 넘겨 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신호, 그 아이가 중심이 되어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에버랜든지 뉴질랜든지 다시 돌아가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박태영이란 애가 했던 말이 자꾸 기억에 남는 것뿐이다.
뉴질랜드라니.. 먼데서도 왔네.
생각지도 않았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겨우 멈추었을 때는 이미 집 앞에 도착한 후였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어째 잠잠하다 싶더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
“엄마… 나 오늘은 정말 피곤한데.”
괜히 어물쩍 시간을 끌며 신발을 벗었지만.. 두 번 정도 안 받으면 멈출 줄 알았던 기본 벨소리는 단조로운 멜로디를 흩뿌리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끊임없이 울며 고요했던 집안을 흔들어댔다.
이 정도 횟수면 맞선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집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여보세요?”
[어휴, 뭘 했기에 전활 이제 받니?]
뭔 일이 생겼다고 하기엔 엄마의 목소리는 지극히 평화로웠다. 그럼 또 맞선 이야기 한번 꺼내겠다고 이리 집요하게 전화통을 붙잡고 계셨나.
“맞선이야기 하실 거면, 끊어요.”
[얘, 됐어. 그이야긴 이제 나도 신물이나.]
“그럼 무슨 일로..”
[아버지가 투 잡을 하시겠단다. 네 방에 있는 짐말이야. 가져갈 거 있으면 가져가. 너랑 느이언니 방 할 것 없이 이층에 있는 방 싹 다 비워서 하숙생 들일 라니까.]
“하숙? 갑자기 웬 하숙을 해요?”
[왜긴 왜겠니. 너도 그렇고 은이도 그렇고 집에 오는 게 가뭄에 콩 나듯 하니까 적적하셔서 그러신 게지.]
집에 가면 엄마가 맞선 이야기로 들들 볶으니까 그렇죠. 라는 말 대신에 어떤 변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먹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집에 가서 짐 챙겨오는 김에 반찬도 싸와야겠다.
“반찬 많이 해두세요. 이번 토요일에 내려갈게.”
먹을 것도 없었지만 마실 것도 없는 텅 빈 냉장고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왔다. 당장 저녁은 입맛이 없다 쳐도 아침에 일어나면 목이 마를 테니 물 한 병은 있어야겠지. 정수기를 설치하지 뭐 하러 고생을 사서 하냐는 엄마에게 괜히 오기 부린 걸 후회하며 힘없이 현관으로 향했다.
“호야, 어디가? 찬주랑 만나기로 하지 않았어?”
“쯧쯧. 민찬주 박태영 따라가서 안 들어 왔잖아 바보야.”
야자1 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화장실에 가거나 휴대폰을 확인하느라 정신없는 아이들 사이에서 현석과 민희의 소규모 입씨름 배틀이 이어졌다.
“죽을래? 만날 여자애들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바보주제에. 호야, 그럼 오늘 찬주 안 만나?”
“그냥 집 가랬대.”
“그럼 우리 집 가자. 우리 집에서 자고 같이 등교하자!”
민희가 호에게 팔짱을 끼며 매달렸고, 현석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선 민희를 다그쳤다.
“돌았냐? 노골적인 것도 정도가 있지. 너같이 들이대는 기지배, 매력 빵점이야. 알아?”
“내가 뭘! 호야, 우리 집에 방 많아! 같이 가자. 응?!”
“우리 집도….”
민희의 팔을 천천히 밀어내며 대답했지만 호의 작은 목소리는 민희의 귀에 닿지 않았다. 민희는 그저 아쉬운지 입맛만 다시다 호의 팔에 시선을 고정하며 건성으로 물었다.
“응? 뭐라구? 너네집도 뭐?”
“…방 많아."
“뭐? 그래서 너희 집에 가겠다고? 그럼 나도 같이…”
“아오, 일절만 해 멍충아.”
가방을 매고 따라나서려는 민희를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는 현석. 일어났다 앉혔다, 힘 씨름을 하던 사이 호가 교실 문을 열고 나가버리자 민희는 의욕을 상실한 채 책상위로 엎어졌다.
“자존심도 없냐. 싫다는데 이제 그만 매달리지?”
현석의 비아냥거림에 민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미 호가 지나간, 아무도 없는 교실문가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래? 저렇게 멋있는데.”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 올까봐 양 팔로 경계태세를 취했던 현석은 질렸다는 듯이 민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요 근래에만 벌써 두 번이나 야자를 빼먹었다. 그 날 이후로 자꾸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던 행정실 여직원 때문이었다.
은우라는 이름, 혹은 그와 비슷한 이름이라도 들었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생긴 일종의 습관 같은 것 이었다. 은우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와 눈이 잠깐 마주쳤었던 것 같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그 여자가 거슬렸던 건 동명고 앞에서 마주쳤던 날 이었다. 어디서 본 적 없냐는 내 물음에 아주 대놓고 모르는 척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필 김은우 박은우도 아닌 정은우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거슬렸다.
기억이 희미해져감과 더불어 그 사람에게 찾아가고 싶은 마음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대신, 그리움은 종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그 사람이 보고 싶을 때 마다 그 사람이 가르쳐준 대로 학을 접고, 그 사람이 폈던 담배 한 개비를 품에 지니고 다녔다. 아스라이 남은 기억 속 그 사람과 닮은 것 같은 여자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런데, 토시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이름을 가진 그 여자에게선 이유모를 짜증이 느껴졌고 심술부리고 싶었다. 그 여자가 갑자기 어른행세를 하며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고 도망치자 화까지 났다. 뒤따라가서 다시 돈을 돌려줘야겠다고 생각 했을 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떻게든 되 값아 줘야겠다고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점심시간마다 행정실 근처 계단에 앉아 그 여자를 지켜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아무래도 정신을 차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 여자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확실하면 더 이상 그 여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될 거라 생각했다.
“하나만 대답해줘요. 8년 전에 유…”
유리라는 남자애 본 적 있어요? 혹시, 그 앨 기억해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훼방꾼이 출연했다. 여자의 미간은 찌푸려져선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처럼 망설임 없이, 도망치듯 이내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여자가 남긴 찰나의 뒷모습은 뇌리에 박혀 잊히지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다가도 아픈 것 같기도 했다.
화가 나서 그런가? 찬주가 충고하듯 제 할 말만 하고 끊어서 열 받은 게 아직 가라앉지 않아서? 아님, 늘 집안에서 환자 취급을 당하니까 진짜 병에 걸린 건지도 모르겠다. 형과 약속은 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집에 들어가면 나는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니까.
가방에 교과서를 채워 넣으며 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그 여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의 뒷모습과 조금 닮았던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많이 닮았던 것 같다.
무거워진 책가방을 맨 뒤, 교실을 빠져나왔다. 세 번이나 말없이 나갔다는 사실을 그분들이 알게 된다면 실망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계단을 내려가는 중에도 몇 번이고 가방을 고쳐 맸지만. 교문을 나서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정 은우, 그 여자를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
ㅠㅠ늦어서 죄송합니다.
맨 위 대사에서 알아차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벚꽃피던 계절에 쓰던 편을 이제야 마무리짓게 되었다는 것을...
양이 좀 (많이)많은데 그냥 20편에 다 구겨 넣어버렸습니다.ㅠㅠ
기다려주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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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 :: The Suim (http://cafe.daum.net/-2ni)
연재 순서 <더쉼→인소닷→왕카>
첫댓글 은우와 유리로서의 재회가 빨리 이루어졌씀 좋겄군요 제목이 왜 신호인가 했더니 유리의 새 이름이 신호였다능....!!!!!
그렇다능....!!!!!
즐감하고 갑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우아우아 본의아니게 닥달? 해놓고 이제서야 보게 됬네요 ㅜ. ㅜ 은우신호, 어떤식으로 풀릴지? 궁금해용*.*ㅎㅎㅎ
감사합니당 ^*^ 21편 업뎃했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