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백석과 하얀 차와 한계령
김왕노 시인
가난한 내가
나타샤를 사랑하는 백석처럼 누군가를 사랑하면
오늘 밤 푹푹 눈은 내려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하여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앉아 적설의 량만큼 그리움을 푹푹 쌓는다.
그리움을 쌓으면서 생각한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눈이 푹푹 쌓이는 밤에는
차를 타고 한계령을 넘어가 한 살림 차려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그 누군가를 생각하고
그 누군가는 이 쌓이는 적설의 그리움이라면
아니 올 리가 없다.
한계령을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이름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그 누군가는 나를 사랑하고
주차장에서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차는 오늘 밤이 좋아
부릉 부릉 혼자서 시동을 걸어 볼 것이다.
*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고
영일만
물은 아래로 흐르다 고였다가 또 아래가 있다면 아래를 찾아 흐른다. 아래로 흐르며 겸손을 가르친다. 아래는 물의 차지라며 끝없이 흐른다. 바다가 출렁인다는 것은 바다로 흘러든 물의 고집 때문, 조금만 높아도 고소공포증을 이기지 못하는 물의 체질 때문이다. 물은 흘러야만 물이고 아무리 커다란 홀이라도 다 채우려는 자세가 전투 태세 같다. 들판을 푸르게 만드는 것도 물이다. 물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폭포에서 투신하듯 떨어진 물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져도 감쪽같이 스스로 수선하는 물은 섬세한 손을 가진 수선공, 물이 악착같이 아래로 흐르므로 강물이 생기고 개울이 생기고 물길이 생기고 눈물이 생기고 피가 생긴다. 물이 곧 생명이라는 등식을 만들며 물은 흐른다. 물은 흐르므로 물의 질서가 잡히나 흐름을 딱 멈추고 반역하듯 증발하거나 지상을 박찬 물은 구름과 안개가 되었다가 끝내 폭우로 구름의 방전으로 뇌성으로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는다. 그것은 물이 자신의 길을 잠시 버렸다는 참회의 통곡이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을 향하던 물의 꿈이 뚝뚝 부러지는 소리다. 겨울밤에 아버지 공사 현장으로 일찍 떠나면 집안을 가득 울리던 할머니가 가꾸던 콩나물시루에 물 떨어지는 소리로 나는 겨울에도 키가 자랐다. 태몽 깊어가는 밤에 어머니 뒷물하는 소리로 아버지와 사랑이 깊어져 내가 태어났다. 내 기원도 한 방울 물이었다는 것을 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방울방울 맺혀 있다. 순풍이 불자 수평선을 넘어 항구를 둘러싼 해안선이 모래로 눈부신 나라로 뱃고동 마음껏 울리며 밀항하라고 부추긴 것도 영일만 푸른 바닷물이었다. 한때 나와 영일만과 배짱이 맞던 시절이었다.
* 포항의 영일만은 내 고향이다. 언덕에 오르면 갈매기 날리며 가슴에 안길듯 영일만 풍경이 펼쳐진다. 이육사가 영일만을 보고 청포도를 지울 수 밖에 없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1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경북 포항에서 출생.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꿈의 체인점〉으로 당선.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 『그리운 파란만장』,『사진속의 바다』,『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게릴라』 등이 있음. 2003년 제8회 한국해양문학대상, 2006년 제7회 박인환 문학상, 2008 년 제3회 지리산 문학상, 2016년 제2회 디카시 작품상 2016년 수원문학대상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회 수혜. 현재 웹진 『시인광장』 발행인 겸 편집인 , 시인축구단 글발 단장, 한국 디카시 상임이사, 한국시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