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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여행] 수지면 몽심재(숨은보석10선.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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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남원 몽심재(夢心齋)(숨은보석10선,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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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그 영광을 영원히 누리고 싶어 했다. 불로불사(不老不死), 늙지도 죽지도 않
는 영생의 꿈.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켜 줄 불로초를 찾기 위해 어린 남녀 수천 명을 선발하여 당시
진나라 동쪽에 있다고 알려진 삼신산으로 보냈는데, 삼신산으로 짐작되는 곳 중 하나가 지리산이라
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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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夢心齋)는 그 전설의 땅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남원에서 19번 도로를 따라 구례 방
면으로 가다가 다시 60번 도로로 접어들어 낮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저수지를 따라 잘 생긴 소나무들
이 늘어선 호곡마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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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 앞쪽에 새로 조성해 놓은 정자 몽심정(夢心亭), 정자 앞쪽 두 기둥에는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보낸 시구가 걸려 있다.
隔洞柳眠元亮夢(격동유면원량몽)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하다,
登山薇吐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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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 안쪽에 남원이 숨겨놓은 숨은보석 10선에 들어있는 몽심재(夢心齋)가 있다. 몽심재는 잿들에
서 흘러내린 물이 집 앞을 둥글게 감싸 안고 흐르는 지점에 있으며, 숙종 20년(1700)에 박동식(朴東式
, 1753~1830)이 산 아래의 따뜻한 터를 잡아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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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의 몽심재(夢心齋)는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가옥이라 하여 유랑자가 들러 보았다. 먼저 이 가옥은 사랑채 마당이 작은 대신에 대문 앞에 넓은 마
당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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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은 솟을대문이며, 토석 담장이 대문 문설주에서 약간 옆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다가 둥글게 담장
을 돌아가는 모습이 꽤나 서정적 이면서도.인상적이다. 수채화 같은 풍경과 흙냄새 물씬 풍기는 그림
이런 모습은 시골 출신들에게는 그져 마음의 고향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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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 앞에 도착한 유랑자는 솟을대문앞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고 활짝 열려있는 대문안으로 들어
가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정원이다. 산을 오르는 것 같이 표고차가 심한
지형에다가 집을 짓다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덕 위로 사랑채와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행랑 마루 옆에 다른 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가 마당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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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랑 누마루 앞쪽으로 안채와 사랑채에서 흐르는 빗물을 모아 연지를 만들었다. 몽심재를 건
축한 박동식이 연꽃을 심어 즐겼다 하여 연당(蓮堂)이라고도 불리며 '蓮堂'은 박동식의 호가 되었다.
먼저 주인은 행랑채에 달린 방, 아니 정자, 요요정(樂樂亭)을 하인들에게 쉼터로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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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랑채(문간채)에 누정이 곁드려 져 있는 특이한 형태로 대청이 있는 것은 유랑자도 처음 보는
것 같다. 보통 문간채는 대문을 여닫고 하는 하인들이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몽심재 주
인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 대한 배려였을까?. 이해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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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에서 양반 전유공간인 정자(亭子)를 하인들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조치
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번 상상해 보시라 하인이 연못이 딸린 정자에 앉아서 노닥거린다? 이른바 하
인들에 대한 특혜 정도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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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요요정은 낮아서 누마루에 가까우며. 연못(천운담:天雲潭) 바로 옆에 붙어 있어 몽심재에서
정경이 아주 뛰어난 곳이다. 이런곳을 제아무리 마음이 넓다한들 하인들에게 내 주었다는것은 누
가 생각해도 풍류를 즐길줄 아는 양반 사회에서는...두번째 이해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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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담(天雲潭):연못은 5.5m X 5.0m의 약간 장방형으로 동쪽 담 아래 샘물에서 물이 들어와 남쪽으로 자연스럽게 넘어나가게
되어 있다. 연못 가운데에 놓인 징검다리가 매우 독특하며 연못 끝 큰 돌에는 '渟滀(정축)', '臨履(임리)'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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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 온 마당 중앙의 바위 '存心臺'와 '淸窩'라는 글귀가 선명하다. 세월을 지켜 온 집안의 내력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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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보통 우리나라 살림집에서 정원계획이라는 것이 별서가 아닌 이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정원계획 이라고 해봐야 마당에 나무 몇 그루를 심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몽심재는 기존에 있는
바위를 그대로 살려 정원계획의 중심으로 삼고 동쪽 하단에 연못을 조성하는 등 적극적인 정원을 조
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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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바위가 수석이 아닌 커다란 바위가 담장 안쪽에 있는 경우는 유랑자가 그동안 우리나라 많은 곳
을 다녀 보았지만 이곳이 유일할 것이 아닌가 싶다. 마당 규모로 보아 바위는 집터 밖에 있어도 될 것
이었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집안으로 끌어들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훌륭한 정원요소로 만들
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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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心齋(몽심재) 양 옆으로 주련이 걸려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련이 세파에 흔들리지 않던 선비의 고고한 기개가
느껴진다.
隔洞柳眠元亮夢(격동류면원량몽)마을을 등지고 잠든 수양버들은 도연명(元亮)을 꿈꾸는 듯하고
登山薇吐伯夷心(등산미토백이심)산속의 고사리는 백이의 마음을 토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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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상 집 안에 이처럼 큰 바위가 있으면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바위에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성리학에서 경(敬)을 설명하는데 사용한 주일무적(主一無適)
에서 따온 주일암(主一岩), 박해창의 호인 정와(靖窩), 맹자가 수양론을 주장한 존심양성(存心養性)
에서 따온 존심대(存心臺), 어려운 시국을 뜻하는 천창애(千蒼厓), 누구나 청렴하고 검소하여 살아야
한다는 염타기적(廉他其適), ‘청와(淸窩)’등의 글이 있는데 특히 유교(성리학)의 가치를 따르며 이 집
안의 선조들도 이 바위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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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夢心齋)'라는 당호가 걸린 사랑채,사랑채 전면 주련으로 동정무위 표리교정 정기의관 잠심이거(動靜無違 表裏交正
正其衣冠 潛心以居)가 있다.
움직일 때와 가만히 있을 때 서로 어긋나지 않고, 안과 밖이 서로 바르며, 의관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깊게 고요히 하여 머
물러라... 뭐 이런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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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夢心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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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옥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한 가옥으로 사랑채와 옆에 붙은 중문채가 높은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다. 사랑채 옆의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단순하지만 둥근 곡선의 자연석 표현이 아름답다.
야생 선인장?? 설명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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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전주에서 왔다는 남성 한분과 여성5분이 들어와 남자분이 해설을 한다. 이야기로 보아 아무
래도 전주에서 고택에대한 해설을 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옥에대한 해박(該博)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유랑자는 잘 되었다 싶어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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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시 몽심재 근본 꿈(夢)은 가문의 영원한 번성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죽산박씨가 기본적으로 가
지려 한 마음씨(心)는 '적선(積善)철학'이었다. [주역]에 나오는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
慶,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집안에 반드시 좋은 일이 따른다는 뜻)을 들먹이지 않아도 적선이야말로 가
문이 영원히 번영하는 데 필수조건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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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선으로 몽심재가 가장 앞세운 것은 접객(接客)이다. 몽심재의 재력과 후한 인심은 남쪽지방에 소문
이 파다하여 한양을 오가는 많은 선비들이 몽심재를 들락거렸다. 이를테면 과거 몽심재는 과객들에
게 사랑방이었다. 여기에서 정보를 교류하고 역사와 문화, 철학을 토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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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이들을 귀히 여기고 후하게 대접하여 적선지가(積善之家)의 명망을 이어갔다. 본시 선이란 물
질로만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러한 집주인의 선한 마음씨는 대외적으로 공동체의 책임, 의로 나
타났고 집안에서는 신분이 낮은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 여성에 대한 배려로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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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안채에는 ‘ㄷ’자형으로 정침과 광채, 그리고 헛간이 배치되어 있다. 부속채는 모두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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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몽심재를 지은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은 죽산박로는 신라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고려 말 이성
계의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72명 중 한 명인 송암 박문수(松菴 朴門壽, 13
42~?, 중추원사 도평의사 찬성사)를 중시조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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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가 이곳 남원에 자리 잡게된 이유는 조선 초기 박포(朴苞)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선 초기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몽주를 제거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포는 논공행상에서 2등이 되자
불만을 품는다. 2차 왕자의 난 때 방간의 편에 서서 반란을 꾀하다 실패하고 참수형의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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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포의 조카인 박자량(박문수의 손자)은 연좌제로 전라감사로 좌천되는데, 박자량은 그래도 신분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심끝에 관직을 사직하고 숨을곳을 찾다가 이곳 수지면 골짜기로 숨어들어 정
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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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몽심재와 광한루의 관계는 박포와 황희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반란의 실패로 박
포의 식솔들이 노비가 되었는데 광한루를 중창한 황희가 박포의 아내를 첩으로 삼았다고 하여, 황희
의 부도덕성을 말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황희가 박포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다
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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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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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한참 지나 1700년에 연당 박동식(蓮堂 朴東式, 1753~1830)이 몽심재를 지었다. 또 시간이 흘
러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위해 지역 유력자들을 포섭하는데, 일제는 남원의 몽심재 주
인인 박주현을 포섭하는데 실패하자 고문으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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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손(박해창)에 재산은 더 늘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정와(靖窩)는 몽심재 3대주인 박해창(朴
海昌)의 호이다. 박해창은 마지막으로 시행한 과거급제자로 고종황제의 비서랑을 역임 하여 신임을
두텁게 받아 황제가 직접 중매를 하여 혼사를 맺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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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꽃무릇과 혼동이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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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중앙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을 담아내고 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생각이 네모난 연못
안의 둥근 섬으로 나타난 것이다. 천운담(연지) 주위에는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여름에는 빨간 배롱나무 꽃이 운치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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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암각서, (왼쪽부터) 靡他基適(미타기적), 主壹岩(주일암), 그리고 千蒼崖(천창애),
이 처럼 교훈이 되는 문구를 새긴 것으로
보아 이 집에서 살았던 분들은 이 바위의 존재를 아주 특별하게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 뱃사람을 상대로 소위 말하는 고리대금업을 한다. 박해창의 돈을 빌리면 그 배는 만선(滿船)이 되
자 뱃사람들 모두 박해창의 돈을 빌리기 위해 일부러 줄을 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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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벌어들인 돈으로 재산을 증식하고, 학교도 짓고, 인근 사람들에게 베푸니 죽산박씨와 몽심재가
명문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인물에 관한 다른 얘기도 많은데 일단 생략하고 몽심재의 풍수적
인 얘기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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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채의 누마루인 요요정(樂樂亭)
자연석의 높직한 축대가 돋보이는 몽심재 사랑채와 중문
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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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산이름이 호두산(虎頭山)이었는데 견두산(犬頭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가 도맥을 이엇
다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이 지역에 호환이 많은 것을 보고 산 이름을 바꾸고, 지명도 호음실(虎音室)
에서 호실(好室)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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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몽심재 앞에는 얕은 언덕이 있는데 호랑이(개)의 꼬리에 해당하고 봉긋하고 솟아오른 모양이
아미(蛾眉) 즉, 여인의 눈썹과 닮아 여자 후손에게 복이 많을 형상이라 한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 마을은 집안마다 여자들이 훌륭한 분이 많다는 마을의 자랑거리 이기도 하다. 뭐~ 자식들을 잘 길
러냈다는 뜻으로 받아 들이면 될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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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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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위에는 '夢心齋(몽심재)' 현판이 걸려 있고 좌우 기둥에는 대련(對聯)이 걸려 있는데, 이는 죽산박씨의 조상인 고려시대의 충신 송암 박문수(朴門壽)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 시(隔洞柳眼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에서 몽(夢)자와 심(心)자를 따서 가옥을 세운뒤에 당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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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구조는 ‘ㄷ’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단을 낮추어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으며, 서쪽 중문채에
고방과 광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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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서 소나무가 심어져 아미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는데 곧 소나무를 베어낼 것이라고 한다. 또한
몽심재로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여기에 지기(地氣)가 뭉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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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앞에는 감나무가 있는데 땅과 닿는 부분이 울퉁불퉁하여 이를 본 기 수련자가 바위의 기가 나무
에 흘러가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호족시(虎足柿)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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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는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소박하게 치장한 사대부가의 검소함이 묻어나는 한옥이다. 정와(靖
窩)는 몽심재 3대 주인인 박해창(朴海昌)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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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는 고려말 우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조선이 건국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 충정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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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심재는 집 안에 정원을 들인 몇 안 되는 한옥으로 도가의 기풍이 서린 곳이다. 이곳에서 하룻밤 자면서 한옥의 정취를
느껴보는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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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수지면 내호곡2길 19
(지번) 수지면 호곡리 796-3
문의:063-631-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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