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국교는 유교(儒敎)란게 공식적 정론입니다.
명나라의 국교도 유교(儒敎)란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청나라가 활약한 내,외몽골과 카자흐스탄 대부분엔 유교사원이라곤 보기 드물고...라마교와 이슬람교 사원 뿐입니다...?
명나라가 활약했단 중원 동부든 서부든...유교사원보단 불교사원이 훨 많습니다...?
명나라는 승유억불 정책을 한 조선과 똑같은 정책을 핀 나라요...
청나라도 공식적으론 유교가 국교라 하는데...
통상적인 유물 유적들은...전부 불교&라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이 월등하고...
타타르 청나라 지역인 중앙아는 이슬람교 유적 외에 ...우리가 아는 조선식 유교의 흔적이 전무한 이윤 뭘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청나라의 유교는...이슬람이다.
현재의 아랍식 이슬람이 아닌...러시아 체첸공화국식이면서...동양화됀 이슬람이다.
명나라의 유교도...넓게 보면 이슬람이다.
현재의 아랍식 이슬람이 아닌...
다분히 티벳과 중앙아&동유럽에 유행하던 마니교의 또다른 한 분파가 명나라식 이슬람이자 명나라 유교라 예상합니다.
칭기스칸의 원나라는...
공식적으로 불교 도교 이슬람교를 삼대 종교로 채택해 세계제국의 모든 종교를 포용했습니다.
문젠 젤 중요한 중원의 유교를 포용하지 않은 겁니다...?
중원인들에 대한 역사적 불쾌감 땜에그랬다 하기엔...
통치 수단으로서 모든 종교를 제국내에 포용한 징기스칸 제국의 포부치곤 쪼잔해 뵈는 대목인데...
전 그렇지 않다 보입니다.
징기스칸제국이 이슬람이라 한 건...중원의 유교도 포함됀 정의라 보이기 때문입니다.
징기스칸의 제국때엔...
이슬람을 청교(淸敎)...진교(眞敎)라 했답니다.
청나라와 여진의 명칭도 결국 이 이슬람과 무관치 않단 유추도 가능하게 됍니다.
명교(明敎)도 한 번 찾아 봤습니다.
명교는 라마교"이자...마니교라 하더군여...
문제는 구한말과 일제 전후기 까지도...한국의 유교단체를 명교(明敎)란 문구를 넣어 불렀단 겁니다.
그럼 큰 틀에서 보자면...
청나라의 유교는...청교(淸敎)라 불리운 서북방 거란이나 타타르족식 이슬람이란 것이고...
명나라의 유교는...마니교 전통이 많이 보존됀 티벳과 인도북부식 이슬람이란 해석을 전 해 봅니다.
이슬람의 기원이 모하메드라 하나...
그 이전엔 아랍에 마니란 성자에서 유래한 마니교가 있었고...
그 마니교 이전 불(火&태양)를 모시는 조로아스터교...즉,배화교를 불(佛)교..브라만교라 했음의 정황도 보입니다.
마니교의 성자 마니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배화교는 성행했었으니...마니교는 배화교의 한 분파이자...불교의 또다른 아류라 분류해 봅니다.
그럼 이런 가정이 성립됄 수도 있습니다.
동양의 모든 종교는 서방에서 들어왔고...고로 동양문명의 시원은 서양이고...고로, 중원은 서양이다.
얼 핏 그럴듯 해 보입니다.
그리고 요기까지가 단편적 지식입니다.
하나...
티벳의 마니교 기원은 인도나 아랍을 통해 들어온건 맞으나...
티벳엔 본교(本敎)란게 원래 있었답니다.
본교(本敎)와 마니교의 합체가 라마교(로마교?)의 대략적인 개념이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티벳과 신장성을 포함한 곤륜산 일대가...현재의 세계 3대 종교의 시원이라 봅니다.
마고할머니가 서황모요...
황제의 애인였던 서황모가 마니(마고할머니)라 예상됍니다.
환웅과 이 윗 분 환인은 동북방의 하늘님(하나님)...알라,엘,엘로힘,알 아브(아랍)...
불교의 마니(어마니=성자)와 관세음 보살님이 마고할미요 서황모이자...서방의 성모마리아 역할...
중원 서쪽 곤륜산과 타클라마칸 일대...
타클라마칸 사막은 상고대엔 곤륜산일대와 알타이산을 휘감던 거대 내륙해였을 것이고...지상의 낙원였을 것이다고 봅니다.
이 지역에 마고(곰)으로도 불리운 여신문명에...
동북방 알타이 동쪽 고비사막의 천해일대 환국의 환웅과 황제가 내려와 혼합문명이 됀것...
그 중 황제가 내려온 곤륜산 일대와 화산일대가...
하(夏)족들의 서황모전설...
환웅이 내려온 알타이 일대가
아사달(현재의 카자흐 아스타나?)일대의 단군조선 전설...
이게 아닐지 싶고...
서황모의 마니산 (곤륜산?)일대 본교(本敎)가...서진하여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이자 불교,마니교로 발전...
환웅의 아사달 일대 단군신앙이...서진하여...하나님(알라,엘로힘)을 믿는 도교(道敎=그리스도교?)와 초기 이슬람교가 돼지 않았나 보입니다.
당나라 불교스님 현장(삼장법사)이...서역으로 경전을 구하러 갔단 건...
원래의 불교 경전을 가지러 갔다기 보단...북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의 원조 그리스도교(배화교?) 경전을 가지러 갔던 것이라 보입니다.
알타이 인근에서 분파됀 스키타이족인 수,당나라의 서방 신대륙 것점이자 고향이 이집트 지역이기도 하겠고여...
불타(석가모니)의 머릿카락이 새똥 앉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글빠글한 꼽슬머리임도...
석가모니의 모습으로 인식한 수,당나라 자기들 본향인들이자 성인들의 대부분 모습이...북아프리카 흑인들의 곱슬머리였기 때문이라 보이며...
그러기에 여기서 유래한 불교나 도교의 두발이...
현재의 아프리카인들 같은 빡빡머리(삭발)일 수 밖엔 없었던 이치라 저는 예상합니다.
카톨릭 사제들이나 이슬람인들도 삭발풍습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같기도 합니다.
삭발하지 않으면...머릿칼이 두피를 파고드는게 그 인종들의 취약점이기도 했으니여...
청교(淸敎)...즉,이슬람(무슬림)들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들의 종교도...그 지역의 원래 종교인 배화교나 마니교를 벗어날수 없으니...
이슬람이든 기독교든...그 조상이 비슷한 것인데...그 복식과 제례의식은 다분히 차이가 많음도 사실인 이유는 이거라 보입니다.
이슬람의 대표격인 이란의 인종 유래가 그렇듯...
이들의 조상은 동북방에서 온 아리안 들이기 때문입니다...알타이와 알알해 족속들이란 것이져...
조선 역사가 말한 거란(카라한=카라키타이)과 달단(타타르)족들이 그들 지배층과 이슬람의 시원인 겁니다.
거란족 요나라 황가가 현재의 아랍인들 종교인 이슬람에 새롭게 귀의한게 아니고...
원래 거란족들이 아랍에 전한 청교(淸敎)의 한 파벌인 이슬람교의 한 파벌에 귀의했단게 정확한 분류일 겁니다.
역사가 말한 흉로의 특징 중 하나가...가부좌(양반다리)입니다.
이슬람과 인도&티벳과 한반도식 불교...한반도의 유교가 그렇습니다.
파만 다르지...원 가지는 하나란 제 예상인 겁니다.
이슬람을 원나라가..파사국교(페르샤교,비류백제교)라 하질 않고... 청교(淸敎)이자....진교(眞敎)라 했다면...
이는 얼핏만 봐도...원조 이슬람교는 여진족(대진국=발해)들의 종교란 말이 됍니다.
유교(儒敎)의 유(儒)자도..현재까지 선비란 뜻이 가장 보편적인 해석인데...
이는...북방족인 선비족(鮮卑)족관 그 한자 표기만 다른것이라 전 해석합니다.
공자의 그 원조 동이족식 유교 말고...
주자학식 유교가 중원에서 본격적으로 채택돼는 싯점도...고려말기 명나라 개국 전부터입니다.
이미 그 이전 거란족들이 서북에서 드리 밀고 올 때는 이 북방식 유교인 이슬람이 배격시 됐지만...
원제국이 형성돼고...
그 분파인 차가타이 한국...그를 승계한 무굴제국이 이 거란족들 영역이다 보니...
몽골제국 통치영역내의 무굴(明?)의 세력확장과 함께 이슬람은 고려나 중원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게 유교 중 주자학등의 고려&중원 유입과 때가 같단것도 같은 맥락으로 전 해석합니다.
중세 동국 조선의 유교는...
원조 선비족들의 공자식 유교에...무굴에서 유입됀 이슬람식 유교가 혼합됀 형태고...
그게 주자학이라 명명돼지 않았나 저는 예상합니다.
주자학자들의 복장도...현 아랍관 다르다 하여도...
현 아랍 지배족들의 기원인 알타이 인(아리안)들인 거란족들의 도령(都領)복장들임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지금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사막은...
고대엔 천해(天海)로 불리운 지상의 낙원였을 것이고...
그 일대를 중심으로 아시아 동부 전체를 통치하던 태양(광명)을 숭배하던 환국문명이...
서북방 고산지대인 알타이에 깃틀을 튼게 단군조선...
단군(탱그리)을 하느님으로 모시던 흉로&선비족들이 서남방에 전한게 이슬람과 도교...
서북방에 전한게 북유럽 바이킹들의 "딘"교...
환웅족의 황제가 곤륜산일대에 본교(本敎=원불교)를 전하고...
그 하(夏)족들이 서남방에 전한게 조르아스터교 브라만교...헤브라이즘...이게 발전한게 마니교이자 도교와 융합됀 석가모기시대의 불교...
이 서방족들이 원시 반본해 수당(서남 스키타이)의 번성과 때를 같이해 중원에 진입하는 시기가...
서방식 불교(석가모니불교)로 추정돼는 북아프리카의 도교(道敎)와... 인도식 불교인 마니교의 중원 유입...
알타이 인근의 아리안(흉로&선비족)들이 서남방에 새롭게 전한게...현재의 이슬람관 많이 다른 초기 이슬람이자 북방식 유교...
이게 원시 반본해 중원에 유입돼는게...차가타이한국을 이은 무굴리스탄(明)의 패권확장과 때를 같이했던 주자학식 유교...
고로, 현재의 한반도 유교는...
원조 동북방식 선비족들 유교와...서북방식 거란족들이 서남아를 통해 확장시킨 초기 이슬람으로 보이는 주자학의 혼형이다.
근세에는...
서남아에서 들어온 대한뎨국 유민들에 의해...유대교식 이론도 상당히 가미됀게 현재의 한반도 유교라 저는 예상해 봅니다.
서역의 배화교와 마니교에서...현재의 불교와 기독교와 이슬람... 이 탄생하는 것인데...
그 배화교나 마니교는...결국 동북아 환국문명의 원불교인 본교(本敎)와 무교(巫敎)에서 유래했기에...
역시 문명과 역사는 동방에서 기원했다 보는게 맞다 전 주장합니다.
각 지역과 시대마다...그 무늬만 다른 것이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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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안순환(安淳煥)이 설립한 명교학원(明敎學院: 조선유학회 또는 조선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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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黃山) 광명정(光明頂)
의천도룡기에서 장무기가 교주로 있는 명교(明敎)는 무협소설이 내포하는 동양적인 정서를 공유하며 수용하는 국내독자의 입장임에도 중국역사의 세밀한 부분까지 알지 못하는 상황인 한에는 생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독자들에게도 김용선생이 1970년에 연재한 의천도룡기에서 주인공 장무기의 문파로 소개되기 전에는 중국내에서도 소수의 역사연구자 이외에는 역사속으로 사라진 명교라는 민간종교에 대해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던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무래도 닉을 无忌로 쓰는 입장이고 보면, 교주된 입장에서(?) 명교를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 역사전공은 아니지만 대강 어설프게나마 살펴볼까합니다.^^
명교(明敎)의 기원
명교(明敎)가 발생한 곳은 파사국(波斯國)인데 원명은 마니교(摩尼敎)다. 당나라 무측천(武則天) 황후때 우리 중국에 들어왔는데, 불다탄(拂多誕)이라는 파사국인이 명교의 삼종경을 갖고 당나라에 들어와 중국인들이 그때부터 명교의 경전을 처음 보게 됐다. 당대력(唐大曆)때 가서야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라는 명교 사원을 건축하였다. 그뒤로 태원(太原), 형주(荊州), 양주(揚州), 홍주(洪州), 월주(越州)에도 사원이 생겨났다.
회창 삼년(會昌三年)에서부터 명교 교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명교의 교세는 크게 기울어지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명교는 금교로 낙인찍히고 비밀교로 인식됐다.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항상 관아의 말살정책에 시달려 온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행동이 자연 괴이하고 비밀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마니교(摩尼敎)의 마(摩)자를 마(魔)자로 오해하고 세상사람들은 마교(魔敎)로 부르게 된 것이다. |
양소가 장무기에게 전해주는 <명교유전중토기(明敎流轉中土記)>부분입니다.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는 예언자 마니(Mani 210~276)가 창시한 종교지요. 마니는 지금의 아라크의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40km떨어진 파르티아 왕조(B.C.247~A.D. 224)와 사산왕조(224~652)의 수도 크테시폰(Ctesiphon)에서 태어납니다. 그는 어려서 다리도 조금 절었던 모양인데, 내성적이면서 예술적으로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로 금욕적인 유태인 수행집단과 어린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12세와 24세때에는 신의 마지막 계시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는 환영을 접하기도 하며, 20대에 금욕과 채식등 엄격한 자기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게 된것 같습니다. 26세에 진리의 전도자로서 여행을 떠나는데, 첫번째 행선지는 인도였던지, 쿠산왕조가 지배하는 인도 북서부에서 불교문화를 접하게 되고, 이후의 그의 사상의 근저에서 불교적 영향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40세까지의 오랜 여행후에는 페르시아 사산왕조 Shapur 1세(241~272)의 후원을 받았지만 당시 페르시아제국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에 도전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Bahram 1세(274~277)때 투옥되어 276년 예수처럼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습니다.
마니의 가르침, 마니교(摩尼敎. Manichaeism)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Mazdaism)와 기독교, 영지주의(Gnosticism)의 전통, 그리고 불교등 제반 종교적 영향등을 융합하고, 이들의 부분적인 진리들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보편적인 종교색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핵심적인 교의는 B.C 600년 경 이란의 짜라투스트라(Zarathushtra)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이원론적인 세계관입니다. 세계는 빛과 광명의 神으로 대표되는 善과 탐욕과 시기심에 이끌리는 어둠으로 대별되는 惡의 대결장이라는 것이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는 애초에 부정되고, 빛과 어둠은 태초로 부터 동등하게 공존해왔으며, 인생의 의미도 이러한 세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물질로 혼합되어 무지와 자의식의 부족으로 가려졌던 진정한 자아를 자신에 내재되어 있는 탐욕과 시기심과의 그 우주적인 전투에 대한 통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은 현상태가 부패한 것이어서, 세상은 인간의 행동으로 개혁할 대상이라는 윤리적인 태도와 진보적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그 과정속에서 엄격한 금욕과 육체혐오가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결한 가운데 빛이 굴레를 벗어나 그 근원과 진정한 존재로 돌아간다는 마니의 가르침은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화된 로마로, 혹은 동방으로 전파되었으며,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는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기 전 9년동안 마니교도이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마니는 신의 마지막 계시를 받은 예언자로 자처하며, 기독교의 영지주의적 교파들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 이슬람과도 경쟁관게에 있다가 이제는 세부적인 흔적마저도 확인할 수없게 사라져버렸습니다.
마니교(Manichaeism)의 중국전래
실크로드를 통해 중계무역을 하던 소그드(Sogd)인 등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 처음으로 마니교가 전래된 것은 김용선생의 원문에도 나오듯이 694년(唐武后延載元年 측천무후가 즉위하여 국호를 周로 바꾸고 4년 후)이겠습니다. 이 부분은 김용선생이 1269년 천태종의 학승 지반(志磐)스님의 중국불교사 저술인『불조통기(佛祖統記)』의 기사를 많이 인용하신 것 같고, 불조통기에는 페르시아인 불다탄(拂多誕)이『이종경(二宗經)』을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비해 김용선생의 원문의『삼종경(三宗經)』은 착오인것 같기도...^^『이종경(二宗經)』은 마니교의 이원론적 우주관에 대한 교리(二宗)에 관한 경전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장부(莊釜)의『사주문록(沙州文錄)』에는 북주(北周 558~581)때나 수나라(隋 581~618)때 중국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585년에 수(隋) 문제(文帝)가 대운경사(大雲經寺. 光明寺)를 창건케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 마니교의 중국전래는 좀더 시기를 앞당길 수는 있겠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마니교뿐아니라 조로아스트교(祅敎 Mazdaism), 경교(景敎 Nestorianism)의 삼이교(三夷敎)라고 불리는 외래종교들이 번성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719년에는 마니교 천문학자가 중국에 들어와서 중국천문학에 영향을 주는 등, 이들 마니교도들은 주로 서역문화의 중개자로 서역의 문물을 중국각지에 전파하는 역활을 수행합니다. 이들은 당 이후 역서(曆書)의 전래라든가, 도서의 장정을 화려하게 꾸미는 중국의 서적형식에는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마니교는 윤회전생(輪廻轉生)등 불교의 교리와 유사한 측면이 많아서 당 현종(玄宗)때 펴낸 마니교총서 성격인『마니광불교법의략(摩尼光佛敎法儀略)』의 경우는 기본적인 불교지식이 없이 읽는다면 불교와 혼동이 생길 정도이며. 최초로 중국문헌에 마니교가 등장하는 당 현종(玄宗)때인 732년 칙령에는 마니교가 불교의 이름을 편취한 사악한 교리라며 비난하여 중국인의 신봉을 금지되었고, 주로 위구르인등 외국인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됩니다. 하지만 마니교의 교세는 꺽이지 않았고, 762년 12월 위구르의 군대는 낙양을 공격해서 약탈하다 철수하면서 마니교도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때 위구르의 카칸(牟羽 可汗)은 마니교로 개종하고 국교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당나라로서는 안록산(安祿山)의 난(755~763)의 급박한 상황에서 위구르군대의 도움을 얻어 난을 평정하는데, 그때부터 마니교도들의 역활이 인정되어 각지에 마니교가 번창하게도 되지요. 실크로드의 투루판(吐魯蕃), 베제크릭(Bezeklik) 천불동일대 그리고『백마소서풍』의 배경이 되는 가오창(高昌)일대에서 19세기말 서구의 탐험가들이 발견한 수많은 마니교관련 문건들은 당시 마니교의 교세를 짐작케 합니다. 그래서 위구르의 요청으로 당 대종(代宗 762~779)때인 768년 6월29일에는 장안에 대운광명사(大雲光明寺)가 건립되고, 이후 지방에도 많은 마니교사찰이 건립됩니다.
그런데 당 무종(武宗 841~846)때인 843년(會昌三年)에 이르러서는 전국의 마니교사찰이 폐쇄됩니다. 마니교의 여성교직자 72명이 처형되었으며, 위구르출신 마니교도들은 추방되거나 마니교성직자들을 삭발시켜서 불교의 잿빛 승복을 입게하는 등의 극심한 마니교말살 정책으로 중국내 마니교는 일대 타격을 입게되죠. 흔히, 당 무종(武宗)의 종교탄압을 불교에서는 <회창법난(會昌法難)>이라고 하는데, 마니교뿐아니라 도교(道敎)를 제외하고는 불교등 모든 종교들이 탄압의 대상이 됩니다.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한 당나라는 도교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이지요. 그것은 노자(老子)의 이름이 이이(李耳)라서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데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종교탄압은 당시 몰락해가는 당나라의 국운을 정비하고자 비대하는 종교사원에 대한 정비를 통한 도덕적 타락을 막기위한 종교개혁이 절실했던 측면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당시 임제종(臨濟宗)등 자급자족적인 기풍을 보유하던 선종계열의 불교는 탄압에서 피해를 입지않고 살아남게 되지요. 마니교의 경우는 주로 위구르지역의 중심으로 발전해왔고, 중국내 마니교사원도 위구르의 요청으로 이루어졌었는데, 위구르가 840년 키르키즈의 공격으로 궤멸당하자 중국인 신도도 있었겠지만, 주로 중국내 체류중이던 위구르인을 중심이던 중국내의 마니교의 위상이 타격을 받는 가운데 무종연간의 종교탄압으로 치명상을 입게됩니다. 이 탄압으로 중국내 마니교도들은 지하로 잠적하게되고, 서방의 마니교본산이나 다른 지역의 마니교도들과의 접촉할 기회를 실질적으로 잃게 된것 같습니다.
조로아스터교(Mazdaism)가 6세기 위진남북조 시기에 중국으로 전래되어 拜火敎, 火敎, 祅敎, 波斯敎등의 명칭으로 불리는 것처럼, 마니교(Manichaeism)도 末尼敎, 牟尼敎, 明敎라고도 쓰입니다. 참고로, 1991년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락그룹 Queen의 보컬 Freddie Mercury가 파시교의 신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죠. 장례식도 파시교의 의례에 따라 치뤄졌고... 파시교(Parsi)는 조로아스터교가 인도로 이전해서 형성한 분파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에 구마지(鳩摩智)의 티벳불교 역경사업에서 티벳불교의 초전(初傳)과 후전(後傳)사이의 간극이 티벳 토속종교인 본교(Bon)의 불교탄압으로 인한 것이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본교(Bon)의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마니교라는 연구도 있다고 합니다.
당 무종(武宗)연간의 탄압이후로 마니교도들은 중국내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다양한 습속을 흡수하면서 중국적인 외형으로 변모해나갑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외관상으로는 불교의 절과 같은 양식으로 사원을 건축합니다. 이런 과정속에서 마니교는 명교라는 명칭으로도 쓰이게 된 것이겠죠. 언제부터 명교(明敎)라고 쓰게되었는지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위구르지역에서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기록을 포함해서 당시의 위구르지역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에 814년 건립된 구성회골가한비(九姓回鶻可汗碑)가 있습니다. 어쩌면 마니교의 교의상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이 비문에 마니교를 명교(明敎)라고 쓰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교(明敎)라면 '밝은(明) 가르침(敎)'의 의미이기도 해서, 유교에서도 쓰이기는 합니다.^^)
應有刻畵魔形, 悉令焚爇, 祈神拜鬼, 幷擯斥而受明敎. 마땅히 마귀의 형상을 새기고 그린 것들은 모두 불지르게하고, 신을 기원하며 귀신을 숭배해온 모든 것을 배척하고 나서, 명교를 받아들여라.
마니교(명교)관련 문건은 모두 사라지고 단편적으로만 남겨져 있었는데, 실크로드상의 둔황이나 베제크릭의 천불동일대에서 마니교경전이 발견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당 현종때 펴낸『마니광불교법의략(摩尼光佛敎法儀略)』등이 북경의 북경도서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파리의 국민도서관에 나뉘어 보관된 것이 발견되면서 명교의 교의나 제도를 어느 정도는 밝힐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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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족 이슬람의 기원과 발전
중국내지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시기는 일반적으로 당(唐) 영휘(永徽) 2년(651년)으로 보고 있다.
중국 회족의 기원과 발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7세기 중엽 중국의 광쩌우(廣州), 항쩌우(杭州), 취엔쩌우(泉州) 등 연해 지역에 상업을 위해 온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들이 정기적으로 거주하면서 번성케 되었다. 이들을 원래 '번객(藩客)'이라고 불렀다. 번객이란 것은 僑民이 되어 중국 국적의 무슬림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두 번째 단계는 13세기 초 몽고의 징기스칸의 서정(西征)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의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과 돌궐어를 하는 각 민족이 노예 혹은 상업적 이유로 또한 전란을 피해 중국에 들어왔다. 이들을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렀다. 이들 역시 이슬람교 신봉자들. 이들이 7세기 중엽 이후부터 중국 내륙에 살고 있던 원래의 무슬림들과 융합하였을 뿐 아니라, 한족, 몽고족 등과 결혼하여 이들을 개종시키기 사작했다. 당시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교가 회회인의 사회 발전과 민족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후에 회족이란 민족공동체 이룩하게 된다. 원대(元代)에 이슬람교는 비로소 불교, 도교와 나란히 "청교(淸敎)" 혹은 "진교(眞敎)"라고 종교의 대열에 들게 되었다.
명청(明淸)시기의 회족은 이슬람교의 경전연구와 저작, 학술활동 등을 통해 중국 이슬람의 이론을 체계화, 계승화 시켜 나갔다. 당시 이슬람 학자들중 아라비아어에도 능통하며, 유교, 불교, 도교 학설에 능(能)한 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중국 전통문화와 이슬람교를 결합시켜 중국 이슬람교의 철학 사상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유교로 코란 및 경전을 해석하는(以儒詮經)"방식을 채택하여, 이슬람교를 중국화 하였다.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에 회족, 싸라족, 빠오안족등 이슬람이 모여사는 깐수, 닝샤, 칭하이 등 지역에 이슬람 수피주의 사상이 전래되었다.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에는 깐쑤의 마완푸(馬萬福)등 아홍이 "이슬람 경전을 중요시하고 세속을 개혁하자", "이슬람 경전대로 종교생활을 하자"는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와하비즘(Wahabism)을 주장하여, 서북의 깐쑤, 칭하이, 닝샤 지역에 이허와니파(伊赫瓦尼派)를 창립하였다. 이 파는 후에 허난(河南), 산 똥(山東), 허뻬이(河北) 및 신쟝 등에 전파되었다. 이로서 중국 이슬람교는 명말청초(明末淸初) 이후 수 피학파의 영향을 받아오다가 두 번째로 교파의 분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1949년 공산화 전까지 중국 이슬람교는 꺼띠무(格迪目), 수피주의〔후피예(虎非耶), 지아디린예(林耶), 저허린예(哲赫林耶), 쿠 뿌린예(庫布林耶)등 포함〕, 시따오탕(西道堂), 이허와니파(伊赫瓦尼派), 사래피예파(賽萊菲耶派), 이싼파(依禪派) 등 6개 분파로 나뉘어 있었다. 현재 중국 이슬람 대부분은 수니파에 속하는 하나피파를 신봉 하고 있다.
19세기 청대에 이르면 회족 이슬람은 그 문화와 풍습 등에서 한족과 확연히 구분되는 민족집단을 구성하면서, 발전해오다가 청조의 쇠퇴로 인해 반청(反淸) 분위기가 일어 회족사이에서 무슬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은 윈난성(雲南省) 남서부에서 두원시우(杜文秀)가 폭동을 일으켜 이슬람 독립국으로 핑난(Pingnan)국을 선포하고, 자기가 술탄 술레이만(Sultan Suleiman)으로서 1856-1873년까지 통치를 한 경우이다.
중화민국(中華民國)시기에 오면 쑨원(孫文)은 이슬람의 중국내에서의 소외문제와 이들을 통합,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오대민족협력'을 추진, 제창하면서 중국에서 한족, 만주족, 몽고 족, 티벳족, 회족의 다섯 민족을 중시하였다. 쑨원은 중국민족이란 통합적인 개념과 목표로 오대 민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다.
2. 신쟝의 이슬람교 정착과 발전
신쟝에 이슬람교의 정착과 발전된 상황은 회족과는 다르다. 신쟝에는 10세기 초에 아랍제국이 동진하면서 이슬람교가 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전까지는 3세기서부터 흥왕하기 시작한 불교가 9세기까지 전반적으로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 중엽 카라칸조(940-1211)의 3대 카칸인 술탄 부그라칸이 신쟝에서는 처음으로 무슬림이 되면서 커라칸조의 수도인 카슈카르가 이슬람교 전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이 지역을 중심으로 신쟝지역에 처음으로 투르크족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커라칸조의 이슬람 전파노력으로 960년에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20만 돌궐인(투르크족)들 이 일시에 무슬림이 되었다. 그 후, 이슬람을 신봉하지 않던 위티엔(于田)왕국에 대해서는 지하드(聖戰)을 발동하여, 40여 년간의 전쟁 끝에 1006년에 위티엔 이씨(李氏)왕조를 정복하고, 이 지역을 이슬람교 의 기지로 만들었다. 위티엔 왕조가 정복당하면서, 남강(南疆)지역이 점차 이슬람화 되었다.
14세기 1352년에는 몽고 차카타이칸국의 카칸이 투헤이루티무얼(투르크 티무얼)이 몽고의 왕으로는 최초로 무슬림이 되어 신쟝의 전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이후 이슬람교는 악수, 쿠치, 엔치, 일리 지역 까지 전파되었다. 15세기 초에는 투르판 지역에, 15세기 말 16세기 초에는 하미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결국 이 시기에 신쟝의 전 지역이 기본적으로 이슬람교를 신봉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신쟝지역이 청의 건륭제(乾隆制)에 의해 청제국의 영역에 편입이 되었다. 당시 터키계의 이슬람교인들이 청조와 한인에 대한 민족 반감이 강했다. 1860년대 코칸도 왕국 출신의 야크부 베크가 이 지역의 독립을 시도했는데, 섬감총독(陝甘總督)인 (左宗棠)이 탈환할 때까지 십 수년간을 유지 하였다.
1884년 청조는 터키계 주민의 반란과 러시아의 이리 점령 등에 경계를 하여 이슬람교 지도자와 왕공에 의한 자치를 바꿔 신강성(新疆省)을 신설하여 순무(巡撫)와 이리 장군을 두고 직접 통치를 단행하였다.
이후 신강성은 몽골, 티벳과는 달리 천산(天山)남북의 오아시스에는 청조 관리와 군이 배치되어 정치, 경제 모두 터키계 민족을 지배하는 체제가 되었다. 이 당시 관료들이 특권을 이용하여 위구르, 카자흐 인의 재산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여 불만이 쌓여갔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신쟝성의 통치가 지속되었는데, 성장은 양쩡신(楊增新)이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1918년 카자흐스탄의 소비에트 정부와 난민문제 및 무역에 관해서 교섭하면서 러시아 영사들이 신쟝에서 백위군(白衛軍)을 조직하는 것을 방관하다가 후에 암살이 되었다. 이후 찐쑤런(金樹仁)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당시 정치 부패, 과중한 세금과 억압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다. 결국 1931년 신쟝성 내에서 하미의 코쟈 니아크를 지도자로 하는 위구르 민족이 궐기를 일으키고, 회족의 수령 마중잉(馬仲英)의 참전이 계기가 되어 전란이 일어났다. 당시 찐쑤런 정권의 참모장이던 청쓰차이(成世才)가 수도 우루무치에서 권력을 잡았는데, 청쓰차이는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소련에 접근하여, 민족평등, 반제, 친소, 청렴한 행정 등 진보적인 정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편 천산의 남쪽 타림분지의 오아시스에서는 한인정권의 폭압에 반대해서 위구르인인 마스도사부리, 모하메드 이민 등을 지도자로 하여 반한, 반회(反回)의 위구르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3년 말 무렵에는 이슬람주의의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의 성립을 선언(수도는 카슈카르)하여서 1934년까지 지속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내분과 함께 군사적 약세로 마중잉의 습격에 6개월 만에 무너지고, 마중잉도 소련의 원조를 배경으로 한 청쓰차이군에게 격파되었다. 1934년 청쓰차이가 신강제압에 성공을 하고 이 지역을 다스리다가 다시 1944년 두 번째 분리독립운동 시도로 이리 지역에 위구르동투르키스탄공화국을 건립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Ⅲ. 공산화 이후의 중국 이슬람 상황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때부터 1978년 11기 3중전회 이전인 개혁 개방이전시기까지의 중국 이슬람의 상황과 개혁개방후 현재까지의 중국 이슬람교와 이슬람교인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처럼 굳이 회족 이슬람과 신쟝지역 이슬람으로 구분하여 다루지 않는 것은 중국이 공산화 된 이후 공산당의 통치와 그 통치의 영향이 내지나 신쟝소수민족 지역이나를 막론하고 절대적이고 강력하게 집행되었기 때문이다.
1. 공산화 이후 개혁개방 전까지의 중국 이슬람
중국 공산당, 1930년 전중국소비에트 의회에서, 통일전선을 시도하였다. (국민당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이때 중국 공산당은 연방제를 선언하였는데, 이때 선언이 1949년 공산당 승리후 초안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을 공산화한 후에 중국 공산당은 무슬림이 우세한 지역을 자치구화 하면서 연방제를 포기하였다. 즉 신쟝위구르자치구(1955년), 영하회족자치구(1958년)등이다. 공산당은 자치구내에서 소수민족의 종교를 보존, 보호한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인민해방군과 한족을 대대적으로 이주, 재배치하는 작업을 전개하여 분리독립움직임을 제지하고 민족의 잡거(雜居)를 통한 통일적인 통치를 진행하였다.
신중국이 소수민족의 종교, 언어, 습관을 유지하는 자유를 주었어도 1953년 인구센서스 조사에서 보면 많은 무슬림들이 자기 종교를 숨긴 사실을 알 수 있다(1938년 중화민국 정부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그 때 중국의 이슬람교인이 48,104,240명이라고 했는데,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번째 인구센서스 조사시에 7,827,475명으로 축소되었다).
한편 기독교의 삼자애국운동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중국 이슬람교에도 중국이슬람교협회가 1952년에 준비모임을 갖고, 1953년 5월 11일에 뻬이징(北京)에서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중국이슬람교협회는 74명으로 구성된 제1기전국대표회의를 갖고, 상무위원을 선출하였으며, 협회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때 기독교로 말하면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주석과 기독교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띵꽝쉰(丁光訓) 주교같은 인물인, 중국이슬람교협회장에 빠오얼한 싸시띠(包爾漢 沙希迪)가 선출되었다. 중국이슬람교협회는 중국공산당인민정부와 이슬람간의 교량 역할을 하는 단체로, 애국애교하며, 정부의 종교신앙자유정책을 관철하는 기관이다. 이 단체에서는 코란을 인쇄하고, ≪中國穆斯林≫잡지를 발행하며, 중국이슬람학교를 운영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이 단체 역시 기독교 단체와 마찬가지고 문화대혁명 10년 기간동안에 폐쇄되었다가, 1979년에 그 활동을 회복하였다.
또한 문자(文字)정책에 있어서도 아라비아알파벳을 대체하고 들어섰던 씨릴 알파벳이 라틴 알파벳화 즉 한어병음화되면서, 이런 변화로 인해 터키사람들의 이슬람적인 유전을 제거했다. 1963년에 정부는 하지를 금지시키고 무슬림들이 전세계 이슬람교인을 결집시키려는 이상인 움마공동체와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중국 독자적인 이슬람의 발전을 꾀하였다.
문화대혁명(1966년-1976년)은 중국의 무슬림들로 하여금 소련이나 중앙아시아로 평화와 자유를 위해 나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홍위병들의 파괴행위가 대단히 심각했는데, 이들은 이슬람의 폐지를 위해 혁명학습조를 형성 운영하였을 뿐 아니라, 무슬림이 한족과 결혼하는 것 자체를 금하였다. 모든 모스크들은 폐쇄가 되었고, 아홍(이맘)을 개조대상으로 노동개조현장으로 추방하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코란을 읽는 것조차 금하였으며, 할례를 금지하였다. 또한 무슬림들의 공휴일과 절기를 취소했으며, 모든 이슬람 조직을 해산하였다. 홍위병들은 이슬람의 전통적인 화장대신 매장으로 대체하는 등 문화 풍속까지 다 파괴하였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뚱이 사망하였고, 10월에는 4인방이 체포되어 문혁시대가 종결되었다. 이후 1978년 떵쌰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정책이 추진되면서 후야오빵(胡耀邦))이 1980년 중국 소수민족에 대한 신뢰 회복과 문혁재난으로부터 회복을 주장하면서, 다시 통전적인 소수민족 종교에 대한 관용의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언제 돌아오셨나요? 알바 근무는 어디서 하시고요??
"자료와 논리"로는... 뭐... 상대가 안되는군요... 할말이 없으시니까... 중국집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하하)
"明敎"가 명(明)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淸敎"가 청(淸)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슬람교를 "모스크"(Mosque) 곧 "淸眞寺"의 "淸"에서 유래하여 "淸敎"라고, 또는 "淸眞寺"의 "眞"에서 유래하여 "眞敎"라고 불렀습니다.
명(明)나라가 있기도 전에, "明敎"라고 불렸습니다.
홍진영 선생님이 위 본문에 직접 인용하신 자료 말이죠...
서기 814년 건립된 "구성회골가한비"(九姓回鶻可汗碑)에 나오지요... 분명히...
"應有刻畵魔形, 悉令焚爇, 祈神拜鬼, 幷擯斥而受明敎"
"明"과 "淸"이라는 글자에는 참으로 좋은 뜻이 있는데...
"九姓"... 이거... 매우 중요한 낱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