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차례 올린 이후 잠잠했던 나의 애창곡을 근 넉달 만에 다시 써봅니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선 지도 제법 됐는데, 그래도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96년 제7차 범민족대회가 열렸던 연세대와 서울 도심에서 수없이 불리워졌던 '통일선봉대 찬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통일선봉대찬가
우뚝 솟은 깃발을 보아라. 반도청년아
몰아치는 폭압을 뚫고서, 간다 내청춘
그 해 여름, 대회장인 연세대에 통일선봉대가 입성한 날 이후부터 경찰의 포위망이 강화됐습니다. 예년과 같이 본대 입성을 앞두고 간헐적인 교문투쟁이 계속됐으며, 그 와중에서 경찰은 터무니없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8월12일부터 14일까지 서울로 향하는 고속도로에는 한총련 학생들이 탄 고속버스와 전경차들의 행렬이 번갈아 이어졌습니다.
경찰의 원봉이 본격화된 14일 오전부터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습니다. 산을 타고 넘어가던 남총련 학생들이 매복한 전경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으며 홍대, 이대 등에 모여 연대 입성을 노리던 타 지역총련 학생들의 필사적인 진입시도 역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브란스 병원을 통해, 일부는 개별적으로, 어떤 때는 사수대 집단적으로 그렇게 연대의 대오는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점 부끄럼 없는 내 청춘이다.
이 한 목숨이다.
그 때부터 종합관의 침탈과 과학관 대오의 대탈출로 사태가 막을 내리기까지 약 열흘 가까운 시간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통일이라는 화두를 놓고 극심한 사상투쟁을 벌였습니다. 학생과 경찰간에 도심지 게릴라전이 진행되는 동안 사회에서는 이념적 전면적이 벌어졌던 것이죠. 지하철에서마저 시민들끼리 학생들을 놓고 대거리를 하다가 삿대질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전세는 비관적이었습니다. 극우세력의 목소리는 높았고, 진보진영의 반박이 먹히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50년대 미국의 매카시선풍이 이런 거였나 싶을 정도로 공안분위기로의 전환은 충격적이리만치 일사불란한 것이었습니다.
분위기 조성에 뒤이은 마녀사냥. 문민정권은 독재교과서의 기본정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한총련의 친북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많은 보도들이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운영자금 및 학생회비의 수납구조에 대한 '심층기획기사(?)'가 난무했습니다. 한때 독재타도를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까지 인정받던 학생운동이 '청산대상리스트 1위'에 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정권에게는 그 다음부턴 일도 아니었습니다. 연세대에서는 수천명이 검거돼 86년 건국대 애학투련 사건의 1천여명 기록을 단숨에 깨버리고 세계 기록까지 세웠습니다. 그같은 검거선풍은 사태종료 이후 그해 하반기까지 쉬임없이 계속됐습니다. 자주적 대중조직에 근거, 10년을 이어온 전대협, 그리고 한총련은 그렇게 사상 최대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이적단체판결 철회를 위한 지난한 여정이 남겨두고 말입니다.
자주, 민주와 통일의 한 길에서
투쟁 투쟁이다.
96년 한총련의 통일운동은 크게 네 가지 과제하에 수행됐습니다. 북미평화협정 체결, 연방제 합의확산,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였습니다. 한총련은 비타협적인 강경투쟁 기조를 갖고 있었으며, 이것은 일년 여 뒤 대통령선거에서 DJ를 이기기 위해서는 분위기 반전이 불가피했던 집권세력의 필요성과 맞물려 전대미문의 충돌을 낳았습니다.
이 사건을 한편에서는 '연대항쟁'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연대사태'라고 부릅니다. 명칭이야 어떠하건간에 이 사건은 곧잘 일본의 60년대를 풍미했던 '전공투'가 몰락한 계기가 된 '동경대 야스다 강당사태'에 비견되곤 합니다. 그러나 대중과 완전히 차단돼 극단적 테러조직으로 변질됐던 전공투와는 달리 한총련은 이전만은 못 합니다만, 어느 정도 조직력을 확보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념적 순결성에 의존한 일본학생운동에 비해 이념에다 분단, 외세에 대한 감성적 저항이 곁들여진 우리 학생운동의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는 아닐런지요?
기어이 우리 대에 가고야 만다.
조국의 신새벽을 열어 간다. 통일선봉대
2000년에도 어김없이 8월이 왔습니다. 학생들의 통일의지를 왜곡 과장하여 온 나라를 이념의 격전지로 만들어버린 지 불과 4년만에, 40년도 아니고 겨우 4년만에, 우리는 남북정상회담과 해빙무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소설이라면 벌써 '설득력이 없군'하며 내팽개쳤을 법한 이 극적인 반전 앞에서 저는 사무치게 혼란스럽습니다. 그 혼란을 풀 자그마한 단초라도 마련하고자, 저는 한양대에서 열릴 통일대축전에 굳이 가보려 합니다.
통일대축전에 가려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96년 연세대에서 수만의 경찰력과 반통일주의자들의 억압, 지식인들의 침묵에 둘러쌓여 꼬박 열흘 이상을 갇혀 있었던 이름 모를 수천의 학생들, 그들을 지탱해줬던 그 '시대정신'을 혹여 거기에서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그 희망이 현실이 된다면 신세대의 트랜디적 문화가 현재의 '시대정신'은 아닌지, 고민하면서 30대의 고루한 터널에 들어선 제게도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침몰하는 이상을 가진 30대 초반의 중늙은이가 아니라, 언제고 DMZ 철조망 사이로 우뚝 솟은 깃발처럼 그렇게 담대하게 일상의 질곡을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드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