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와 국립중앙박물관의 고달사지 석등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폐사지 중의 한 곳이 여주시 북내면의 고달사지다. 넓고도 너른 터전에 크고도 웅장한 석조유물들이 나그네를 맞는 곳, 국보 4호였던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7호인 원종대사 승탑, 8호인 석불대좌, 그리고 국입중앙박물관에 있는 쌍사자 석등까지 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폐사지가 여주의 고달사지다.
어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일제강점기에 옮겨져 온 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외롭게 서 있는 고달사지 석등을 바라보는 그 순간 자우림의 <영원히, 영원히>라는 노래가 가슴을 헤집고 떠올랐다.
라라라라라라
너의 손을 꼭 잡고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라라라라라라
사라지지마 흐려지지마
영원히 영원히 여기 있어 줘
......
사랑은 시들고
노래는 잊혀진다고
그렇게 사람들 말하곤 하지
언젠가 너도 시들어
기억에서 사라질까
내가 처음 이곳 고달사 터에 왔을 때는 꽃피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남녘의 산에서부터 피기 시작한 진달래가 북녘으로 활활 타올라 이곳 경기도 일대까지 올라오고 하동, 구례, 광양의 산천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며, 노오란 산수유 꽃들이 자지러질 무렵이었다. 상교리 마을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개울을 건너면서 나는 보았다. 우리가 건너는 다리가 절터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석재로 만든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웬 꽃 대궐 산수유 꽃밭이 노랗게 온 들판을 눈부시게 치장하고 있었으며 여기저기 눈에 띄는 불교 유물들, 나는 할 말을 잃고 여기저기를 찬찬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도(道)의 경지를 통달한다는 뜻을 지닌 고달사(高達寺)는 혜목산 아래에 있고 그 지형은 아늑하게 감싸인 것이 큰 소쿠리 속에 있는 듯하다.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누가 창건했으며 어느 때 폐사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추정하기로 이때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했던 시기였고 남한강의 유리한 수로를 확보하기 위해 거대한 사원을 경영했을 때였으므로 고달사를 신라시대 창건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종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은 맞지가 않고 원종대사(元宗大師) 이전에 나말여초기에 세력을 떨친 선종 계통의 절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달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중 봉림산파의 선찰이면서 고달선원으로 불리었는데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는 원감국사 현욱의 제자였고, 그는 원종대사에게 법통을 넘긴다.
김현준이 쓴「이야기 불교사」에 고달사 일대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문성왕 2년(840) 현욱선사는 거처를 여주 혜목산 고달사로 옮겼는데 사람들은 산 이름을 따와서 스님을 ‘혜목산 화상’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선풍을 떨치다가 경문왕 9년에 입적하자 경문왕은 원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달사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큰절의 위용을 갖추었고 사방 30리가 모두 절의 땅이었다는데, 이 절 고달사를 중흥시킨 사람은 원종대사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여주목불구조」에 “취암사와 상원사가 혜목산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고달사의 암자인 듯한 두절만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고달사터에 들어서서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유물이 보물 제 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터 석불대좌이다. 좌대는 높이 1.57m 사각이며 상, 중, 하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현재 국내에서 가장 크고 잘생긴 대좌로 평가받고 있다. 불상이 놓였던 상대의 각형 받침에는 23잎의 당려문을 새기고 그 밑에 각형 받침에는 다시 안상을 새겨 놓였다. 대좌의 크기나 장중함으로 보아 그 위에 앉아있었을 불상 역시 그 규모나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났을 것으로 여겨지며 당시 철 불이 유행이었으므로 철불을 조성했는지 석불이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이 대좌는 규모가 큼에도 불구하고 연꽃무늬 때문에 유려한 느낌을 주고 하대석 각 면의 안상과 아래로 향한 복련, 상대석, 각 면의 안상과 위를 향한 앙련의 시원스러움이 보는 즐거움을 더하여주는데 특히 이 불상을 중심으로 건립되었을 법당의 규모를 상상해보면 씁쓸한 아쉬움만 남는다. 석불대좌에서 20m쯤 서북쪽으로 보물 제 6호인 원종대사 부도비 귀부와 이수가 있다. 1915년 봄에 넘어지면서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있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거북을 비의 받침으로 삼아서 귀부이고 이무기를 지붕으로 삼으니 이수라 하는데 거북은 지상과 하늘을 이어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면서 천년수명을 누리는 장수의 상징이다. 또한 이무기는 하늘을 나는 용의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둘 다 신성한 영물이다.
원종대사 승탑의 귀부인 이수는 나라 안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탑비를 짊어지고 있는 돌 거북은 그 당당함이 태산 같은 힘을 분출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한 역동적인 모습으로 만들었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이수의 맨 아래에 앙련을 둘러 새기고 1층의 단을 두었으며 앞면에는 중앙의 전액을 중심으로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하고서 전액 안에다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라고 썼다.(...)
혜진탑비를 보고 산기슭으로 향하며 비신과 이수가 사라진 돌 거북을 만나게 된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고개를 가로 저으며 산수유나무 아래를 걸어서 산길에 접어든다. 간간히 돌계단이 만들어진 좌우에는 새 푸른 칡넝쿨이 얼크러 설크러져 있고 이미 팰 대로 패어버린 고사리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길을 곧장 따라가서 만나게 되는 승묘탑이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지금은 국보로 남아 있는 고달사지 승탑이다. 승탑 중의 승탑이라고 일컬어지는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승탑이나 지리산 연곡사의 동승탑, 북승탑이 크지 않으면서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이 승탑은 그 장중함으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신라의 양식을 비교적 정직하게 이어 받은 고려시대 8각 원당형 승탑 중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승탑은 혜목산문의 개산조 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입적한 원감국사의 사리탑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또한 이 절에 있던 고달사지 석등(보물 제 282호)은 부도 옆에 있었으나 1959년 옥개석이 없어진 채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전 발굴과정 중에 그 옥개석을 찾았다고 한다. 고달사지 절터를 돌아보고 느티나무 아래에 차를 세운다.
.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를 보듬고 의자에 앉아 있다. ‘절 뒷산이 혜목산이 맞느냐’고 묻자 “그렇지요 저 산은 매봉산이고 가운데가 혜목산 그리고 저쪽은 우두산이지요. 저 앞들에 있는 작은 산은 신털이봉이라고 하지요. 옛날 고달사를 지을 때 스님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다보니 저렇게 봉우리가 됐다고 해요”
영원한 것은 없다. 세상에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 자리에 천년만년 서 있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희망, 믿음을 전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어느 새 절도 사라지고, 그 절을 지었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이 아름다운 석등은 지금도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도 없이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이 고달사지를 그리워 하며 서 있으니, 역사는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인가?
너의 손을 꼭 잡고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라라라 라라라
사라지지마 흐려지지마
영원히 영원히
2025년 6월 23일
일제 잔재 청산은 일제에 의해 옮겨진 문화유산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