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대공원 개장 누군가에게는 다리 아프게 걸었던 소풍날의 추억으로, 다른 이에게는 엄마 몰래 만난 이성친구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화려한 놀이공원들의 인기로 쇠락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어린이대공원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디즈니랜드, 유니버설 스튜디오….
수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놀이공원들이다.
국내에도 롯데월드·에버랜드·서울랜드 등 세계적 수준의 놀이공원들이 있어 어린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럼 국내에서 어린이를 위한 공원으로 문을 연 가장 오래된 곳은 어딜까.
어떤 이는 "그게 지금도 남아 있나?" 하고 반문할 정도로 빛바래고 희미해진 이름,
그 이름마저 고색창연한 서울 광진구 능동의 '어린이대공원
서울에서 자란 사람치고 어린 시절, 청춘 시절 이 '대공원'에 추억 한자락 묻어두지 않은 이 없을 정도로 시민들 곁에서 정들어온 낡고 닳은 도심 공원이다.
어릴 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름이었죠.
"여기 소풍 한번 안 와본 사람 드물걸요.
놀이기구 타고, 호랑이·코끼리도 구경하고…
아이들이 놀기에 여기만한 데가 없었죠.
숲이 울창해서 데이트하기에도 좋았고."1973년 문열때 아시아 최대 규모의도심 속 어린이 놀이공원'어린이대공원'에서 만난 '어른'들의 한결같은 추억담이다.
어린이대공원은 1973년 국내 최초로 문 연 어린이를 위한 대형 종합 놀이공원이자,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도심 속 어린이 놀이공원이었다.
지금은 최첨단 놀이시설로 무장한 놀이공원들에 밀려 어린이'대공원'이란 이름도 무색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자녀를 동반한 가족 나들이 장소로, 청춘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 어르신들의 도심 속 쉼터로 각광받고 있다.
무엇보다 입장료 무료. 동물원도 식물원도 다 무료.늦가을 막바지에 접어든 어린이대공원 숲길엔, 40번째 가을이 빚은 화려한 단풍도 잦아들고 다시 시민들의 추억처럼 낙엽들이 두껍게 쌓였다. 지난 주말 스산한 날씨 속에 찾아간 어린이대공원은 낙엽길마다 옛 추억 되새기며 거니는 시민들의 옛이야기로 오히려 훈훈했다.어린이대공원은 1973년 5월5일 제51회 어린이날 문을 연 넓이 53만㎡에 이르는 대규모 도심 속 공원이다.
울창한 숲과 인공 연못, 물이 하늘 높이 쏘아지는 대형 분수대, 열대식물들 가득한 식물원, 호랑이·사자·코끼리·기린·원숭이 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동물원, 청룡열차·회전목마 등 갖가지 놀이기구들이 설치된 놀이동산까지
그야말로 어린이들이 꿈에 그리던 놀이공원이었다.
해마다 어린이날엔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고,
서울시내 초·중등학교는 물론 근교 학교들에서도 봄가을 단골 소풍 장소로 이용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각종 시설을 둘러싼 32만여㎡의 녹지대(숲과 잔디밭)엔 2.6㎞ 길이의 산책로가 이어져, 사랑을 키워가는 연인들이 자주 찾는 데이트 명소였다.동물원 원숭이 우리 앞에서 3살 난 딸과 원숭이 구경을 하고 있던 방(35)씨가 말했다.
초등학교 때 하여간 소풍 갔다 하면 어린이대공원이었다니까요. 갈 데도 적었지만,
여기가 또 그만큼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죠." 중곡동 용마초등학교에 다녔다는 방씨는
소풍 말고도 부모님 손 잡고 자주 놀러 왔었다"며 "어느새 부모가 되어 아이를 데리고 다시 오니 감개가 무량하다"며 딸의 손을 꼭 잡았다.어린이대공원 자리는 본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인 순명황후(민씨)의 능(유강원)이 있던 곳
능동이란 지명도 여기서 나왔다.
순종 승하 뒤 능이 금곡 홍유릉으로 합장해 옮겨가자 일제는 이곳에 골프장(경성골프구락부)을 만들었다.
광복 뒤엔 서울컨트리클럽 골프장으로 유지돼 오다, "골프장을 옮기고 어린이 공원을 만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대공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순명황후 능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초식동물관과 조류관 뒤의 나무들 우거진 언덕이다.
능에 있던 석물들 일부가 분수대 옆 공연무대 뒤쪽에 전시돼 있다.이 공원의 매력 중 하나가 40년 세월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대공원에서 27년째 근무중인 행사과장은 "나도 군 복무 시절 휴가 나와 지금의 아내와 여기서 데이트를 자주 했다"며 "팔각당(옛 한식당) 건물과 식물원은 옛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와 북카페·식당 등이 들어서 있는 '꿈마루'(옛 교양관) 건물도 마찬가지.
꿈마루는 서울컨트리클럽 당시 클럽하우스로 지어진 건물로, 건축가 나상진(1923~1973)의 대표작 중 하나
몇년 전 리모델링 때도 원형을 그대로 살려 새 단장을 했다고 한다.뭐니뭐니 해도 어린이대공원의 명물은 청룡열차가 아닐 수 없다.
몇시간이고 줄 서서 기다린 끝에 타야 했던, "언제나 짜릿짜릿 오금 저리게 하는 꿈의 놀이기구"였다.
하지만 이젠 청룡열차도, 느릿느릿 돌아가며 어린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회전목마·다람쥐통도 더이상 타볼 수 없게 됐다.
기구가 낡아 안전사고 우려가 높아지면서, 공원 쪽이 올해 초 대대적인 놀이동산 재조성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놀이동산은 앞으로 높이 38m의 드롭타워, 길이 395m짜리 패밀리 롤러코스터 등 '최신식' 기구 9종을 보강해 내년 4월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기념사진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끌던 곳은 분수대와 팔각당 앞의 꽃시계
분수는 현대식 음악분수로 바뀌었고 꽃시계는 사라졌다.
분수대를 장식했던 4개의 '모자상'은 분수 옆쪽으로 옮겨져 전시돼 있다. 장 과장은 "어머니와 아이들 모습을 조각한 모자상은 96년 마이클 잭슨이 방문했을 때 보고 반해 자신의 집에도 설치하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변하지 않은 것들은 이밖에도 많다.
1977년 시작된 어린이공원미술대회도 여전히 열리고, 어린이날이면 아이 울음소리로 메워지던 미아보호소도 여전히 가동중이며, 동물원 원숭이들은 여전히 과자를 달라고 팔을 뻗는다.
스피커에선 '요술공주 밍키'도,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도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옛 모습이 변하지 않았다는 건 달리 보면 그만큼 낡아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산책로에서 만난 한 여성(28·경기도 구리시)은 "공원이 좋긴 한데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라며
일부 시설물은 관리가 안돼 방치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어쨌든 어린이대공원은 이제 어린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도심 속 휴식공간'으로 서울시민들의 마음의 일부가 돼가고 있다.
분수대 광장의 양지바른 나무의자들은 어르신들의 쉼터요, 외딴 숲길 벤치는 연인들의 놀이터
올해 공원 안에 문을 연 창의적인 어린이 체험학습시설 '상상나라'는 대공원의 새 인기 놀이공간이다.4살 난 아들을 데리고 수시로 대공원을 찾는다는 김수정(40·경기도 남양주시)씨는 "아이에게 이만큼 보여줄 게 많은 곳을 전철로 편하게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소중한 장소"라며
"대공원이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대대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한편 어린이대공원의 미래 모습을 그려보며 그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시민 주도로 진행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오는 11월30일 서울글로벌센터(종각역 부근)에서 1단계 행사를 시작하는 '소셜 픽션 콘퍼런스@어린이대공원'이 그것이다.
시민 100여명과 어린이 30여명이, 그리고 이 행사를 처음 제안한 정치·경제·사회·환경·문화예술 등 각계 전문가 10명이 참가해,
머리를 맞대고 30년 뒤의 어린이대공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그려보는 행사다. '소셜 픽션'이라는 제목 아래 벌어지는 이번 행사는, 주제 발표와 토론으로 이어지는 기존 회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 흥미롭다.
이 행사의 핵심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있다.
제안자 중 한 명인 이원재(경제평론가·전 한겨레경제연구소장)씨는 "공상과학소설들이 결국 과학의 세계를 현실화시켰듯이,
사회적인 문제도 먼저 미래를 상상해본 뒤 그것을 현실화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방식으로 풀어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겨울 문턱의 어린이대공원 숲길엔 화려했던 단풍잎들이 쌓이고 또 쌓여 두툼한 낙엽길이 만들어졌다.
동물원 옆 산책로나 생태연못가 숲길에서 바스락거리는 추억 밟으며 이 오래된 공원의 앞날을 상상해 보시는 건 어떨지.글 이병학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어린이대공원 제공만화 정운경 화백 제공
너에게 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