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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정체가 많이 헤깔렸는데...
이제 조금씩이나마 가닥이 잡혀가는 느낌입니다.
우리가 청나라라 일컷던 동북아의 여진족은 삿갓을 쓴 여진족이 맞는듯 하고...
이들이 중원동부 전체를 다스리다가...
조선말기 어느싯점부터 서북 타타르(달단)여진들이 정권을 잡는듯 합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우리가 아는 여진족 청나라는 키타이자 남청(南淸)인 격이고...
구한말기 득세를했던 그 타타르는...북청(北淸)이자...대청(大淸)일듯 합니다.
복장부터가 확연히 다릅니다.
강시영화에 나오는 부의황제나 광서제 모자 스타일의 종족이 타타르청...
구한말기 북경에서 양이들과 강화조약을하던 삿갓을 쓴 자들이 동북아 여진 키타이 청나라...
이것같습니다.
어찌보면여...
구한말기 중원에서 흥한멸만(興漢滅滿)을 부르짖던 홍수전의 태평천국세력들은...
동북아의 여진족들을 멸하자 봉기했다기보단...새롭게 서역 (만주)에서 밀고 들어온 타타르와 무굴을 공히 만(滿,蠻)등으로 분류했던건 아닐지 싶습니다.
시중의 역사가 종전까지 인지했던 중원 동부중심의 청나라는...동북아 금나라(키타이)계 여진인들이 주류인 것이고...
시베리아 전체와 티벳,카자흐스탄,동유럽까지 표시됀 역사지도들의 그 타탈리아는...
여진재족들중...러시아지역에 있던 타타르여진족들의 영역였지 싶습니다.
언제 타타르여진이 키타이여진을 제압했는진 몰라도...
구한말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도...이들은 복장이 서로 다른 체로 혼합돼던 어정쩡한 상태에서 망한거라 보입니다.
명색이 천자국의 관복들이 그리 천양지차로 다를수가 없는이치고...
모름지기 체계적인 황제국이라면...민족별 전통복은 몰라도...그 관리들의 복식은 댓님 하나까지도 통일돼고 규정이 엄격할진데...
구한말기 기록사진들의 청나라 관리들은...
하난 베트남인들처럼 아오자이에 삿갓을 쓰고...
또 하난 강시영화에 나오는 가마솥 뒤집어 엎은 형태의 관모를 썼습니다.
같은 문화권&왕조의 복식이 아니란 반증입니다.
구한말기 직례총독 원세계등의 총독을 기용해...
러시아쪽 타타르(달단)여진 왕조가...동북아 키타이여진을 흡수하던 와중...둘다 망했다 봄이 어떨지 싶습니다.
밑에 조선 말기에 그린 북관 거시기도에는...
함경도의 병사들 복장이..특히,모자가...진기스한 초상화의 거란족식 모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의 전립(벙거지)형태는 아닙니다.
부산성&동래성 전투도의 조선군들 모자도 얼핏 그렇게 보였으나...설마허니 했는데...아무래도 벙거지(전립)가 아닙니다.
그림에 나오는 이씨조의 주인공 장군들만 정확히 우리가 아는 조선식 투구입니다.
중요한게 하나 있습니다.
밑의 기록화에 공통적으로 나오는...형(刑)을 집행하는 나졸들여...
모자 좀 보십시여...
우리가 아는 조선의 금부나졸들식 샐일파티때 쓰는 고깔형 관모가 아닙니다.
오리너구리 부리같은...일제순사 도루구찌 같은...로빈훗 같은 형태의 모자입니다.
동복을 말궁뎅이에 실코 말을탄 경주의 기마인물상의 그 모자형태와 약간 담기도 했습니다.
이 도루구찌 형태이 모자여...
몽골의 나담축체때 어린이들이 전통복장으로 자주 쓰는걸 본듯 합니다.
몽골과 러시아 어느 땐가의 군대 복장중...게스타프(순사) 역할의 병사들이 저 형태의 모자를 썼었단 일설도 있습니다.
유추하자면...
이씨조때의 함경도 병사들은 현재의 내외몽골지역 병사들이며...
누르하치의 여진족들은...몽골을거처 북경일대의 옛 금나라(키타이)영토를 병합하곤 급성장한다.
그 지역은 원래 청구조선지다.
이 금나라(키타이)지역은 이조가 다스리던 지역였으나...누르하치의 건주여진에 넘어가곤...
그 아들인 홍타시때엔 ..팔기군중 순전 이 요동의 조선족(키타이) 팔기의 힘으로 중원을 지배한다.
그러다 태평천국의 난 한참 전 쯔음...?
서북에서 진입한 타타르에 총독통치를 받는다.
서와 북의 여진정권과 풍습이 전혀 다른데...
신 지배자들인 중화와 대한뎨국...그리고 섬 원셍이들은...이를 다 같은 문명 같은 시원의 나라라 뭉퉁그린다.
그러기에 항시 타타르의 옆에서 타타르의 침략에 시달렸기에 타타르를 너무도 잘 알던 양이들이...
새삼스레...구한말 때 북경 근처에 얼씬대면서...그들이 전설로만 듣던 키타이임에 경악했던 걸 것이다.
이게 아닐지 의심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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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고려 예종 2년(1107) 평장사 윤관(尹瓘, ?-1111)과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이
각각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와 부원수(副元帥)에 임명되어 17만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물리친 뒤 국경을 넓혀 그곳에
함주(咸州) · 복주(福州) · 웅주(雄州) · 영주(英州) · 길주(吉州) · 공험진(公險鎭)에 육성(六城)을 쌓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領)에 '고려지경(高麗之境)' 네 글자가 새겨진 비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것이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후에 9성을 반환하는 등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내적으로 왕권강화를 노리면서 거란의 쇠퇴를 틈타 동북아시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면적인 포석이었다.
<야연사준도(夜宴射樽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조선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 1390-1453)가 야인(野人)을 격퇴하고 육진(六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한 뒤 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로 있을 때의 일화를 그린 것이다
그가 하루는 술과 음악으로 야연을 베풀고 있는데 화살이 날아와 주준(酒樽, 술항아리)에 적중하였다.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지만 김종서는 '간사한 사람이 나를 시험하였을 뿐이다' 며
침착함으로 연회를 계속 진행하여 마쳤다는 것이다.
<야전부시도(夜戰賦詩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세조 때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야인을 정벌한 이야기이다. 야인(野人)이 밤에 진영(陣營)을 습격하여 군사들이 이에 대해 응전(應戰)하고 있는데
이러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신숙주는 누워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막료(幕僚)를 불러
오히려 적군을 걱정하는 시 한 수를 즉석에서 지어주며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출기파적도(出奇破敵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어유소(魚有沼, 1434-1489) 장군이 슬기롭게 적군을 물리친 고사를 그린 것이다. 1467년(세조 13) 길주사람 이시애(李施愛, ?-1467)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좌대장(左大將)으로 어유소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는데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에서 대전(大戰)을 치렀다.
만령에서 적은 높고 험한 곳을 점령하여 화살을 아래로 내려 쏘게 되니 아군은 감히 올라갈 수 없었다.
어유소는 정예군사를 작은 배에 싣고 푸른 옷을 입혀 풀빛과 구별하지 못하게 한 뒤
벼랑을 따라 돌아서 윗봉우리에 이르러 적의 후방을 위에서 굽어보며 공격하였다.
적이 크게 놀란 사이 아래의 군사들도 기세를 몰아 이겼다는 이야기이다.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주인공은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다. 그는 태종의 외손으로 약관(弱冠)에 이시애의 난을 정벌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올랐다.
이시애를 토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 돌을 갈아 칼을 만들어 다하고 두만강 물을 퍼서 말을 먹여 없앤다.
남아가 20세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 후세에 어찌 대장부라 칭하겠는가"
라는 유명한 시를 지어 대장부의 웅혼한 기개와 포부를 나타내었다는 내용이다.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신립(申砬, 1546-1592)이 화살 한 발로 두만강변의 오랑캐를 소탕한 고사를 그린 것이다. 1583년(선조 16) 봄 신립이 온성부사(穩城府使)로 있을 때
오랑캐가 경원도호부의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고 장성문(長城門)을 철거하는 등
성(城)을 훼손하자 신립이 즉시 달려와 격돌하였다.
오랑캐 중에는 신립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었는데
두목을 쏘는 빠른 활솜씨를 알아보고 놀라 퇴각하였다는 내용이다.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임진왜란 발발 전에 말직을 지낼 때에 있었던 일이다.
1587년(선조 20) 경흥도호부 순찰사 정언신(鄭彦信, 1527~1591)이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당시 조산만호(造山萬戶)로서 이순신이 그 일을 관장하였다.
가을이 되어 수확을 할 무렵 오랑캐가 침입하여 약탈하려 하자
목책(木柵)을 방어하여 농민을 보호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17-18세기, <북관유적도첩>, 종이에 담채, 31×41.2㎝, 고려대박물관
<북관유적도첩> 중 여덟번째 '창의토왜도' 1592년(선조 25) 왜군이 함경도에 들어왔을 때 의병을 일으켜 대항했던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 1565인-1624)의 활약상을 그린 기록화이다.
당시 경성(鏡城) 사노(寺奴) 국세필(鞠世必)이 반역하여
왜군이 주는 관작을 받으며 성세(聲勢)를 넓히고 있었다.
정문부는 숨어 있다가 이붕수(李鵬壽, 1548~1592)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리를 듣고
어랑리(魚郞里) 이붕수 집으로 달려와 최배천(崔配天) · 지달원(池達源) ·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이를 저지하기로 하고 창의대장(倡義大將)이 되어 300여 명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부성(府城)의 국세필을 달래서 의병군들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성 남쪽에서 노략질하는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강문우에게 국세필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현수(懸首)하도록 하니
정문부는 군성(軍聲)을 떨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림 속 대장기가 꽂힌 성루에는 정문부 장군이 앉아 있으며, 왜군에 협력한 매국노를 참수하는 모습,
성문 밖에선 말을 타고 왜군을 추격하며 화살을 쏘는 의병들과 화살을 맞고 쓰러진 왜군 등
패퇴하는 왜군들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 고려대학교 개교 96주년기념, 박물관 제36회 특별전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 2001, pp. 98-107
'북관대첩' 왜군 격파 기록화 <창의토왜도> 첫 확인
일본이 최근 남북한 합의 후 돌려주기로 한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북관대첩’ 내용을 담은 18세기 기록화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가 5월17일 처음 확인됐다.
북관대첩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함경북도 길주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의 왜군을 격파한 전투. 이 장면을 담은 ‘창의토왜도’는 고려대 박물관 소장의 화첩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에 들어있다. 높이 41.2㎝, 폭 31㎝ 종이에 그린 채색화로, 1708년(숙종 34) 건립된 북관대첩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창의토왜도’는 단지 제목만 언급됐을 뿐 그림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관대첩비는 1708년 함경도 북평사 최창대(崔昌大)가 세웠으며, 1905년 러일전쟁 당시 현지에 주둔한 일본군이 파내간 뒤 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신사 구석에 버려 뒀다. |
혹시, 홍선생님도 포함되나요?
그래요? 늘 써먹으시는 방법인데....
그렇다면,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저를 먼저 죽여보시지요.
그런데, 한반도를 왜(倭)의 전통 서식지로 왜곡한 사람이 누구죠??? 그 사람이 장본인이죠??
까놓고 왜곡은 오히려 착한 겁니다.
주섬주섬 말장난 와중에...알아서들 그리 유추들 하시게끔 유도하는거...
마치 이승만이가...김구 죽여줘! 하질 않고,,,
김구선생 죽이겠다는 안두희에게 ...이 청~~~년~~~이~~~ 그 애국자인가~~~?..허고 교활을 떨듯이여...
적절한 비유였나 걱정이 됍니다...
역사 연구는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편견,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증오심을 버리세요.
남을 미워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죠....
오직 "자료와 논리"로 연구하는 겁니다. 감정을 제외하세요.
섬 원셍이들의 유전자지도여...?
그런건 못 만듭니다.
사악하고 아랫도리 정조가 전혀 없는 왜노들의 유전자는 아시아 남부 전체에 쫙 깔려 있기에...그 구분이 유전자 감별론 않 됍니다.
저는 개인적으로...얼굴 5초만 봐도...말투(글투)만 들어도 왜색을 단방에 감지하는 능력이 있긴 하지만여...
제 자랑이 너무 늘어졌나 봅니...ㅡ. .ㅡ
왜놈들에게 한이 맺혀서, 아무한테나 왜놈의 앞잡이라고 주장하시는군요...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셔서...
솥뚜껑을 보고도 놀라죠... 이해합니다.
저는 남의 글투만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아는데요...
홍선생님에게는 독해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남의 글을 제멋대로 해석하시고, 자기가 직접 인용한 글도 무슨 뜻인지 모르시고...
개인적(가문적) 원한은 없습니다...저의 할머님 집안도 친일파 유뭐시기 집안과 연관이 좀 있으시니여...
서기 814년 건립된 "구성회골가한비"(九姓回鶻可汗碑)의 내용 말이죠...
"應有刻畵魔形, 悉令焚爇, 祈神拜鬼, 幷擯斥而受明敎"
그럼, 홍선생님의 가족사(家族史)에는 "친일파"(親日派)가 있었군요... 아하! 이제 이해됩니다.
아무에게나 친일파(親日派)라고 주장하시는 것을 보니까... 측은합니다.
식사 못하신것 같은데...연장근무 고만하시고...편히 쉬십시여.
벌써 식사하였습니다. 촌음을 아껴서...
그런데, 어디로 알바 근무하러 가세요?? 논쟁이 끝난 게 아닌데요...
홍선생님도 편히 쉬세요. 피곤하시죠??? (하하하)
홍진영 선생님, 이거... 숙제입니다.
함경도(咸鏡道)만 조사하시면 부족하고요.....
조선(朝鮮) 팔도(八道)의 형리(刑吏)들이 몽골식 도루구찌(?) 모자를 썼는지, 모두 조사해보세요.
도루구찌(ivy cap)
테두리 없는 모자의 일종으로 일본 경찰들이 착용하면서 명칭이 생겨났다.
일반적으로 "아이비 풍 스타일의 모자" 또는 "헌팅용 캡"이라고 한다.
[출처=http://www.storysearch.co.kr/story?at=view&azi=11271#]
일제 시대에 친일 매국노들이 도루구찌 쓰고 완장 차고 민초들을 겁탈하는 일에 앞장섰다던데...
도루구찌에 사연이 많았군요...
도루구찌... 이거... 일본어 같은데, 사전에 나오지 않네요... 철자법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군요...
김선생님...제발 부탁인데여... 위키검색 같은건 생략해 주십시오.
누구나 자판 몇 번 뚜두리면 다 나오는 거니여...댓글들의 질을 떨어트립니다...스스로여...
그리고 본문의 주제가 뭔지를 잘 간파하시고...거기에 맞는 반박이나 보충을 해 주셔야 질높은 연구토론이지...
뻔한 검색내용 나열이나...한자풀이 놀음은 스스로 나는 초짜요..하는 푼수짓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유의하여 주십시요.
항시 군더더기를 뺀 엑기스의 본문과 댓글을 쓰시는 습관을 들이셔야 겠습니다.
자꾸 난 완벽해~! 라고 자위하시지 마시고...쓴소리도 좀 들어 주십시오.
남의 글을 제멋대로, 마음대로 해석하시는 게... 문제입니다.
저는 "완벽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였을 뿐이죠... 착각 금물!!!
위 본문의 내용을 좀 보세요... 주절... 주절... 액기스를 쓰셨나요??? <위키백과>에도 중요한 자료가 많습니다.
홍선생님이야말로 "자기 이론"으로 자위하시지 마세요... 그야말로 "헛점, 약점" 투성이입니다.
후이족의 기원은 대외 무역이 성했던 당나라 시대에서 원나라 시대까지 중앙 아시아나 인도양을 경유해 건너 온 아랍계·페르시아계의 외래 무슬림과, 그들과 통혼하여 개종한 재래의 중국인(주로 한족)에게 있다고 일컬어진다. 후이족의 커뮤니티에는 보통 모스크("중국어 정체: 淸眞寺"라고 표기)가 있어 성자묘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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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료가 홍선생님의 연구에 걸림돌이 되지요??? 그러니... 온몸으로 거부하시는 거구요...
청도(淸道)
천자(天子)의 행차에 앞서 길을 깨끗이 하거나, 다른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일
[출처=다음(Daum)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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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도 홍선생님의 연구를 방해하는 것 같군요...
위 본문에 나오는 그림 자료들이요...
홍진영 선생님만이 보유하신 "비장의 자료"는 아니지요??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냥 퍼오신 거지요??
자료 검색은 제마음대로입니다. 어디를 찾든지 간에... 간섭하시지 마세요.
댓글도 제마음대로, 제스케줄대로, 시간나는대로 올립니다. 개인 자유에 속한 것을 제한하시려 하다니...
댓글은 대화 방식이라서,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그림을 확대해서 보니 재밌군요. 알아야 보인다더니 역시 눈은 달고 다녀봤자 세뇌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어..마지막 그림에서 왜넘들 복장중 머리에 두건 쓴 모습이 전형적인 해적 스타일이고 빨간 두건도 많고.. 말하던대로 홍건적과 관련이 많아보입니다.
두건 말고도.... 왜군의 상의와 하의(바지)를 보세요... 일반적인 왜군과 다르죠??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거야 왜라는 개념이 꼭 배타고 해안을 통해 침략한 세력이 아니라 넓은 범위로 주변 잡것들 이라는 말이니까 가능성이 여러가지 일수 있지요. 특정 지역을 고정시켜서 왜라고 지칭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 역사 시간대에 특별한 짓을 했던 "왜"를 구분할 수 없는건 또 아니지요.
네, 그건 저도 아는 내용이고요... 일반적인 "복장"의 차이를 언급한 것인데요...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요?
제가 "왜(倭)의 정의"를 질문한 게 아니고요...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라는 그림에 나오는 것들은 카토-키요마사(加藤 淸正) 휘하의 왜군(倭軍)이라고 하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왜군(倭軍)과 다르죠??
"북관대첩비"는 다름 아닌 정문부를 비롯한 함경도 의병의 활약상을 담은 기념비다. "북관대첩비"가 정문부의 활약상을 글로 기념한 것이라면 "창의토왜도"는 그림으로 그 활약상을 기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아니라 여러 점의 그림을 묶은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불확실하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http://blog.daum.net/koreanmarinecorps/14443?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koreanmarinecorps%2F14443]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에서 말하는 조선(朝鮮) "북관"(北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비정하시면 좋겠는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카토-키요마사(加藤 淸正) 휘하의 왜군을 격파한 지역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