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구하는 것을 받은 줄로 믿으라
막11:20-33절, 480.482.505장. 3927 Bible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오늘의 본문은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능력에 대한 교훈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권세 곧 예수님의 권능은 하늘로부터 왔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이긴 하지만 함께 생각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거나 무리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여러분들과 함께 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아침 우리들에게 주시는 깊은 진리를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미 지난 단락에서 설교(說敎)를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자기(自己) 자신(自身)을 공개적으로 계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한 사건이나 예루살렘의 성전을 청결케 하시면서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고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내 외에 천명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수도 예루살렘에 빅 뉴스였고 이로 말미암아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행정 당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시내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메시야이며, 구주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바로 창조주이심을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공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태도는 이제 와서 숨길 것도 가리울 것도 없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메시야로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일련의 구속사의 과정을 이루기 위한 단계를 밟기 위한 전초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왕권에 대한 선포는 사탄과의 일전을 앞에 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당당함이 들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 하룻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그 무화과 있는 곳을 지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제 저주한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나무 전체가 말라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가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즉시 말라 죽은 사실은 사명을 감당치 못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두고, 두고 생각할 말씀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는 주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보고를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가 듣기에는 동문서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왕권 행사를 보고 놀란 베드로를 향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 것은 결국 예수님의 이적의 본질이 하나님을 믿도록 한 것이요,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주님을 믿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결국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은 그를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결국은 독자가 그 사실을 믿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2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 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룬줄 믿고 그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자연스럽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응답 받는 기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18:1)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했습니다. 어떤 환경에 서든지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實題)로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도(祈禱)에 재미를 못 느끼니 신앙(信仰)의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한두 번 기도하다가 쉽게 낙심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죠지 뮬러는 5만 번의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응답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도대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며 맹목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어떤 것은 들어주시고 어떤 것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는 즉시 이루어 주시지만 어떤 기도는 오랜 시간을 잡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것이 바로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인격적인 분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 나의 욕심과 나의, 소욕을 따르는 기도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구체적인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에 죄악을 품고"(시66:18) 있을 때 하나님은 응답치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간절한 요구가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해결할 것은 죄악의 문제입니다. 죄 문제 해결하기 전에는 응답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아니할 때"(잠28:9)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뜻 없이 증언 부언 넉두리를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말씀대로 순종하는 구체적인 걸음이 있어야 함을 믿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하는데 왜 응답이 없느냐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변에 속아 넘어가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울 때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자녀에게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에게서 떠난 마음"(사59:2)을 갖고 있을 때기도의 응답이 없습니다. 실제로 마음은 하나님에게 떠나 있으면서 하나님에게 무엇을 얻기를 구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실제와 마음이 다른 것을 주님이 아시는데 어찌 기도의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마6:5~6)는 외식이며 위선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넷째는 "믿음이 없는 기도"(히11:6) "의심하고 두 마음을품은 기도(약1:8)는 하나님이 응답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는 기도"(약4:3)도 하나님이 응답치 않습니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참되신 분이며 선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은 생각지 않고 오직 내 유익과 내 욕심과 내 편한 것만을 구하는 것은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무슨 기도이든지 주님의 영광이 첫째이고 주님의 주권이 첫째이어야 합니다.
내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한대로의 응답 받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2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 그대로 되리라" 고 했습니다. 기도는 100% 믿어야 응답(應答)받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도(祈禱)하고 구하는 것은 아직 구체적인 성취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받은 줄 믿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創造主)이며 구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이 필요하며 우리의 요구가 무엇 인지 깊은 속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간구 하든지 이미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 응답과 성취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갖고 계십니다.
당장 필요한 것을 당장 주시지만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주시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간구의 내용은 몇십년이 흐른 후에 주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도 믿음으로 나아가야하며 또한 기도한 후에도 믿음으로 구한 것을 이미 받은 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의 시간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예를 들면 교역자가 성도들을 위한 기도가 하나, 하나 쌓여서 하나님께 상달되고, 또한 성도들이 교역자를 향한 기도도 쌓여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그리고 서로끼리의 중보의 기도도 결코 헛되지 않고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문제는 기도는 공중에다 대고 마구 내뱉는 독백이 아닙니다 기도는 천지 만물을 지으신 우리의 구주인 하나님께 기도하기 때문에 그분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둘째 응답받는 기도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해줄 때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의 죄는 주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고자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백날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마음에 기쁨도 평화도 은혜도 감사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해서 자기의 눈에 들보는 보이지 않고 남의 눈에 티만 보이는 것이 인생입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드리다가 형제와 화해할 일이 있으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먼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님이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고 헝크러져 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형제의 죄를 용서함 없이 자기만 은혜 받고 축복받겠다는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최고로 일곱 번까지 하겠다고 예수님께 맹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얼마든지 무한 용서하란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할 때 나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 받은 기도가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온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형제(兄弟)의 죄(罪)를 용서(容恕)할 때 주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은 우리의 기도의 중보자가 되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늘로서 오신 권세를 가진 중보자이십니다.
딤전 2: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해주는 것은 중보기도가 아니라 “위하여 기도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나 선지자들이 중보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중보자가 오신 후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역할은 예수님 아닌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느 곳도 예수님 말고 다른 중보자가 있다는 말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박봉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