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12월28일(화) -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오늘의 복음] 마태 2,13-18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3) 박사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주었다. 14) 요셉은 일어나 그 밤으로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이리하여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6)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대중하여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 18)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복음산책]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 이는 대림시기와 사순시기를 제외한 모든 주일과 대축일, 성탄과 부활의 팔일축제와 성인들의 축일에 노래하는 ‘대영광송’의 첫 부분이다. 이 외침은 예수께서 탄생하신 순간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천사들과 더불어 하느님을 찬양한 데서 비롯된다. 천상군대의 찬양에 걸맞게 목동들이 떼를 지어 와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고, 동방에서도 박사들이 셋이나 경배하고 선물을 드렸다. 그런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젖먹이를 포함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이 모조리 떼죽음을 당하였으니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점성가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이 하늘에 큰 별이 나타난 것을 보고, 그 별의 주인을 찾아 온 데서 시작된다. 그들이 제각기 먼 길을 거쳐 찾아와 보니, 그 별이 성도 예루살렘 위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 화려하고 웅장한 성도 예루살렘 정도라면 별의 주인인 유다인의 왕이 탄생한 장소로 적합하다고 보였던 것이다. 자기 말고 어떤 왕이라니, 아닌 밤에 홍두깨라 했던가, 헤로데 대왕은 한밤중에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모아 놓고 예언서를 뒤졌다. 거기에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이라고 적혀 있었다.(미가 3,1.5) 그 길로 박사들은 별의 안내를 받아 베들레헴의 예수 아기가 있는 곳으로 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경배하였다. 물론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가서 찾아보고 와서 알려달라고 청을 했었다. 자기도 ‘유다인의 왕’에게 경배하러 가겠다는 말도 했다. 그동안 헤로데는 아기를 제거할 무슨 책략을 꾸미려 했을 것이다. 혹자(或者)는 헤로데가 박사들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당장 손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그 아기가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요 영도자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 년을 기다려온 메시아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유대혈통이 아닌 헤로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사들이 꿈에 헤로데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들 나라에 돌아간 일 때문에 결국은 헤로데 대왕의 주권이 발동되고 잔악한 대학살이 벌어진다. 아버지 안티파텔을 닮아 아내를 십수 명씩 거느리며 부귀와 권세와 영달을 좋아하던 헤로데에게 두 살도 채 안되는 사내아이들이 미래 이스라엘의 꿈이라는 단순한 진리조차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구약의 모세도 서슬이 시퍼런 파라오의 칼날을 피해 갔고, 아기 예수도 하느님의 안배로 미리 피난길에 올랐지만, 졸지에 변을 당한 그들의 억울함을 누가 있어 송사해 주겠는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만,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으랴. 또 그이들을 젖 먹여 키운 엄마들의 찢어진 마음은 누가 있어 위로해 주겠는가? 어처구니가 없음은 마태오복음사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라마에서 들려오는 소리, 울부짖고 애통하는 소리,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예레 31,15)라는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성탄대축일 이후 팔일축제의 첫 3일간을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예수님의 애제자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그리고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을 잇달아 기념하여 왔다.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은 서방교회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500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에서 처음으로 기념되었다. 12월 28일에 이 축일을 지내게 된 이유는 무죄한 어린이들에 대한 헤로데의 학살극이 예수 탄생 3일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 아이들의 죽음이 졸지에 당한 ‘개죽음’이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의 죽음으로 볼 지도 모르지만, 교회는 이 아이들의 무죄한 죽음과 이 아들을 잃고 애통해 하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순교의 행위로 승격시켰다. 경배와 찬양으로 둘러싸인 아기 예수의 요람(搖籃) 아래, 이미 증오와 박해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구원사명과 운명에 포함된 것이리라.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죽음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애통해 하는 마음들이 많다. 아직 한마디 말도 못하고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아기 예수님이지만, 예수님은 오늘 헤로데의 칼날에 쓰러져간 무죄한 아이들의 죽음과 다른 모든 죄 없는 죽음과 의로운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실 것이다. 오늘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그 빛이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초의 심지’와도 같은 죽음이 된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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