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자 1) 연재를 시작하면서
치우천자의 "구리"시대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한가지 입니다 "중국정사와 우리사서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단군왕검 이전의 실존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중국현지에서 유물/유적도 발굴 하였기 때문에 증빙이 가능합니다 이를 부정하지 않는 한 "단군조선도 당연히 실존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이하 자료를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1) 치우천자 항목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여기는 중국의 정부에서 작성한 "정사"중 제일먼저 작성된 "사마천의 사기본기"에 나오는 우리 "동이"의 2번째 나라 "치우천자"의 "구리(려)"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곳입니다
"구리"는 우리의 사서인 한단고기 등에는 "배달, 한웅, 신시"시대라고도 기록되어 있으나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될 것입니다
도표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빨간색 네모로 표시된 부분입니다
("구리"시대 연표)
(추가설명 : 한글병기)
① 최초의 나라 "한"(桓國: 동아시아 단일시대) 우리민족은 약 9200년전인 기원전 7197년에 최초의 국가 "한"(桓)이 일어나 약 300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② 두 번째 나라 구리(九黎) - 배달(倍達) 또는 한웅(桓雄), 신시(神市)시대 : 동아시아 단일국가
한(桓)에 이어 기원전 3898년(약6,000년전)에 구리(九黎)시대가 1565년간 유지되었는데 치우천자는 구리시대의 14세 천자(B.C 2707년, 일명 자오지 한웅)이었습니다 이때가 중국정사에 나오는 중국인의 시조 "헌원"시대로 치우천자와 전쟁을 하게됩니다
(2) 치우천자를 소개하는 이유
우리나라는 "한국" → "구리(배달, 한웅)" → "단군조선"으로 이어지는 약 9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학계에서는 우리 상고사에 대한 근거가 없다며 단군은 실존인물이 아닌 신화라 주장하고 전통 무속 등 미신으로 격하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오늘 기원전 2333년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 보다 400여년전 선조인 구리시대 치우천자의 실존을 밝힘으로써 단군이 신화가 아닌 실존역사시대 였다는 것을 증빙하고 단군조선 이전 1600여년간의 "구리시대"가 이미 실존하였다는 사실을 정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증빙코자 하는 것입니다
이자료를 보시고 기존 학계의 무지와 원서를 보지 않고 스승의 뜻만 좇아 교육하는 도제식 조폭역사문화의 "게으른 학문의 한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3) 치우천자란 누구인가 ?
한단고기중 "삼성기"중 신시역대기에 나오는 14대 천자입니다
중국 정사에는 치우천자로 한단고기에는 치우한웅(또는 자오지한웅)으로 기록하고 있어 "양국사서에 공통"으로 나오는 단군왕검의 단군조선 개국 400여년전 동이의 선조라는 것입니다
신시역대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분홍색 네모칸이 14대 치우천자 항목입니다
이분이 중국의 시조 헌원과 탁록에서 전쟁을 합니다 중국 정사에 나오는 신분을 비교해보면
(치우) "치우"는 "구리(려)"의 "천자"이고 그 백성이 "묘민"이다 "치우 = 구리의 천자"
치우천자의 무덤은 곡창 평야지대인 산동성 "동평"에 있습니다
(헌원) 헌원은 치우천자의 구리연방국의 제후 "소전"의 아들로 치우천자에 반역을 도모하였다가 태행산맥 서쪽으로 쫒겨나 중국민족의 시조가 되었는데
황제는 산동성 "수구"에서 태어나 치우천자에게 반역을 도모하다가 쫓겨나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다가 고산지대 척박한 땅 장안북쪽 "황릉"에 묻혔습니다
(이를 지도상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동평 : 치우천자의 무덤이 있는 곳 - 거야 : 치우천자 부인 "견비"의 무덤이 있는 곳 - 수구 : 제후국 소전의 아들 "헌원"이 태어난 곳 - 탁록 : 치우천자에 반기를 들어 쫒겨다니다 "탁록"에서 최종적으로 황제가 패함 - 황릉 : 고원지대 척박한 땅 장안 인근으로 달아나 끝끝내 "헌원"이 태어난 옥토 산동성 고향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황릉"에 묻힘
(4) 산동성에서 발견된 실존 유물
동이의 역사를 찾기위한 뜻있는 분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산동성에서 "치우천자의 유적"이 발견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려주어도 기존 학자들은 치우는 "중국의 악신일 뿐, 우리와 상관없다" 합니다 그들에게는 유물유적도 중국의 정사도 자기들 기준과 다르면 모두 부정하는 특히한 구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아래에서 산동성 동평에서 발굴된 유적지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① '치우총(蚩尤塚)' 비석
석회암으로 된 길이 2.38m, 넓이 0.83m, 두께 0.31m의 비석
② '치우사' 표지석
화강암에 석각된 된 길이 1.1m, 넓이 0.55m, 두께 0.15m의 표지석
③ "치우천자의 비석 및 표지석" 발굴시 같이 나온 "연호"가 새겨진 유물
"원화(元和)" 연호는 후한(84 ~ 86), 당(806 ~ 820)때 사용한 연호 입니다
④ 복원중인 치우천자총
⑤ 묘족 시조 "치우상" 락성(苗族始祖蚩尤像落成)
⑥ 탁록에 있는 치우유적 중 현존하는 "치우북채(蚩尤北寨) 표지석"
치우천자가 진을 쳤던 북쪽요새가 있었던 자리 표시 북채외에 중채, 남채가 있다
⑦ 탁록에 있는 치우천(蚩尤泉), 치우송(蚩尤松)
치우북채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치우천과 치우송
⑧ 하북성 장가구시 탁록현에 있는 삼조당내 “치우천자상”
좌측이 치우천자, 우측이 염제, 중앙이 훤원이 모셔져 있다
(4) 맺음말
이러한 자료는 학계의 누가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우리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뜻있는 분들이 사비를 들여 발굴하고 찾아낸 유물유적들입니다
땅을 파서 유물이 나와야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계 그들은 이제 재야사학자들이 발굴 한 것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나라의 역사를 찾아가는데 도움은 주지못할 망정 가장 큰 걸림돌이 일본 중국사람도 아니고 바로 "우리나라 학계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가슴아플 뿐입니다
더 정확하고 더 자세한 자료들이 이 홈페이지를 통하여 공개될 것입니다 믿고 안믿고의 선택권은 네티즌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이 비교를 통하여 본 홈페이지 내용이 옳다면 주변에 전파하여 우리역사를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
바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감사합니다
(치우천자 2) 구리(九黎) 시대
(들어가기전에)
이내용은 기존 역사학자들은 물론 중국, 일본학자들까지 입에 거품(?)을 물면서 한단고기에 나오는 치우천자의 구리국의 역사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우리역사상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우리역사의 일부이다
어느 나라이건 자기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승하여야 함에도 어찌된일인지 우리 학자들은 있는 것도 숨기고 위서임을 밝히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그들이 어찌 우리민족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 가 ?
진실을 얘기하는 학자들은 매도하여 강단밖으로 몰아내고 천년만년 일제식민사학의 잔재를 목숨처럼 여기며 살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가 ?
이제라도 그 더러운 민족정기 말살의 앞잡이 노릇을 그만두고 민족앞에 참회의 용서를 빌기를 진정 경고한다 !
(구리(九黎)국 시대)
(주)黎 : 사서에 의하면 국호로 사용할 때는 "나라이름 리"로 발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서(한단고기)에는 "한웅, 배달, 신시"시대 라고도 한다 18대 천자 1,565년 존속 (BC 3898년 ~ BC 2333년 까지 존속)
(치우천자의 기록이 있는 사서)
- 단기고사 (삼성기, 태백일사) - 규원사화 - 중국 25사중 하나인 사기권 1 (한 무제때 사마천 저 : 중국 최초의 정사) - 이외 수십여종 다양한 사서
(치우천자는 누구인가 ? 구리(九黎)국 14대 천자 = 한단고기 : 신시역대기에 나오는 14대 천자)
(역대기)
- 1세 (B.C3898) : 거발한 한웅, 재위 94년, 120세 - 2세 (B.C3804) : 거불리 한웅, 재위 86년, 102세 - 3세 (B.C3718) : 우야고 한웅, 재위 99년, 135세 - 4세 (B.C3619) : 모사라 한웅, 재위 107년, 129세 - 5세 (B.C3512) : 태우의 한웅, 재위 93년, 115세 - 6세 (B.C3419) : 다의발 한웅, 재위 98년, 110세 - 7세 (B.C3321) : 거 련 한웅, 재위 81년, 140세 - 8세 (B.C3240) : 안부련 한웅, 재위 73년, 94세 - 9세 (B.C3167) : 양 운 한웅, 재위 93년, 139세 -10세 (B.C3071) : 갈 고 한웅, 또는 독로한 한웅 재위 100년, 125세 -11세 (B.C2971) : 거야발 한웅, 재위 92년, 149세 -12세 (B.C2897) : 주무신 한웅, 재위 105년, 123세 -13세 (B.C2774) : 사와라 한웅, 재위 67년, 100세 -14세 (B.C2707) : 자오지 한웅, 일명 치우천왕이라하며 청구국으로 도읍을 옮겨서 재위 109년, 151세 -15세 (B.C2598) : 치액특 한웅, 재위 89년, 118세 -16세 (B.C2509) : 죽다리 한웅, 재위 56년, 99세 -17세 (B.C2453) : 혁다세 한웅, 재위 72년, 97세 -18세 (B.C2381) : 거불단 한웅, 혹은 단웅, 재위 48년, 82세
(치우천자 실존증빙 : 중국정사 사마천 사기본기 원문해석)
중국최고의 정사인 사기본기가 있는 한 구리국 치우천자의 역사는 영원히 존재하며 아무리 한단고기의 위서를 논한다 해도 이사실은 지울수 없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1)
▒ 보는 방법
(1번 큰글자)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사마천이 기술한 중국최고의 정사로 한무제 말기에 완성 (한나라 무제 : 기원전 141 - 87 존재, 사마천 : 기원전 145 - 86 존재)
(2번 "집해") 사마천의 원서에 송나라때(420 - 479) 배인이 추가한 내용 (일종의 설명)
<3번 "색은"> 당나라때(618 - 907) 사마정이 추가한 내용이고 동시대 장수절이 정의를 함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2)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3)
▒ 해 설
(5 번) 제후들이 모두와서 복종하는데 치우는 가장 포악하여 능히 벌할자가 없었다 (諸侯咸來賓從而蚩尤最爲暴莫能伐) (제후함래빈종이치우최위폭막능벌)
(6 번) 치우는 고천자 이다 (蚩尤古天子) (치우고천자)
(7 번) 용어하도에서 황제가 섭정시 치우의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썼으며 머리는 동이고 이마는 철이며 모래를 먹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만들어 천하를 진동케하고 무도하게 만민을 살해하였다. (龍魚河圖云黃帝攝政有蚩尤兄弟八十人 獸身人語銅頭鐵額 食沙造五兵仗刀戟大弩威振天下 誅殺無道萬民) (용어하도운황제섭정유치우형제팔십인 수신인어동두철액 식사조오병장도극대노위진천하 주살무도만민)
(8 번) 구리의 통치자(군호君號:직위)는 치우다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공안국왈구려군호치우시야)
▒ 운영자 부언
네티즌 여러분 믿기지 않겠지만 윗내용은 중국정사에 기록된 치우천자에 대한 생생한 기록입니다 어느나라도 자기민족의 시조(헌원)를 논하면서 이민족의 수장(치우천자)에 대해서 이렇게 공포심에 질린 표현을 할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두려움의 대상이었길래 이렇게 기록을 하였을까요 이분이 우리민족 단군왕검이전 400여년전 구리시대 14대 치우천자의 역사입니다 반드시 복원하여야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본기 권1-4)
▒ 해설
(9 번) 황람의 말을 인용하여 치우의 묘는 동평군수장현함향성안에 있으며 높이는 7길이고 10월에 백성들이 제사지내는데 붉은 기운이 비단같이 솟아 올라사람들이 "치우기"라고 부른다. (皇覽曰蚩尤 吊平郡壽張縣함향성 高七丈民常十月祀之 有赤旗出如匹縫帛民名爲蚩尤旗) (황람왈치우 재동평군수장현함향성 고칠장민상십월사지 유적기출여필봉백민명위치우기)
또한 그 부인의 묘가 산양군 거야현에 있다 (견비총在山陽郡鉅野縣) (견비총재산양군거야현)
(10 번) 치우(蚩尤)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령을 듣지 않으므로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탁鹿之野) (치우작란불용제명어시황제내징사제후여치우전어 탁녹지야)
(지도 해설)
- 동평 : 치우천자의 무덤이 있는 곳 - 거야 : 치우천자 부인 "견비"의 무덤이 있는 곳 - 수구 : 제후국 소전의 아들 "헌원"이 태어난 곳 - 탁록 : 치우천자에 반기를 들어 쫒겨다니다 "탁록"에서 최종적으로 황제가 패함 - 황릉 : 고원지대 척박한 땅 장안 인근으로 달아나 끝끝내 "헌원"이 태어난 옥토 산동성 고향으로 돌아 오지 못하고 "황릉"에 묻힘
▒ 운영자 부언
곰곰히 생각해 본다. 황제는 왜 자기가 태어난곳에서 묻히지 못하고 그 머나먼 장안북쪽 황릉에 가서 묻혔을까 ?
한단고기의 기록을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 제후의 아들인 헌원이 치우천자에 반역을 도모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징벌, 황제는 태행산맥 서쪽으로 쫒겨나 지나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아닌가 ?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해도 풀리는 부분 아닌가 ?
이것이 왜 신화인가 ? 동평군 수장현에 있는 치우천자의 무덤과 그 유적지를 뜻있는 분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여 직접발굴하였고 바로 이홈페이지에 공개하였다
이토록 자랑스런 우리 역사를 죽어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저 오만과 가식에 가득찬 매국식민도제식조폭학자들은 도대체 어느나라의 사람인가 ?
(구리국 치우천자의 기록이 아직도 허구라 믿는가 ?)
중국 정사 기록의 원칙은 "나의 것은 과장하여 쓰되, 남의 것은 축소하여 기록한다" 이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두려움의 존재로 여기어 졌으면 중국 최고의 정사 제일 앞부분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을까 ?
사기에는 헌원이 이긴 것으로 되어있으나 한단고기에는 분명 70여회의 전쟁에서 헌원이 단한번도 이긴적이 없는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더구나 뒤편에서는 헌원은 제후의 아들이라고 정사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누구것을 따를 것인가 ? 중국정사에 있고 우리 기록에도 있다 그것이 야사라 하여 보지도 않고 부정하는 태도는 중국정사도 제대로 보지못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한단고기의 일부 기록)
자오지(정사에서는 치우천자로 표현)한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중략)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 공을 세우게 하더라.
(맺음말)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B.C 2700년대 중국민족의 시조 황제헌원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동시대 유명인이었던 "구리"의 치우천자를 비교론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우리의 사서에도 있고 중국의 사서에도 있는 공통부분이다. 왜 믿지도 않고 연구도 않고 거짓이라고만 하는 걸까 ?
치우천자와 황제헌원의 사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천손민족 "구리"의 치우천자께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제후국의 소전의 아들이었던 황제헌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자가 탁록에서 징벌을 하였다
이에 황제헌원은 매일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소를 옮겨다녔으며 70여회의 전쟁에서 한번도 싸워 이겨보지 못하고 결국 태행산맥 서쪽으로 고산지대 척박한 땅으로 도망을 가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이 치우천자의 역사를 복원시켜야 합니다 반드시 복원시켜야 합니다
(치우천자 3) "치우천자" 사진모음
- 출처 : 치우학회(회장 박정학) 및 다물넷(김산호 화백)
▒ 김산호 화백이 그린 치우천자상(www.damool.net)
▒ 김산호 화백이 그린 탁록대첩도(www.damool.net)
▒ 호남성 화원현의 치우천자 동상
▒ 치우무술을 연구하시는 유석만님이 그린 치우상
▒ 강화도 마니산 대시전(단단학회)에 봉안된 삼황오제 중의 치우상 - 임시로 그려진 것임
▒ 평양 단군릉의 단군 8가중 한 가문인 치우씨의 상 - 치우천자가 아닌 것으로 봐야 할 것임
▒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귀면와 사진 - 가장 대표적인 한국의 도깨비상 내지 치우상으로 통함
▒ 탁록 중화 삼조당에 모셔져 있는 치우천자상
좌측 탁록의 중화삼조당에는 가운데에 황제, 왼편에 염제, 오른편에 치우제를 모셔놓고 있습니다.
탁록의 중화삼조당 벽화의 중간부분에 그려져 있는 치우상입니다. 가장 큰 특징은 소뿔 투구입니다.
▒ 삼조당 치우제상 앞의 소형 목상
▒ 탁록에 있는 한 식당에 걸려있는 치우천자 그림
▒ 황제대전치우도 (黃帝大戰蚩尤圖)
(생활속의 치우천황)
- 출처 한배달 2002년 43호
▒ 치우천자상 : 탁록 삼조당
▒ 중국 오제사에 소장되어 있는 치우/황제 전쟁복원도
▒ 귀면상 : 창경궁
▒ 귀면상 : 창덕궁
▒ 탁록전투 묘사도 : 삼조당
▒ 녹유귀면판 : 경주 박물관(안압지 출토)
▒ 전쟁기념관 본관 입구 상단에 새겨진 치우상
▒ 육사박물관 소장 투구상에 새겨진 치우상
▒ 육사박물관 소장 : 쇠도리깨 손잡이 끝부분에 새겨진 치우문양
▒ 육사박물관 소장 : 쇠몽둥이 손잡이 끝부분에 새겨진 치우문양
▒ 고구려시기 귀면판 :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궁 성터 출토
▒ 치미(망새) : 용의 아홉아들 중 하나로 이문이라고 하는데 불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졌다 한다. 이 치미의 치를 치우의 "치(蚩)"로 적기도 한다
▒ 육사박물관 소장 치우기(도깨비상기)
▒ 고구려 시기 귀면와 : 평양시 대성구역 청암리성 출토
▒ 둑신기
- 심신민고(三神民考)(조자용저)에 실린 둑신기. 저자는 이 둑신기를 안곽의 "황제 전쟁전설의 벽화"에서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치우천황을 모신 사당, 즉 둑신사에 그려진 것으로 이 둑신기야 말로 우리 태극기의 원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치우문양)
- 출처 : 한배달 치우연구 제2호(2002.12)
(치우천자 4) 치우의 무기 >
- 출처 : 한배달 치우학회
월드컵에서 붉은악마가 치우라는 말이 퍼지면서 청소년들로부터 치우에 대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무기에 대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래서 지난 호의 '치우와 붉은악마' 특집에 이어 치우천왕이 사용한 무기에 대해 기록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사기, 태평아람, 후한서 등 중국의 많은 책에서
'치우는 쇠를 캐내어 다섯 가지 병기(五兵)를 만들었고, 그것을 즐겨 사용했다'면서 그 다섯 가지를 한꺼번에 다 소개한 문장은 없지만
주로 관자를 인용해 도극대노(刀戟大弩)과 검극(劍戟), 투구(銅頭鐵額)를 만들었다고 소개함으로써 도, 검, 극, 대노, 투구의 다섯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록에는 다섯 가지라고 제한적인 표현을 하지 않고,
(1) 삼성기 - 오구장도극태노(五丘杖刀戟太弩),
(2) 규원사화와 태백일사-대변경, 삼한비기 - 도극대노·검 개 모 극 대궁 고시·예과(세모창)옹호지극(미늘창)·비석박격기 - (刀戟大弩·劍 鎧 矛 戟 大弓 矢·芮戈(세모창)雍狐之戟(미늘창)·飛石迫擊機)
(3) 규원사화 - 도극대노거부장창(刀戟大弩巨斧長槍)
등의 기록이 있어 종류를 보면
오구장, 도, 검, 극, 대노(태노), 모, 대궁, 효시, 예과, 옹호지극, 투구, 비석박격기, 거부, 장창의 14가지가 나온다.
여기다가 한 가지 더 보탤 것은, 이런 물질적인 병기뿐만 아니라 기무(氣武)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무기가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즉, 한·중 양국의 기록을 종합하면
- '하늘을 빙빙 돌게 하고, - 큰 안개를 일으키고 - 물과 불, 번개와 구름을 부리며, - 바람과 비를 불어 일으키고, - 신을 부르는 등
천도에 밝았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너무나 막강한 금속무기와 이러한 도술을 지닌 치우천왕이었으므로 황제에게 패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며(이는 다음에 다시 다루기로 한다), 현재까지 치우기라는 하늘의 별이 되어 난리를 사전에 알리고, 전쟁신·군신·승리의 신으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큰 활(大弓=夷)의 소질을 이어받은 우리 민족은 지금도 세계 양궁대회를 휩쓸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무기는 최소한 청동 내지 철기로 된 것이었으며, 후대에 기록된 것이므로 약간의 오류는 있다고 하더라도 양국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도, 검, 극, 대노, 투구는 기본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 서기전 20∼25세기로 재정립되고 있는 중이지만, 우리나라의 '청동기 시대는 서기전 10세기 전후, 철기는 서기전 4세기 전후'라는 데 문제가 있다 (북한의 경우 서기전 30세기에 청동기 시작 주장).
치우의 시기는 단군보다 3∼400년을 앞선 서기전 27세기로서, 단군만 해도 우리 청동기 시대보다 1300여 년이 앞선 시기이므로 전설이나 신화로 돌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이런 기록들이 모두 엉터리라고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우리나라 청동기와 철기 시대 편년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많은가?
< 치우무기 >
< 도 >
< 검 >
< 극 >
< 대노 >
< 투구 >
< 모 >
< 부(도끼) >
< 과 >
< 창 >
< 비석박격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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