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2025. 10. 7.
경북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
1996년 경북 탄생 100주년을 맞아 앞으로 400년후 500주년 되는 해인 2396년 10월 23일에 개봉하여 후손들에게 현재 경북인의 생활, 풍습, 문화 등 삶의 표본을 보여주고자 100품목 475종으로 분류, 선정하여 첨성대형 타임캡슐에 담아 유서 깊은 영남제일문인 주흘관 뒤 지하 6m에 매설하였다.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 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조국순례 자연보도사업의 일환으로 옛 현태대로 되살려 선주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겨 보자고 한다.
교귀정(交龜亭)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交印妻)로 1470년경(성종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 1년) 의병 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꾸구리 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용추각자(龍湫刻子)
제1관문과 2관문 중간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소(沼)를 이루었는데 이를 용추라고 한다. 이곳은 새재 옛길의 백미로 꼽히며, :용추“ 글씨를 새긴 사람은 구지정이다. 구지정의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1666년(현종 7)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며, 공주(公州)와 황주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
조령 산불됴심 표석
표석의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문화재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 비석을 모두 4점이나 “조령 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바위굴과 새재우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나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음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람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영남 제2관문 조곡관(嶺南 第二關門 鳥谷關)
이 관문은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던 문경(聞慶) 조령(鳥嶺)의 중간 위치한 제2관문으로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축성되었다고 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조선(朝鮮)선조(宣祖)25년(1592) 왜란(倭亂)이 일어난 후에 충주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숙종(肅宗)34년(1708)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신충원이 쌓은 옛성을 고쳐 쌓고, 중성(中城)을 삼아 관문을 조동문(鳥東門)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시설은 그 후 폐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귀틀집
주로 산악지에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우물정(井)자 모양이 되고 “방틀집” “말집” “목채집” “틀목집” “투방집” 혹은 “정한식(井韓式)집” 이라고도 한다.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를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시베리아, 파미르고원, 북유럽, 아메리카 산악지대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 변에 남아 있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방법을 나무와 나무 사이가 엇물리는 네 귀가 잘 맞도록 아귀를 지어 놓으며, 나무사이에 진흙을 발라 보온성이 좋고, 특히 자연 소재 그대로 주거생활에 반영해 습기조절, 산림욕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오늘날 옛 형식을 보완하여 현대인의 웰빙 주거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문경새재 책바위 이야기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ㅏ 하늘에 지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자 몸울 고차고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었다. “당신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은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 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