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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가 설법을 하려 할 때는 그 청중이 앉은 데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젊은 세대에게 주는 말
함석헌
세계를 휩쓰는 말세감(末世感)
오늘 이 시대의 특색은 가는 곳마다 말세감(末世感)이 짙은 것이다. 세상이 다 돼 간다라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사실은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삶의 성질상 그럴 수밖에 없다. 시간은 언제나 말세적이다.
그러나 소위 평상시라는 때, 태평시대라는 때에는 어느 일부의 매우 민감(敏感)한 사람들, 곧 예언자, 선각자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고 일반 사람은 이른바 태평의 꿈속에서 안심하고 산다. 노아는 절박감에 몰려 방주(方舟)를 묻는 망치질에 바쁘고 있는 때에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사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면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시간이 오면 모든 사람이 그 다 됐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말세다.
지금은 아직 그러한 전반적인 불안 공포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상당히 퍼져가고 있고 깊어져가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삶의 틀거리에 흔들림이 온 것이다. 삶은 하나의 틀거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말해서 “세상이……”, “사람이……”, “이 우주에”하는 것은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하는 능력 때문에 있는 일이다. 우리가 보통 말할 때는 사람, 동물, 식물, 무생물, 물질, 정신, 이제, 옛날, 하지만 이 삶, 혹은 이 우주에는 그런 갈라진 것은 없다.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 그보다도 하나의 우주를, 살고 있다. 인생 없는 우주도, 우주 없는 인생도 없다. 창조물 내놓고 창조자가 따로 있을 수도 없고 창조자 내놓고 창조물이 따로 있을 수도 없다. 그저 하나의 하나인 삶이 있을 뿐이다. 생각을 하자면 시간이요, 공간이요, 정신이요, 여러 개의 차원을 그릴 수밖에 없지만 생각하게 하는 그 ‘한 생각’에는 그런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해서 옳게 살아간다 할 때는, 엄정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없지만, 마치 봄 속에서 나와 천지와 만물이 봄을 사는 모양으로 그 하나의 틀거리 속에 살지만, 꽃이 피고 질 때는 봄의 오고 감을 느끼는 모양으로, 어느 때에 가면 그 우리를 낳고 살리고 있게 하는 그 하나의 틀거리의 이루어짐,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그 무너지려는 흔들림을 느끼는 것이 소위 말세다. 인도 사람들은 그것을 우주의 밤, 우주의 낮으로 표시했다.
그런 흔들림이 올 때는 우리는 세상이 어지러움에 빠졌다고 한다. 지금은 어지러운 시대다. 아마 그 시작일 것이다. 어지러움은 반드시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일엽지추(一葉知秋)라, 떨어지는 오동잎 속에 겨울을 보는 것이 예언자다.
어지럽다는 말 속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하나는 거기 지켜야 하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요, 또 하나는 지킬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지켜야 하는데 지킬 능력이 없다. 지킬 능력은 없는데 지켜야 한다. 여기 고민이 있다. 지금은 고민하는 시대다.
지키긴 무엇을 지키란 말인가? 질서다. 나는 여기 서고 너는 저기 서며 너는 이렇게 하고 나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어떤 차례가 있다. 그것을 깨달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을 우리는 가치체계라고 한다. 흔들림은 이 가치체계의 무너짐에서 온다. 오늘 우리 사는 사회가 불신, 불안, 불평에 빠졌다는 것은 이 가치체계 곧 모든 사상행동의 표준이 없어지게 된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에 흔들림과 어지러움이 왔지만, 동시에 그 무너짐 뒤에 우리는 강하고 엄한 다시 세우라는 명령을 듣는다. 그것을 들을 줄 아는 것이 사람이다.
그것은 이 삶이 자라는 삶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틀거리를 가지는 삶이라 했지만 그 틀거리는 자라는 틀거리다. 집이라기보다는 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몸은 자라는데 집은 자라지 못한다. 몸이 자라는 것은 삶이 곧 자라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자라는 것이고 보면 세상에 자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집도 자라지 않는다 했지만 참 뜻에서는 자란다. 오늘의 건축은 오만 년 전의 굴과 나뭇가지에 틀었던 둥지에서 자라나온 것 아닌가?
과학은 이 우주가 자라는 우주라고 한다. 종교에서도 깊이 보면 하나님도 자라는 하나님일 것이다. 절대(絶對)고 보면 그 속에 변(變)도 불변도 다 있을 것 아닌가? 변과 불변이 합하면 자람이다. 변하면서도 변치 않는 것, 변치 않으면서도 자꾸 변하는 것, 그것은 자라는 자다. 동서양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동양은 덧없는 것을 보았는데 보수적인 역사가 나왔고 서양은 영원불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진보적인 역사가 나왔다. 그런데 또 진보적인 역사는 막다른 골목에 들게 됐고 보수적인 역사는 거기 비약을 가르쳐주게 됐으니 재미있지 않은가? 진보도 보수도 없고 영원한 자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자람도 매듭이 없을 수는 없다. 그 매듭이 곧 말세다. 여기 심판이 있고 구원이 있다. 적멸(寂滅)이 있고 왕생(往生)이 있다. 이것을 비유해 말하면 마치 릴레이 경주와 같다. 바톤을 건네주는 순간 하나의 달음질은 끝이 나고 하나의 새달음질이 시작된다. 그러나 두 개의 딴 달음질이 아니라 하나다. 그 너와 나, 새 것과 낡은 것, 전체와 부분을 하나로 만드는 신비가 곧 바톤이다.
지금 우리는 그 역사의 바톤을 제대로 넘겨주지 못하고 떨어뜨린 셈이다. 넘겨주는 전 세대가 잘못했는지 넘겨받는 새 세대가 잘못했는지 말하기 어려우나 옳게 연락되지 못하고 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역사인 이상 둘이 다 같이 책임져야 할 것이다. 늙은 세대는 새 세대를 책망하고, 새 세대는 늙은 세대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역사적 책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젊은 눈으로 보면 늙은 세대는 무책임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못했다 하더라도 역사적 전통 없는 세대는 없다. 다만 변동이 너무 급격하였기 때문에 태평한 시대에서 같이 재빠르게 그 손에 쥐어주지 못하고 넘어지는 바람에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세대가 정말 역사의식이 있다면 옮겨 받지 못했더라도 그 주변에서 스스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찾으면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 지재노화천수변(只在蘆花淺水邊)이지, 어디 그 부근에 있을 것이다. 어려움이 있대야 옅은 물가 같은 것이요 갈밭 속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바로 주지 못하고 넘어졌고 찾노라 두리번거리니 혼란은 혼란이지만 결코 역사의 끝, 인생의 허무는 아니다. 책임을 서로 밈 없이 선과 악을 너와 나의 공동 책임으로 알아 전체를 건지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바톤 건네주고 받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 이해다. 혼란기일수록 더욱 그렇다.
사람의 삶에는 두 면이 있다. 인생과 역사다. 변천의 걸음이 느렸던 옛날 전통 사회에 있어서는 삶은 거의 고정적인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그 단면만을 보고도 살 수 있었다. 3천년 4천년 전 사람이나 오늘의 나나 근본에서 다름이 없기 때문에 그전 사람의 경험을 그대로 내 것으로 살려 쓸 수 있었다. 거기서는 가치체계는 분명한 것이요 따라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내게 임했다. 그러나 지금은 변동이 급격함에 따라 사회구조가 거의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키던 그 질서가 거의 우리게 소용이 없어졌다. 오늘의 어지러움의 원인은 여기 있다. 이것이 넘어짐으로 바톤을 옮겨 넘겨주지 못하고 떨어뜨렸다는 것이다. 떨어뜨렸지만 사회가 너무 변했기 때문에 어디서 그 잘못을 찾아서 바로잡아야 할지를 모른다. 세대 사이의 단절이 여기서 일어난다.
그러나 바톤은 어떻게 해서라도 찾아 들지 않으면 아니된다. 바톤 없이는 뛰어도 뛴 것이 아니다. 지나간 역사를 살림 없이 새 시대의 창조는 절대로 없다, 여기 이데올로기나 행동의 표준의 조건이 있다. 역사를 살림 없이 인생을 살릴 수 없다. 지난날은 또 모르나 적어도 오늘은 역사적 참여 없이 인생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고생을 하면서라도 반드시 그 주변을 두루 살펴 떨어진 바톤을 찾으라는 이유다.
이것을 공자의 말을 빌어서 한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다. 옛 것을 찾아서 새 것을 안다. 어째서 따스하다는 온(溫)자에 찾는다는 뜻이 있는지 모르지만 참 재미있다. 알을 품어 따뜻해지지 않고는 병아리가 나올 수 없는 모양으로 역사를 그 의미가 밝아지도록 뜨거운 마음으로 찾으란 뜻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창세기 첫머리에 천지창조의 기사의 뜻과도 통한다. 원시의 혼돈(渾屯沌) 위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고도 번역하지만 또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도 번역할 수 있다. 혼돈을 품고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서 창조가 나왔다.
오늘의 젊은이에게 우선 하고 싶은 말은 늙은 세대가 혼돈할수록 너는 절망하지 말고 그것을 품어 따뜻해지도록 까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알 수 없는 혼란뿐인 듯하던 현실이 결국 갈꽃 피어 흐느적이는 하나의 옅은 강변 같아 역사의 흐름을 타고 저어갈 수 있는 배는 거기 어디 멀지 않게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권위의 무너짐
종교의 깊은 체험을 할 때는 늘 심한 진동이 반드시 있는 것을 본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려 할 때는 그 청중이 앉은 데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육종이란 앞뒤 좌우 위아래란 말이다. 그렇게 진동하면 하나도 견디어날 물건이 없다.
예수의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 할 때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 자리가 크게 흔들린다고 했고,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 계시를 받을 때도 하나님의 보좌가 진동한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낡은 권위가 무너지고 새 권위가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새 역사의 창조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은 권위에 산다. 의미에 살고, 보람에 사는 인간이기 때문에 또 권위가 없을 수 없다. 사람이 저와 꼭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라, 임금님이라 섬기기도 하고, 종이라, 죄인이라 부리고 벌하기도 하는 것은 생각하면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원인을 찾으면 인생도 역사도 절대의 복종을 요구하는 권위 없이는 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권위의 임하는 곳은 양심이다. 태평시대라 하는 때는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리만큼 한결같이 권위에 평안히 복종하고 있는 때다. 그 사실 없이는 평화요 문화발달이요는 있을 수 없다.
분명히 의식은 못하지만 그 권위는 결코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정치나 종교의 우두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거룩한 권위다. 천자(天子)라는 칭호와 혁명이라는 말이 그것을 잘 증명한다. 임금은 하늘이 자기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세운 것이기 때문에, 천자 곧 하늘의 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나타내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그에게서 그 명(命)을 빼앗아서 다른 적당한 사람에게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혁명 곧 천명을 새롭게 한다 했다.
그러면 새 명을 받을 사람은 어떻게 고르나? 덕(德) 곧 인심(人心)이 돌아가는 것을 보아서 한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기에는 반드시 권위의 흔들림이 온다. 영원한 그 권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권위는 반드시 인간적인 어떤 사람 제도를 통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권위는 본래 전체의 의지와 개인의 양심 사이에 흐르는 정신의 운동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유로 자발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권위를 가장 온전히 느꼈을 때 가장 즐겁고 고상한 찬송이 나온다. 모든 빛나는 예술은 여기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권위를 대표하던 마음이 그 자격의 가장 근본적인 덕(德)인 겸손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의 욕심이 동하기 시작할 때는 자동적으로 그 자격을 잃게 되고 그러면 그 결과로 제 재주와 힘을 써서 억지로 그것을 놓지 않으려 하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어디서나 말세가 될 때의 공통하는 현상은 권위주의다. 참 권위는 평화 속에 스스로 되는 것인데 이것은 그 깨여지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인위로 기술적으로 유지해보려는 노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권위주의는 반드시 구속적이요 강압적이다. 한마디로 무리(無理) 혹은 무도(無道)다. 그러면 자연 인심의 반항이 없을 수 없다. 반항하기 때문에 더욱 더 구속적이요 강압적이요 부조리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더 많은 반항을 불러일으키고 그러면 또 더 강제. 적이 되고 그렇게 해서 점점 더 경쟁적으로 격심해져서 나중에는 전면적인 동란에 빠져버린다. 그것이 정치적으로는 난세라는 것이요, 종교적으로는 하느님의 심판이다. 오늘이 시대는 그 극점을 향해 가속도적으로 달리고 있다. 이런 시대의 특색은 사람들이,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불행인줄 알면서도 망하는 길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운명적이다. 그러므로 시대가 바뀌고 나면 인력이 아니고 하늘의 명령이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렇게 해서 새 시대 준비가 이루어진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영원한 권위를 다시 체험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새로 틀거리를 세움 곧 재장 흑은 재형성(Reformation)이다.
오늘 흐린 물결처럼 세계를 휩쓰는 젊은이의 반항은 이렇게 설명해서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히피요, 마리화나요, 스튜던트 파워요, 심지어는 비행기 납치를 하고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폭력단에 이르기까지 외양으로 보면 아무 이유 없이 그저 파괴하기 위해서 파괴하는 허무주의 같지만, 그 속을 깊이 생각해보면 결국 기성 체제와 권위에 대해 반항하자는 것이다.
왜 반항하나? 그 자체가 이미 생명적이 아니요, 그 권위가 벌써 참 권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코 몰라서 그렇다 할 수 없다. 다 현대에서 받을 수 있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교육 받은 결과 그것이 쓸데없는 것, 그것이 결코 자기네가 느끼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풍조가 당초 일어날 때에 ‘성난 젊음’이라고 했다. 정당한 이름이었다. 성났다. 왜 성났나? 못마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코 허무주의요, 종교를 모른다고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인간인 다음에 그들이라고 인간의 근본성격을 잃었을 리 없다. 도리어 강한 종교적 요구가 있고 새 질서 새 가치에 대한 저도 모르게 애타는 요구가 있는데 기성질서와 권위가 그것을 만족 시켜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반항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처음으로 흐르기 시작한 급류가 제 길을 잡기 전은 우선 흐린 물을 일으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 새로운 틀거리의 비전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젊은 세대니만큼 낡은 가짜 권위의 종이 아니다. 그들의 눈에는 국가라는 것도 민족이라는 것도 문명도 하나도 영원한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다 가짜가 전에 의미를 가졌었는지 모르나 뭔지 모르게 앞에 오려는 역사에 대한 직감에서 볼 때 그것은 다 어리석은 것이요, 의미 없는 것이요, 하나도 자기네 의문에 대답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듯 실망시켰느냐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기 쉽게 우선 이것만은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 실망은 결코 자연에 대한 것은 아니요 인간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것이라는 것.
둘째, 그 잘못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문명 발달로 인해 얻는 여유의 시간은 바로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전쟁 문제다.
인간은 이날껏 물질주의 문명의 길을 달리면서 문명이 발달하면 자동적으로 인간은 이상적인 행복의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산업주의로 인해 한편으로는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있는 대신 반면에 인류의 대부분은 후진국이라면서 인간 이하의 살림을 하는데 빠지게 냈다. 그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노동과 노동의 결과로 얻는 소득과 그 소득을 써서 얻는 행복의 분배는 결코 전체의 입장에서 공평하게 된 것이 아니고 거기 모순이 많다. 그리고서 무엇이 이성적이냐 무엇이 행복이냐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그러한 산업주의는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전쟁을 일으켰다. 각 나라들은 서로 국가주의의 입장에서 이기려고 경쟁을 했다. 그 결과로 핵무기전쟁에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문명의 힘을 최고도로 이용하여 인간의 대량 학살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하고 있다. 그러니 무엇이 종교요, 무엇이 도덕이요, 무엇이 인도요 도리냐 하는 것이다. 이 문명의 사도인 기성세대는 별 이상한 생각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의 눈에는 그것이 이상했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 심각한 의문을 발표해 낸 것이 이른바 성난 젊음이다.
새 종교교육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젊은이는 세계구원을 스스로 자기의 사명으로 지고 나서지 않으면 아니된다. 떨어진 바톤을 기어이 찾으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링컨이 “우리는 역사에서 도망할 수는 없다” 한 것을 명언이라 하지만 과연 역사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무시하려 해도 무시해지지 않는 것이다. 도망할 곳이 없다. 첨부터 무조건 긍정으로 시작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삶이다. 무조건 긍정은 무엇인가 믿음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 안에 절대의 권위가 있다. 기성 권위에 반항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자체 안에 절대의 권위를 발견함으로만 인생은 있고 역사도 있다. 그렇게 보면 기성세대도 역사의 바톤을 내버리려 해도 내 버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냇물이 제 길을 찾아서만 시내가 될 수 있듯이 오늘의 젊은이도 제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성세대에 반항함으로만은 아니될 것이다. 가는 세대, 실패의 역사, 말세를 따스한 마음으로 대해야만 될 것이다.
그 의미에서 젊은이는 새 종교를 체험해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낡은 틀거리가 이미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될 수 없어서 이렇게 말세가 됐으니만큼 지금 있는 종파와는 매우 다른, 아마 거의 종교라 할 수 없으리만큼 다른 것일지 모른다. 비(非)신화니, 하나님은 죽었느니, 하나님 없는 종교니 하는 말은 아마 이래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있는 종교를 모르고 전연 무시하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질 수 없고 없음이 역사를 둘로 나눌 수도 없다. 간디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하느님은 전능하기 때문에 무신론자의 무신론까지도 될 수 있다고. 그것이 종교다. 새 종교는 그런 태도로만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이미 있는 종교가 재집권을 할 수 있단 말은 아니다. 참 의미에서 재집권이란 있을 수 없다. 할 것을 다한 다음에는 더 머물면 거짓이 있고 악이 있을 뿐이다. 모든 강아지는 다 제 뼈다귀를 하나씩 물고 간다. 신생(新生)해야만 된다. 종교는 사람을 통해서는 되지만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가 많이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참 종교, 곧 삶의 새 틀거리를 체험시켜주는, 역사를 자라게 하는 종교는 되지 못한다. 가짜 종교다. 지식이 발달한 오늘에는 인조 종교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를 건지지 못할 것은 그 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종교는 전체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귀가 필요하다. 귀 아닌 귀다. 예수가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한 것, 불경이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이 지교(知巧)로 흐르기 전에 사람은 듣는 사람이었다. 근대 사람은 듣기보다는 말하는 사람이다. 들은 것 없이 말하려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다. 여기 현대 종교가 권위를 잃어버린 이유가 있다. 지금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전체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아니고 중간에서 조작한 말이다.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이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세대의 단절이란 곧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항인데 그것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가 하는 협잡임을 알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항이다. 아들로 아버지께, 아버지로 아들께 돌아가게 하는 것은 전체의 말씀뿐이다. 아버지는 곧 전체의 모습이요, 아들도 전체의 모습이다. 불불상영(佛佛相映)이라,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자기를 보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자기를 보는 데 전체가 있다.
그러면 다음은 그 새로운 종교는 어떤 것이냐? 그 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나온다. 종교가 인간의 말이 아니요 전체의 말인 이상 아무도 그것을 말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것을 미리 말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가 나오려 할 때 우선 고전의 연구가 시작되어 그것으로 학문 사상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다음은 새로 연구 발명한 것을 실지 산업에 적용하는데서 산업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다음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그 신생운동을 완성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앞으로 올 신생운동도 무슨 양식으로나 역시 그 안에 학문과 산업과 종교의 혁명을 다 포함함으로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세 가지 혁명은 이미 시작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생각할 것은 학문의 혁명이다. 그것은 오늘의 모든 급격한 변동이 주로 과학의 발달과 거기 따르는 사상의 변천에 따라서 왔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의 타락부터가 이성의 잘못 사용에서 온 것이라 할 것이겠지만 현대인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해야 할 것이다. 이성이 제 주인을 발견해야 한다.
옛날 사람 더구나 동양에 있어서는 이성을 결코 가장 안심하고 따라갈 길잡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직관(直觀)에 의한 신비(神秘)론 체험에 의해서 전체의 초의식(超意識)에 통하는 길을 더 존중했다. 그런데 서양 근세에 들어 과학 연구가 성해지면서부터 인간 자신에 대한 것까지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하여 옛날에 모르던 것을 밝힌 것도 많고 사람을 여러 가지 미신에서 해방시킨 점은 많으나, 반면에 또 사람을 순전한 과학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에 크게 잘못된 점도 많다. 오늘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는 거기서 나온다. 이제 와서야 겨우 잘못을 차차 알게 됐으나 그 동안 아주 급속도로 아주 문명의 발달에 따라 자동적으로 완전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망상하던 버릇, 더구나 그것이 권력주의와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또 극단의 전문화 특수화해 가는데 따라 종합이 어렵기 때문에, 문명 전체가 혼란에 빠질 위험이 뵈는 틈을 타서 폭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제라도 멸망보다는 낫다는 사이비(似而非) 지혜 때문에 좀해서는 그것을 고치기가 쉽지 않다. 미래의 열쇠를 쥐는 젊은이는 이점에 특히 진실되고도 용감한 각오를 하여 세계관 인생관 일대 혁명을 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해야 할 것이다.
새 인류의 씨알
가장 깊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생명이 억만 년 진화의 길을 걸어 오늘에 이르렀고 그 선두에 섰지만 우리의 우리된 까닭은 생각하는 데 있다. 생각하고, 생각한 결과 우리는 지금 정신이라 영이라 하는 점에까지 이르렀고, 우리가 나기 전과 같이 진화를 자연과정에만 맡겨두지 않고 우리 생각하는 힘을 이용해서 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취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만큼 우리 책임은 크다.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의 근본 성격이 책임적이란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인간은 스스로 우주진화의 책임을 짐으로만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 위기에 빠졌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에 반항하고 나서는 것을 말했지만, 우리는 그 원인이 온전히 우리의 생각이 잘못된 데서 나온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지만 생각하는 능력은 우리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위틈에서 온천이 쏟지만 그 뜨거움이 바위에서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생각할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이시기 때문이다. 생명 그 자체가 생각하는 생명이다. 거기서 인간이 나왔다. 나왔지만, 마치 온천이 지심(地心) 속의 열 때문이지만 지심(地心) 그대로는 아닌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생명 그 자체의 크고 거룩한 그 생각대로는 못된다. 우리 생각을 내놓고 그이의 생각에 가는 길은 없지만 우리 생각이 곧 그이의 생각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요점은 어떻게 해서 찢어진 바위틈같이 좁고 더러운 우리 마음이 스스로의 좁음과 더러움으로 자기를 나타내려는 그 ‘한 생각’에 손상을 입힘 없이 그 자신 그대로를 쏟아낼 수 있게 하느냐 하는 데 있다. 예로부터 많은 어진 마음들이 이 점을 알아 힘써 왔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수백 년이래 서양문명은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그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생각의 근본이 되는 그 크신 생각을 잊고 생각은 마치 자기네가 하는 것처럼 알아서 교만해진 점이다. 그 결과로 작은 데서는 발달하는 것이 있는 듯한 대신 큰 것 근본되는 것을 잊은 점이 많다. 그 결과로 이 우주는 죽은 우주로 하나의 물질로 떨어져버렸다. 근본을 잃은 인간의 생각은 마치 근원이 끊어진 샘처럼 점점 흐리고 작아지게 됐다. 그 결과가 오늘의 물질주의, 국가주의, 차별주의다. 그 결과 젊음의 반항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의 자아분열이다. 이것이 낫지 않는 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생각의 힘은 여러 가지면서도 통일되는 데 있다. 통일이 못되면 생각은 자기를 망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나? 개인이 미쳐도 큰일인데 인류 전체가 미칠 때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미치지 않으리라고도 누가 단언하겠는가? 생각의 가장 귀한 점은 스스로를 억제 통제할 줄 아는 데 있다. 그러므로 생명의 본질은 자유에 있지 않은가?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가 오늘 환란을 당하는 것은 우리 전에 있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한 일이 우리가 아니고는 완성될 수 없게 하기 위하여서라고 했다. 그것이 믿는 마음이요 그 믿음이 세계를 건지는 마음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각이 가장 활발하고 맑은 때는 젊은 때다. 젊은이는 감격적이요 이상적이다. 그것은 젊은 때에야말로 전체의 의지가 가장 왕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세상을 건지는 위대한 종교는 모두 젊은 혼에 의해서 일어났다. 오늘의 젊은이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신은 감응(感應)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에 적연부동(寂然不動). 감이수통(感而遂通)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듯한 가운데 전체의 뜻에 통할 수가 있다. 전체는 어진 것이요 거룩한 것이다. 제 일을 제가 스스로 결정하는 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밝히고 가라앉혀 거기 초점이 잡힐 때 그 거룩하고 어진 뜻에 통할 수 있다.
그러나 또 알아야 할 것은 그 거룩한 뜻은 틀렸다 볼 때는 사정없이 짤라버린다는 일이다. 한때 지구 위에는 굉장한 식물이 번성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멸종돼버렸다. 자연과학은 환경의 변동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알고도 모르는 말이다. 그것은 아무 설명도 되는 것이 없다. 마음은 결코 그런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아니다. 알 수 없는 까닭을 캐고캐고 죽으면서도 캐는 것이 마음이요, 그 마음 때문에 영의 고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환경의 변천 때문이라는 어반중한 설명으로 우리 마음을 속여서는 아니된다. 있을 때 뜻이 있어 됐으면 없어질 때도 뜻이 있을 것이다.
또 한때는 굉장히 큰 파충류가 지구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그것도 멸종돼 버렸다. 까닭이 뭘까? 그 거룩한 뜻은 왜 그것을 냈다가 없애버렸을까?
이런 모든 수수께끼의 풀리는 단 하나의 길은, 그것으로는 전체가 자기의 뜻을 드러낼 수가 없어서였을 것이라고 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큰 뜻에 합치 않으면 망할 것이다. 그의 큰 뜻이 뭔가? 우리로서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 우주를 더 자라게 하여 완성하는 지경에 가는 것이라고 할 수야 있지 않을까? 생명에는 중지도 있을 수 없고 실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진화의 절정에 섰다 하더라도, 책임이 중대하니만큼 잘못이 있을 때는 사정없을 것이다. 지공무사(至公無私)다.
그런 교만한 생각에 빠져 인간 자기만을 알지 자기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 그 결과 정신분열을 일으켜 제 지체가 제 지체와 싸우는 그 믿음이 능히 전체의 큰 영원한 뜻을 알아낼 수 있을까? 영원한 권위에 반항한 인간이 능히 스스로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인류는 이러다가는 멸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망상일까? 아닐 것이다. 과학적임을 자랑하는 그 자신들이 솔직히 손을 들고 자기네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의 고백 아닌가?
그럼 그때에 어떻게 할까? 온 세상이 다 그릇된 문명 향락에 취해도 한 사람 노아가 있어 그 망하는 세상을 건졌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작용될 이야기일 것이다.
누구나가 건지자는 용기를 내야 할 것이다. 진실된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믿어야 할 것이다. 죽음 가운데서 영원한 삶을, 혼란 가운데서 의미를 믿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씨알을 내세우고 싶다. 전 인류는 망할지 몰라도 새 인류의 씨알은 여기서 나와야 할 것이다. 진화는 언제나 그 길을 걸어 왔다. 전 종족을 사정없이 버리는 것은 어느 모퉁이에 뵈지 않게 제 씨알을 기르기 위해서다. 자비의 하나님은 또 엄격한 심판의 하나님이다.
학자들의 말이 일치해서 비관적인 것은 주의할 만한 일이다. 인구는 불과 몇십년 내에 폭발할거라지, 천연 자원은 끝이 날거라지, 권력 국가들은 회개할 생각을 아니하지, 핵무기는 점점 더 무서운 것이 생기지, 그 말로는 어찌될까? 그것은 생각하는 마음을 한 점으로 몰아치는 일 아닐까?
그 한 점이 뭐냐? 새 인류의 씨알이다.
그런 시점에서 젊은이의 대부분이 향락에 취한다는 것은 기막히는 일이다. 멋이 뭐냐? 멋으로 인생이 건져지느냐? 엔죠이가 뭐냐? 엔죠이로 역사가 건져지느냐? 그것이 젊은이의 본뜻이 아닌 것을 안다. 방향을 못 찾은 반항심의 역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동정한다. 그러나 역정으로 이 세계를 건지지 못한다. 겸손해야, 겸손만이 거룩한 뜻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다.
젊은 마음이 생각을 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생각이 전체의 거룩한 큰 뜻을 깨닫지 못하고 제 열정과 재주에만 취할 때 무서운 위험이 온다. 우리 조상은 거기 대하여 많은 쓰라리고도 무시무시한 경험을 가졌다. 그러므로 옛날의 지혜의 핵심은 삼가라는데 있었다. 삼간다는 것은 자기의 받아든 것이 무한히 귀하고 위대한 것을 알아, 책임감과 용기를 가지기는 하면서도 거기 거룩하고 신비로운 생명의 지성소가 있어서, 감히 그 문턱을 넘어서는 아니되고 무한히 찾으면서도 참아야 하는 것을 알아, 계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태도다. 구약 창세기에 있는 선악과 이야기는 이것을 가장 엄숙하게 가르치는 말이다. 그러나 창세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뜻은 옛날 모든 원시 사회에서 내려오는 모든 설화 속에 공통으로 다 들어 있는 경계의 교훈이다.
문명이 놀랍기는 하면서도 한가지 크게 잘못한 것은 자연은 무엇이나 다 마음대로 써서 좋다는 생각이다. 그러나다 써도 좋은데 거기 써서는 아니되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그것은 아니씀으로 씀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인류에게 큰 경고장을 내리는 가지가지의 공해 곧 오염은 맨첨의 정신의 더러워짐에서 나왔다. 따먹어서는 아니되고 무한히 감사하고 씹어보는 마음으로 바라보아서만 먹음이 되는 것을, 만지고 따먹는 것이 곧 더럽힘이다. 오늘의 젊은 마음의 할 일은 이 더럽힘을 제해버리고 이날껏 짓밟아 거칠어진 동산 속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새 세계로 통하는 오솔길을 찾아내는 데 있다.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음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
씨알의소리 1973년 5월 22호
저작집30; 3-295
전집20; 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