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우 延基羽 (?~1911) 선생은 삭녕(朔寧)[현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옛 지명] 출신으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1908년 1월의 13도 창의군(倡義軍) 서울 진공 작전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연기호(延基浩) 또는 연봉렬(延奉烈)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연기우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 시절 동료였던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6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연천(漣川)과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활약하며 적을 크게 무찔렀다. 연기우는 군인 출신이라 군율(軍律)에 엄격하였고, 과단성 있는 지휘로 부하들과 지역민의 신망을 얻었다
「일본인이 가장 꺼려해서 그 아들을 잡아다가 거금을 주고서 그 아버지를 유인해 오도록 시키면서 만약 귀순한다면 총애하여 벼슬을 내릴 것이라 하였다. 연기우가 분노하며 말하기를 ‘내가 의병을 일으킨 것은 다만 대의(大義)를 부식(扶植)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말을 한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휘하 병사들에게 아들을 포박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많은 의병들이 울며 처형을 중지하라고 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울지 않은 자가 없었다.」
강화 진위대 부교 출신으로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에 격분해 강화진위대 군인들을 이끌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될 때 선생의 의진을 비롯한 주요 의병부대는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였다.
1907년 가을 이인영(李麟榮)[1867~1909]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이 조직되어 서울로 진격할 때 연기우는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인근까지 진격하였으나 다른 의병들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상을 당해 진격 작전 중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패배의 한 요인이었다. 서울 진격 작전이 실패한 후 연기우는 1908년 2월 허위(許蔿)[1855~1908]를 총대장으로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홍인관(洪仁觀)·이병채(李秉采)·조수연(趙壽淵)·김규식(金奎植)·장순원(張洵遠) 등과 경기도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908년 6월 허위가 체포되고 10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연합 의병은 와해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경기도 양주로 모여든 연합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여 일본군과 4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선생은 서울진공작전 중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나 일제의 경비가 느슨한 틈을 타 탈출하였다.
1908년 13도창의대진소가 해산되자 선생은 서울, 경기, 황해지역 의진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임진강을 넘나들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신무기를 구입해 무장을 강화하였고,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군자금과 물자를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특히,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지역 주민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았다.
1910년 일제는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해 연기우 의병장을 비롯한 경기, 황해지역 의병을 탄압하였다. 이후 연기우 의병장에 대해 1911년 가평에서 일제 헌병대와 전투 중 순국하였다는 설과 1914년 인제에서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순국했다는 설이 있다.
정부는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연기우 의병장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는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연기우 의병장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공훈선양 학술강연회를 열고 8월 한 달간 천안 독립기념관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선생의 생애와 의병활동을 담은 기획 사진을 전시한다.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 연기우(延基羽, 미상~미상) 의병장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