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이었던 고성(固城) 이씨(李氏)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깃들이어 있다.
이때 고성이씨 신부께서
당신의 남녀비복을 한명도 빠짐없이 불러 대청 앞에 모이라 하였다.
대청에 자리를 단정하시고 모인 노비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오늘로부터 혼사하여 0씨댁 사람인즉
주인이 떠난 이 집안에 남을 너희들이 다시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기보다
이제 (자유로운)양민으로 살면서 주인 떠난 집을 더욱 흥성하게 하길 바란다."
고 하시며 그 자리에서 남녀노비문서 삼백여 장을 불에 태웠다.
뿐만 아니라
"너희가 지금으로부터 속량을 하였으나
일조일석의 식량이 없으면 어찌 살 수 있느냐.
고기가 물이 없는 마른 못에 있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집안 재산 가운데 일천석의 전답을 줄 것인즉 너희는 평균분배하야 가지고
생활하여 우리 부모가 구거(舊居)하시던 이곳을 떠나지 말고
각각 옛정을 나누도록 하여 달라."고 하시니 모두 눈물을 펑펑 쏟더라는 것이다.
아들인 약봉(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으로
진사와 참의의 낮은 벼슬을 하였는데,
약봉이 어렸을 때에 멀리 유배를 갔다가
배소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약봉의 어머니는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었다고 한다.
효부였던 그녀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해 어린 약봉을 업고 귀양지에 가 유골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경북 안동군 일지면 망호동으로 가는 도중
이곳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었다.
쉬어갈 곳을 찾았지만, 인적이 드문 산중에
인가라고는 한 채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장님의 환상이었을까?
갑자기 커다란 기와집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인한테 사정을 하고 하루 밤 신세를 졌는데,
아침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니 기와집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야트막한 산자락의 풀밭 위에 누워있는 것이었다.
이상하기도 했지만, 다시 길을 떠나기 위해 유골이 든 관을 들려고 하자
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아무리 애를 써봐도 움직이지 않아,
마침내 유골을 그 자리에다 모시기로 하였다.
마침내 땅을 파 내려가자, 그 안에는 훈훈한 기운이 감돌면서
부드럽고 오색 빛이 감도는 혈토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신께서 눈 먼 며느리의 효성에 감동하여 명당을 잡아 주었구나
생각하고 장례를 모두 마친 다음,
이씨는 친정이 있는 서울 약현(藥峴)에 올라와
부지런히 술과 떡을 만들어 팔아 어린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전통 음식인
약과나 약주의 명칭은 약봉의 어머니 고성 이씨가
약현에서 만들어낸 음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약봉의 호(號)도 약현에서 기인하였음은 물론이다.
고성 이씨는 이제 남편 옆에 자리를 잡고 편히 잠들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