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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빛, 고려청자를 만나다
“여기 있는 청자 파편들은 선생님이 만들었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깨신 거예요?”
“아니에요. 이거 다 고려 때 거예요.”
“아 그래요? 이거 제가 이렇게 만져도 되는 거예요?”
“고려 때 것을 설명해드린 거예요. 아무리 설명해줘도 귀에 안 들어와요. 그러니까 직접 보라고.”
“와, 박물관에서 보던 것들이 여기에 다 있네요.”
4월 1일 오후 전라북도 부안 보안면 유천리 작업장에서 만난 이은규 사기장은 조선시대 백자와 같은 다른 도자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려시대 청자는 아름답다고 설명하는데 열정적이었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도자기와 파편, 그리고 책자를 하나하나 들어 보이면서 그 자신도 감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천 년 전 전라북도 부안 유천리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은 청자를 빚었다. ‘천년의 빛’이라고도 불리는 고려청자는 단아하고 유려한 선의 흐림과 현대기술로도 따라 하기 힘든 맑고 신비로운 비취색의 멋을 자랑한다. 청자는 송나라에서 먼저 만들었지만, 뛰어난 비색과 상감기법은 송나라도 따라 할 수 없는 고려만의 기술이었다.ᅠ
송나라 귀족들도 송나라 청자보다는 고려청자의 비색을 더 높이 평가했는데, 그중에서도 독특한 상감기법의 ‘상감청자’를 선호했다. 부안 유천리는 상감청자의 대표적인 생산지다. 이은규 사기장(62.전라북도 무형문화제 제29호)은 이 터에서 부안의 숨겨진 고려비색 재현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석같은 비색에 감탄하다
비색의 ‘비’는 한자로 물총새 비(翡)자를 사용하는데, 바로 물총새의 깃털이 띠는 색깔이다. 물총새의 사진을 보면 푸르스름한 기운이 도는데, 딱히 어떤 색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오묘하고 그윽한 색감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봤던 고려청자의 색만 해도 100가지가 넘는데, 그중에 고려청자 전성기 시대에 만들어진 ‘바로 그 비색’을 재현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은규 사기장은 그 색을 “보석 같다”고 표현했다. ᅠ
고려청자의 모양도 백자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멋을 내더라도 과도하지 않은, 그야말로 세련미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이은규 사기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리 역사상 유물 중에서 고려청자같이 잘 생긴 게 없어요. 백자는 10분의 1도 못 쫒아 와요.ᅠ청자는 아주 선이 곱고 세련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백자는 단순해요. ‘촌아줌마’같죠? 그런데 청자는 ‘기생 팔방미인’처럼 잘 빠졌죠? 분청사기나 백자는 서민적이라고 하고, 청자는 귀족적이라고 해요. 쉽게 말해서 청자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어요.”
사실 고려청자 하면 부안이 아닌 강진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부안은 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안의 고려청자가 강진의 고려청자보다 우수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이은규 사기장은 강조해 말했다. ‘부안 고려청자’ 도예인으로서 그의 자부심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강진에선 높이 50cm를 넘는 청자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부안에서는 1m를 넘는 청자가 발견된 점은 부안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은규 사기장은 “기술이 좋아야 큰 것을 만들 수 있는데, 그 기술이 없으면 크기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려청자의 주재료인 모래 역시, 점토질이 많아 큰 것을 만들 수 없는 강진과 달리 미세하고 깨끗해서 크게 만들 수 있었다고 이은규 사기장은 부연했다.
뒤로 가는 역사, 고려청자의 재현
이은규 사기장은 인생의 대부분을 고려청자와 함께 했다. 자부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고, ‘장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충남 공주 출신인 이은규 사기장은 큰형인 분청사기의 대가 청파 이은구 선생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흙을 만지기 시작했다.
“17~18살 때부터 도예를 시작했죠. 그때 시대는 못 먹던 시대였어요. 초등학교도, 고등학교도 안 가고 기술을 배우던 시기죠.” 이은규 사기장은 큰 형의 소개로 해강 유근형 선생 문하에서, 또 큰형에게 십여 년 고려청자의 비법을 배웠다.ᅠ
그러다가 20대 후반쯤 됐을 때, 이은규 사기장은 고려청자 재현에 뜻을 품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됐다. 그는 1986년 부안으로 발길을 옮겼다.ᅠ예로부터 부안지역은 흙과 물, 나무가 풍성하고 해상을 통한 교통이 발달해 청자 굽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형님 일을 도와주다가, 돈이나 그런 걸 떠나서 누군가 한 명은 뒤로 가는 역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옛날 사람들이 하는 걸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데, 전부 앞으로만 가려고 하니까 옛날 사람들이 뭘 했는지를 모른단 말이에요.”
이은규 사기장은 옛날 고려청자를 굽던 유천리에 정착해 ‘유천도요’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고려청자 재현에 전념해왔다. 그는 전해지는 기법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 실험해보고, 또 그것들을 이곳에서 출토되는 청자 파편들과 비교해가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지난 2003년 고려비색을 재현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전북에선 이런 그의 고려청자 제조기법과 장인정신을 인정해 2004년 9월 10일 전북 무형문화제 제29호 사기장(청자제작)으로 지정했다.
그가 재현해 낸 고려청자의 표면을 30배율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투명한 구슬모양이 보인다. 그 안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점들이 있다. 이는 유천리 일대에서 발굴된 청자파편와도 거의 일치한다고. 느릎나무 잎이나 떡갈나무 잎 등 자연에서 채취해 만든 잿물을 입히고, 전통 재래식 가마에서 구어야 이러한 투명한 구슬모양이 형성될 수 있다.
이처럼 고려청자를 재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고려시대 이후 조금씩 다른 재료와 방법으로 모양이 달라져온 만큼, 천 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똑같이 만드는 일은 많은 노력과 연구가 뒤따라야했다. 이은규 사기장은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재현이라고 하지만 완벽하게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봤을 때 흡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 아직 옛날과 똑같이 만들었다고 보긴 어렵다”며ᅠ“거의 80~90% 근접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장인은 멈추지 않았다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했을 때 상황이 어땠나요?”
“그 날은 일진이 좋았죠. 바람이 안 불어서. 하늘의 운이에요.”
이은규 사기장은 항상 고려청자 재현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특히 기압과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시간이 조석으로 변한다고 하잖아요. 밀물의 격차 때문에 바닷가에서 6시간마다 바람 불어요. 그 시간에 딱 걸리면 작품이 잘 안 나오죠.” 이은규 사기장은 ‘가마’를 ‘아궁이’에 비유했다. 바람이 불고 궂은 날씨에는 아궁이에 불이 잘 안 때지고, 건조한 날에는 불이 잘 때지는 것과 같은 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은규 사기장이 결국 고려청자 재현에 거의 다다른 것은 셀 수 없는 실패에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는 긍정적인 마음과 자신감이 있었다. 이은규 사기장은 고려청자를 다룰 때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진지함을 보였지만, 그 외 일상에서는 ‘하하호호’ 웃음이 가득했다. 수줍음 속에서도 다른 사름들과 잘 어울렸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청자를 만드는데 저만의 철학 같은 건 없어요. 항상 하는 일이니까, 잘 나올 땐 잘 나오고 안 나올 땐 잘 안 나오고 그러는 거죠. 거기에 생각이 묻혀 있으면 작업을 잘 못해요. 실망하지 않고, 잘못 나오면 ‘또 잘해야지’ 하는 거죠. ‘다음에는 잘 나올 것이다’라는 희망을 갖고 하는 거죠. 현대가마에서는 실수를 안 하면 다 잘 나오는데, (전통가마에서 하는) 이것은 하늘의 운이에요.”
“잘 안 나온 청자는 깨고 그러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영화나 TV 속에서 인상 깊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지, 잘 안 나오면 다른 용도 그릇으로 쓰곤 하죠. 하하.”
일본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목숨 걸었던 고려청자
이은규 사기장에겐 아직 숙제가 남아있다. 바로 후대 양성이다. 그동안 이은규 사기장에게 고려청자를 배운 제자는 많이 있다. 공장이나 박물관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은규 사기장 못지않게 계속해서 재현에 힘을 쏟고 전통을 이어나갈 후대가 필요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은규 사기장은 이를 “정확한 제자”라고 언급했다.
이은규 사기장은 선조들이 고려청자를 목숨과 재산을 걸고 지켜왔다며 고려청자 전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고려 말쯤, 일본 사람들이 기술이 없어서 대나무를 자르거나 나무를 깎아서 그릇 만들었어요. 그런데 고려에서 만든 사기그릇 보니까 첨단예술 아니었겠어요?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계속 뺏어갔는데, 그때 고려 사람들은 안 뺏기려고 버티다가 칼부림을 당해 많이 죽었죠. 그래서 고려가 국법으로 해안가에서 50리 안쪽에선 가마를 굽지 말라고 정해서, 안으로 들어와 만들다 보니 흙도 바뀌고 질이 떨어지게 된 거죠.”
이은규 사기장은 또한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을 언급하며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상기시켰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아버지의 부고로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논 4만 마지기(800만평)라는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아 이를 서화와 서책, 도자기, 석조물 등 귀중한 문화재를 사들이는데 썼다.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품은 값을 따지지 않았다.ᅠ그중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을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2만원에 사들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간송 전형필 선생은 정말 대단한 거죠. 일본 사람들이 5배인 가격에 산다고 해도 안 팔았어요. 자존심 때문에. 그래서 지금도 남아있죠.”
TlP. 고려청자 재현 비법
이은규 사기장은 유천리에서 나는 흙을 직접 채취해 고려청자를 만든다. 포크레인으로 5미터 정도 땅을 파면 하얀색의 흙이 나오는데, 이를 ‘고령토’라고 부른다. 그 흙을 가져와 채로 불순물을 걸러 고운 입자만 남게 한다. 이때 자석으로 흙속에 포함돼 있는 쇳가루나 철분 등을 제거한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청자에 까만 점들이 박히게 된다.
그 다음에 흙을 밟아주고, 또 손으로 반죽하면서 흙 속에 있는 공기를 빼주고 찰지게 만든다. 반죽된 흙을 물레 위에 놓고 돌려서 기형을 만든다. 크기가 클수록 많은 힘이 들어간다. 이은규 사기장은 인터뷰가 있는 이날 직접 물레를 돌려 매병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레를 돌리는 순간 눈빛부터 달라졌다.
기형이 만들어지면 상감을 한다. 상감은 고려의 독창적인 도자기의 문양ᅠ기법ᅠ중의 하나로 몸체에 다른 물질을 박아 넣어 문양을 나타내는 장식ᅠ기법이다.ᅠ이은규 사기장은 학과 구름 모양으로 조각을 했다. 그 파인 곳에 백상감이 들어가게 한 후 건조시켜 칼로 하얀 부분을 얇게 긁어내서 파인 부분만 백상감이 들어가게 한다.
다음 순서는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를 하는 것이다. 12시간 정도 850~920도 높은 온도에서 한다.
그 다음엔 위에 유약을 바른다. 문헌과 구전으로는 느릅나무 잎 유약(잿물)을 만드는데, 지금은 대량으로 얻기 쉽지 않은 나무다. 이에 이은규 사기장은 떡갈나무 잎과 도토리나무 잎을 7~8월에 따서 태워 유약 재료로 사용한다. 순수 천연재료임은 분명하다.
이후 18시간 정도 재벌구이를 한다. 가마에 불을 때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들어간다. 그 다음에 3일 정도 가마를 식힌 후 꺼내면 겉이 반짝반짝 한 완성된 고려청자를 볼 수 있다. 어떤 기형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일련의 과정을 다 합치면 한 작품을 만드는데 수개월이 걸린다고 볼 수 있다.
이은규 사기장은 고려청자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재료를 꼽았다. 부안 유천리에서 나온 흙, 그리고 천연재료로 만든 유약 등이 바로 그것이다.
유천 이은규 사기장
1970.9. 인간문화재 해강 선생 문하 시사
1976.5. 청파 이은구 선생 문화 시사
1986.4. 유천도요 설립
1992.6. 부안교육청 교육장 감사장
1993.4. 전북기능경진대회 금상(도자기부분)
1993.10. 전국기능경진대회 장려상(도자기부분)
1994.5. 일본 가고시마현과 교류전
1994~1997. 애국가 도자기 제작 장면 출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29호(청자제작) 지정
2008.12. (사)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도자분야) 공로상 수상
2008.12. 전라북도 부안군 문화장수상
글 최지현 / 영상·사진 최재덕
최종편집 : 2015-05-03 16:20:34
ⓒ민중의소리
유천요 이은규선생님 부안 청자를
재현하고 계시는 유천요를 방문시
받은 선물
향로 매병 사발
감사드림니다
멋진 작품남기시기를 기원함니다
청담 변동해 합장
이은규 선생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