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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여행
배낭을 메고
친구들과 2박3일 일정으로 브라디보스톡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짧은 일정이라 배낭을 메고가자한다. 아내는 여행가방이 편리할 것이라고 했지만 가방을 끌고 갔다가 모두 배낭 메고 나오면 혼자 불편할 것 같아 배낭을 메고 가기로 했다. 준비물, 주의사항 등에 대한 상세내용이 카톡방에 활발히 올라왔다. 그중에 킹크랩 선물 구입시 담아올 냉동백 준비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여행가서 킹크랩 까지 사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공항에서 만난 친구들
아내가 틈만 나면 ‘여행가려니 가슴이 설레지?’하고 나보다 더 좋아한다. ‘하나도 설레는 게 없어’ 그때마다 그렇게 대답했는데 배낭을 싸면서도 또 그렇게 묻는다. 나는 설렘보다 걱정이 더 앞선다. 멋도 모르고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지만 패키지여행이 아니라 자유여행이란다. 일행 중 러시아말을 할 줄 아는 친구가 없는데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에서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겠다는 것인지? 숙식과 이동문제, 기타 각종소통문제가 은근히 걱정된다. 러시아 사람들이 다소 폭력적이라는 소리에 불안이 더해진다. 여행사에 지급한 필요경비 외에 개인별로 루블화를 8,000불씩 준비하기로 했는데 환전이 까다로운 일이라 은행에 밝은 용화가 자원해서 일괄 환전을 했다. 5,000루블은 공동경비로 삼환이가 맡아 관리하고 3,000루블은 개인이 소지하기로 했다.
7월7일, 출발하는 날 나는 공항3층 온누리 투어에서 별도로 주문한 포켓와이파이를 수령한 후 일행이 모이자는 곳을 찾아 합류했다. 모두들 회장의견에 따라 배낭을 메고 홀가분해 보이는데 재훈이 혼자서 여행용가방을 끌고 왔다. 보는 주변이 왠지 어색하고 불편스럽게 느껴진다.
영빈이, 희태, 형욱이가 러시아 알파벳을 열심히 공부했나보다. 자료도 많이 준비해왔다. 인터넷자료 한번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온 내가 부끄러워진다. 설렘이란 준비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인데 많이 부끄러워진다.
아무도 술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용화가 면세점에 가서 코냑 한 병을 사자고 했다.
이후 용화는 코냑을 담은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다니며 ‘내가 분위기를 위해 사자고 했더니 말을 꺼내었다고 나보고 이 무거운 것을 들고 다니라한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여행준비 과정에서 영빈이는 늘 그래왔듯이 회장으로서 합리적인 방안을 잘 제시해주어 사안마다 매듭이 술술 잘 풀려왔다. 출발에 앞서 불안감이 없지 않지만 회장의 역량에 무한한 신뢰를 가져본다.
북한상공을 통과한다는데
러시아소속인 오로라 항공의 기내는 제주도를 오가는 국내기 정도의 수준으로 규모가 작았다. 러시아스튜어디스들의 표정은 경직되고 무표정해 보였다. 시간이 되니 기내안내방송이 이어지는데 무슨 말인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다. 기내 반 이상이 한국 사람인데 너무 성의가 없다 싶었다. 이런 현상은 귀국비행기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비행기는 거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는데 러시아어로만 방송을 고집하는 항공사의 방침이 오만스러워 보이기도하고 무시당하는 기분도 들어 괘씸했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의 스튜어디스들의 서비스 수준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구나 싶어 새삼 귀하게 느껴진다. 좌석에 비치된 자료를 보니 러시아 문자인 모양인데 알파벳 문자 그대로에 몇몇 글자는 살짝 비틀어놓기도 했고 웃기는 그림 같은 문자도 들어있다. А В М Т 등과같이 멀쩡한 글자도 있고 И Г Я Д Б 과같이 뒤집어지거나 깨어지고 쭈그러진 글자도 있는가 하면 Ж Э Л 등과같이 조잡스런 글자들도 있다. 서른 세자로 된 이름하여 ‘키릴문자’라고 하는 것이다. ‘알파벳을 갔다 쓰려면 멀쩡하게 써야지 비틀어 자기들 고유문자처럼 쓰면 되남? 표절도 아주 질이 나쁜 표절이네’ 했더니 희태가 알파벳을 쟁반에 순서대로 받아오던 사람이 술이 취해 넘어져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어떤 것은 깨어지기도 했는데 기억을 더듬어 짜맞추다보니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Я같은 것은 거꾸로 된 채 쓰이고 있는 것이란다. Я을 보고 ‘야! 그것은 거꾸로 되었잖아?’하고 지적했는데 그 소리에 ‘야’로 발음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설명에 정신없이 웃었다. 같잖은 기내방송의 언짢은 기분을 일시에 싹 날려버렸다. 희태는 대학시절부터 늘 그랬다. 그의 휴머니티(humanity)는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평생 장발장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집요한 자베르 경감은 자신의 냉철함과 투철함이 장발장이 보여준 휴머니티에 비해 너무나 부끄러워짐을 느껴 세느강에 투신자살을 하게 된다. 이기적이고 탐욕이 넘쳐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는 세상에서 희태와 같은 훼손되지 않은 인간미가 참으로 값지고 고귀한 것으로 보여진다. 건강하여 늘 향기롭고 더욱 발랄했으면 좋겠다. 비행기는 러시아항공이라 북한상공을 지나간다고 했다. 바깥풍경이 궁금했지만 좌석이 내측이라 소란 떨지 않고 그냥 잘 수밖에 없었다.
첫째날 거리노점상 무스림 여인
드디어 블라디보스톡
두시간만에 비행기는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내렸다. 공항이 한산하여 시골간이역 같은 느낌이 든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차량 기사가 오삼환 이름을 적은 피켓을 들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호텔, 호텔에서 공항까지의 이동차량은 여행사에서 조치한다고 해서 다소 안도가 되었다. 차는 고속도로 비슷한 길을 한 시간 이상 달려 시내에 진입했고 거기서 부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예약된 호텔에 도달했다. 호텔에 도착하자말자 삼환이가 입실 수속을 위해 로비직원과 열심히 소통을 하는 모습이 여간 진지하지가 않다. 401호 희태, 형욱. 402호 삼환, 정태. 403호 재훈, 용화. 404호 영빈, 의중이 배정되었다. 삼성급(三星級) 호텔 가번(Gavan)은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편리했다. 언젠가 패키지로 갔던 중국여행에서 화장실 물이 막혀 곤욕을 치른 기억이 끔직하다. 오후 다섯시 정도가 되었나보다. 짐정리를 한 후 관광 및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걷기로 했는데 잘 정비된 길이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걷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주변을 구경하며 두어시간을 걸은 모양이다. 동해안 해파랑 길을 걸을 때 생각이 새롭다. 그때는 단단해 보이는 형욱이가 의외로 고통스러워했는데 용화가 참석한 이번에는 모두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어있다. 그러나 용화가 누구냐? 테니스로 단련된 내공으로 끄떡없어 보여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걷는 도중 노점에서 체리, 살구같은 과일을 파는 여인이 한국말을 하고 있어 반가워 쳐다보았다. 중동풍의 곱상스런 아줌마였는데 우리는 도와주고 싶어 체리며 살구등을 많이 사주었다. 여인은 신이 나서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 ‘한국서 5년 살았어요. 김포에서 살았어요’ 하는 말을 흥분된 어조로 반복했다.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자기는 무스림이어서 낯선 남자들과 사진을 안 찍는다고 했다. 저녁식사는 킹크랩으로 유명한 주마(zuma)라는 식당이다. 식당가를 헤매다가 가까스로 주마(zuma)를 찾아 들어갔으나 예약이 안 되어있어 자리가 없단다. 내일 점심시간대를 예약 해놓고 식당 직원에게 소개받은 다른 음식점을 찾아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태국, 중국, 러시아식의 퓨젼음식 이란다. 그러나 거기도 한 시간을 기다려야 자리가 난다고 해서 광장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했는데 삼환이는 음식점 카운타 주변을 지키며 자리확보를 위해 엄청 수고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영빈이가 1Km 정도 떨어진 부산통닭이라는 곳을 찾아서 닭튀김 두 봉지와 감자튀김을 사왔다. 신기하게도 딱 우리 입에 맞는 양념으로 맛이 너무 좋았다. 감자튀김도 일품이었다. 거기 가서 저녁식사를 해도 좋을 뻔 했다. 겁도 없이 혼자 그 먼 거리에 가서 먹을 것을 사오는 영빈이가 참으로 놀랍다.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냉동백은 뭣 하러?
벤치에 앉아 저녁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내가 냉동 백 이야기를 꺼내었다. 회장이 킹크랩 선물 준비할 사람은 담아갈 냉동 백 가져오라 해서 번민하다가 그냥 왔는데 어째 준비해온 사람이 한명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용화가 자기는 그 말했다가 ‘노량진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거기까지 가서 구차스럽게 킹크랩을 사오려느냐?’며 마누라한테 쿠사리(?)만 먹었노라 했다. 재훈이가 받아 열변을 토한다. 아내가 ‘번거롭게 냉동 백을 뭣 하러 가져가려느냐?’ 하는 것을 회장이 공금으로 킹크랩 사준다는데 나 혼자 준비 안 해가면 무슨 낭패냐며 설득을 시키고 충실히 준비해왔더니 킹크랩 준다는 말이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항변을 한다. 내가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재훈아 너 그것 때문에 여행용가방 끌고 왔냐?’했더니 그랬는데 킹크랩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지금 속 끓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혼자여행용가방을 끌고 와 공항에서부터 의아했었는데 스토리가 너무 즐겁다. 재훈이의 엉뚱한 말이 청량제가 되어 지친 시간에 귀한 웃음으로 무료함을 잊게해 주었다. 저녁식사 후 호텔까지는 택시 편으로 돌아왔다. 오늘 걸은 거리가 17,000보란다. 케익과 마실 것으로 401호에 모여 형욱이 생일파티를 열었다. 용화가 애써 들고 온 코냑이 유감없이 빛을 발했다.
독수리 전망대에서 보이는 금각교(이날은 안개로 보이지 않아 입수한 다른 사진을 활용)
비가 내리는데
호텔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입구를 나오니 이슬 같은 비가 내린다. 택시를 두 대 불러 독수리 전망대로 향했다. 해발 214m 비교적 높은 언덕바지에 있는 독수리전망대에 오르니 안개가 자욱해 한치 앞도 볼 수가 없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택시가 떠나버리면 어떻게 돌아가느냐며 왔던 택시를 타고 돌아가자고 했다. 걱정으로 와글거리는 모습이 출애굽 때 홍해 앞에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던 이스라엘백성들의 다급한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돌아가는 문제를 의논하는 중에 여자운전사는 성질을 부리고 혼자 떠나 버렸다. 의논이라지만 한쪽은 러시아말을 하고 한쪽은 영어로 말하니 제대로 통할 리가 없다. 삼환이와 희태가 운전기사와 통하지 않는 말을 열심히 주고받으며 애를 쓴다. 삼환이는 지극정성으로 영어로 이야기하고 희태는 메모지를 꺼내어 러시아 알파벳을 적어가며 거들고 있는데 저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의사소통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어렵쇼 기사아저씨가 밝은 표정으로 독수리상 앞으로 따라오라 손짓하며 앞장을 선다. 사진촬영을 해주겠단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서로 안 통하는 문제를 알파벳으로 썼더니 쟁점이 풀려 해결되었단다. 참으로 대단들 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망대 아래 보통날이면 바다와 금각교가 장관인데 안개로 인해 볼 수 없다고 영빈이가 못내 아쉬워한다. 우리를 위해 택시가 한 대 더 왔다. 우리는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 타고 혁명광장으로 출발했다. 혁명광장은 지금 중요한 행사가 개최되는 블라디보스톡의 대표적인 광장인데 1937년 한인들을 집합시켜 중앙아시아로 추방시켰던 아픔이 서린 바로 그 광장이다. 광장한편에서 꽃을 파는 여인의 얼굴이 왠지 친숙하게 다가온다. 물어봤더니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까레스키란다. 그 얼굴에 반가움이 넘쳐흘렀는데 가슴속에 흐르는 조국 대한민국을 만난 기쁨이었으리라. 까레스키! 조국이 힘이 없어 관리를 못하는 동안 경작해놓았던 터전을 빼앗기고 서러운 땅으로 추방되었던 비운의 동포들, 그들을 고려인이라 부르고 있지만 그들은 고려인이 아니라 엄연히 조선인들이었다. 바로 이 혁명의 광장이란 곳에서 그들의 할아버지들이 알몸으로 쫓겨나 팽개쳐졌다. 광장에는 그들의 눈물인양 주적주적 비가내리고 있었다. 광장가운데 동상은 1917-1922년 레닌 사회주의혁명을 기념하는 동상이란다. 혁명의 광장을 지나 잠수함 박물관을 관람했다. 2차 세계대전 때 14대의 독일함대를 침몰시킨 전설적인 잠수함 이란다. 유격훈련 하듯 힘들게 좁은 문을 수없이 통과하면서 내부를 구경한 후 밖으로 나오니 관광객들 상대로 모델이 되어주는 남녀모델이 사진촬영을 하자고 권한다. 모델 한명에 100루불씩, 촬영을 했는데 의중이는 여자모델과 단독으로 촬영을 하겠다고 해서 박수를 받았다. 잠수함 박물관을 지나 영원의 불꽃을 보러 갔다.
세계2차대전 당시 참전하고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영원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365일 날씨 상관없이 꺼지지 않는다고 영원의 불꽃이라 부른단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노라니 냉전시대를 주도해온 공산주의 이념의 음습함이 벌레처럼 스물거리는 듯하다. 희태는 그 앞에서 사진도 찍고 싶지 않다며 찍사(?)를 자청했다. 모두들 ‘그래 우리는 쓸개 빠진 놈들이여’ 하며 웃어넘겼다.
종업원이 샘플로 가져온 살아있는 킹크랩
킹크랩으로 황홀했던 시간
아침 일찍 출발한 관계로 주요관광지를 다 돌아보았는데도 시간이 열한시경 밖에 되지 않았다. 킹크랩 주마(zuma) 의 예약시간은 오후 한시인데 시간이 넉넉하다. 빗길을 걸어가다 보니 선물센타가 나왔다. 러시아인형두개를 샀다. 2900루블인데 나누어 받은 3,000불을 모두 주었더니 한눈 파는 사이에 종업원이 잔돈을 한 움큼 들고 뭐라 뭐라 떠든다. 앞에 서있는 어느 여행사 가이드가 ‘650루블을 더 내라고 해요’ 하기에 3,000루블을 내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을 쳤더니 제까닥 100루블을 내어주었다. 별일이 다 있다싶었지만 아찔했다. 킹크랩에 가니 좋은 자리가 준비되어있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핸섬한 남자종업원이 와서 삼환이와 주문을 의논하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한다. 까페, 블로그 마다 한국말 잘하는 종업원으로 칭송되는 문제의 인물이다. 한국에서 2년 살았다고 했다. 어디 살았느냐니까 신촌에서 연세대학을 다녔단다. 한국말이 자유로운 스물다섯의 청년이 반갑고 기특하기 짝이 없다. 킹크랩 (1K/2,000루블) 8kg, 기타 게맛살 요리를 곁들여 시켰다. 와인은 백포도주 고급이 2,200루블인데 그것을 시키라고 권한다. 삼환이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9,000루블의 프랑스제 샤또뭔가 하는 유명한 와인을 두병 시킨다. 400,000원인 셈이다. 모두들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난색을 표한다. 삼환이는 이곳까지 와서 친구들 좋은 와인 한번 맛보이고 싶다고 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용화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어필하여 결국 2,200루블의 백포도주 두병을 시키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와인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삼환이가 친구들을 위해 최고급을 시켜주려 한 것은 참으로 귀한 충정임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삼환이를 위해 모두 박수를 보내주었다. 참으로 풍성하고 행복한 식탁이었다. 용화는 킹크랩을 마음껏 먹으니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삼환이를 우습게 보았는데 이제부터는 달리 보아야겠다, 존경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모든 것이 여유롭고 풍성하여 꿈같은 시간이었다.
신한촌을 찾아서
신한촌(新韓村)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 잡고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였다. 이 지역은 독립운동의 중추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인 대량학살사건(신한촌사건, 사월참변)등 애환이 깃들어 있던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1893년 시가지 중심부에 한인들만 집단으로 거주하도록 하는 구역을 설정하여 살게 하여 ‘개척리’라 불렀다. 그러나 1911년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시키고 서북편 외곽에 새로 설정된 구역으로 이주하도록 강제했다. 한인들은 그 곳에서 다시 피땀 흘려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독립운동가인 이동휘 선생의 집, 독립만세를 기린 독립문, 항일독립운동기관인 권업회, 교육기관인 한민학교 등... 다양한 한인흔적이 있었던 곳이지만, 현재는 신한촌 일대가 아파트단지로 변해버려서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 일행은 기념비가 있는 곳을 둘러보고 암울했던 시절 선진들의 발자욱을 더듬어 보았다.
잊혀진 땅을 생각해보며
원래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고 부여와 고구려 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조상들의 중심 활동무대였다가 발해가 멸망한 후 잊혀진 땅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땅이 조선의 땅임을 명시했다. 그 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계속되어 오다가 고종 20년인 1883년 두 나라간 국경에 관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중국 측은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고 새겨진 문장에서 토문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토문(土門)이라는 글자는 두만이라는 글과 음과 뜻이 달라 두만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토문이라는 글자는 만주지역의 지명이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는 청나라의 역사서인 청사고에 토문이라는 곳이 만주지역이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백두산정계비에 따라 볼 때 우리땅은 토문강-송화강-흑룡강 선이 된다. 따라서 그 동부지역으로 연해주 전체, 즉 우수리강-흑룡강(아무르강) 선의 남쪽 지역도 당연히 한국의 영토인 것이다. 이러한 우리땅이 관리가 부실한 틈에 이리저리 찢어발겨져버렸다. 연해주지역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위태로워진 청이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고 연해주 지역을 러시아에게 할양해버린다. 조선땅이던 연해주 지역이 모르는 사이에 러시아 땅으로 되어버리고 그곳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졸지에 남의 땅에 사는 게 되어버렸다. 두만강 하구의 녹둔도도 이때 러시아령으로 들어가고 만다. 간도지역은 더욱 어이가 없다.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이후 1909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청나라로 부터 얻어내는 대신 독단으로 간도의 영토권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간도나 연해주가 법적 權原없는 제3국에 의한 영토처리이므로 불법적이며 무효인 것이다. 당시 국력이 쇠약한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두웠다. 러시아와 청의 베이징 조약 체결 사실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두만강에서 러시아와 접하게 된 사실을 안 것은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다음해인 1861년이다. 이후에도 조선인들은 흉년이 들면 간도뿐만 아니라 연해주로 대거 이주했다. 이사벨라 비숍여사가 쓴 책에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옛날에는 삼림이었던 이 도시의 개발은 186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63년에 많은 나무들이 벌채되었고 몇 개의 판자집이 건설되었다’라는 내용이다. 그때까지 블라디보스톡은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삼림지역이었다. 뿐만아니라 비숖여사의 연해주 조선인들의 생활상도 눈길을 끈다.
‘연해주의 모든 농민은 조선 사람으로서 생활은 부유한 편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 대다수의 생활양태는 양호했으며 그들은 중국 만주에서 야윈 소를 사들여 살찌게 키워 팔기도 했다. 조선에서 살고 있는 조선 사람에게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믿기지 않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조선 사람들은 중국인들과의 야채시장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이 도시의 상권을 장악했다. 조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약하고 의심 많으며 위축된 농민들의 특징이 이곳에서는 솔직함과 독립심을 가진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다’고했으며
아울러 비숍은 ‘연해주에서 내가 본 것처럼 조선 사람의 품성과 근면성은 장래에 그 민족에게 훌륭한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나를 일깨워 주었다’고 했다. 그런 연해주 조선인들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18만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6.25때 내가 살던 고향사람들이 모두 피란을 갔는데 피란가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미피란자 (未避亂者)라고 불렀는데 마을사람들이 피란 가 있는 동안 그들은 집집마다 뒤져 땅문서와 비단이불, 귀중품을 모아 서로 나누어가진 상태였다. 미피란자들은 오랜 세월 죄의식 속에서 살았지만 남의 나라를 제 마음대로 찢어발겨 나누어 가진 자들은 전혀 거리낌이 없는데 이 몽매한 백성들이 틈만 나면 그들에게 달려가 조아리고 읍소하는 천하에 용열하고 못난 짓을 하고 있다. 이 나라가 안보도 주권도 팽개친 채 주변국 눈치 보고 비위맞추기에 급급한 저급하고 편향된 지식인과 정치지도자들의 대오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위태롭기 때문이다.
2017.7.12 石泉 김정태
키릴문자를 고안했다는 키릴형제-독수리전망대
영원의 불꽃
킹크랩에 행복한 순간
영원의 불꽃앞에서 촬영 - 그래 우리는 쓸개빠진 놈들이여!
잠수함을 나와서 단체촬영
첫댓글 블라디보스톡 2박3일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어요.
여행기가 8페이지나 되어 전편을 미리 올렸고 성격이 조금 다른 나머지 한편
'평양관에서'를 별도로 올리려 합니다
종전과 다르게 친구들 호칭을 모두 이름으로 직함없이 썼으니 양해바랍니다.
임영빈회장, 오삼환대장이 있어 우리 모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 보답은 하늘로부터 받으세요. 후한 상을 주실것입니다.
킹크랩정상가격 RUB1,800.-/kg이지만 부산데이 특별할인으로 RUB900.-/kg에 먹었다.
나는 킹크랩이 2,000루블인줄 알고 그래도 싸다고 생각했는데
900이라면 더먹을걸 그랬어 아깝다.
좋은 여핻 뜻깊은 여행하셨네요 모두 사진빨 좋네요
덕분에 블토크 간접여행 잘 했습니다.
거기에 동대선생이 들어가있다면 사진빨 끝내줄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