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설마하던 검찰의 기대를 저버리고, 강금실 변호사는 장관이 되어 법무부 청사의 문지방을 넘어섰다. 자그마한 체구라 발걸음에 실린 무게는 가벼웠으나, 검찰이 받은 충격은 최초의 달 착륙 못지않았다. 바야흐로 검찰은 해방 이후 최고의 격변기에 접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첫 조각에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정점을 이룬 이유는 ‘문화충돌’ 때문이다. 경제분야보다는 정치·사회적 변화로 물꼬를 바꿔보려는 노 대통령의 필요성과 검찰의 조직 보전 논리가 맞닥뜨린 것이다.
4·3사건의 여파로 구속된 부친
강 장관이 갖는 정치적 중량감은 그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임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통령직인수위의 한 핵심 관계자는 “개인적으로 강금실 변호사를 추천했다. 당선자가 잘 모르리라 생각했는데, 이미 점지해놓은 상태였다. 그 뒤 검찰을 비롯한 각계 저항이 있었고 실무진에서는 다른 대안을 찾아보았으나, 당선자는 사실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왜 하필이면 강금실일까.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를 전매특허처럼 달고 다닌 화려한 이력 이면에 예사롭지 않은 인생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 장관의 삶에는 출생사에서부터 현대사의 격랑과 뒤틀린 법 현실이 반영돼 있다. 제주 농림학교 교감이던 부친이 제주 4·3사건의 여파로 빚어진 이른바 ‘제주 유지 사건’에 휘말리며 구속된다. 당시엔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어서 부친은 부산과 대구로 옮겨가며 옥살이를 했고, 모친은 옥바라지를 위해 자식들을 끌고 뭍으로 나왔다. 그의 부친은 결국 무죄판결을 받고 1년여 만에 풀려났지만, 이미 고향에서의 삶은 뿌리뽑힌 상태라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강 장관은 그 무렵 경주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붓글씨를 잘 쓰고 바이올린도 잘 켰는데, 그런 예술가적 기질을 강 장관이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나중에는 강 장관까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게 돼, 모녀가 2대에 걸쳐 옥바라지를 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총명한 아이로 자라났다. 경기여고 다닐 때는 동기생 가운데 유일하게 3년 내리 우등을 했고, 아침조회 때 전교생 앞에서 애국가나 교가를 지휘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년 후배인 황덕남 청와대 법무비서관은 “공부는 물론 모든 면에서 탁월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후배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고 기억했다.
1975년 서울대에 입학한 그는 ‘가면극연구회’ 동아리에 들어가 탈춤도 배우고, 유신치하의 엄혹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워가기 시작한다. 고시공부를 하면서도 광화문에 있는 당시 유일한 사회과학서점 ‘민중문화사’를 자주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79년 서점주인 김태경씨를 만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김씨는 서울대 미학과 74학번으로 이미 학내시위로 구속과 제적을 한 차례 겪은 정통 운동권 출신이었다. 김씨는, 강 장관이 대학 1년생일 때부터 눈여겨봐온 것으로 알려졌다. 81년 김씨가 국가보안법으로 다시 구속되자 강 장관은 사법연수원을 다니면서도 김씨가 수감된 전주교도소까지 옥바라지를 다녔고, 결국 84년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남편 빚 갚기 위해 변호사 개업
부산지법 판사로 재직하던 88년에는 사회과학 전문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운영하던 김씨가 남한에서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출간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파란을 겪었다. 당시 법원은 영장담당 판사를 두 차례 바꾸는 등 김씨의 구속을 강행했고, 강 장관은 당시 판사로서 구속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검찰에 제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법원개혁에 앞장섰다. 88년 노태우 정부가 김용철 대법원장 등 5공 당시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명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2차 사법파동과 93년 서울민사지법 소장판사 40명이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대법원장에게 전달한 3차 사법파동 모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96년 강 장관은 남편의 빚을 갚기 위해 서울고법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한다. 그러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고, 확실한 보증을 요구하는 채권자들의 요구에 밀려 그는 남편의 빚을 모두 떠안았다. 상황이 계속 악화되자 두 사람은 결국 3년 전 합의이혼했는데, 강 장관은 ‘더 이상 빚을 떠맡지 않기 위해서’였고, 김씨는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검찰은 ‘부채를 피하기 위한 위장이혼’이라고 공격하며 조직적으로 반발했으나, 청와대는 조사결과 ‘미담’으로 결론내리고 검찰쪽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금도 친구처럼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사로 개업한 당시 강 장관은 경제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민변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가치를 계속 추구했다. 2000년 4월 법무법인 ‘지평’을 설립해 2년여 만에 국내 변호사만 23명이 참여한, 업계 10위의 중견로펌으로 키우면서도 ‘공익성’을 강조해왔다. 지평의 변호사들은 한해 50시간 이상 공익활동을 해야 하는 의무규정이 있어 대부분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강 장관 기용은 이런 삶의 이력만으로도 검찰개혁의 상징성을 띠는 인물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검사 출신 가운데서만 장관을 배출해야 한다는 검찰 이기주의와 사법시험 기수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낡은 서열주의를 동시에 깨는 사고의 전환을 보여줬다. 힘있는 부처엔 여성장관을 앉히지 않던 보이지 않는 차별을 극복한 첫 사례다.
자율과 견제, 검찰개혁 밑그림 완성
더 나아가 강 장관은 검찰개혁의 밑그림을 완성해놓은 상태다. 판사 시절부터 법조계 전반의 개혁방향을 함께 고민해온 진보적 성향의 젊은 판사 그룹과 민변소속 변호사들과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청와대의 박범계 민정2비서관도 들어 있다. 강 장관이 취임하자마자 “법무부의 문민화라는 명제 아래 검찰 출신 인사들을 차츰 전문 행정관료로 대체해 갈 것”이라고 개혁방향의 일단을 선보일 수 있는 것도 이런 준비 때문이다.
강 장관의 개혁방향은 ‘자율과 견제’로 요약된다.
청와대 한 핵심 관계자는 “검찰은 그동안 권력의 하청을 받아 수사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권력도 키워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고리가 끊어지고 수사에 관한 한 검찰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보장된다. 다만 사법시험 합격하고 검사라는 이유만으로 검찰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검찰독재가 일어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인사와 제도를 통해 일정한 견제가 필요하다. 일단은 시장원리에 맡기되,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때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제 운용방식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검찰을 견제하는 수단으로는 현재 대검 감찰부에서 해오던 감찰기능을 법무부로 가져와, 검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적 감시활동을 펴도록 하는 방안 등이 다각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크게는 참여정부 5년 동안에 한해서 특검제를 상설화하고, 경찰에게 수사권의 일부를 넘겨주는 방법도 확정적이다.
검찰로서는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측면보다는 자신들이 누려온 권리가 침해당하는 측면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검찰을 실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인가”라는 볼멘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특히 법무부의 검사 몫이 크게 줄어들거나, 서열 파괴에 따른 인사불안이 큰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검찰 일부선 극단적 강성 분위기
검찰조직을 지키기 위해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극단적 강성 분위기도 감지된다. 새삼스레 10년 전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93년 김영삼 정부가 막 들어섰을 때도 검찰개혁이 최대 화두였다. 수사 도중 우연찮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선거 직전 청구그룹 장수홍 회장으로부터 30억원을 받은 게 수표추적 결과 드러났다. 이 가운데 20억원은 선거자금에 쓰였는데, 나머지 10억원은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 여주인 증권계좌에 꽂힌 것으로 나타났다. 이 음식점은 김 전 대통령이 민자당 시절 즐겨찾았으며, 유명 정치인들이 여주인 치마폭에 난을 치기도 해 유명세를 타던 곳이다. 검찰은 여주인 정아무개씨를 소환했으나, 정씨는 응하지 않았고 내사는 거기에서 중단됐다. 그러나 그때부터 검찰개혁이란 말은 쑥 들어갔다”
서슬퍼렇던 초기 문민정부도 검찰의 실력을 인정하고 공생관계를 취했다는 얘기다. 김 전 대통령은 오히려 그 뒤 검찰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졌고, 김태정 총장을 임명할 무렵에는 “검찰총장은 장관 20명하고도 안 바꿔”라고 말할 정도였다.
실제로 서울지검 형사9부가 ‘요란스레’ SK를 압수수색하고, “대통령이 대북송금 특검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있도록 건의하자”고 돌출적인 의견을 낸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대내적으로는 침체된 조직의 분위기를 바꿔보고, 대외적으로는 개혁 논란으로 일그러진 검찰의 위상을 펴보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또 대검의 한 간부는 “어떤 부처든 검사만큼 일 잘하는 공무원이 없다. 검사는 명석하고 조직적이라서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받는다. 더욱이 법무부는 다른 부처와 달리 잡무를 빼고는 거의 검사들이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강 장관이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 당분간 해보면 검사들 없이는 일 못한다는 점을 깨닫을 것이다”라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강단진 모습, 여리고 예술적인 내면세계
이 때문에 강 장관에 이어 ‘지평’의 후임 대표변호사를 맡게 된 조용환 변호사는 “강 장관이 정치적 상징으로 부각되면서 기득권 세력들의 집중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 자칫 기대만 부풀리고 성과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눈높이를 낮춰 강 장관이 안착하는 것만 해도 큰 성과로 봐줄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강 장관은 사회적 발언을 할 때는 대단히 강단진 모습을 보이나, 내면세계는 여리고 예술적 감성과 낭만적 기질이 풍부하다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다. 피아노를 잘 치고, 가곡을 즐겨부르는 노래 솜씨는 좌중을 압도한다. 틈틈이 써놓은 시는 출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질과 양을 담보하며 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특히 우리 전통춤을 좋아해, 진주 교방춤의 대가 김수악 선생으로부터는 살풀이를 전수받았는데, 김 선생으로부터 “판사고 변호사고 다 때려치우고, 나하고 같이 춤이나 추자”고 권유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또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 성품의 소유자다.
<노자>에는 “세상에 물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없으나,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는 데는 물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구절이 있다. 강 장관의 부드러움이 억센 검찰조직을 어떻게 요리할지, 그 대비되는 극적 요소 때문에라도 당분간 조명은 강 장관을 떠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