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7년 전쟁은 부녀자들에게는 큰 수난이었다. 왜군은 부녀자를 겁탈하고 포로로 데려가 노리개 감으로 만들었다. 정조(貞操)를 잃은 여성들은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거나 혼사 길이 막히기도 하였다. 이런 와중에서도 정절을 끝까지 지키려 한 이도 많았다. 왜군에게 능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가장 극한적인 방법인 자결을 선택한 부녀가 한 둘이 아니었다.
판서 윤국형이 지은 <문소만록>은 여성 수난사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임진년 난리 이후로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비록 대가세족(大家世族)이라도 모두 생업을 잃고 거지가 되어 돌아다녔으며, 여자들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왜적들에게 몸이 더럽혀진 자가 매우 많았다. 이 중에서 두드러지게 절개를 지킨 자는 조정에서 알아보고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의 변란의 화가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
정유재란 때 장성에서도 여러 부녀들이 절개를 지키려고 몸을 던졌다. 그런 이들 가운데서 의병장 변윤중의 부인 성씨와 며느리 서씨는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는 열부(烈婦) 기씨부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그녀는 고봉 기대승(1527~1572)의 딸이고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손자며느리였는데 1597년 9월 19일에 황룡강 푸른 물에 몸을 던졌다.
먼저 기씨부인 묘소를 찾는다. 그녀의 묘소는 하서 김인후 묘소 근처에 있다.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맥동마을의 하서 선생 묘소 올라가는 길 중간 왼편에 묘소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하서선생 아들 김종호의 묘소, 그 옆에는 김종호의 며느리 기씨부인 묘가 있다. 이 비가 속칭 일비장(一臂葬)이다.
묘는 단촐하다. 묘 앞에 비석이 있다. 비석 앞면은 ‘선교랑 김남중 부인 행주기씨 묘’ 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음기(陰記)가 적혀 있다. 음기를 대강 읽어본다.
행주기씨는 고봉 기대승의 딸이다. 선교랑 김남중(1570~1636)의 부인이고 하서 김인후의 손부이다. 선조 2년 기사년(1569년)에 태어났다. 울산김씨 족보에는 기씨부인의 생년월일이 기사(1569년) 12월 13일생으로 적혀 있다.
기씨부인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에 살았는데, 선교랑 김남중과 결혼하여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맥동마을로 시집왔다. 그녀는 고봉의 딸답게 덕성과 정숙을 갖추고 소학과 여러 책을 읽어 유학에 밝았다.
정유재란 때 그녀는 친가에 있었다. 남편 김남중이 시아버지와 함께 장차 병화를 피하여 강원도로 가면서 부인과 작별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별 말없이 잘 떠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왜적이 광주까지 진입하자 기씨부인과 친정집 식구들은 다시 피난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사방에 깔린 왜적은 이들을 검문하였다.
왜적은 오빠 효맹과 남동생 효민을 칼로 죽이고 기씨부인을 욕보이려고 손목을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왜적의 손을 뿌리치고 지니고 있던 은장도로 자신의 팔뚝을 잘랐다. 왜적에게 잡힌 손을 그냥 달고 있는 것조차 정조를 더럽힌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임진왜란 때 사대부집 여인이 나룻배를 타는 중에 뱃사공이 손을 잡아 주었다 하여 물에 빠져 죽은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 하물며 왜적이 팔을 붙잡았으니 얼마나 기겁했으리요.
이어서 그녀는 왜적을 크게 꾸짖고 황룡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나이 29세였다. 같이 있던 두 올케도 왜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황룡강 물에 몸을 던졌다.
어린 두 아들은 그녀가 해를 당한 모습을 보았는데 이 날이 9월 19일이었다. 기씨부인과 같이 있던 어린 두 아들은 일본에 끌려간 듯하다. 일제시절에 ‘하서(河西 가와니시)’ 성을 가진 고부 경찰서장이 장성을 찾아왔다 한다. 그는 자기의 조상이 조선 사람이라면서 일본에 ‘하서’ 성을 가진 집안이 더러 있다는 말을 했단다.
난리가 끝나자 기씨부인 남편 선교공은 강원도에서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종으로 부터 기씨부인의 팔뚝 하나를 전달받았다. 부인과 어린 두 아들을 잃은 그는 슬피 울면서 이 팔뚝을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 원당 선산 중턱 하서 선생 묘 바로 밑에 장사지내었다. 이 묘가 바로 일비장(一臂葬)이다. 효종 임금 때 조정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열부문(烈婦門)이 세워졌다.
한편 선교공 김남중의 둘째 부인인 함풍이씨는 수사 이지도의 딸인데 형복, 형록 등 4남과 2녀를 낳았고 이후 자손들이 줄짓고 있다.
이 음기는 1866년에 비서원 승지 통정대부 10대손 김경중이 지었다. 비서원은 고종임금 시절 비서실의 명칭이다. 비 다른 한 쪽에는 “선교랑 김남중의 묘는 순창군 복흥면 화개산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음기를 읽고 나서 묘소 앞에서 목례를 올리었다. 일비장의 애달픈 이야기, 조선 여성의 정절에 숙연하여졌다.
주 1) 연려실기술에 실린 이 기록은 임진왜란 시 여성의 수난사를 잘 보여준다.(연려실기술, 난중의 시사(時事) 총록)
○ 그때 사대부집 부녀들이 많이 약탈을 당하였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에 화를 면한 집에서는 변고를 당한 집과 혼인하지 않으려고 하므로 임금이 근심하여, “이런 풍습이 만약 이대로 간다면 온 나라의 대가(大家) 중에는 거의 완전한 사람이 없겠다.” 하고, 종실과 귀척(貴戚)에게 힘써 권하여 변고를 만난 집과 혼인하도록 하였더니 그 뒤부터는 감히 허물을 구별하는 자가 없었다. 《공사견문》
주 2)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맥동마을의 행주기씨와 태인박씨, 장성읍 장안리 장안 마을 함풍성씨와 장성서씨, 영천이씨, 북일면 문암리 제암마을 고흥유씨, 광암마을 서산유씨, 북일면 가곡마을의 문화류씨, 서삼면 송현리 내연마을 완산최씨 등 수많은 여인들이 왜적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행주기씨, 함풍성씨와 장성서씨 부인의 기록 외에 다른 열녀들의 기록은 입수하지 못하였다.
주 3) 고봉 기대승이 퇴계 이황에게 보낸 1570년 5월 9일자 편지를 보면 ‘그녀가 홍역을 앓고 있어서 부인이 아직 광주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기대승은 1570년 2월 고향 광주에 내려와서 5월에 낙암을 지었다. 그런데 이 무렵에 아내는 딸이 홍역을 앓고 있어 광주로 내려오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주 4) 하서 김인후는 3남 4녀를 두었다. 하서의 큰 아들은 종룡이고 며느리는 일재 이항의 딸이다. 여기에서 손자 중총(㑖聰)이 태어났다. 둘째 아들은 종호이고 여기에서 태어난 손자가 남중(南重)이다. 셋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딸은 넷인데 큰 딸은 조희문, 둘째 딸은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 양자징, 셋째 딸은 미암 유희춘의 외아들과 결혼하였다. 넷째 딸은 1545년에 죽었다.
주 5) 고봉 기대승은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임진왜란 의곡장 효증(孝曾 1550년생)이고, 차남은 효민(孝閔 1561년생), 4남은 효맹(孝孟 1572년생)이다. 딸은 사인(士人) 김남중(金南重)에게 시집갔다. 아들 하나와 딸 둘은 모두 요절했다. 효증은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으로 연은전 참봉(延恩殿 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정헌(廷獻)은 현감(縣監)이고, 장녀는 승지 조찬한(趙纘韓)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한이겸(韓履謙)에게 시집갔다. 기효증은 1592년 7월 장성남문창의에 참여한 의곡장이었고 동복현감을 하기도 하였다.
효민은 참봉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두었고, 효맹은 승지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다. 정헌은 정즐(鄭騭)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고, 측실(側室)에게서 낳은 아들은 국주(國柱)이다.
정유왜란(丁酉倭亂, 1597) 때에 효민과 효맹은 길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딸과 양씨ㆍ정씨는 겁박을 당하자 굴하지 않고 모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정홍명의 고봉 행장에서 인용, <고봉집>)
한편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곡마을 월봉서원 가는 길에 칠송정(七松亭)이 있다. 이곳이 바로 기효증이 선친 고봉 기대승의 시묘살이를 하던 곳이다. 일설에는 칠송정은 기대승과 큰 아들 효증 그리고 효민과 효맹 부부와 고봉의 딸 기씨 부인을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 6) 장성군 문화관광 홈페이지 전설과 설화에는 일비장이 실려 있다. 이 글을 여기에 싣는다.
하서 선생의 손자에 김남중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부인은 도학자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재란을 맞아 남중은 이미 강원도로 피난을 갔고 기씨 부인은 미처 따르지 못하여 광주로 피난을 갔다.
왜놈들의 만행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지독했으며 부녀자를 강탈하여 추행을 일삼았는데 왜군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기씨 부인은 광주에서 맥동으로 돌아오다 동네 어귀에서 왜놈들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정숙한 부인의 태도에 왜놈들은 어리벙벙하였다. 부인은 몸을 더럽히기보다는 자결할 뜻을 품어 깊은 냇물 속에 뛰어 들었다. 왜군들이 물러간 후에 동네 사람들이 부인의 시체를 건지려 하였으나 찾지를 못하고 잘라버린 팔 하나만으로 장사 지내 주었다.
비록 팔 하나로 무덤을 만들어 일비장이라고 하나 여인의 붉은 정염은 오랜 세월에도 바래지 않는 바가 아닐 수 없다. 일비장은 조상의 무덤들과 같이 맥동에 있는데 부인이 몸을 던졌던 냇가는 메워져 지금은 논으로 되어 흔적을 찾을 길 없다. 그의 두 아들은 왜병에 이끌려 일본에 갔는데 그 뒤 소식을 모른다.
다만 일제시대 전북 고부에 하서라는 경찰서장이 있었는데 자기의 조상은 조선 사람이라고 했다. 아마 두 아이는 이름도 모르고 그 때 유명하게 부르던 하서립이라는 말을 기억하여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 어느 고을엔 "하서"라는 성을 가진 자가 많다고 한다.
주 7) 기씨 부인의 죽음에 대한 정황은 정확하지 않다. 친정으로 가는 중에 왜적을 만났는지, 친정에서 시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도중에 그랬는지에 대해 정설이 없다.
한편 최영희의 <임진왜란> 책에는 “성리학자 기대승의 딸 기씨는 정유재란 중에 남편이 강원도로 피난하고 혼자 집에 있다가 친가로 가는 도중 왜적에게 손을 잡히자 패도(佩刀)로 팔을 자르고 황룡강에 투신자살하였는데 시체는 찾지 못하고 한 팔 만으로 묘를 만드니 일비장(一臂葬)이라”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최영희 지음, 임진왜란, p157)
주 8) 이수광의 <지봉유설> 권15, 인물부 열녀(烈女) 편 첫머리에는 나룻배를 타다가 뱃사공이 손을 잡아준 것을 수치로 여겨 죽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난리를 피하려는 사대부집 여인들은 모두 나루터에 이르러 배를 타기에 바빴다. 한 부인이 계집종을 따라서 여기에 나왔으나 배에 미처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뱃사공이 부인의 손을 끌어 배를 태우려고 하자, 부인은 큰 소리로 울면서 “내 손이 너에게 더렵혀졌으니 내 이제 살아서 무엇하랴?” 하고는 이내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 부인의 계집중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나 혼자서 차마 어떻게 산단 말인가?”하고 그녀 또한 물에 빠져 죽었다.
아아! 장한 일이다. 당시 환란 시절에 이같이 한 부녀자가 어찌 한 둘이랴마는,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것은 아주 드물고 혹 전하기는 하지만 누구인지 모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주 9) 정태은이 지은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 책에는 조선여성의 자결의 양면성에 대한 서술이 있다.(정해은 책 p246-247)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함경도 길주에 사는 양인 여성 조합(趙合)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녀가 살던 마을의 여성들이 모두 왜적에게 욕을 당했는데 그녀만이 두 딸과 함께 정조를 지켜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정조를 지킨 여성에게 찬사를 보내고 다른 많은 마을 여성은 불명예를 씌우고 있다. 조선 사회는 여성들에게 정절의 수호가 타고난 임무임을 강요하였다. 열녀가 나오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고, 이를 거부하면 그 여성은 수치스럽고 고단한 삶을 살았다.
주 10) 최영희는 <임진왜란> 책에서 열녀 5사람을 소개하고 있는 데 그중 3사람이 전라도 열녀들이다. 행주기씨, 장성서씨, 양산숙 부인 이씨이다. 왜군들이 전라도를 분탕질하자 양씨 집안 부인들은 9월 17일에 무안 몽탄에서 절개를 지켰고, 변윤중의 며느리 장성서씨는 9월 18일에, 하서 김인후의 손자며느리 행주기씨는 9월 19일에 황룡강에 몸을 던졌다.
부록 1) 하서 김인후의 자식 잃은 슬픔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의 전라도편을 보면 인걸은 땅의 영기로 태어나므로 전라도에는 인걸 또한 적지 않다고 하면서, 도학으로 이름난 인물로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하서 김인후를, 절의로 이름난 인물로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을 들었다.
하서 김인후(1510~1560)는 도학과 문장과 절의의 큰 선비로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사람이다. 이 글은 하서와 그의 자녀에 관한 것이다.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하서 김인후(1510~1560)는 자식을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하서의 큰 아들은 종충이고 둘째는 종호이다. 하서의 큰 며느리는 일재 이항의 딸이다.
첫째 사위는 조희문이며, 둘째 사위는 담양 소쇄원에서 은거한 소쇄처사 양산보의 둘째 아들 양자징, 셋째 사위는 친구인 미암 유희춘의 외아들 유경렴이다.
그런데 셋째 아들은 나이 5~6세에 죽었고 넷째 딸도 1545년 인종이 승하한 해 7월에 죽었다. 또한 둘째 사위인 고암 양자징(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에게 시집 간 둘째 딸도 1550년에 죽었다. 그때 하서는 글을 지어 사랑하는 딸을 보내는 아버지의 슬픔을 곡진하게 드러냈다(원문은 제양씨녀문祭梁氏女文이다). 1557년에 소쇄처사 양산보가 별세할 때 하서 김인후는 만시를 통하여 ‘이제 양산보의 며느리이자 자기의 딸도 저승에서 보겠노라’고 말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가장 불효라고 한다. 자식 잃은 부모의 설움은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서의 자식 잃은 슬픔을 그가 남긴 시에서 느낄 수 있다. 먼저 열세 살 어린 나이의 넷째 딸을 잃었을 때의 슬픔을 느껴보자.
내 딸이여 내 딸이여
마음과 몸 맑았도다.
심기(心氣)조차 한정(閒靜)했어. 단아하고 성실했지
갓 자란 난초, 티 없는 구슬
빈 산에 너를 묻다니
봄이 와도 모르겠네.
죄 없는 너 보내놓고 이 지경 되었구나.
백년가도 원통하지
내 가슴 무너지네.
어허라! 세 번 노래
노래도 구슬퍼
하늘 보고 목 놓아 우노라
하늘은 대답 없네.
그는 ‘칠월 십팔일에 세상을 떴다. 이날 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라고 넷째 딸이 죽은 날 날씨에 대하여도 상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로부터 삼년 뒤 하서는 다시 넷째 딸을 그리는 시를 쓴다.
장성 가는 길에 짓다
내 딸 세상 뜬지 어느덧 삼년
해 넘겨 다시 오니 비참하기 그지없다.
무덤가 가벼운 바람, 얼굴을 스치네.
내 딸의 넋, 정녕코 이 가운데 엉겼으리.
1545년 7월에 넷째 딸을 잃은 하서는 3년 후인 1547년에 장성 길을 걸으면서 그는 죽은 딸애를 다시 생각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은 비통하다. 이 시에서 여나(女挐)는 당나라 문장가 퇴치 한유의 넷째 딸이다. 한퇴치의 딸도 12살에 병들어 죽었는데 하서는 자기의 넷째 딸을 여나로 부른 것이다. 한유가 쓴 애절한 시를 생각하면서 그는 이 시를 지었으리라.
한 손으로 눈물 훔치는 아버지의 정이 엿보이는 하서의 이 시에는 옛 선비들은 근엄하고 정을 모른다는 편견을 벗게 한다. 더욱이 넷째 딸은 자기가 모시던 인종 임금이 승하하고 나서 죽었기 때문에 더욱 슬픔이 가중되었을 것이다.
이 시를 쓴 1547년은 1545년 을사사화 이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 일파가 송인수, 임형수 등 사림들을 죽이고 유희춘, 노수신 등을 먼 곳으로 유배 보내는 시절이었다. 그 때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내고 있어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한편 하서는 넷째 딸이 죽기 몇 년 전에 셋째 아들도 잃었다. 셋째 아들은 나이가 5-6세이어서 기록에도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런 시를 쓴다.
죽은 자식을 곡하다
석자 시신에 두세 치 관을 쓰고
북망산을 바라보니 눈이 늘 차갑구나.
사람의 일 가련하니 슬퍼한들 무엇 하랴.
야속한 하늘의 마음 믿으려 하여도 어렵네.
동야의 울음소리는 목에 매어 듣지 못하고
한퇴치의 제사상도 헛되게 처량하구나.
책상머리의 책들이 평생의 흔적이라.
그림자 부질없이 몽매간에 나타나네.
이 시에서 동야는 당나라 시인 맹교의 자인데 그는 세 아들을 모두 다 잃었다. 그래서 늙어서 후손 없음을 한탄하였다 한다. 이 시에는 아비의 슬픔이 한 장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아들을 산에 묻고 집에 와서 책상머리의 책들을 보니 공부하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는 표현은 압권이다.
부록 2)
선조 93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10월 14일(신미) 1번째 기사
하삼도에서 온 피란민들을 구제할 방안을 호조가 건의하다
이철(李鐵)이 호조의 말로 아뢰기를,“하삼도(下三道)에서 피난하는 사람들이 강원·함경·평안·황해도 등에 흩어져 떠돌며 걸인의 행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약할 수 없을 듯하니, 매우 불쌍합니다. 각 고을의 창곡이 고갈되어 구제할 물자를 나눠 줄 수는 없지만 내년 봄에 관에서 종자(種子)라도 주고 묵은 농지를 주어 개간하게 하며, 농사지을 소가 없는 사람에게는 혹 관가에서 문서를 작성해 날짜를 계산하여 사용하게 하고 추수한 뒤에는 관에서 3분의 1을 취득하고 부세는 면제해 주며 3분의 2를 갖게 하면, 저들은 살 길이 있게 되고 국가는 곡식을 얻는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더욱 가난해 살 수가 없는 자에게는 각관으로 하여금 소금이나 간장 등의 물건을 주어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가 없게 한다면 살 수 있게 해준 은혜에 저들도 반드시 감격할 것입니다. 신들은 직책이 지부(地部)를 맡았으므로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사진 1. 2. 기씨부인 묘소 - 일비장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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