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연차를 써서 오늘도 출근하지 않는 월요일입니다.
물론 내일부터는 본업으로 복귀해 업무에 들들 볶이겠지만요.
도서명: 수를 놓는 소년
저자: 박세영
* 이 도서는 독서 플래폼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책입니다. 전문 성우들의 오디오북이 좋았어요.
* 소개글 서평
한때 십자수나 뜨개질 등 바늘과 실로 하는 수공예가 유행을 탄 적 있다. 나도 뭣도 모르던 시절, 과감하게 십자수에 도전하기도 했다. 진짜 뭘 모르던 초딩이라 가능했다.
일반학교에서 시각장애인이, 그 당시 장애인 지도 노하우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교사에게, 십자수를 배우는 특별 활동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했겠나.
생각이라는 게 좀 생긴 중고생 시절에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뜨개질부에 입부하기도 했다. 특수학교라서 코뜨기는 배울 수 있었다.
이처럼 바늘과 실을 사용한 활동은 손재주와 여성미의 상징 같은 거였다.
남자가 바늘과 실을 잡는다? 수를 놓는다?
패션 디자이너라면 또 몰라도, 취미로 수를 놓는다는 건, 글쎄.
편견이 아니라, 그림적인 구도로 봤을 때, 아무래도 수놓는 건 여자들의 일로 여겨진 면이 없지 않다. 특히 규방칠우니 뭐니 해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인지, 소설 《수를 놓는 소년》에 호기심이 왕창 생겼다.
소년이라지만, 남자가 수를 놓는다고? 이거 작품 배경이 조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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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를 놓는 소년》 - 실을 통해 살길을 열어가는 소년의 이야기
소년 윤승은 청나라로 끌려와 노예가 되었다. 때는 병자호란, 그는 청나라 군사에 의해 마을이 쑥데밭이 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청나라 병사에 칼에 스러지는 모습도 눈앞에서 봐야 했다. 더불어 누나와 암록강에서 헤어지게 되었다. 윤승은 청으로, 그의 누나는 이 하늘 아래 어디에 있는지 생사를 알 수 없다.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돈독한 가족이 있었다. 아픈 누나를 대신해 수를 놓아줄 수 있었다. 비록 남자가 되어 바늘과 실을 든다, 여인네들이나 하는 일을 한다며 어머니에게 핀잔을 듣긴 했지만, 소년 윤승은 행복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어 머나먼 타국으로 끌려왔으니.
그러던 소년에게 우연한 기회가 생긴다. 청나라 강 대인 집에서 노예로 일하던 중 조선 소녀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신과 부딪힌 바람에 비단옷을 떨어뜨린 소녀가 고초를 겪을 위기에 처한다. 윤승은 흙으로 인해 소매에 묻은 얼룩을 수를 놓아 가려보겠노라 나서고, 진씨 부인은 같은 조선 출신이라 그런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윤승은 바늘과 실로 분홍 소매에 노란 나비를 수놓았다. 그 일로 소년은 진씨 부인의 눈에 들어 자신의 재능을 살려 수를 놓게 되는데......
“비단실이 살 길을 열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상황은 진씨 부인의 바람과 윤승의 기대와는 다르게 전개된다. 크게 생각하지 않고 사용한 금사가 함정이 되고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윤승은 기절할 때까지 매질을 당하고 쫓겨나 다시 노예 시장의 상품이 되고 만다. 그러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온 세자빈의 눈에 띄어 노예 신분을 벗게 되었다.
심향관에서 진씨 부인과 재회하고 세자빈의 지지 속에 다시금 바늘과 실을 들게 된 윤승은 그림 문자를 통해 자수 작품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는다. 의뢰주는 세자빈이었다. 사소한 편지 하나에도 청나라가 쓸데없이 간섭하니, 그것을 피해 고향에 편지를 전하고자 한다는 게 이유였다.
한편, 진씨 부인은 윤승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청나라의 우수한 자수 장인 서 사부를 소개해준다. 윤승은 남자도 자수를 한다는 데 놀라고, 서 사부의 실력에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리고 세자빈에게 은혜를 갚고, 언젠가 누나와 만나기 위해 그림 문자를 담은 자수 작품을 꼭 완성하리라 다짐하는데......
과연, 윤승은 수를 통해 바람을 이룰 수 있을까?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좀 수상한 세자빈의 그림 문자 의뢰는 어떻게 될 것인가!
🧵 🪡 🙇♂️
자신의 꿈을 수놓기 위한 수본 같은 이야기 - 《수를 놓는 소년》
병자호란은 우리나라의 뼈아픈 역사 중 한 대목이다. 명과 청으로 나뉘어 다투던 중국, 극변하는 국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청의 침략을 당했다.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45일 만에 항복하고, 임금은 삼전도까지 걸어가 청나라 황제 앞에 삼배고구두례를 올리는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진정한 굴욕은 절하며 이마를 바닥에 찧는 따위의 행위가 아니었다. 전쟁 과정에서, 혹은 전쟁 후 무수한 피로인이 발생해 청나라에 끌려가야 했던 게 진정한 굴욕이었다.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천고에 다시없을 굴욕이 아니겠는가.
망말로 그럴 거면 나라가 왜 있는데?
주인공 윤승도 애꿎게 청나라로 끌려간 피로인(포로)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자신의 재능을 살릴 기회를 얻게 된다. 바로 자수 재능이었다. 소년은 평안북도 안주에서 침선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집안의 일원이었다.
보통 자수는 규방 여성들의 예술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북쪽 평안북도 안주 지방에서는 여자 아닌 남자들이 전문적으로 자수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은 섬세한 색감을 살린 대형 화조도 자수 작품 등을 제작했다고 한다. 왕실에 진상될 만큼 빼어난, 남자들이 놓았다는 그 수를 안주 지방에서 유래했다 하여 ‘안주수’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 남자들은 왜 자수를 놓게 되었을까? 바늘과 실을 왜 들었을까?
안주수의 탄생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중 유력한 가설은 병자호란 때 피로인으로 끌려간 양반 및 하인들이 무료함을 달래려 자수를 놓았고, 그들이 어찌저찌 고향으로 돌아와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다.
작가는 이 사실을 바탕에 두고, 양반 계층 대신 양민 소년을 내세워 소설을 전개한다. 꼰사, 푼사 등 자수 장면이 꽤나 섬세하고 세부적으로 묘사되어 우리 고유의 예술인 자수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부드러운 남성적 캐릭터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점이 흥미로웠다. 걸 크러시가 아니라, 보이 프리덤이라고 해야 하나?
게다가 평등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고민도 하게 만든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전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부카 같은 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노예 감독관이라 채찍을 휘두른다. 그 행위에 부카의 의지는 없다. 그는 소설 마지막에 윤승을 돕는다. 그러나 그것은 진씨 부인의 지시가 있어서일 뿐, 그 도움에 부카 자신의 뜻은 없다.
그가 비록 어딘가에 억류되거나 가둬진 건 아니지만, 자신의 주관을 가질 수 없는 환경이란, 그 얼마나 사람답지 못한 것인지.
한편, 윤승은 진씨 부인을 위해 자신의 재주를 쓰려 한다. 노예를 벗어나 누나를 만나고 싶기도 하다. 함정에 빠졌다가 청나라에 볼모가 된 소현세자 및 세자빈에 의해 신분을 회복했을 때도 소년은 세자빈에게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 자수를 놓으려 한다.
그런 소년에게 청나라 자수 장인 서 사부는 묻는다.
“너는 왜 수를 놓는 것이냐?”
기실, 윤승이 자수를 놓겠다 결심한 동기는 다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 진씨 부인을 위해, 세자빈을 위해.
소년 자신의 꿈을 위한 목적은 희박했다.
서 사부는 윤승에게 경고도 한다. 권력자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말이다. 거리를 두라고도 한다. 묘족이라는 중국의 소수 민족 출신인 탓에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견제를 받고 배신을 당해본 이의 충고였다.
그의 안목은 들어맞는다. 세자빈이 요청한 그림 문자 자수 편지는 그저 단순한 안부 인사 같은 게 아니었다. 청나라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은자를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밀서가 발각되어 윤승은 다시금 위험에 처한다. 그때 손을 내민 게 서 사부와 그의 딸 양양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 너머에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세상이 있을지 몰라. 언젠가는 그 아름답고 큰 세상을 자수로 담아내자. 거기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고, 너는 수를 놓는 거야.”
어쩌면 윤승이 계속해 곤경에 빠진 것은 ‘왜 하느냐’에 대한 질문을 위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꿈은 자신을 위한 것이다. 윤승의 꿈은 자수 장인이다. 하지만 소년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자수를 놓기보다 타인의 목적을 위해 수를 놓았다.
기실, 윤승의 환경이 꿈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남자다움이란 틀에 갇혀 자수를 놓는 행위를 꺼려하는 사회 풍조가 그를 막았고, 청나라에서는 성별에 의한 장벽은 없었지만 피로인 노예 신분이 그를 억눌렀다.
그러나 재능과 그것으로 꾸는 꿈은 온전히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의 꿈을 위해 살아가게 되며, 때론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은 결코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이 소설에서의 윤승의 여정은 자수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한 수본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수를 놓기 전에 수놓을 그림을 그려보는 것 말이다.
결국 소년은 서 사부와 양양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유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당시 청나라는 서학을 수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관련 책도 많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에 천주교 및 예수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일 수도 있다.
과연 윤승은 자수로 꿈을 펼칠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한 꿈을.
열린 결말이라 모르겠지만, 그렇게 고생했으니 잘하겠지 뭐.
길은 무수히 많다. 하나가 아니기에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자수 공예를 소재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의미 있고 즐거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