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선왕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高麗忠宣王(고려충선왕) 久留元(구류원)
정을 듬뿍 준 여자가 있었다
有所鍾情者(유소종정자)
고려로 돌아올 때에 그 여자가 따라오므로
及東還(급동환) 情人追來(정인추래)
왕이 연꽃 한송이를 꺾어서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王(왕) 折蓮花一朶(절연화일타) 贈之以爲別(증지이위별)
밤낮으로 왕은 사무치는 그리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
日夕(일석) 王(왕) 不勝眷戀(불승권련)
익재(이제현의 호)에게 명하여 가서 보고 오라고 시켰다
令益齋往見之(령익재왕견지)
익재가 가서 보니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누워 방에만 있은지가
益齋往則女在樓中不食(익재왕즉여재루불식)
몇 날 며칠인지, 말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已數日(이수일) 言語不能辨(언어불능변)
힘겹게 붓을 잡고 시 한 편을 써 주기를
强操筆書一絶云(강조필서일절운)
「이별하며 건네주신 한송이 연꽃
贈送蓮花片(증송연화편)
처음에는 붉은 꽃잎 예쁘기 그지없었는데
初來的的紅(초래적적홍)
꺾인 지가 몇 날 며칠이던가
辭枝今幾日(사지금기일)
시들고 말라가는 모습이 나를 보는 것 같네
憔悴與人同(초췌여인동)」
익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益齋回啓云(익재회계운)
“그녀는 술집에서 젊은 남자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찾아도 나오지 않습니다.”
女人酒家(여인주가) 與年少飮酒(여년소음주) 尋之不得耳(심지불득이)
왕은 크게 괴로워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王大懊唾地(왕대오타지)
그 이듬해 왕의 생신날에
翌年慶壽節(익년경수절)
익재가 술을 올리고 물러나 왕 앞에 엎드리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益齋進爵(익재진작) 退伏庭下(퇴복정하) 言死罪(언사죄)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王問之(왕문지)
익재는 나아가 그 시를 바치고, 그때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益齋呈其詩(익재정기시) 道其事(도기사)
왕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王垂淚曰(왕수루왈)
“만약에 그때 이 시를 봤으면, 죽을힘을 다하여 다시 찾아갔을 것이다.”
當日若見詩(당일약견시) 竭死力(갈사력) 還往矣(환왕의)
“경이 짐을 사랑하는 까닭으로 말을 꾸며댔으나, 진실로 충성이 갸륵하다. “
卿愛我故(경애아고) 變言之(변언지) 眞忠懇也(진충간야)
-출처: 용재총화(慵齋叢話)
『용재총화(慵齋叢話)』는
조선 성종대에 예조판서를 지낸 용재(慵齋) 성현(成俔:1439~1504)이
고려로부터 조선 성종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전반을 다룬 잡록집이다.
첫댓글 자신이 바로 섰으면
사랑하는 것이 뭔 그리 나라를 바꾼다고,
물론 바꾼 기록도 있지만,
왕이 잊지 못하고 신하를 보내
겨우 죽어가는 여인을 찾아갔으니
그 여인은 혹여 다시 왕이 찾을까 하여
하염없이 기다렸을 듯하다.
여인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도
사람으로 지은 죄인데
거짓까지 이른 신하를
잊혀진 여인은 안부조차 잊고
충신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머저리 왕과 신하의 대화가 가관이고
그 여인의 덧없는 사랑이 서글프다.
그러게요.
한 사람의 사랑도 지켜주지 못하면서
무슨 나라를 다스리며,
한 사람의 마음도 품을 수 없는 군주(君主)를
어떤 신하가 충언(忠言)을 하리요.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700여 년이 흘러도 사뭇, 마음이 저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