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se acercó a Jesús la madre de los hijos de Zebedeo con sus hijos, y se postró como para pedirle algo. Él le dijo: «¿Qué quieres?». Dícele ella: «Manda que estos dos hijos míos se sienten, uno a tu derecha y otro a tu izquierda, en tu Reino». Replicó Jesús: «No sabéis lo que pedís. ¿Podéis beber la copa que yo voy a beber?». Dícenle: «Sí, podemos». Díceles: «Mi copa, sí la beberéis; pero sentarse a mi derecha o mi izquierda no es cosa mía el concederlo, sino que es para quienes está preparado por mi Padre».
Al oír esto los otros diez, se indignaron contra los dos hermanos. Mas Jesús los llamó y dijo: «Sabéis que los jefes de las naciones las dominan como señores absolutos, y los grandes las oprimen con su poder. No ha de ser así entre vosotros, sino que el que quiera llegar a ser grande entre vosotros, será vuestro servidor, y el que quiera ser el primero entre vosotros, será vuestro esclavo; de la misma manera que el Hijo del hombre no ha venido a ser servido, sino a servir y a dar su vida como rescate por muchos».
«¿Podéis beber la copa que yo voy a beber?»
Mons. Octavio RUIZ Arenas Secretario del Pontificio Consejo para la promoción de la Nueva Evangelización
(Città del Vaticano, Vaticano)
Hoy, el episodio que nos narra este fragmento del Evangelio nos pone frente a una situación que ocurre con mucha frecuencia en las distintas comunidades cristianas. En efecto, Juan y Santiago han sido muy generosos al abandonar su casa y sus redes para seguir a Jesús. Han escuchado que el Señor anuncia un Reino y que ofrece la vida eterna, pero no logran entender todavía la nueva dimensión que presenta el Señor y, por ello, su madre va a pedir algo bueno, pero que se queda en las simples aspiraciones humanas: «Manda que estos dos hijos míos se sienten, uno a tu derecha y otro a tu izquierda, en tu Reino» (Mt 20,21).
De igual manera, nosotros escuchamos y seguimos al Señor, como lo hicieron los primeros discípulos de Jesús, pero no siempre logramos entender a cabalidad su mensaje y nos dejamos llevar por intereses personales o ambiciones dentro de la Iglesia. Se nos olvida que al aceptar al Señor, tenemos que entregarnos con confianza y de manera plena a Él, que no podemos pensar en obtener la gloria sin haber aceptado la cruz.
La respuesta que les da Jesús pone precisamente el acento en este aspecto: para participar de su Reino, lo que importa es aceptar beber de su misma «copa» (cf. Mt 20,22), es decir, estar dispuestos a entregar nuestra vida por amor a Dios y dedicarnos al servicio de nuestros hermanos, con la misma actitud de misericordia que tuvo Jesús. El Papa Francisco, en su primera homilía, recalcaba que para seguir a Jesús hay que caminar con la cruz, pues «cuando caminamos sin la cruz, cuando confesamos un Cristo sin cruz, no somos discípulos del Señor».
Seguir a Jesús exige, por consiguiente, gran humildad de nuestra parte. A partir del bautismo hemos sido llamados a ser testigos suyos para transformar el mundo. Pero esta transformación sólo la lograremos si somos capaces de ser servidores de los demás, con un espíritu de gran generosidad y entrega, pero siempre llenos de gozo por estar siguiendo y haciendo presente al Señor.
«No sabéis lo que pedís. (…) sentarse a mi derecha o a mi izquierda (…) es para quienes está preparado por mi Padre»
+ Rev. D. Antoni ORIOL i Tataret
(Vic, Barcelona, España)
Hoy, en el fragmento del Evangelio de San Mateo encontramos múltiples enseñanzas. Me limitaré a subrayar una, la que se refiere al absoluto dominio de Dios sobre la historia: tanto la de todos los hombres en su conjunto (la humanidad), como la de todos y cada uno de los grupos humanos (en nuestro caso, por ejemplo, el grupo familiar de los Zebedeos), como la de cada persona individual. Por esto, Jesús les dice claramente: «No sabéis lo que pedís» (Mt 20,22).
Se sentarán a la derecha de Jesucristo aquellos para quienes su Padre lo haya destinado: «Sentarse a mi derecha o mi izquierda no es cosa mía el concederlo, sino que es para quienes está preparado por mi Padre» (Mt 20,23). Así de claro, tal como suena. Precisamente decimos en español: «No se mueve la hoja en el árbol sin la voluntad del Señor». Y así es porque Dios es Dios. Digámoslo también a la inversa: si no fuera así, Dios no sería Dios.
Ante este hecho, que se sobrepone ineludiblemente a todo condicionamiento humano, a los hombres sólo nos queda, en un principio, la aceptación y la adoración (porque Dios se nos ha revelado como el Absoluto); la confianza y el amor mientras caminamos (porque Dios se nos ha revelado, a la vez, como Padre); y al final... al final, lo más grande y definitivo: sentarnos junto a Jesús (a su derecha o a su izquierda, cuestión secundaria en último término).
El enigma de la elección y la predestinación divinas sólo se resuelve, por nuestra parte, con la confianza. Vale más un miligramo de confianza depositada en el corazón de Dios que todo el peso del universo presionando sobre nuestro pobre platillo de la balanza. De hecho, «Santiago vivió poco tiempo, pues ya en un principio le movía un gran ardor: despreció todas las cosas humanas y ascendió a una cima tan inefable que murió inmediatamente» (San Juan Crisóstomo).
♣ 죽기까지 섬김을 실행한 사랑의 사도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되풀이해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면서 부활의 기쁨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첫 예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16,21). 두 번째 예고 때는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묻습니다(17,22-23; 18,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종말에 다시 오시어 다스리실 좌우에 앉혀달라고 청합니다(마르 10,35). 그들은 예수님의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 거룩한 변모와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번민의 증인이었고, 그분의 사랑 받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권력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셔야만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으며, 종말에 자리를 배치하는 일은 성부의 전권에 속한다고 대답하십니다(마태 20,22-23). 그분께서는 압제와 폭정을 일삼던 당대의 비정한 정치 현실을 꿰뚫어보시고, 그와는 달리 제자단과 교회에서는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낮추어 섬겨야 함을 가르치십니다(20,27).
“모든 제자들을 앞서 보려던 마음이 있었던 요한은 그 후 설교할 때나 기적을 행할 때나 항상 베드로에게 우선권을 줍니다. 야고보는 이 일이 있은 후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열성으로 불타올라 세속의 온갖 관심사를 버리고 덕행의 정상에 도달하여 즉시 치명당할 수 있었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우리 또한 나약함 가운데서도 사도들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나아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목숨 바쳐 인간을 섬기신 예수님을 본받아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앞장 서 서로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종의 삶에 헌신해야겠습니다(20,28).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 봉사라 해도 그것을 위해 주어진 권한이나 책임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하느님과 무관한 것이 되고 증오나 폭력의 수단으로 바뀌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을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내놓고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누면 서로를 살리고 인간다운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찌기 장 쟈크 루소가 말했듯이 권력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 번 맛을 들이면 중독되어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2코린 4,7).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힘을 서로를 섬기고, 살리고, 일으키는 데 사용해야겠지요.
우리도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 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고,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기도 합니다(2코린 4,11-12). 그러나 우리 모두 세상의 힘에 굴복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으로 저 낮은 곳에서 주님의 힘을 전달하고 나누는 진정한 섬김을 실행해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출세와 섬김>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여기서는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예수님께 청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청한 것은 열두 사도가 앉게 될 자리 가운데 가장 높은 두 자리입니다.
앞의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열두 옥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 자리를 청한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두 옥좌 가운데 가장 높은 두 자리를 청한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청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열 제자가 두 사도를 불쾌하게 여기게 됩니다(마태 20,24).
(아마도 열두 사도가 모두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1) 사도들이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를 희망한 것은
그들이 아직은 명예욕을 버리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5-27).”
이 말씀을,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라고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라고 뽑은 것이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려고 경쟁하면 안 되고,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려고 경쟁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또는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것처럼 보이는 자리는
사실은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또 첫째처럼 보이는 사람은 사실은 가장 낮은 종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예수님 나라의 열두 옥좌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죄인들을 처벌하는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실 때,
그 통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통치는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세속 권력자들의 통치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섬김’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섬기시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니,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2)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청한 일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교회 직분에 대해서 말할 때,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1티모 3,1).”
감독 직분이 봉사직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고,
하느님과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소망’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단순히 명예욕만으로 높은 자리를 청했을까?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또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싶다는
순수한 소망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명예욕과 순수한 소망이 섞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바로 대답했습니다(마태 20,22).
만일에 명예욕만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대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예수님의 질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또 예수님께서 두 사도에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도(마태 20,23)
두 사도가 순전히 명예욕만으로 그런 청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떻든 사람의 눈에 ‘높은 자리’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종’이 되어서 사람들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 하는 욕망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제대로 ‘섬김’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3).”
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올바르게 응답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올바르게 응답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높은 자리’는
꼭 교회나 종말의 예수님 나라에서의 자리만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자리가 다 해당됩니다.
(세속의 높은 자리도 해당됩니다.)
인간은 아무도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말은,
단순히 세속의 격언만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교훈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독서: 코린토 2서 4장 7~15절
질그릇
오늘 독서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
그 말씀을 읽고 보물은 뭐고.. 질그릇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해봤는데요.
먼저 든 생각이.. 지금 밖에서 캠프를 하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여름 신앙 학교 팀들이 와서 캠프를 시작했고,
앞으로 열 팀 정도 더 올 예정인데요.
그렇게 오는 아이들이 교회의 미래임을 생각해 본다면 큰 보물이고 보화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보물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거 같은데요.
쉽지는 않은 거 같습니다.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손님 맞을 준비로 청소도 해야 하고, 빨래도 해야 하고,
망가진 거 수리해야 하고, 필요한 시설들을 만들어 내야하고,
수영장도 설치해야 하고, 시설 관리해야 하고..
하다보면 일할 수 있는 신자 분들이 모두 함께 해야 겨우겨우 담아낼 수 있는 준비를 마치고,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될 수 있는 거 같은데요.
많이 힘들지만 보물을 담아낼 수 있는 의미 있고 멋진 일인 거 같습니다.
그것 말고도 저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이 있죠. 논과 밭입니다.
본당 땅은 아니지만 농사도 삼천평 짓고 있고, 고구마도 천평 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옥수수나 호박이나 감자를 심는 밭도 있는데요.
그 밭이 가난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독특한 그릇의 역할을 하는 거 같습니다.
아마 직접 농사지은 걸로 가난한 이들의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본당은 없을 거 같은데요.
저희 본당은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료급식소나 갈 곳 없는 할머님들이 계신 양로원에 쌀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많지는 않지만 직접 재배한 쌀이라 더 많은 정성과 사랑을 담아 보내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보니 몇몇 본당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김장 김치를 하는데 쓸 무와 배추를 살 수 있는지..’ 문의를 하셨었는데요.
그 얘기를 듣고 ‘우리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김장을 하는데
사람이 많지 않아 일손을 보탤 수는 없지만,
밭이 있으니 무와 배추를 지원해 보면 어떨까...’ 해서 사목회 분들과 얘기를 했고,
올 해는 일단 한 본당에서 쓸 무와 배추를 지원하기로 했는데요.
그 일도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저희 본당이 부지가 꽤 넓어서 한쪽에 동물들을 키우고 있는데요.
그 중에 돼지도 있습니다.
세 마리였는데, 한 마리는 제 영명축일 잔치 때 잡았고, 지금은 두 마리가 남았습니다.
아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공소 축성식 할 때 쓸 거 같고,
다른 한 마리는 신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신학생들을 위해 잡을 거 같은데요.
돼지를 키우고 잡아다가 나누고 친교를 이루는 일도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일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넓은 부지와 공간이 저희 본당만의 특별한 그릇일 거 같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 하시는 이야기가 정말 조용하고 좋다...
풍경이 소박하고 아름답다.. 는 얘기를 많이 하십니다.
성당 안 다니시는 밑에 동네 할머님도 지팡이 짚고 힘들게 올라오시더니..
여기 오니까 너무 좋네.. 마음이 다 평화로워지네.. 하는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그 선물을 잘 살릴 수 있으면 우리 본당만의 독특한 그릇을
또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오시는 분들이 몸과 마음을 쉬어 갈 수 있는..
그리고 어떤 교육이나 연수나 피정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된다면 너무나 좋지 않을까.. 하는데요.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정원도 조금씩 가꾸기 시작했고,
시설들을 조금씩 갖추어 가고, 십자가의 길도 만들고,
먼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신자들을 교육해서
무언가 가르치고 안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다면
작은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저희 본당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독특한 그릇이 만들어 지겠죠~
저희 본당 공동체는 그렇게 나름의 독특한 그릇으로 아이들도 담고,
가난한 이들도 담고, 지치고 힘들어하는 신자들도 담고,
본당 공동체도 담고 있는 거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각자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그릇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 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전원신부님의 강의에서..)
어떤 부인이 어디서 퀴즈를 듣고 왔다.
가장 추운 바다는? 썰렁해
가장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
라는 건데,
그 퀴즈를 남편에게 내보았다고 한다.
“여보 가장 추운 바다가 뭐야?”
“썰렁해~”
“여보, 그럼 가장 뜨거운 바다는?”
남편이 대답을 못하자,
부인이 ‘나에게 해 주고 싶은말을 생각해봐~’ 하고
힌트를 줬더니 남편이 대답했다.
“열바다(열받아)~”
인천교구 밤송이(김기현 요한) 신부
20 그때에 제베데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왔는데 그 어머니는 무엇인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21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22 그래서 예수께서 그 형제들에게 “여러분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습니까? 내가 마시게 될 잔을 여러분도 마실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24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 25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릅니다. 26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27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28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입니다” 하셨다. (마태 20,20-28)
앞 단락에 언급된 예수의 마지막 수난 예고와 크게 대조되는 제자들의 권력 다툼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자의 몸가짐과 자세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 그 주제다. 오늘의 본문은 마르코 복음서 10,35-45를 마태오가 세 군데 손질하였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마르 10,35) 대신에 그 어머니가 예수에게 질문하였다. 예수가 질문을 먼저 받은 것(마르 10,36)이 아니라 예수가 재촉하자 그 어머니가 비로소 질문하였다. 고난의 세례(마르 10,38)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삭제되었다.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예수에게 질문한 것은 수수께끼다.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부담을 덜어주려 그렇게 했다고 추측하는 학자들이 있다.
예수의 왼쪽과 오른쪽 자리는 권력 서열 1 · 2위 자리를 뜻한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예수가 최초로 부르신 네 제자는 시몬과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두 쌍의 형제들이다(마태 4,18-22). 시몬 형제 중 하나인 시몬이 수제자 대접을 받자 반대쪽 형제들이 권력 다툼을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네 제자 사이의 권력 투쟁을 마태오는 암시하는 것일까. 4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낸 열 제자들은 이미 그들도 권력 다툼의 와중에 끼어들었음을 가리킨다. 저항과 죽음의 길로 가는 예수의 여정에서 정작 제자들은 권력 다툼에 몰두한 것이다.
“잔”은 주당(酒黨)인 예수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익숙한 단어다.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심판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였는데 ‘운명’ 또는 ‘죽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23절에서는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23절을 근거로 4세기에 아리우스 학파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를 하느님에 비해 종속적인 위치로 해설하였다. 마태오의 의도와 전혀 관계없는 해설이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 1311년
25절은 정치체제에 대한 예수의 생각이 드러난, 복음서에서 보기 드문 구절이다. 25절의 “세상(ethne)”은 보통 이방인의 나라로 해설되는, 예수와 제자들이 모두 이해하는 단어다. 예수와 제자들의 지리적 · 정치적 정보가 제한적임을 감안하면 구체적으로 로마를 가리키는 단어라고 보인다. 로마의 정치는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억압한다고 예수가 지적한 것이다. 조국 이스라엘을 군사력으로 점령하고 지배하는 로마 제국에 대한 예수의 비판이다.
이 말 하나로도 이미 예수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되기에 충분하다. 예수의 이런 말을 듣고 곧 예루살렘에 입성할 제자들은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박정희 시대에 유신체제는 억압체제라고 비판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 예수가 오늘 한국에 오시면 한국 상황을 어떻게 평하실까. 교회 역사에서 25절 예수의 말씀은 안타깝게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방치되었다. 권력의 시녀로 추락한 서양 그리스도교의 당연한 모습이다.
로마에 대한 강력한 비판에 이어 예수는 제자들 사이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제자 공동체에서 누구도 억압과 지배를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디아코노스(diakonos)라는 단어가 마태오 복음서에서 여기 처음 나타난다. 종을 뜻하는 둘로스(doulos)도 등장한다. 교황은 여기서 착안하여 ‘종들의 종(servus servor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28절 몸값 부분은 당시 문화에 어울리는 표현으로 이른바 대속론(代贖論)의 근거로 자주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대속론은 현대인에게 그 설득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26절 말씀은, 그러나 정반대의 모습으로 교회 역사에 정착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된 이래 교회는 고대 왕조정치에 적응한 체제를 만들어냈다. 강력한 권위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주교라는 봉건적 영주 체제가 등장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중심이던 초대교회의 모습과 달리 성직자 중심주의의 교회 모습이 등장하였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러한 모습에 크게 탄식하였다.
‘교회 안에 민주주의는 없다’는 미신을 굳게 믿는 성직자들이 여전히 많다. 신학교에서 가장 자주 듣는 단어가 ‘서열(ordo)’인 가톨릭 분위기에서 교회개혁이 과연 가능할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개혁을 외치는지 참 의아하다.
왕조 체제에 근거한 교회 제도는 민주주의 제도에 훨씬 못 미친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하느님 나라에 훨씬 못 미친다. 교회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두 단계를 더 향상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제도를 시대정신에 굴복하거나 적응하라는 뜻이 아니다. 교회 제도를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개혁하라는 것이다. 전통은 기준이 아니라 자료일 뿐이다. 제도가 기준이 아니라 성서가 기준이다. 개신교의 경우도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목회자를 신성시하는 풍토는 목회자의 타락을 부추겼다. 루터가 통탄할 모습이다.
25-27절은 가톨릭 주교들이 책상 앞에 붙여놓고 매일 수십 번 읽고 새겨야 할 구절이다. 현재 주교들은 권위주의 체제의 최대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이다. 주교들의 일상적인 모습은 섬기는 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고 사실상 통치자의 모습에 가깝다. 주교는 종으로서 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주교 제도의 변화 없이 가톨릭교회의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주교 선출 방식, 임기제, 권한 분배와 규제, 주교 소환 등 많은 논의가 활발하다.
덧붙이자면 국가로 존재하는 교황청의 성격 문제다. 종교지도자이자 국가원수로 존재하는 교황의 모습을 예수가 이해할 수 있을까.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떨어뜨리고 주교를 감시하는 가톨릭의 국정원인 교황대사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하늘이 주신 가톨릭 개혁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희생적인 결단이 기대된다. 성직자는 출세를 노리지 말라고 그는 경고한 바 있다. 주교가 죽어야 가톨릭이 산다. 주교, 신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