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할머니 묘비에 이름은 전씨다 조선왕조 후기 고종시대 출생했고 93세에세상을 뜨셨는데 할아버지와는 십 년 넘게 나이 차가 났다. 조선왕조 말기 전국적으로 유행한 괴질로 많은 이들이 사망했는데 장티프스(염병)였다. 전주 삼례를 거처 김제군을 지나는 만경강가 고향에서는 식수로 강물을 먹었다.
수인성 전염병이 번지면 일가족이 죽거나 한 두 명이 생명을 건졌다. 사형제 나 되는 증조부께서 후손은 할아버지만 살아남아 우리 집안은 육촌과 팔촌이 없다. 그 시기 정읍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분노한 농민들의 항쟁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전봉준(全琫準)과 동학교도들이 있었다. 동학 농민항쟁은 불꽃같이 일어났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참담하게 패하고 전봉준과 주모자급은 효수된다.
할머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조카딸이었다. 역적 집안의 남자는 사형 당하고 여자는 관비로 끌려가게 된다. 할머니의 외할아버지가 열다섯 살 전후 전씨 집안 조카딸 세자매를 데려와 증조부께 후사를 부탁하고 피신한다. 증조부께서는 동학교도들과 친분이 깊었던 분이었다.
세 자매는 집안일을 도우며 숨어 지내다 세상이 조용해지자 증조부께서 큰딸 은과 막내는 가까운 동네 집안으로 시집 보내고 둘째는 며느리 삼는다. 할아버지가 노총각 신세를 면하게 되었다. 전씨 성 세 분 할머니로 인해 자손들이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조부 위 선조 분의 원 거주지는 경상도였는데 전라도로의 이주는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왜군은 임진년 전라도 지방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패한 원인이라 생각했다. 정유 재란때는 전라도 지방을 점령 후 충청도로 진격하려 했으며 함양은 지리산을 넘어 남원으로 진격하는 길목으로 폐해가 컸다.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관리와 군사 백성 만여 명이 전사했는데 가는곳 마다 조선인을 죽이고 전과를 증명하기 위한 증거물로 코를 베어 갔다. 일본 교토공원 한구석의 귀 무덤 사실 조선인의 코 무덤이다.
임진왜란을 피해 이주한 이곳 김제군 백구면 일대는 충적(沖積) 토양으로 논농사는 적합하지만 먹을 물을 찾기 어려웠다. 샘을 만들려고 땅을 파 내려가면 뻘이 밀려들어 우물을 팔수 없었다. 할아버지 형제분들은 가까운 강물을 먹게 되어 수인성 전염병으로다 돌아가셨다.
동학농민항쟁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국권을 일제에게 빼앗긴다. 그들은 이곳이 쌀농사 적지임을 파악하고 본국에 부족한 쌀을 보내려고 수리 시설을 대대적으로 만들었다. 산이 많은 동쪽 고산 완주 쪽에 저수지를 건설하고 구불구불했던 만경강을 직선화한다. 옛 강은 없어졌지만 유강리(柳江), 동자포(童子浦)등 지명이 남아 있다.
새로운 농지가 생겨났고 사전에 헐값으로 사들인 많은 농지는 좋은 논으로 변했다. 그 시기 집안 어르신 중 미곡상과 농사일을 겸하던 치문(致文) 증조부는 여유 자금으로 농토를 넓혔다. 일본으로 쌀 교역을 하면서 재산이 늘어나자 육영사업에 투자한다. 현재 개교 중인 치문초등학교는 사립국민학교로 출발하여 60년을 넘게 유지하다가 재정난으로 정부에 기증한다. 김장호(致文은호)증조부가 설립한 학교다.
할머니는 5남2녀를 두었고 식구들 빨래하고 먹는 물 긷는 일은 큰 일거리였다. 그 어려움이 강관을 저렴하게 만드는 기술과 지하수개발공법 발전으로 해결된다. 작업용 삼각대(아시바)를 만들어 지하에 묻을 강관세우고 그 속에 강력한 수압을 가하면 토사가 흘러나오고 강관을 이어가며 철주(鐵柱)로 때려 박는다. 이 공법으로 지하 30m정도 내려가면 거친 모래자갈이 올라온다. 심층 지하수층에 도달한 것이다. 강관 파이프 끝에 무쇠로 만든 펌프(작두샘)를 달면 완성이다. 손잡이를 상하로 움직이면 깨끗한 물이 사시사철 나온다. 강물을 먹지 않게 되면서 수인성 전염병 걱정도 사라지고 여인네들의 수고를 덜어준다. 명절에가는 고향 큰댁의 작두샘은 신기했다. 펌프 손잡이를 올리고 내려도 물이 나오지 않는데 물 한바가지를 붓고 펌프질을 하면 신기하게 물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농사일, 할머니는 목화 심고 누에 키워 명주베까지 짜서 밭 사고 집짓고 식구들을 부양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어려서 돌아가셨고 일자무식이었지만 자녀교육열은 높았다. 아버지가 다닌 치문국민학교는 4학년까지만 있었고, 5, 6학년은 기차역이 있는 부용으로 십리길을 왕복했다. 동네에 신문이 들어오지 않아 교장 선생님댁에 신문을 전해주는 심부름을 했는데 부용역에서 신문을 받아 오면서 내용을 다 읽어 보게 돤다. 그 때문인지 조선인은 몇 사람 뽑지 않는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공직생활을 하게 되고 일본인들과 근무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는 가혹했지만 관리들의 성실과 부지런한 이도(吏道)를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는 아버지 말씀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가끔 고향 큰집에 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베틀도 볼 수 있었고 물을 끊인 솥에서 누에고치 실을 뽑아내며 돌리는 물레도 생각난다. 실이 다 나온 얇은 껍질 속에 번데기를 뻬먹으면 고소한 맛이 보기와는 다르다. 할머니는 누애를 뻬낸 고치는 모았다가 솜을 만들면 고급 이불속이 된다 하며 버리지 못하게 했다. 늦가을 목화밭에서 덜 익어 푸른색이 나는 목화를 따먹으면 쌀뜨물 같지만 달짝지근한 맛도 잊혀 지지 않는다. 베틀로 짠 무병베는 올은 거칠지만 햇볕에 바래주면 도톰하여 촉감도 좋고 물기를 잘 빨아들인다. 할머니의 무명베는 수건으로도 쓰고 이불깃으로 썻다. 공장에서 나온 옷감들은 화려하지만 투박한 무명베가 그립다. 격동의 근·현대를 사신 할머니 조선왕조와 일제식민지 해방과 6.25 전쟁의 격랑에서 부지런과 끈기로 삶을 이룬 것이다. 역적 집안 딸이라고 숨어 지냈지만 동학농민혁명으로 재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할머니는 혁명아 녹두장군 전봉준의 조카딸이다. 할머니 혈육인 남동생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떠돌다 선산 한구석에 조그마한 비석과 함께 묻힌다.우리 부부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자손들에게 어떤 추억을 남기고 갈 것인지 지난 일들과 앞일을 잘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끝)
첫댓글 김영남 선생님~~
일전에 통화 했던 익산 김연수 입니다.
치문 김장호 선생 손자 며느리 이신 홍정자 교장선생님이랑 자주 통화 했어요.
익산 내려오시면 연락주세요~~